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회 金釵落地形局을 찾아서 (경북 김천 2012년 6월 10일)
오늘은 김천 구성면 延城府院君 李末丁 墓와 아름다운 芳草亭. 그리고 개령면 동부리 성황산(城隍山)
으로도 불리며 지역민들로부터 神山으로 받들던 감문산 줄기의 낙동 대감 낙파(落波) 류후조(柳厚祚) 선생의
墓所가 있는 관학산(冠鶴山) 명당를 찾아 9시 길을 떠났다.
경부 고속도로 김천휴게소 커피 한잔. 잠시 후 나들목을 벗어난 답산차는 김천의 최 동남쪽에 있느 구성면
上院里 延城府院君 유택을 향해 황학산 뻗어내린 골짜기를 따르니 어느덧 감천과 하원천이 합수되는 구성면
안내판이 우리를 반긴다.
(멀리 黃嶽山이 보이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길지)
감천과 하원천이 구비 돌아 만나는 산머리에 자리하여 멀리서 보면 연꽃이 물 위에 떠있는 형세라는 연화부
수형(蓮花浮水形)의 吉地로 전하며, 대대로 연안이씨(延安李氏) 부사공파(府使公派) 정양공(靖襄公) 후손들
이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는 유서 깊은 양지 마을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그림자가 풍기는 아름다운 芳草亭)
떠나간 아내를 기리며 자신의 호를 따 건립했다는 아름다운 芳草亭의 샛길을 따라 왼편 조산골로 접어들면
延城府院君의 위패를 모신 재실 영모재(永慕齋)가 오랜 세월 속에 아픔을 가득 안은체 쇠락되어가는 대추나
무 기둥만이 아쉬움을 보여준다.
(재실 영모재(永慕齋)
영모재(永慕齋)는 연안 이씨 入鄕祖 이말정(李末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齋舍이다.
3칸 규모의 삼형 대문을 들어서면 齋舍가 남쪽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기와집
이다.
평면으로 보면, 대청 2칸을 어간으로 하여 좌우에 온돌방 1칸을 설치한 중당협실형이다.
전면에 반 칸 규모의 툇간을 설치하였고, 양측 온돌방 전면의 툇간은 하부의 아궁이 때문에 대청보다 조금
높게 설치되어 주변의 산세와 잘 어울리는 지붕형태의 곡선이 아름답다.
(대추나무 기둥의 永慕齋)
永慕齋의 오른쪽 담장을 따라 돌면 수백 년에 걸쳐 닦힌 가파른 오솔길을 오르니 연안이씨 入鄕祖가 되시는
延城 府院君 李末丁 墓가 學文의 기초와 시작을 의미하는 貴砂 一字文星의 案山을 바라보고 있다.
위로는 長男 直講公 이숙황(李淑璜)을 비롯한 後孫들의 墓가 조성되었고, 그 아래 逆葬 형태로 府院君 配位인
谷山韓氏의 墓가 있다.
(매봉산 조산 골 “금채낙지처(金釵落地處)"
上院里는 삼악산 지맥 매봉산을 베개로 삼아 새들(新野)과 감천 너머 송림산줄기를 바라보며 東向으로 앉아
있는 매봉산 조산골은 예부터 “금비녀가 떨어진 형국”이라 하여 금채낙지처(金釵落地處)로 불리며 조선 8대
명당으로 알려져 왔다.
<연성부원군 묘소>
府院君의 墓所는 응봉산을 背山으로 하여 靑龍과 白虎가 감싸주는 기운찬 龍脈의 끝자락에 坐向은 辛坐乙向
東向으로 甘泉과 그 너머로 案山인 一字文星이 받쳐주고 있어 전형적인 명당의 조건을 갖춘 아름다운 곳이다.
<谷山韓氏 할머니 墓所>
府院君 李末丁은 延安李氏로 장령(掌令)과 보주지사(甫州知事)를 역임한 증(贈) 병조판서 이백겸(李伯謙)과
온양방씨 사이에 1395년(태조4) 서울에서 태어났다.
