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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72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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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cky Lim 덕규의 여행기 스크랩 경주의 석탑을 찾아서 01 - 구십 노비구의 방하착, 원원사지 삼층석탑
Ducky Lim 추천 1 조회 83 15.11.30 08: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경주의 석탑을 찾아서 01 - 구십 노비구의 방하착(放下着), 원원사지 삼층석탑

 

 

 

 

2015년  10월  29일   경주  원원사지

 

 

 

 

경주읍에서 성 밖으로 오 리쯤 나가서 조그만 마을이 있었다. 여민촌 혹은 잡성촌이라 불리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 한 구석에 모화(毛火)라는 무당이 살고 있었다. 모화서 들어온 사람이라 하여 모화라 부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 머리 찌그러져 가는 묵은 기와집으로, 지붕 위에는 기와버섯이 퍼렇게 뻗어 올라 역한 흙 냄새를 풍기고, 집 주위는 앙상한 돌담이 군데군데 헐리인 채 옛성처럼 꼬불꼬불 에워싸고 있었다. 이 돌담이 에워싼 안의 공지같이 넓은 마당에는 수채가 막힌 채, 빗물이 괴는 대로 일 년 내 시퍼런 물이끼가 뒤덮여 늘쟁이, 명아주, 강아지풀, 그리고 이름 모를 여러 가지 잡풀들이 사람의 키도 묻힐 만큼 거멓게 엉키어 있었다. 그 아래로 뱀같이 길게 늘어진 지렁이와 두꺼비같이 늙은 개구리들이 구물거리며 움칠거리며, 항시 밤이 들기만 기다릴 뿐으로, 이미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전에 벌써 사람의 자취와는 인연이 끊어진 도깨비굴 같기만 했다.

이 도깨비굴같이 낡고 헐리인 집 속에 무녀 모화와 그 딸 낭이는 살고 있었다. 낭이의 아버지 되는 사람은 경주읍에서 칠십 리 가량 떨어져 있는 동해변 어느 길목에서 해물 가게를 보고 있는데, 풍문에 의하면 그는 낭이를 세상에 없이 끔찍이 생각하는 터이므로, 봄?가을철이면 분 잘 핀 다시마와 조촐한 꼭지미역 같은 것을 가지고 다녀가곤 한다는 것이었다. 나중 욱이(昱伊)가 돌연히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 도깨비굴 속에 그녀들을 찾는 사람이라야 모화에게 굿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과 봄 가을에 한 번씩 낭이를 찾아 주는 그녀의 아버지 정도로, 세상 사람들과는 별로 왕래도 없이 살아가는 쓸쓸한 어미, 딸이었을 것이다.

                                                                                                       -  김동리의 무녀도(舞女圖) 에서

                                 소설 무녀도를 더 읽고 싶으신 분은  클릭하세요.  http://blog.daum.net/humm99/17106986

 

 

 

 

원원사가 있는 외동은  울산 생활권입니다.  외동에 사는 사람들  자체가 집주소는 '경주시'라고 적지만 자신들이 '경주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에서  눈먼 소녀 '낭이'와  '욱이'의 엄마인  무당 모화(毛火)가 이 동네 사람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봉서산 에서 흘러내리는 모화천을 따라  길은 깊은 산속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요즘 공사를 했는지 조그만 저수지와  그 아래 주택지를  넓게 조성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울산의 베드타운 정도로 만들 예정인가 봅니다.   원원사는 여기를 훨씬지나  저수지가 저 아래 내려다보일 때 쯤 되어서 나타나는 절집입니다.

 

 

 

 2015년  10월  29일   경주  원원사지

 

그런 깊은 산속에 있으면서도 원원사는 길가에 나 앉은 것 처럼 촐싹맞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일주문, 천왕문 모두 제처두고  절의 금당(金堂)인  천불보전이 빤히 보입니다.  산사(山寺)고 뭐고 없습니다.   절마당 올라가는 계단참에 방하착(放下着)이란 글귀가 쓰인 돌이 서 있습니다.

 

나는  화식(火食)하는 속세의 인간이니  나에게 붙어있는 수많은 착(着)을 어떻게 내려놓을 수가 있게소, 단지  착득거(着得去)는 하겠는데,이 절 비구는   방하착(放下着)을 이루었는지....

