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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 되지 않아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다고 추정됨. |
삼국시대(신라) |
신라경덕왕16년(757년)거제군은 아주, 송변, 명진 3속현이 있었는데, 이때 조라는 아주현에 속하였음. |
1459년(세조5년) |
거제에 7진을 둠(가배량, 영등포, 지세포 구조라, 옥포) 등 |
1592년(선조23년) |
임진왜란 발발, 옥포만에서 일본 수군 격퇴하자 일부일본군이 조라쪽으로 올라와 승판재에서 몰살함. |
1604년(선조37년) |
조라포(구조라)에서 조라(현 조라)로 진을 옮김. 조리포진은 현 당산(옥포종합복지관)과 보광사 부근에 10채의 부속건물이 건축됨. 성능은 없었으나 만호(무관 종9품), 군관, 진무, 지인, 사령 등이 있었음. |
1889년(고종26년) |
이운 10방에 속함(장승포,아주,옥포,조라, 해명,수월,양정) |
1895년(고종32년) |
통제영과 함께 조라진 폐지됨. |
1920년 |
조라마을에 서당이 생김. |
1919년 3월4일 |
‘대한독립만세’라는 붉은 깃발을 들고 하아시장(아주장터)에서 조선독립만세 외침. |
1950년 7월 |
6.25전쟁으로 진동면민이 조라에 피난하여 살았음. |
1982년 |
조라마을 대동회에서 이순신장군 성역화에 86,000평을 기증함. |
1989년1월1일 |
장승포시 설치에 따라 옥포1동과 옥2동을 둠(옥포2동은 조라, 국산, 팔랑포, 덕포) |
2. 조라의 역사
조라는 어디에 있을까? 너무 평범한 질문이지만 조라의 지리적 위치는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군사 요충지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에서 조라의 지리적 위치가 갖는 의미는 크다 할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조라는 어떤 중요한 지역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예전부터 거제의 중심지로 알려진 이곳은 사등성과 고정부곡( 고현성), 거제면 등으로 나누어졌다. 또한 조선시대 접어들면서 6진 (조라, 옥포, 영등, 가배, 지세포, 장목)을 중심으로 군사적 중요성이 커지게 되는데, 특히 임진왜란 전후로 옥포진과 조라, 그리고 영등포진이군사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빈번한 왜구의 침범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과 가까운 조라와 구조라 지역은 항시 방어 태세를 유지하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 옛 조라는 옥포만과 인접하여 교통의 요충지였는데, 조선시대 때 조라, 옥포, 지세포, 구조라로 이어지는 해상로는 많은 무역상들이 거점지로 삼았던 곳이다. 특히 조선시대 말에는 대마도 도주들이 조라를 거쳐 가배까지 무역행위를 했음이 『대마도종가문서』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다시 말해 조라는 풍부한 수자원과 넓은 농토가 있는 곳은 아니지만 농작물까지 수확되었고, 연평균 1,804mm의 강우량은 벼농사 짓기에도 적합하여 조선시대이후로 무역 및 군사적 요충지로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좋은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었다 하겠다. 한편으로 지리적 특성상 이전부터 육상교통보다 해상교통이 더욱 발달한 곳이며, 특히 옥포. 장승포와 같은 생활권으로 인하여 상업적 도시로 크게 변하고 있다. 조선시대이후 중심이 거제읍내로 이동하면서 퇴락하는 듯 하던 조라는, 일제시대 이운면 아양리로 행정변경이 이루어지면서 중심지로 발돋움하여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당시 발행된 『통영군안내』에 보면, “조라는 옥포만과 인접하여 물류이동과 장승포항을 이어주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라고 적혀 있다. 지금은 옥포 1.2동으로 나누어져 도시화 되었지만 바다와 인접한 특성에 맞게 어업이 여전히 생업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상업 등으로 그 생활 기반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또 조라의 주택구조는 옛 모습과 달리 큰 변화를 겪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조라마을의 지명
1)조라(助羅): 옥개의 동편에 라호라는 호수가 형성되어 옥포진의 군선이나 어선들의 풍랑을 피하는 항구의 역할을 하였으니 벌릴 라(羅)와 도울 조(助)의 뜻이다. 옥개(옥포)의 동편, 본래 라호(羅湖)라 하였는데 마을 가운데 큰 호수가 있었다. 1604년(선조 37) 구조라진을 옮겨왔다가 1651(효종2년)신묘에 다시 돌아갔는데 조라관계골이 있고 신조라 또는 조라포라 하였다.
2)당산(堂山): 승판재에서 줄기를 뻗어 내려온 동산으로 조리마을의 형상인 갈매기 형태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산이며 임진왜란 때부터 관계 관사 옆의 야산으로 4~500년이 넘는 소나무 50여 그루가 방풍림으로 둘러쳐 있고 가운데는 잔디 및 흙 마당으로 군사훈련과 작전을 연습하던 곳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태풍과 화재 등으로 노송들은 없어지고 현재 옥포복지회간 건립으로 유명무실해 졌으며 100년 송 4그루만 남아 있다.
