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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시는길
경천대란?
관광지명 : 경천대
주소 :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면 삼덕리 산12-3번지
면적 : 209,000㎡(63,223평)
영남의 상징이자 젖줄인 낙동강이 감싸 안은 “삼백의 고장” 상주는 성읍국가시대부터 사벌국, 고령가야국의 부족국가가 번성하였으며, 신라시대에는 전국 9주, 고려시대에는 전국 8목중 하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관찰사가 상주목사를 겸하는등 웅주거목의 고도로 언제나 역사의 중심에 자리해 왔다. 또한 누란의 위급한 국난을 극복할 때에도 충과 효의 올곧은 선비정신을 앞세운 수많은 충신과 지사가 있어 자랑스러운 역사의 맥을 이어왔다 낙동강변에 위치한 경천대는 태백산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 1,300여리 물길중 경관이 가장 아름답다는 “낙동강 제1경”의 칭송을 받아 온 곳으로 하늘이 만들었다 하여 일명 자천대(自天臺)로 불리는 경천대와 낙동강물을 마시고 하늘로 솟구치는 학을 떠올리게 하는 천주봉, 기암절벽과 굽이쳐 흐르는 강물을 감상하며 쉴 수 있는 울창한 노송숲과 전망대, 조선 인조15년(1637) 당대의 석학 우담 채득기 선생이 은거하며 학문을 닥던 무우정과 경천대비, 임란의 명장 정기룡장군의 용마전설과 말먹이통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명승지와 유적지를 만날 수 있다. 경천대 관광지내에는 전망대, 야영장,목교,출렁다리, MBC드라마 상도”세트장, 어린이 놀이시설, 수영장, 눈썰매장 및 식당, 매점 등이 갖추어져 있고, 소나무 숲속의 아담한 돌담길과 108기의 돌탑이 어루러진 산책로와 맨발체험장 및 황토길이 있으며,인근에는 “전 사벌왕릉”과 “전 고령 가야왕릉”, “화달리 3층석탑”, 임진왜란의 명장 정기룡장군의 유적지인 “충의사”, “도남서원”등 여러 문화유적지가 있으며, 상주활공장, “MBC드라마 상도”세트장(중동), 상주예술촌 등이 있어 가족과 함께 편안한 휴식과 관광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돌탑과 황토길) 곽광받고 있다
전망대
무우정 방향으로 내려 간다
경천대
낙동강 변 상주시 사벌면에 위치한 경천대는 태백산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 1, 300여리 물길중 경관이 가장 아름답다는 곳으로 낙동강 물을 마시고 하늘로 솟구치는 학을 떠올리게 하는 천주봉, 기암절벽과 굽이쳐 흐르는 강물을 감상하며 쉴 수 있는 울창한 노송숲과 전망대, 조선 인조15년(1637) 당대의 석학 우담 채득기(蔡得沂) 선생이 은거하며 학문을 닦던 무우정(舞雩:기우제 우 亭)과 경천대비(擎天臺碑), 임란의 명장 정기룡장군의 용마전설과 말 먹이통 등 명승지와 유적지를 만날 수 있다.
경천대 관광지내에는 전망대(옥주봉 정상, 163.5m), 야영장, 목교, 출렁다리, MBC드라마 상도”세트장, 어린이 놀이시설, 수영장, 눈썰매장 및 식당, 매점 등이 갖추어져 있고, 소나무 숲속의 아담한 돌담길과 108기의 돌탑이 어우러진 산책로와 맨발체험장 및 황톳길이 있으며, 인근에는 “전 사벌왕릉”과 “전 고령가야왕릉”, “화달리3층석탑”, 임진왜란의 명장 정기룡장군의 유적지인 “충의사”, “도남서원”등 여러 문화유적지가 있다.
*****************경천대와정기룡장군*********************************
경천대는 수려한 경관뿐만 아니라 임진왜란때의 명장 정기룡 장군이 젊었을 때 이곳에서
용마와 더불어 수련을 쌓았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용마는 경천대 아래, 물이 휘돌아 돌아가는 공간이 '용소'에서 나왔다고 전하는데 경천대에서 모래사장 건너편으로 뛰어노는 용마를 발견한 정기룡장군이 이를 잡아서 전쟁시에 유용하게 쓰겠다는 생각으로 잡을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허수아비를 백사장에 세워놓고 기다렸는데, 처음에는 말이 거들떠오 안 보다가 나중에는 차츰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나중에는 허수아비 곁에 와서 몸을 부벼대기까지 하자, 이때 허수아비로 분장한 정기룡 장군이 가면을 벗고 그 용마를 얻었다는 전설이 있다. 정기룡 장군은 이 용마와 함께 임진왜란 중 금산 싸움에서 단기필마로 혼자서 적을 무찌르고 조경장군을 구하기도 했다고 전하며, 경천대에는 그때 장군이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는 말 구유(말먹이통)가 남아있다.*******
천주봉
<채득기 선생이 세웠다는 경천대비, 대명천지 숭정일월이란 글자가 뚜렷하다>
채득기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봉림대군 등을 시봉하기 위해 1638년 겨울 심양으로 떠나면서 지은 ‘봉산곡’(일명 천대별곡)이란 가사에서 경천대의 절경을 노래했다.