 

 

 

중국 당(唐)나라 때,  엄양 존자(嚴陽尊者)가 먼 길을 걸어 조주 선사(趙州禪師)를 찾아왔다. "어떻게 왔느냐?"고 조주가 물으니 "가르침을 받으러 왔다"고 엄양이 말했다. 그 말에 조주는 "방하착(放下着)"을 외쳤다. '내려놓아라'는 뜻이다. 엄양은 그 말을 좇아 손에 든 염주와 지팡이를 내려놓고 조주를 올려다보았다.

그럼에도 조주의 대답은 똑같았다. "방하착!" 엄양은 잊은 게 있는 듯 등에 진 걸망을 내려놓으며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이제 더 이상 내려놓을 것이 없다는 무언의 답변이었다.

 

그때 조주가 내뱉었다. "착득거(着得去)!" '정 내려놓기 싫으면 그대로 지고 가라'는 얘기다. 우두커니 서 있던 엄양은 비로소 깨달았다. 조주가 지칭한 것은 마음이었다. 온갖 번뇌와 갈등, 원망, 집착을 다 내려놓아라는 가르침이었다

                                                                                                               - "방하착(放下着)"과 "착득거(着得去)"

 

 

 

 

 2015년  10월  29일   경주  원원사지

 

마당에 올라서니  천불보전이 썩 앞으로 내닫으며 다가서는데, 건물의 크기가 범상치 않습니다.  게다가 천불보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참에는  거대한 석상이 양쪽을 지키고서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성이  맞는 것인지 어쩐지?  한쪽은 관세음보살인것 같고,  한쪽은 지장보살인것 같은데,  법당 앞에까지 튀어나와  돈달라고 수금박스(희사함)을 썩 내놓고 있습니다.

 

정면의 계단보다  오히려  그 옆에 있는 계단이 무언가 할 이야기가 있는 듯 합니다.

 

 

 

2015년  10월  29일   경주  원원사지

 

계단 위에는 고양이 한마리가, 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이 돌계단은  불국사  석축 복원공사에 참여했던 기술자가 와서 쌓아 준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석축과 돌계단의 품새가 주변의 돌계단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엇이 있습니다.

 

이 절집은 우리가 찾아가는 원원사(遠源寺)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새로운 원원사(遠願寺)로  40년전쯤 새로 지은 천태종 소속의 사찰입니다.  봉서산 산골짝에 훌륭한 석탑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재빨리 들어와 남들보다 일찍 '알박기 절집'을 지은 것이지요.  그래 절값도 많이 올리셨는지요.

 

 

 

2015년  10월  29일   경주  원원사지

 

우리가 찾는 삼층석탑이  이렇게 절집 뒤 소나무 숲속에 서서 '나 여기있소!'를 외치고 있습니다.

 

 

 

 

 

2015년  10월  29일   경주  원원사지

 

 

절 뒤편 소나무 숲속에 원원사지 삼층석탑이 있고 그 사이에 화사석(火舍石)이 없어진 석등이 서있습니다.  탑은 2기로  원원사지동서삼층석탑(遠願寺址東西三層石塔)으로 명명되어 2005년에 보물 142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서탑 뒤쪽으로 조금 보이는 것이 옛 원원사(遠原寺)의 금당터인데,  그 뒤로 계속해서 건물의 기초를 나타내는 돌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나와있는 원원사(遠源寺)는  당나라에 갔던 명랑법사(明朗法師)가 밀교(密敎)를 배워와 세운 사찰로,  명랑의 후계자인 안혜(安惠)·낭융(朗融) 등의 승려와  김유신(金庾信)·김의원(金義元)·김술종(金述宗) 등의 화랑이 호국(護國)을 논하던 사찰이라고 합니다. 

 

경주 동남쪽 20여리 되는 곳에 원원사(遠源寺)가 있다 속설에는 안혜등 네 대덕(大德)이 김유신 김의원 김술종등과 함께 발원하여 세운 것이라한다. 네 네 대덕의 유골을 모두 절의 동쪽 봉우리에 모셨으므로 이 때문에 이 봉우리를 사령산(四靈山) 조사암(祖師巖)이라고 불렀는바 즉 네 대덕은 모두 신라시대의 고명한 중들이다                                        - 三國遺事 明朗神印

 

 

2015년  10월  29일   경주  원원사지

 

경주지역의 유적을 설명한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원원사(遠願寺)'로 기록되었는데, 