3) 조라포 관계골: 1604년(선조37) 일운면 구조라진을 조라포로 옮겼다가 1651(효종2년)에 되돌아갔는데 그때 조라진의 관아가 있었던 곳이다.
4)신촌:임진왜란 이후 관계골재를 넘어 북쪽 들녘의 마을이 형성되는데 라호 호수 쪽에서는 북쪽변의 옥포, 조라, 국산 3개 마을 중 조라마을의 새로운 거주지 중 제일 나중에 생긴 마을이다.
4)승판재: 승판재는 임진왜란 당시 왜구를 물리쳤다고 하여 지금까지 불러지고 있다. 그 당시 옥포초등학가지 내항으로 되어 있었는데, 왜구들이 옥포만으로 들어와서 내항에 정박하고 있던 함선들과 접전을 하였다. 그때 조선수군은 일부 조라마을 쪽으로 도망해 온 5만의 왜구들과 승판재에서 싸워 1605년(선조 38년) 임금으로부터 승판재라는 승전기념재명을 하사하였다.
4. 조라포진(助羅浦鎭)
조라포진은 두 번이나 옮겨져 완전한 건물로 자리 잡게 된 시기는 조선후기로 여겨진다. 초기에는 임진왜란의 방어를 위한 목적으로 조라에 터를 세웠지만, 1604년 다시 돌아오면서 본청과 부속건물들이 건축되었다.
당시 조라포진에는 객사(客舍),아사(衙舍),내아(內我),동헌(東軒),사창(社倉),이청(吏廳),화약고(火藥庫), 교청(校廳), 군관청(軍官廳), 포수청(砲手廳), 화포청(火砲廳), 환곡고(還穀庫), 군기고(軍器庫),선소(船所)등의 건물이 있었다.
객사는 객관이라고도 하는데, 1279년 8월부터 지었다고 하나, 사신이 묵은 것은 고려 초부터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행해 예를 올렸으며, 외국 사신이나 중앙에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때문에 관찰사가 일을 보는 동헌보다 격이 높았으며, 관리는 이곳에 머물면서 교지를 전하기도 하였다.
조라포진 지도에 표시된 객사의 위치를 보면 제일 높은 곳에 표시해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동헌보다 객사가 비중이 높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동헌은 현감(縣監)∙수사(水使) ∙ 병사(兵使)∙감사(監司)가 주재하는 관청의 본 건물로, 수령이 사무를 집행하던 건물의 일곽, 즉 대청을 이르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조라포진의 만호가 직접 업무를 보았다.
그 외 내아(內衙)는 동헌의 암채를 말하고, ,아사(衙舍)는 동헌 건물을 말한다. 사창(社倉)은 조선시대 각 지방의 사(社)(행정단위로 현재의 면)에 두었던 곡물대여 기관이고, 이청(吏廳) 관리들이 업무를 보는 곳이다. 나머지 화약고, 군관청, 포수청, 교청, 화포청, 군기고 등은 별도의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선소는 지금의 조선소이다. 선소(船所)는 전선과 병선을 배치해 놓았고, 각종 선박을 건조, 수리하기도 했다 한다.
1898년 거제읍지에 보면, 거제부(고현) 동쪽 30리에 있으니 성은 없다. 옛날에는 거제부의 동족 4십리에 성이 있었으니 둘레가 1천7백9십 척 이었고, 높이가 13척 이었다. 이 내용은 구조라진을 보고 말하는 것이다. 만호는 종4품이니, 군관이 18명이요 지인(知印)이 7명이며, 진무(鎭撫)가 10명이요 사령(使令)이 10명이다. 전선에는 중사, 우초관, 도훈도가 각각 1명씩이요 기패관이 5명이며 좌우포도가 2명이용 사부가 18명이며 타요정수가 3명이요 화포수가 10명이며 포수가 24명이요 능수군이 220명이다. 병선에 선장1명, 타공1명, 사부10명, 포수14명, 능로군14명이다. 1사후선에 타공 1명 능로군 4명이용, 2사후선에 타공 1명 능로군이 4명이다.
1905년 4월7일 조라포진의 폐지할 대 진영의 건축물을 보면,
객사 3칸 문 3칸, 아사 2칸 3칸, 내아 3칸, 군사청 4칸 문 1칸, 이청 6칸 문 1칸, 포수청 3칸, 화포청 2칸, 환곡고 2칸, 군기고 2칸, 화약고 1칸, 총 청사 40칸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거제 지역 진(鎭), 보(保)들 중에서 옥포진과 영등포진 다음으로 큰 규모를 자랑하였다. 현재 조라마을 당산 아래 동네 전체는 조라포진의 관사 및 부속건물들이 들어섰던 곳이다. 이들 관사는 단순히 조라포진의 군사적 업무뿐만 아니라 배석들의 대소사(大小事)나 구휼(救恤)활동까지 펼쳤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동사무소 같은 역할도 함께했다.
고종 때 만들어진 조라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