“… 고운 모래 흰 바위가 굽이굽이 절경이로다
그중에 좋은 것이 무엇이 더 나으랴
기암이 물을 굽이치며 천백척 솟아올라
구름 사이로 우뚝 서서 높은 하늘 떠받치니
귀부(鬼斧)로 베었는가 화공의 솜씨런가
자천대란 네 이름이 과연 헛되게 얻은 게 아니로다 …”
채득기는 “문장이 아무리 훌륭한들 누가 이를 다 시로 써 낼 것이며, 화공이 신묘한들 어찌 다 붓으로 그릴 것인가”라며 경천대의 절경을 극찬했다.
경천대는 병자호란 후인 1628년(인조 6) 봉림대군이 중국에 볼모로 갈 때 주치의로 따라갔던 채득기(蔡得沂)가 터를 닦았는데 기암절벽과 강물, 소나무 숲이 절경을 이루는 곳으로 본래는 하늘이 스스로 만든 경치라고 해서 자천대(自天臺)라고 부르던 곳이었다. 그러나 채득기가 ‘대명천지(大明天地) 숭정일월(崇禎日月)’이란 글을 새긴 뒤 경천대로 바꿔 불렀다.
오마이뉴스에 백유선씨가 대명천지의 정확한 의미를 적었는데 그것은 조선이 명나라 소속이라는 뜻이다. 우암 송시열은 속리산 국립공원의 화양동 계곡에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이라고 남겼는데 숭정은 북경의 경산공원에서 1644년 자살한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이다. 간단히 말해서 조선의 하늘과 땅은 명나라 것이고 조선의 해와 달도 숭정 황제의 것이라는 의미다.
무우정
상도촬영세트장
출렁다리
경천교
산행
청룡사
상도촬영세트장
임상옥(林尙沃)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경약, 호는 가포이다.
그는 1779년 정조 3년에 평안북도 의주(지금의 신의주)에서 태어나 1855년 철종 6년에 죽은 조선 후기의 무역 상인이다.
사농공상이라 하여 상업을 가장 천시하던 시대에 태어나 상업으로 성공한 거상 임상옥.
그의 상업철학은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이다.
즉,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라는 뜻이다.
또, ‘장사는 돈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라는 상업철학을 가지고 조선 최고의 거상이 될 수 있었다.
임상옥의 이러한 상도정신은 현재에도 길이 존경과 흠모를 받고 있으며,
기업인의 윤리가 중요시 되는 요즘 사람들에게 진정한, 바람직한 기업인의 표상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임상옥은 일생동안 세 번의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였다.
그 첫번째는 1821년 변무사를 수행하여 청나라에 갔을 때이다.
당시 베이징 상인들은 임상옥이 상권을 독점해 가자 그를 약화시키기 위해 임상옥의 인삼을 사지 않기로 불매동맹을 맺었다. 이 때 임상옥은 모두들의 예상을 뒤엎고, 자신의 인삼을 불태워 위기를 넘긴다. 중국의 약은 임상옥이 가져온 조선의 인삼을 찐 홍삼이 들어가지 않으면 약효가 날 수 없었다. 그리고 임상옥의 홍삼은 최상품이 였고, 이조판서 박종경의 정치적 배경을 이용하여 조선 최초로 인삼무역권을 독점한 상태였기 때문에 임상옥 이외에는 그 누구도 조선의 인삼을 청나라와 교역할 수 없었다. 그걸 알고 있던 임상옥은 낮은 가격에는 인삼을 팔지 않고 불태워 버림으로서 조선 인삼은 더더욱 귀해져 품귀현상까지 빚어져 가격이 폭등하였고, 임상옥은 이때 인삼 원가의 수십 배에 달하는 막대한 차익을 올렸다. 임상옥의 이러한 과감한 행동에 청나라 상인들이 한 발 물러났고, 결국 임상옥은 청나라 상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죽을 각오를 해야만 위기를 물리칠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사건이 였다.
두 번째는 홍경래의 난 때이다.
홍경래가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같이 손을 잡자고 제안을 했지만, 그 때 임상옥은 거절했다.
노자는 인간에게는 솥의 세 다리처럼 권력, 명예, 재물욕. 이 세가지 욕심이 있는데 다 가지려고 하면 다리는 없어지고 솥이 쏟아진다고 경고했다. 임상옥은 세가지 욕망의 유한함을 깨달았고, 재물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임상옥의 선택이 옳았다. 홍경래의 난은 4개월 만에 진압되었다. 만약 임상옥이 홍경래와 손을 잡고 홍경래의 반란을 도와서 성공했을 수도 있지만, 실패했다면 지금까지 임상옥이 이루어 놓은 부는 하루 아침에 물거품처럼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가 계영배이다.
계영배는 7할 이상 술을 따르면 술이 없어지는 잔으로 조선 최고의 거부가 된 임상옥은 술로서 세월을 보내며 자신은 조선 최고의 갑부라고 자만하고 있었다. 이 때 임상옥은 이 술잔에 술을 따르려고 했지만 아무리 술을 부어도 채워지기는커녕 오히려 술이 없어지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자만을 자책하고, 가득참을 경계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어 정상의 시기에서 물러나 가객으로 여생을 보내며, 그가 평생 모은 재화로 굶주리는 백성과 수재민을 구제한다. 이 공으로 1832년(순조32년)에 곽산군수에 오르고, 1835년에 종3품 구성부사에까지 오른다. 그는 시가에도 능하여 <가포집>과 <적중일기>를 지었다:출처 :daum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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