1426년(세종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이래 출중한 학문과 높은 덕이 널리 알려져 종5품의 충청도 도사
(都事)와 판관(判官), 종3품의 예빈시소윤(禮賓侍少尹)을 역임하다 이곳으로 낙향해 학문에 전념하다가
1461년(세조7) 67세를 일기로 졸했다.
(위쪽으로 後孫들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墓 터 이야기)
1446년(세종28) 谷山韓氏가 졸하자 마을을 지나가던 한 스님이 터를 정해주며 땅속에서 석함(石函)이
나오더라도 절대 열지 말라고 당부했다는 것.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인부가 석함을 열자 벌 두 마리가 날아 나왔는데 이에 스님이 “이 터에서의 發福이
3년 후로 미루어지겠지만 분명 후손 중에 큰 인물이 나올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하는데, 그로부터 3년
후부터 다섯 아들이 차례로 과거에 급제하며 후손들이 번성했다고 한다.
府院君과 谷山韓氏와의 사이에 5남 1녀를 두었는데 5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에 진출해 五子岩이란
명성을 얻었다.
장남 숙황(淑璜)은 성균관 직강(直講), 차남 숙형(淑珩)은 감찰(監察), 삼남 숙규(淑珪)는 현령(縣令),
사남 정양공 숙기(淑琦)는 형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역임하며 불천위(不遷位) 사당에 배향되었고, 오남 文狀公
숙함은 이조참판과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다.
결국, 부원군은 자제들을 훌륭히 훈육하고, 가문을 크게 번성시켜 후손 중에서 8명의 판서(判書)와 12명의
목사(牧使)를 배출하며 이 고장을 대표하는 명문가의 반열에 오르도록 했다.
(案山과 朝山)
(전하는 이야기)
李末丁의 현손 이호민(李好珉)은 좌찬성을 지내고 부원군으로 봉군된 인물로, 임진왜란 때 청원사(請援使)로
중국에 가서 이여송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때 이여송이, 압록강을 건널 다리를 조선의 관목(棺木)으로
만들라고 요구하였다. 즉, 무덤 속의 관을 꺼내 그 나무로 다리를 놓으라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에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나서 중국을 넘보는 것을 막기 위해 명당의 혈(血)을 끊어 놓으려는 심산에서였다고 한다.
나라가 왜란에 처해 있는 형편이라 조정에서는 할 수 없이 굴총대감(掘冢大監)을 임명하고, 전국의 묘를 파서
얻은 관목으로 압록강 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이때 응봉산 延安李氏의 묘는 그 화를 면했는데, 비록 금채락처
(金釵落處)의 명당이지만 逆葬 탓에 명당에 들지 못한다 하여 墓가 파헤쳐지는 수난을 면했다 했으니 積德의
결과가 아닐까.
금비녀, 낚시대, 사두혈 등등, 힘차게 감아 돌아 자리 잡은 응봉산 부원군 유택을 이런 저런 잣대로 구경을
마치고, 내려서니 벌써 허기진 배를 채울 시간이다.
누구였을까. 지례 흑돼지 맛이 좋을거라고, 다들 가자고 합창이다.
(지례 흑돼지 골 `백산가든`에서 진짜 흑돼지를 돼지처럼 먹었으니. 총무님 감사하오이다.)
(우리 총무님 感謝 ! .........)
*오늘의 두 번째 답산지 구성면에서 북서쪽 김천 끝자락 冠鶴山 頂上 낙동 대감 낙파 류정승(柳厚祚) 墓를 향해 부른
배를 제치고 出發이다.
<김천의 발생지 감문국>
개령면 서부리와 동부리, 양천리를 품고 있는 감문산은 성황산(城隍山)으로도 불리며, 지역민들로부터 神山
으로 알려져 왔다.
감문산에 묘소를 들이지 않는 것이 오랜 세월 불문율처럼 인식됐는데 이를 어기고 암장(暗葬)하였다가 지역
민의 식수원인 동부리 마을 앞 쌍샘이 핏빛으로 변함으로 인해 번번이 발각되어 혹독한 망신을 당하였다는
일화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墓域으로 오르는 곳, 전봇대 좌측으로 오른다.)
