글쓰기 그 후
기다려지는 목요일이다. 일주일 전 약속을 잡아 다섯 명이 빠진 사람 없이 모두 모였다. 비가 내린 다음날이라 산책하기에는 그만이다. 아침 밥을 먹고 도서관으로 향한다. 주차장 앞쪽에는 빈 자리가 없어 건물 옆을 돌아 뒤쪽 남은 자리에 차를 세운다. 이른 시간이지만 최근 노벨 문학상 수상 영향인지 열람석 자리도 사람들로 자리가 채워진다.
도서 검색 책상에서 다음 달 독서 토론 도서를 찾아 모바일 대출증으로 대출 처리를 한다. 스마트폰 하나면 어느 것 하나 처리 못할 일이 없는 듯하다. 다만 능숙한 기기 활용이 뒤따라야 활용도가 높아진다. 그렇지 못하면 전화기로 또 게임에 시간을 빼앗길따름이다. 열람실을 나와 문화홀로 발걸음을 옮긴다.
두 층의 계단을 따라 내려간 겅간은 문은 열려 있으나 행사 안내문은 걸려있지 않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나만의 자서전 쓰기’ 강좌를 수강하면서 마음 속에 꾹꾹 눌러 둔 삶을 한 겹 씩 뽑아내는 시간을 쌓아왔다. 수업 전 매주 제출해야 하는 글 한편은 머리를 싸매고 몇 시간 동안 온 정신을 쏟았다. 단어 선택 하나, 문장 한 단락 써 내려가는 것이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그나마 글쓰기 단련으로 주 1회 글 한편 완성하기를 이어오면서 손을 놓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글쓰기 강좌에서 함께 한 이들 덕분이다. 강좌가 끝난 뒤에는 뜻이 맞는 몇몇과 시간을 이어 가는 이들의 응원과 충고로 글이 연결된다.
도서관 쉼터에서 차 한잔과 과일 몇 조각으로 시작된 모임이 어느 듯 일 년이 되었다. 다듬고 고른 서로의 글을 자신이 읽어 내려가면 다른 이들은 듣고 감상평을 말한다. 가끔은 눈물 짓고 두 손바닥을 마주치며 공감의 시간이 된다. 글이라는 수단을 통해 4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우리만의 시간을 만들어간다. 이야기 속에 자식과 남편의 안타까운 이야기가 이어질 때면 숱한 인생의 역정을 보여진다. 장성한 자식을 먼저 떠난 보낸 부모의 마음, 참척(慘慽)의 고통 속에서도 손주를 돌보는 사랑, 매주 토요일이면 아들이 묻혀 있는 곳으로 꽃 한 송이를 들고 찾아가는 애증, 매일 매일 일기를 쓰면서 자식이 하늘로 간 일 수를 하루 하루 더해 가는 마음은 가슴이 미어져 온다.
남편이 떠난 지 5년, 며칠 후 기일이란다. 남보다 건장한 체격으로 병원 간 적이 없기에 걱정을 하지 않았단다. 단지, 돈을 좇아 바쁘게 치 닫고 겉 포장에 여념이 없어 스스로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 왔단다. 그러다 어느 날 사무실에서 갑자기 가족과 헤어진 그 사람이 마음 쓰일뿐이란다.
학교에 다니에 자녀를 둔 이는 암이라는 병으로 중환자실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자신을 지켜 낸 하루 하루는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 몇 년에 걸친 투병 생활에서 스스로 음식 조절로 자신을 지켜 낸 과정이 글에 녹아 있다. 나아가 건강 밥상이 가족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챙기는 계기를 만들어 간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으며 몇 차례 도움을 얻었다.
아이들이 초등학생 때 남편을 떠나보낸 이의 이야기에서는 삶의 처절한 짐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십 수년 동안 집과 병원을 반복하여 오가다 갑자기 의사의 사망 선고를 받는다. 이 날 울음 대신 웃음이 나와 화장실로 달려갔다는 말에 잠깐 숨이 멎는다. 그렇게 보낸 지 이십 년인데 엊그제 드디어 세상을 향해 울음을 내뱉고 홀연히 전국 곳곳을 다니며 얽매이지 않고 누린단다. 기도와 함께 종교의 의지 아래 위탁모 역할을 맡아 공허함을 채워가고 있단다. 움직이는데 불편함이 있어 소형 승용차를 발품으로 언제든지 떠나 자유로운 영혼임을 부러워한다.
