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탐매 Ⅵ - 야마구찌현(山口?) 죠후조코마치(長府城下町)의 매화
2012년 3월 29일 다음에 들린 곳은 일본 야마구찌현(山口縣) 죠후 조카마치(長府城下町) 이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모리(毛利)영주의 지배지였다. 도자마 다이묘인 모리 가문(毛利氏)이 지배하였던 조슈 번(長州藩 조슈한)은 지금의 야마구치 현에 해당하는 스오노쿠니와 나가토노쿠니의 2개 구니를 지배했던 일본 에도 시대의 번이다. 가격(家格)은 국주격(?主格)에 해당되었는데, 그 아래 즉 지번(支藩)으로는 조후 번(長府藩 조후한), 도쿠야마 번(德山藩), 기요스에 번(淸末藩;조후 번의 지번), 이와쿠니 번(岩?藩) 등이 있었다.
죠후 조카마치(長府城下町) 안내도
조슈 번의 성하도시(城下町)로는 하기시(萩城)의 성하마을이 있다. 1604년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가 하기성을 축성한 이래, 260년에 걸쳐 36만호로 번창한 성을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인 하기시(萩市)는 일본 유수의 사적지이다. 이곳에는 중후한 무사저택(武家屋敷)이 있다. 또 밀감을 드리운 흙 담이나 나마코 벽(なまこ壁, 흙벽돌로 된 창고 외벽에 평평한 기와를 붙이고 그 이은 틈을 석회로 만든 벽)도 볼 수 있다. 가이마가리(鍵曲, 적의 침입이나 미행을 막기 위해 일부러 직각으로 굽도록 한 길) 등 거리에는 아직도 성하도시(城下町)의 운치가 남아 있다. 죠후 조카마치(長府城下町)는 하기시(萩市)의 성하마을보다는 못하지만 이곳에도 일본의 옛 풍치를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시노모세키의 옛날 중심지인 죠후(長府) 조카마치(城下町: 사무라이 마을)는 조슈번 지번(支藩)의 번주(長府毛利)와 그의 신변을 지키던 무사, 즉 사무라이(さむらい[侍])들이 모여 살던 도시였다. 이 마을에는 죠후테이엔(長府庭園)을 비롯하여 대웅전이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코잔지(功山寺) 등 여러 사원 들, 오래된 신사들이 즐비하다. 또 메이지 36년(1903년) 쵸후 모리가 제14대 번주인 모리 모토토시가 세운 저택으로 메이지 천황의 행재소(行在所)로 사용되기도 한 죠후모리테이(長府毛利邸)등 볼거리가 많다. 이 저택 바로 위에는 노기(乃木希典) 신사가 있다. 노기 大將은 1905년 러일전쟁 때 요동반도 끝에 위치한 러시아 요새 여순(旅順)을 함락시킨 육군대장이다. 여순공략전에서 노기는 휘하 장병 3만 명을 전사(戰死)시키는 전략상의 오류를 범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메이지 천황은 그런 그가 자신의 배를 가를 것을 우려해 미리 「자결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을 전했다. 노기 부부는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사망한 후에야 자결했다.
'단구천(壇具川)'을 따라 난 길에서 만난 모자 '단구천(壇具川)' '단구천(壇具川)'을 따라 난 길
'단구천(壇具川)'에는 오리와 잉어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성밑거리의 서부엔 家老 이상의 상급 家臣의 집이 줄지어 있다. 우리는 시간 관계상 이 마을 중앙을 가로 질러 흐르는 '단구천(壇具川)'을 따라 난 길로 코잔지(功山寺)까지 가서 되돌아오는 것으로 죠후 성하마을을 대략 훑어보기로 하였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쵸후번 사무라이야시기나가야(長府藩侍屋敷長屋)이다. 야시기(屋敷)는 저택을 일컫고, 나가야(長屋)는 여러 세대가 나란히 이어져있는 일자형 공동주택이다. 적의 직접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높은 담이 정면(正面)을 가로막는 전형적인 사무라이(さむらい[侍])가옥이다. 1976년 시모노세키시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이 나가야(長屋)는 쵸후번의 장로직을 맡고 있던 서가(西家)의 분가에 부속되어 있던 것이었다. 본래 현 위치에서 500m 남쪽에 있던 건물인데, 이곳으로 이건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언떳 보기엔 나가야(長屋) 형태이지만 중후한 구조로 보아 고급 무사들의 가옥으로 여겨진다. 에도 후기의 건축물로 추정하고 있다.
