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초상화에 마늘잎과 쑥잎을 두른 것은 바로 선도수행법을 후손에게 기억시키기 위한 깊은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불교의 108배나 100일 기도도 신선도에서 기를 모으는 우리의 기초 수행법이었다
“7년 앓은 고질병이라도 3년 묵은 쑥이면 고칠 수 있다
단군 조선 개국에 얽힌 쑥과 마늘 이야기와 단군 영정의 어깨와 허리에 두른 풀잎과는 깊은 연관이 있다. 그 당시는 이미 누에를 먹여 비단을 생산하던 시대인데도 어깨와 허리에 풀잎을 두른 것은 종교와 정치와 경제를 주관하던 제정일치 시대 단군의 신분을 나타내던 제복이었기 때문이다. 단군의 어깨와 허리에 두른 풀잎은 바로 마늘잎과 쑥잎이다.
aae14588624309957ffc772883d59d0a_1595961253_1435.jpg 반 재 원
(국학박사, 훈민정음연구소장, 한국땅이름학회장)
반재원은 훈민정음연구소장, 태극원리연구소장, 한국땅이름학회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훈민정음 창제원리와 천문도와의 상관성>이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한글과 천문>, <훈민정음 창제원리와 옛글자 살려쓰기>, <옛글자를 살려 쓴 21개 외국어표기 예>, <한글세계화 이대로 좋은가> 등 10여권이 있다.
③ 단군의 풀잎 영정의 의미
해방 후 1949년 강진구 선생은 부여 장형리에 천조궁(天祖宮)을 건립하고 솔거본 단군 영정을 모셨다. 그가 타계하고 나자 그의 아들 강현구가 분실을 우려해 부여박물관에 맡겨 보관해 오던 것을 2002년에 찾아내었다. 크기는 가로33.6cm, 세로 53.3cm이다.
1910년 경술 합방이 되기 전 3월 15일 한밤중에 나철에게 강원도 명주군 석병산에 살고 있다는 노인이 찾아왔다. 그는 누런 비단에 싼 오래된 단군 영정을 주면서 “우리 집에서 대대로 내려온 솔거의 유일본이오. 내가 99세에 죽을 것인데 이 영정을 전해줄 사람이 없어서 103살까지 기다렸노라”라고 하였다. 그 사람은 자신을 공공진인이라 하고 이름은 고상식이라 하였다. 단군교를 개창한 지금의 재동 초등학교 터에 나타나서 전해준 영정이 바로 부여 박물관에서 발견된 단군 영정의 모체라고 한다. 그것을 모체로 하여 종두법을 개발한 지석영의 형 지운영 화백이 그린 단군 영정을 경술국치 바로 전날인 1910년 8월 21일 날 봉안하였다.
그 후 나철이 만주로 가서 총본사를 설치하여 독립운동을 하였고 조선에서 남도본사를 맡은 호석(湖石) 강우(姜虞)가 단군 영정을 부여 본가의 다락방에 보관해 두었다가 1932년 작고하면서 큰아들 강진구(姜鎭求)에게 “저 다락 속에 감추어 둔 천진(단군 영정)을 잘 보존하라.”라는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나철과 같은 도반이었던 강우가 그의 아들 강진구에게 전한 것이 다시 손자인 강현구에게 전해졌다가 보관상의 어려움 때문에 1990년대 중반에 부여 박물관에 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되자 지운영의 장남인 지성채 화백이 이를 다시 모사하여 대종교 총본사에 봉안케 되었다. <동사유고> 등 옛문헌에는 신라 말 솔거가 단군 영정을 그려 민간에서도 많이 모신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솔거의 단군 영정은 불교와 유교 국가인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되고 대종교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일제 통치 기간 몰래몰래 모셨던 풀잎 영정을 광복이 되자 1949년 제헌 국회에서 국조 성상으로 공인하였다.
그 후 표준 영정을 둘러싸고 다시 시비가 일자 1976년 6월 14일 자로 문화공보부 장관으로부터 <문화 1740-8790호>로 대종교의 그 단군 천진을 <국조 단군 표준 성상>으로 심사하여 승인하였으며 또 1976년 12월 28일에는 <문화1740-19226호>로 “대종교 총본사에서 제작한 것만을 존중하기로 확인함”이라는 단군 영정 제작 확인까지 받았었다.
여기서 단군교를 중광하게 된 내력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904년 개천제날 백두산 대숭전에서 33인의 선도가 백봉대신사(白峯大神師)를 모시고 단군 포명서를 선포하였다. 나철은 1905년 서울역 근처에서 백전(佰佺)이라는 노인으로부터 <삼일신고>와 <신사기>를 전해 받는다. 지금의 서대문 사거리 부근인 이화여고 서문 앞이 그 당시에는 서울역이었다. 이것이 혼동을 일으켜 어떤 이는 지금의 서울역으로 알고, 어떤 이는 지금의 서대문 전철역 자리라고 주장하는 빌미가 되었다.
지금의 서울역은 그 당시에는 남대문 역이었으며 염천교 부근에 있었다. 그 후 1908년 12월 9일 일본 도쿄 개평관에서 나철은 단재(檀齋) 정훈모와 함께 백봉의 제자 두일백(杜一伯)으로 부터 단군심계(檀君心戒)를 받는다. 이듬해인 1909년 1월 15일 한성부 종로 재동 8통 10호 초가(지금의 재동 초등학교 터)에서 정훈모와 함께 단군교를 중광하였다.
