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일본 외 국가와의 무역 거래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무역과 정에 나선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돌아 1498년 인도에 도착했고,
1512년에는 몰루카 제도를 진출했으며 , 중국에는 1514년, 그리고 마침내 1543년에는 일본에 당도했다.
일본에 최초로 도착했던 유럽인들은 난파선을 끌고 왔던 선원 몇 명에 불과했지만
총을 소개함으로써 일본에 불안한 변화를 초래했으며,
6년 뒤 가톨릭 선교사들이 함께 들어오면서 더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몇몇 다이묘를 포함해 수십만 명의 일본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제수이트교와 프란체스코 선교회가 서로 경쟁적으로 선교에 나서자
선교사들이 유럽지배의 토대를 닦기 위해 일본을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려 한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1597년, 도요토미는 일본 최초의 순교자 26명을 십자가형에 처했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다이묘가 정부 관료에게 뇌물을 주거나 암살하는 일이 벌어지자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유럽인들과 그리스도교가 쇼군과 일본의 안정에 위협이 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다시금 역사를 돌아보면 중국과 인도, 그리고 다른 많은 나라들의 경우 분명 처음에는 순수한 무역업자와 선교사들이 먼저 들어왔지만
이후에는 유럽의 군사적 간섭이 따랐다. 이런 점에서 이에야스의 외세 위협에 대한 예상은 매우 현실적인 것이었다.)
1614년, 이에야스는 그리스도교를금지하고 선교사들과 종교를 버리기를 거절한 개종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하기 시작했으며,
4년 뒤는 일본에 남아 있던 포르투갈 인들을 축출했다.
1635년, 이에야스의 뒤를 이은 쇼군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일본인들의 외국 여행을 금지하고
일본 배들이 일본 해안을 떠나지 못하도록 금지력을 내렸다.
이후부터 약 2세기 동안 일본은 다른 나라와의 통로를 차단했으며
유럽보다는 중국, 한국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게된다.
일본 정부로부터 허락을 받은 유일한 외국인 교역자는 네덜란드 상인이었지만
(그들은 반(反)가톨릭 입장이었기 때문에 포루투갈인들보다 덜 위험다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들마저도 마치 위험한 세균인 것처럼 중국인을 집단적으로 거주시켰듯이 나가사키 항에 별도로 고립시켰다.
그들 외에 교역이 허가된 외국인은 한국인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놓여 있는 쓰시마섬,
그리고 남쪽의 류큐 섬(오키나와 포함)에서 교역이 행해졌으며,
북쪽 홋카이도(당신에는 지금처럼 일본에 속한 땅이 아니었다)의 원주민인 아이누 사람들과도 교역했다.
이외에도 다른 어떤 나라와도 외교 관계를 맺지 않았는데, 심지어 중국과도 마찬가지였다.
상대적인 고립 시기가 계속되던 세기에 일본은 필요로 하는 산물의 대부분 ,
특히 식량 목재, 광물을 자체적으로 조달할 수 있었다.
수입품은 설탕, 향료, 인삼, 의료품, 수은, 매년 160톤에 이르는 사치스런 목재, 중국 비단, 사슴가죽,
가죽을 만들기 위한 짐승 가죽(일본에서는 가축을 그다지 많이이 사육하지 않았다.) 납 ,
그리고 화약을 만들기 위한 초석(硝石)으로 제한되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국내에서 비단관 설탕 생산이 증가하고,
총의 경우에도 사용이 금지되어 사라지게 되자 점점 감소하고 말았던 것이다.
유례가 없는 일본의 자급자족 상태와 스스로 택한 고립은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함대를 끌고 나타나 일본에게 미국 고래잡이배와 상선에게 연료 및 식량을 공급해줄
항구를 개방해달라고 요청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제 도쿠가와 쇼군이 총으로 무장한 야만인들로부터 일본을 더 이상 보호해줄 수 없음이 명백해졌고
쇼군은 1868년 붕괴했다.
이후 일본을 고립된 유사 봉건 사회에서 근대 국가로 급속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삼림 파괴는 1600년대의 평화와 번영에서 비롯된 환경 및 인구 위기의 주요 요인이었다.
이 시기에 목재 소비(거의 모두 국내에서 생산한 목재로 충당했다.)가 치솟았기 때문이다.
19세기 말까지 일본에서 대부분의 건물을 다른 나라와는 달리
돌. 벽돌, 시멘트 , 진흙, 타일이 아닌 나무로 지어졌다. 목재로 집을 지었던 것은
목재에 대한 일본인들의 미학적 선호, 그리고 일본 역사 초기부터 지속된 목재 획득의 용이성 때문이었다.
평화와 번영, 그리고 인구 증가가 지속되자 건축을 위한 목재소비는
성장하는 농촌 및 도시 인구의 필요에 맞추어 늘어나기 시작했다.
1570년대 초 히데요시, 그의 후계자인 쇼군 이에야스 , 그리고 많은 다이묘들은
커다란 성과 사원을 지어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고 권위를 과시하고자 했다.
이에야스가 세웠던 세 개의 커다런 성을 짓기 위해서만 약 10평방마일에 이르는 산림의 목재가 필요했다.
히데요시, 이에야스, 또 그 뒤를 이은 쇼균의 시기에 약 200여 개의 성을 가진 마을과 도시가 생겨났다.
이에야스 사후에는 엘리트 지배계급의 기념비적인 건축보다는 도시를 건축하는 데 목재가 더 많이 소비되었는데,
이는 당신 목재로 만든 도시의 초가집들이 서로 가까이 붙어 있어
화로를 통한 난방 방식을 사용할 경우 화재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으므로
계속해서 도시 건물을 재건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657년에 일어난 메이레키 대화재로 수도였던 에도의 거의 절반을 불태웠고 10만여 명의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의 복재는 연안을 왕래한 배를 통해 도시들로 운반되었고,
그런 배 역시 목재로 만들었으므로 목재에 대한 수요는 더욱 높아졌다.
더구나 히데요시가 결국 실패로 끝난 조선 정벌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면서
해한 해협을 지나 히데요시의 병사들을 운송해줄 배를 만드느라 목재의 소비는 더욱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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