"인조 8년인 숭정(崇貞) 경오년(庚午年 - 1630)에 중수하였으나 효종 7년(1656)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곧 중건되었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남구만(南九萬)의 약천집(藥泉集)에도 1660년  원원사에서 사람이와서 만나고 시를 지은 기록이 있습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까지 법등이 이어졌으나 조선 말기에 이르러 폐사되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특히

 

1809년에  울산에 사는 '청안 이씨'사람이 부근의 산을 구입하여 조상의 묘를 쓰면서 두개의 탑을 무너트려 낮은 곳으로 버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하며, 지금도  위 사진에 보이는 분묘(墳墓)뿐 아니라 근처 곳곳에 분묘가 자리잡고 있어 이 말이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2015년  10월  29일   경주  원원사지

 

안내판에는

"이 쌍탑은 부분적으로 파손된 곳이 유난히 많은 편이다.  이 탑들은 금당앞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31년 가을에 경주고적보존회가  복원한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현재 있는 원원사의 홈페이에서는

 

"1921년 경주 살던 일본인 '삼산(杉山)'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사냥하러 왔다가 우연히 탑재 일부를 발견하고 그 사실을 조선총독부에 보고했다.

또 당시 우리나라의 유물유적에 관심이 많았던 교토제국대학 공학부 건축학교실 조수였던 '노세 우시조(능세축삼 能勢丑三)'가 1928년 말 원원사터를 답하하고, 원원사터에 완전히 붕괴된 채 방치되어 버린 삼층석탑을 발굴조사하고  1929년 총독부의 도움을 받아  탑재의 대부분을 수습하고 실측하여 1931년 현재와 같은 상태로 복원을 마쳤다"

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 이 소식을 좀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현재 원원사 홈페이지를 망문해 보세요

          원원사 홈페이지 :    http://www.wonwonsa.com/bbs/board.php?board=kkknewsbuss

 

 

 

 

2015년  10월  29일   경주  원원사지

 

탑을 바라보며 왼쪽, 즉 석등의 왼쪽에 있는 탑이 서탑(西塔)입니다.  서탑은  상대적으로 많이 파손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이 탑을 파괴한 유학자(儒學者)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것은 이미 1993년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lvilizations)'에서 배운바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문명이 충돌하여 파괴하는 것이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니까요.  문명의 진보를 위해서 일어나는 필연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깨어진 문화재를 보면 '조금만 더 넓은 아량을 가졌더라면.... '이란 아쉬운 마음이 언제나 듭니다.

 

 

 

 

2015년  10월  29일   경주  원원사지

 

탑의 기단부에는 각 면에 세개씩 십이지신상(十二之神像)을 새겼습니다. 도상(圖像)의 마모가 심하여서 어느것이 무슨 상(像)인지 구분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특이한점 한가지는  십이지신상의 복장이 무복(武服-갑옷)이 아니라  우리의 평상복같은 문복(文服)을 입고 있습니다. 게다가  하나같이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고 있습니다.  어떠한 상징성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일일이 사진을 나열하기에는 복잡하지만 또 관심가는 것은  십이지신상의 얼굴이 모두 '오른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물론 도상(圖像)이 멸실(滅失)된 것은 제외하고 입니다. 이것은 동탑이나 서탑이나 모두 같습니다.

 

 

 

2013년  10월  10일   경주  능지탑

 

능지탑의 십이지신상은 무복(武服 -갑옷)을 입었습니다.

 

 

2015년  10월  29일   경주  원원사지

 

서탑의 십이지신상입니다.  왼쪽 끝에있는 우(牛)상만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2015년  10월  29일   경주  원원사지

 

동탑의 십이지신상입니다.  역시 왼쪽 끝에있는 우(牛)상만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탑의 일층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2015년  10월  29일   경주  원원사지

 

사천왕상도 면에 따라서는 많이 파괴된 곳도 있습니다. 이 사진은 서탑의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입니다.  여러 사천왕의 도상들 중에 변하지 않고 탑(塔)을 들고있는 것이 다문천왕입니다.  반대편 남방 증장천왕은 완전히 깨져 없어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2015년  10월  29일   경주  원원사지

 

상대적으로 조금 덜 깨어진 것이 동탑(東塔)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일층 옥개석의 한귀퉁이가 떨어져 탑아래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 최근의 일인것 같습니다.

동탑도 서탑과 같이 기단에는 십이지신상을  일층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습니다.  두 탑의 조각의 차이는 잠시 둘러보는 자리라 어떤지 알 수 가 없습니다.