어느 한 누구라고 할 것도 없다. 다섯 명이 매달 모여 글 쓰고 책 읽은 내용에 이어 살아온 이야기가 지혜로 다가온다. 젊은이의 재빠른 동작과 아이디어는 연장자의 연륜으로 날 줄과 씨 줄이 엮어지는 모양새다. 시가 있고 에세이가 들려지고 책갈피 속 문장이 읊어진다. 미수(眉壽)가 가까워져 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한가지도 뒤처지는 법이 없다. 더구나 시구를 암송하는 능력은 나머지 네 사람과는 견줄 이가 없다. 사십 년 이상의 월간 문예지 정기 구독은 문학과 가까이하는 공간이 되고 매달 전해지는 선물과 같단다.
지난 봄에는 자연이 안겨 주는 속삭임을 맞을 겸 도시를 벗어나 외곽으로 둘레 길을 걸었다. 낙동강을 끼고 벼랑길 따라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일상에서 잠시 떠나 산과 물이 벗이 되었다. 팔각정에서 넘기는 한 잔의 커피는 대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받아들이기에 넉넉했다.
약속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다. 어깨에 가방을 둘러메고 편백나무 숲길을 찾아 나선다. 경사로 목재 계단이 깔려있다. 오르는 길 왼편에는 물이 들어찬 저수지에 분수가 솟구친다. 숲 내음 가득한 길에 계곡 물 소리는 짙어 가는 가을을 안긴다. 군데군데 자리한 돌에 새긴 시 비가 발길을 붙잡는다. 음수대 옆에 플라스틱 물통이 줄을 지어 차례를 기다린다. 간단한 운동복 차림으로 가방을 둘러메고 약수를 받는 중이다. 계곡물 소리는 맑은 노랫가락을 연상케 한다. 더 이상 부러울 게 없다. 구부러진 길을 벗어나자 반반한 길에는 바깥쪽으로 맨발 걷기에 뒤처질라 황톳길이 길게 이어진다. 울퉁불퉁 여기 저기 작은 돌이 솟아 있는 길이지만 개의치 않는 듯 신발을 손에 들고 빠른 걸음이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벚나무가 큰 그늘을 만든다.
문자가 도착한 듯 진동이 느껴진다. 시계를 들여다 보는데 산을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달음질하듯 발걸음에 바짓가랑이가 이리저리 부딪힌다. 내려가는 사람들 사이로 앞질러 발자국 소리가 쿵쿵거린다. 편백나무 사이 도서관 쉼터가 보인다.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회원들이 원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담 너머로 눈인사를 하고 식당 건물을 돌아 도서관 입구에 닿았다. 고개가 숙여진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까지 전원 참석하였다. 어디에나 빠지지 않는 한강 작가의 작품 이야기부터 나온다. 소설에 관해 긍정적인 인식과 부정적인 수용이 동반되기에 각자의 취향에 따른다.
분위기가 달아오를 즈음 근처 식당으로 자리가 이동된다. 병원 뜰을 가로질러 작고 깨끗하게 단장된 곳에서 국수와 비빔밥을 주문하였다. 얼큰한 고추장이 몸에 좋다며 더 권한다. 여느 식당과 달리 밥보다 나물이 그릇에 수북하게 쌓여 마음에 든다. 유부 초밥은 덤이다. 배가 채워 진 다음 길을 하나 건너 카페로 향한다. 따뜻한 커피와 빵 두 조각으로 오늘의 모임이 마무리로 달려간다.
생활이 삶이요 곧 글이다. 문장으로 담아내지 못한 내용은 이야기로 이어진다. 하늘 아래 하루 스물 네 시간은 정해져 있다. 이 시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 하는가에 따라 시간의 지배를 받든지 아니면 누릴 수 있다. 퇴직 후 내 시간 계획에 맞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되묻는다.
삼 년이라는 세월이 나를 어떤 모습으로 보여주었는가. 책 읽고 글 쓰고 아내와 시골살이를 누린다. 매주 오전에는 학생들과 만나 이전보다 한 발짝 물러나 바라보며 교감하는 가운데 교육에 임한다. 전공이 아닌 부전공도 해 본 적 없는 과목을 선택해 배우고 익히는 자세로 최선을 다한다.
어떤 일이든 해보지 않고 두려움부터 가질 필요는 없다. 시작이 반이다. 글쓰기도 가르치는 일도 계속 도전하고 진행중이다. 스스로 다짐한다. 반복하여 곱씹는다. ‘나는 할 수 있다. 반드시 해 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