쵸후번 사무라이야시기나가야(長府藩侍屋敷長屋) 설명판
메이지유신(1868)의 영웅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를 정치적으로 적극 지원한 닌도하지메(豊永長吉;いんどうはじめ)의 생가가 보존되고 있다는 간판도 도로변에 서 있었다. 처음 노부루(印藤聿)라 불렸던 그는 모리 번사(毛利藩士)였는데, 문무(文武)에 뛰어나 번주 모리모토카네[毛利元周;もとかね]의 두터운 신뢰를 받고 측근에 등용된 사람이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와는 분큐 3년(1863) 무렵부터 교류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들이 주고받은 유물들은 조후박물관(長府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염전(鹽田)을 조성, 그 수익금으로 생활이 어려운 사족(士族)들을 도왔다. 제지 회사와 은행 등을 설립하였으며, 경제적인 이유로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에게도 도움을 주었으며, 교육의 보급에도 노력했다. 시모노세키(下關)항과 해협을 두고 마주보는 규슈의 모지항(門司港)을 개항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기도 하다.
닌도하지메(豊永長吉)의 생가 안내 간판 그의 무덤은 막부(幕府) 말 장부 번사였던 미요시신조우(三吉愼藏, みよし しんぞう;1831?1901)의 무덤과 함께 코잔지(功山寺) 뒤편에 있다. 미요시 신조우는 유명한 검술사로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위기에 쳐했을 때 구해준 인물이다. 그 뒤에는 이곳의 번주(藩主)였던 죠후 모리(長府 毛利) 집안의 묘소도 있다. 미요시신조우(三吉愼藏)
코잔지(功山寺) 이 마을에서 꼭 보아야 할 곳은 코잔지(功山寺)이다. 이곳에 14세기 후반 고려불화 ‘양류관음(楊柳觀音)’이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서 약탈한 불화 중 지온인 소장 ‘미륵하생강변상도’, 센소지 소장 ‘수월관음도’, 후도인 소장 ‘비로자나불도’, 나고야 성 박물관의 ‘관음보살’등 일본 곳곳에 퍼져있는 50여점의 고려불화 중 대표적인 유물 중 한점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코잔지(功山寺) 소장 고려불화 양류관음(楊柳觀音)
1327년 창건 당시에는 임제종(臨濟宗)으로 금산장복사(金山長福寺)라 불렀다. 아시카 씨(足利氏), 아씨히가시 씨(厚東氏), 오우치 씨(大?氏) 등 무가(武門)의 지원으로 크게 융성하였던 절이었다. 하지만 1557년 조슈번(長州藩)의 元祖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추격을 받은 오우치 요시나가(大內義長)가 이곳에서 자결하였고 전란 등으로 폐허가 되었다. 1602년 조후번조(長府藩祖)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재위 1600년 ~ 1650년)가 이곳을 재정비하였고, 조동종(曹洞宗)으로 개종하였다. 그의 아들인 2대번주(二代藩主)인 모리 미쓰히로(毛利光?;재위 1650년 ~ 1653년)가 이곳에 아버지의 영위(靈位)를 안치하면서, 죠후 모리 가(長府毛利家)의 보다이지(菩提寺;조상을 위한 절)가 되었다.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의 법호(法號)는 <지문사전공산현예대거사(智門寺殿功山玄?大居士)>였는데, 이 이름을 따서 공산사로 개칭(改稱)하였다.