우리가 신화의 영역으로 알고 있는 단군 조선 개국 이야기에 나오는 마늘 20통과 쑥 한 묶음에 관한 내용은 바로 단군 조선 때의 신선도 수행법에 불과하다. 신선도의 100일 수련 기간 마늘을 먹는 날은 10일을 단위로 하여 3일과 7일 날이다. 흔히 웅녀가 21일 만에 수련을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것은 3일과 7일의 의미를 미처 몰랐던 소치이다. 3일 날과 7일 날은 마늘을 1통씩 먹는 날이다. 즉, 10일마다 2통의 마늘을 먹으므로 100일 동안 모두 20통의 마늘이 소요되는 것이다. 마늘 20통을 준비한 이유이다. 그런데도 왜 20통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조차 품어보는 이가 없다. 그저 신화로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교웅蟜熊(웅녀)은 21일 만에 수련을 마친 곰이 아니라 열유씨의 딸로서 100일 선도 수련을 끝까지 잘 마치고 한웅의 반열에 올라 간택을 받은 여인이었다.
여기서 쑥은 뜸을 뜨는 약쑥이었다. 왜냐하면, 쑥 한 묶음(艾一炷)을 표시하는 주(炷)가 불 화(火)변에 주(主)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불을 붙여 뜸을 뜰수 있도록 만든 심지(炷)로 보기 때문이다. 3일과 7일 날마다 뛰어난 항생제인 마늘을 1통씩 먹고 족삼리와 단전과 곡지에 쑥뜸을 뜨는 수행법은 우리 민족의 신선도 수행법이었다.
단군 조선 개국에 얽힌 쑥과 마늘 이야기와 단군 영정의 어깨와 허리에 두른 풀잎과는 깊은 연관이 있다. 그 당시는 이미 누에를 먹여 비단을 생산하던 시대인데도 어깨와 허리에 풀잎을 두른 것은 종교와 정치와 경제를 주관하던 제정일치 시대 단군의 신분을 나타내던 제복이었기 때문이다. 어깨와 허리에 두른 풀잎은 바로 마늘잎과 쑥잎이다.
쑥과 마늘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식품이자 약초이다. 약물 사전인 『조선 의약사전』에도 마늘과 쑥이 맨 앞에 수록되어 있으며 지금도 우리 민족의 대표 약초이자 일용하는 음식이다. 『맹자』 이루장구 상편을 보면 “7년 앓은 고질병이라도 3년 묵은 쑥이면 고칠 수 있다”라고하여 쑥뜸의 효능을 단적으로 입증하는 구절이 있으며 삼국지·위지 동이전에도 “한인이 병이 있음에 오직 쑥뜸을 알 뿐이다.”라고 한 내용을 보더라도 쑥은 우리 민족과 뗄 수 없는 음식이자 약초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쑥뜸은 한인 때부터 한웅과 단군으로 이어져 내려오던 우리의 전통의술이었다.
단군 영정에 마늘잎과 쑥잎을 두른 것은 바로 선도수행법을 후손에게 기억시키기 위한 깊은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불교의 108배나 100일 기도도 신선도에서 기를 모으는 우리의 기초 수행법이었다. 여행 중에 몸이 아프면 여행이 아니라 고행이 되듯이 동굴이나 수련 처에 들어가서 몸이 아프면 아예 수련을 포기하고 하산해야 한다. 그만큼 수행 중에는 건강이 최우선이다. 쑥과 마늘은 100일 수련 중에 건강을 지키기 위한 필수 식품이자 비상약 품이었다.
쑥뜸을 뜰 때 생기는 미세한 상처가 이종단백질(異種蛋白質)을 만들어서 면역 물질인 백혈구 수를 200배까지 증가하여 혈액 속을 돌아다니면서 정혈 작용을 하여 염증을 예방하기 때문에 질병의 침입을 막아준다. 쑥뜸은 혈관을 튼튼히 하고 신경을 강화하므로 비록 고혈압이라도 혈관이 터지는 것을 예방할 뿐아니라, 고혈압과 저혈압을 다 같이 정상으로 되돌려 준다.
혈액 성분이 좋아지고 몸의 면역력을 최대한 높여주기 때문에 감기 같은 잔병치레가 없고 아울러 뇌졸중이나 중풍과 같은 중병을 막아주는 종합 예방주사이다. 질병 예방의 최대 관건은 면역력이다. 뜸 1회의 효과는 7일째 되는 날 최고점에 도달하고 완전 소멸 기간은 91일(13주)이 걸린다. 91이라는 숫자는 태양계의 최소 단위 91개와 상통한다. 뜸을 매일 뜨면 면역력이 항상 최고점을 유지하게 된다.
단군의 풀잎 제복은 조선 시대 왕의 제복인 곤룡포와 같다. 풀잎 제복에는 우리 민족의 시원 문화와 선도 사상이 담겨 있다. 어깨의 마늘잎과 허리의 쑥잎은 가죽에 그 모양을 새겨 둘렀던 것으로 보인다. 상고사를 파고 들어가 보면 우리의 조상이 동방 선파仙派의 조종祖宗이며 우리는 그 맥을 이은 대종손이라는 증거가 이렇듯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는데도 선뜻 믿으려 하지 않는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