 

 

2015년  10월  29일   경주  원원사지

 

그런데 동탑의 북방 다문천왕은  왼손에 탑(塔)을 들고있는 것이 서탑의 도상(圖像)과 다릅니다. 그러니 자세하게 비교해보면 다른 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고, 탑 복원의 비밀도 일부 벗겨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안내판에는

" 이 쌍탑은 8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되며  이후 9세기에 유행하는 같은 형식의 석탑 중 가장 빠른 예이다."

라고 합니다. 이 말은 탑신에 십이지신상과  사천왕상의 조각을 넣은 탑으로는 최초일지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탑신(塔身)에 조각을 넣기 시작한 것이 밀교(密敎)적 표현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2015년  10월  29일   경주  원원사지

 

두 탑의 사이에 석등(石燈)이 서 있습니다.  석등의 현재 위치가 제자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석등의 크기와, 새겨진 앙련(昻蓮)과 복련(伏蓮)의 수법등으로 보아 탑과 같이 건립된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현재 화사석(火舍石)이 없어져 뚜껑돌을  바로 올려 놓았습니다.  화사석 뚜껑의 파괴된 모습을 볼때, 상대적으로 약한 화사석의 운명을 짐작해 볼 수 있겠습니다.

 

 

 

 

2015년  10월  29일   경주  원원사지

 

석탑의 왼쪽 뒤쪽으로 조금 떨어져,  작은 집 한채가 숲속에 숨어있습니다.  주변에  방범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요즈음 지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건물이 사찰 창건당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유물입니다.   지금은 용왕각(龍王閣)이라 불리는 샘터입니다.

 

이 절의 창건주 명랑법사(明朗法師)는 중국에서 돌아올 때  용궁에 들러 용왕의 환대를 받고 돌아왔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명랑법사(明朗法師)는 신라여러곳의 우물과 관련된 전설을 남겼는데  당시에는 물(水)가 커다란 자원이고 힘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2015년  10월  29일   경주  원원사지

 

용왕각은 두칸으로 되어 있는데, 한쪽에는 용왕신을 모시고, 한쪽에는  양쪽 옆으로 선인(仙人)을 그리고  가운데 조복(朝服)을 입은 무인(武人)을 그렸는데  용(龍)을 타고 있는 모습입니다.  추측하건대  명랑법사(明朗法師)를 그린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래쪽 돌확에는 맑은 물이 고여있는데, 이 샘은  원원사 건립시부터 사용한 마르지 않은 샘으로 지금도 문밖에서도 물 솟는 소리가 들릴 정도라고 합니다. 속을 보면 파이프를 넣어서 아래 절에서 이 물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15년  10월  29일   경주  원원사지

 

탑을 떠나려는 데 아래 절집의 늙은 보살이  따듯한 볕을 등지고 추수해온 콩을 손질하고 있습니다.  가는 길에 멈춰 노보살과  그의 삶에 얽힌 오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이 아흔이 넘은 노보살은 기억력도 청청하게 젊은 시절 철도 공무원이었던 남편이야기를 한보따리 풀어 주었습니다. 아마도 저 아래 쓰여진 '방하착(放下着)'이란 글귀는 이 노보살의 삶에 딱 맞는 것 같습니다.

 

 

 

 

 

2015년  10월  29일   경주  원원사지

 

소나무 우거진 원원사(遠願寺)의 탑도  슬쩍  노보살의 인생역정을 귀기울여 듣는것 같았습니다.

 

 

 

 

 

PS.  원원사가 있는 모화마을은  울산 생활권입니다.  울산의 베드타운으로 많은 연립, 다세대, 원룸, 그리고 주말주택이 있습니다.

 

PS. 근처에 고기식당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먼길 간 사람이라면 울산의 회나 고래고기가 특미입니다.  장생포 고래로를 따라가면  장생포 고래문화관 근처에 이름났다는 고래고기 식당들이 있습니다.  

 

PS. 또  울산농수산물도매시장도  고래고기 맛있다는 집이 있고  상대적으로 여러가지를 즐길 수 있습니다.  주차장은 꽤 많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PS. 또 울산에 가시면 꼭 '대왕암 공원'을 들러보라고 권합니다.  울기등대로 볼만하고,  문무왕 해중용 전설의 또 한꼬투리인 대왕바위에 갈 수 있습니다.  옛 기록(동경잡지)에 따르면  울산의 대왕바위가 진짜 문무왕의 대왕바위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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