코잔지(功山寺)의 불전(佛殿)
현재 불전(佛殿)은 원래 1320년에 건립된 전형적인 가마쿠라 말기(鎌倉末期)의 선종(禪宗) 양식(樣式)이다. 건물 남쪽 기둥에 「此堂元?2年(1320)卯月5日 柱立」이라는 묵서(墨書)가 남아있어 일본 최고(最古)의 선사(禪寺) 양식으로 판명되어 1953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역시 국보로 지정된 가마쿠라시(鎌倉市) 야마노우치(山ノ?)에 있는 엔가쿠지(円?寺)의 사리전(?利殿)과 같은 양식이다. 우리나라의 금당(金堂)에 해당되는데,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본존(本尊)으로 모시기 때문에 대웅전이라 불러도 될 듯하다.
1953년 국보로 지정된 불전(佛殿)
이 절의 정문(?門)은 불전에 이어 건립된 무로마치(室町時代) 시대의 건축물로 2004년 6월 15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총문의 정면에「해우제일봉(海右第一峯)」이라 쓴 편액(扁額)이 걸려있다.
정문(?門)
「해우제일봉(海右第一峯)」이라 쓴 편액(扁額)
1773년 10대 번주 모리 마사요시(毛利匡芳;재위 1769년 ~ 1792년)가 당시 현지 장인들을 모아 만든 산문(山門)도 잘 남아있다. 시지정문화재로 목조와즙2층 건물로 2층에는 20여구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산문(山門)
그 외 현문화재(縣文化財)로는 목조지장보반가상(木造地?菩半跏像)과 오우치 요시나가(大內義長)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보협인탑(??印塔),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거병(擧兵) 장소 등 많은 사적과 문화유산들이 남아있다. 사찰 뒤에는 이곳의 번주 모리집안의 무덤들을 비롯하여 사무라이가 등의 가족 무덤이 즐비하다.
고잔지 뒤의 모리집안 묘소
코잔지(功山寺)의 정원
코잔지(功山寺)의 정원 코잔지(功山寺)의 정원 - 이곳은 찾지 못하였다. 사진은 코잔지 홈페이지에서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이 사찰이 지금 일본인들에게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는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1839년 9월 12일 ~ 1867년 5월 17일)가 거병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봉건제 하에서 전쟁은 오직 사무라이 계급의 독점물이었으나, 조슈 번의 사무라이였던 그는이를 타파하고 모든 국민이 국가의 부름에 전쟁에 나서는 국민적 군대를 창설한 것이다. 그리하여 농민, 상인, 공인, 스모 선수, 심지어는 불교 승려까지도 쇼타이[小隊]에 가입시켜 번의 재정지출을 억제하면서 전력을 증강시킬 수 있게 하였다. 1863년 특수한 쇼타이를 만들고, 기헤이타이(奇兵隊)라고 불렀다. 300명으로 구성된 기헤이타이의 중 반은 사무라이 출신이었는데, 막부군의 두차례에 걸친 조슈정벌을 격퇴하였다. 이 패배로 막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숨통을 사실상 끊어 버렸고, 명치유신(明治維新)을 가능케 하였던 것이다.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그러나 다카스기는 이러한 성공을 보지 못하고 겨우 28세때인 1867년 5월 17일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사카모토 료마와 비슷하게 성공을 앞두고 요절하는 바람에 신정부의 지도자는 되지 못하였다. 반면 그의 부하였던 야마가타와 이토, 기도 다카요시 등은 이후 신정부에서 수상 등의 고위직에 진출하였다. 부하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다카스키 신사쿠의 행적에 대해 『동(動)하면 우레 같고 발(發)하면 풍우 같았다』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관련 유물
회천의거동상(回天義擧銅像) 코잔지(功山寺) 경내외에는 다카스기 신사쿠 관련 유물이 몇 있다. 불전 오른쪽에는 말을 탄 타카스기 신사쿠 상(高杉晋作像)이 보이는데, 이를 회천의거동상(回天義擧銅像)이라 부른다. 『입으로 成敗를 말하는 것은 이미 무모한 일, 이제부터 조슈 남아의 솜씨를 보라』며 말에 올랐던 신사쿠를 표현한 것이다. 1972년 쵸후박물관 동우회에서 건립한 것으로 동상의 높이 1.4m, 둘레 1.8m, 길이 3.8m 정도이다. 받침대 바위는 시모노세키 시내 ?王山에서 가져온 것으로 높이 3.1m, 폭 2.1m × 1.6m, 무게는 15t으로 추정된다.