風水地理로 볼 때 감문산은 虎形 즉 호랑이 상으로 일컬어지는데 많은 감문산의 봉우리 중 虎頭山이 범의
머리에 해당하고 머리가 향하는 감천 맞은편의 아포 대신리 한 골에 끝없는 凶事가 일자 직지사를 창건하기
위해 선산과 김천을 내왕하던 阿道和尙이 호랑이의 기세를 누르기 위해 심장에 해당하는 곳에 절을 짓고
호랑이와 상극인 닭을 기르며 절 이름도 계림사(鷄林寺)라 했다는 이야기가 그래서인지 더욱 신비롭다.
(文憲公 左議政洛坡柳先生之墓)
많은 전설을 품고 있는 명산 감문산이 빗겨 흘러 그 정기가 모인 봉우리가 곧 관학산(冠鶴山)으로 조선 후기의
명재상 낙동 대감 낙파(落波) 류후조(柳厚祚) 선생의 묘소가 亥坐巳向으로 坐向을 잡고 壙中이 깊어 밧줄을
이용하여 棺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산의 형세가 학이 관을 쓰고 있는 것 같다 하여 이름 붙여진 冠鶴山은 역마고개를 거쳐 유동산까지 이어지고
감천을 넘어 아포 제석봉과 금오산을 마주하는 명당으로 알려져 왔다.
(入首到頭에 앉아 계시는 분은 生氣를?)
冠鶴山이 갖는 명성은 예부터 개령지방 토호로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양천허씨와 단양우씨 집안에서 저택을
앞다투어 이 산자락에 지었으며 고종 때 영남인으로서는 실로 2백 년 만에 정승의 반열에 오른 상주인 유후조
선생이 고향이 아닌 이곳 개령땅을 幽宅으로 정한 사실만으로도 冠鶴山의 위상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낙동대감 낙파 柳 정승 묘를 看穴하시는 회원님들>
柳厚祚는 풍산류씨로 선조 때의 명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8대손으로 1798(정조 22년)에 상주에서
태어나 부호군, 이조참판, 공조판서를 두루 거쳤다.
우의정으로 임명된 그해에 柳厚祚 선생은 고종의 가례(嘉禮)를 알리는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를 다녀왔으며
그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가 1872년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로 퇴임하기까지 淸白吏로서 명망을 얻었다.
퇴임 후 고향인 상주 중동 우물리로 은거했을 때 전국의 문사들과 대소 관리들이 문안 인사차 마을을 찾아들자
방문객들의 불편을 줄일 요량으로 낙동강 가의 나루터로 집을 옮겨 살 때의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어때 유!. 碑石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어느 날 과거시험을 보러 가던 한 젊은 선비가 강가에 소일하던 한 노인을 불러 등에 업혀 낙동강을 건넌 후
柳 정승댁을 일러달라고 했더니 “내가 그 老人이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후 낙동 대감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하니 공의 소탈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동안 冠鶴山에 있던 개령향교 터를 탐낸 유정승이 자신의 묘소를 들이려고 일부러 향교를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떠돌기도 했는데 1989년 대성전 중수 때 발견된 "개령향교신축중수이건기문"
에 1866년에 향교를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선생의 졸(卒)한 연도인 1875년과는 상당한
연차가 났음이 밝혀져 애꿎은 누명을 벗게 되었다고 전한다.
<柳 정승 墓가 터를 잡고 있는 冠鶴山>
宋 나라 性理學의 대가 주자(朱子)의 제자이면서도 거꾸로 스승인 주자에게 풍수를 가르친 이가 蔡元定이다.
蔡元定이 쓴 풍수서 ‘발미론’은 조선조 사대부들이 금과옥조로 여긴 책인데, 이 책에 “음지호, 불여심지호
(陰地好, 不如心地好)”란 말이 있다. “무덤(陰地)이 제아무리 좋아도 마음(心地) 좋은 것만 같지 못하다”는
뜻이다.
명문가의 후손으로서 일생을 청렴하게 살아온 柳 정승과 그 후손이 사익을 위해 유학의 지방본산인 鄕校를
사사로이 이전했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오늘 답산도 끝을 맺는다.
壬辰 六月 淸虛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