회천의거동상(回天義擧銅像) 회천의거비(回天義擧碑) 정문(?門) 왼쪽에 높이가 1.6m 정도인 긴 자연석 석주 하나가 보이는데, 그 안에 「高杉晋作回天義?之所」大正九年十二月二十四日建之라 쓰여있다. 그 옆에는 이 비를 해설한 작은 비석이 있는데, 원문은 아래와 같다.
회천의거비(回天義擧碑) 碑の解? 高杉晋作回天義?之所 明治維新の策源地 正にこの地この所である 回天とは何の意か 天皇親政の古に復えすの意であろう 義?とは何ぞ 義は正義の義であり忠義の義である この碑は高杉が明治の昭代をつくり出した地点を示す 否少なくもその主なる一人である 由??史は人を造るが 人また?史を造りもする 高杉は?史を造る人か 高杉のこの?は 直ちに近代?家への進展を見なかったが たしかにその一道程を進めたものと言えよう
그리고 탐매(探梅)
이번 여행의 주목적은 탐매이었지만 코잔지에서 시간을 너무 낭비(?)한 것 같다. 이곳에도 명매 한 두그루 쯤 있을 법 하였지만 다음 일정에 쫓겨 찾지 못하였다. 내가 걸은 도로변에는 오래된 벚꽃들이 망울을 터뜨리기 직전이었고, 단지 주택가 담장 안에 있는 매화 몇 그루만 보았을 따름이다.
주택가 담장 안에 있는 매화 - 수양백매이다.
주택가 담장 안에 있는 매화 - 수양백매이다. 동백과 목련 등이 만개해 있었다.
도로변의 오래된 벚꽃들은 망울을 터뜨리기 직전이었다.
일본 가정의 조경수들 - 너무 인위적이다.
이 조후마을 黑門東町에는 모리번(毛利藩) 중신(家老) 니시유키나가(西運長)의 저택이 죠후테이엔(長府庭園)이라는 이름으로 보존되고 있다. 대지 약 31,000㎡에 조성된 회유식(廻遊式) 일본 정원으로 뒤에 나지막한 산이 있고 연못, 폭포수, 벚꽃, 소나무, 단풍나무, 철쭉, 청포 등과 함께 매화도 있다고 하였으나 가 보지는 못하였다. 이곳의 연꽃은 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孫文)이 보내 준 것이라 한다. 이곳을 포함하여 조후모리가를 비롯하여 많은 저택이 남아있다. 다음해 이른 봄에는 이곳들을 둘러보고 명매(名梅)들을 찾아보았으면 한다.
죠후테이엔(長府庭園) 안내 리플렛 |
출처: 눌인정사로의 초대 원문보기 글쓴이: 눌인
첫댓글 일본에는 좋은 명매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예 지난번 동경 근교에서는 많이 보았습니다. 이번 여행에서도 많이 보았는데 소개할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구경 잘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읽어주시고 뎃글까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서야 후편을 읽네요..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호를 보니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님의 호(號) 창송불로(蒼松不老)가 생각이 나는군요. 아시겠지만 ‘푸른 솔은 늙지 않는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