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여울물 소리」중에서
Posted by 황석영 on 2013-01-03 00:00:00 in 2012 전성태, 문장배달, 문학집배원 | 0 댓글
황석영,「여울물 소리」중에서
신통이 녀석 언젠가부터 우리네와 좀처럼 안 어울린다네. 하는 것이 그의 첫마디였다. 박돌은 이신통을 십 년 전에 처음 만났다고 그랬다. 천안 장터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울고 웃고 성나고 기쁘게 하기를 하늘이 여름날의 바람과 구름을 희롱하는 듯하였다. 옛말에 이야기 주머니(說囊)라고 하더니 바로 신통이 그러했다. 그는 이야기를 하다가 가장 간절한 대목에 이르러 갑자기 그치니 사람들은 뒷얘기가 너무 궁금하여 다투어 돈을 그의 발아래 내던졌다. 이신통은 당시에 한양 패거리와 헤어진 직후여서 단출한 패거리를 이끌고 다니던 박돌이 막걸리 잔이나 사면서 동무가 되었다. 신통은 다시 때와 장소를 구분하여 이를테면 장터 어구의 버드나무 아래라든가 다리 앞에라든가에서 다른 이야기로 판을 벌였다. 새 손님이 많았지만 앞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도 지나가다 다시 모여들기 마련이었다.
박돌이 자기네 패와 동행하기를 권하여 함께 다니다가 이신통과 헤어졌는데 그들은 다시 도방 대처에서 만나기를 거듭했고 나중에는 신통이가 광대물주를 하게 되었다. 그들이 전주에서 엄마의 색주가에 들렀을 때에 이신통은 광대물주를 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그는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고 했다. 내가 글쎄 그 일이 뭐냐고 물었을 때, 박독은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천지도라구 들어봤나? 신통이가 그 패거리에 들게 되었거든.
저 머신가, 나라에서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하는 미신인데 그것이……
그러면 예전 천주학 같은 거 말예요?
이전에는 모두 죽였다만 시방 천주학은 양귀들 때문에 묵인된 셈이고, 천지도는 처음 시작했다는 교주를 국법으로 처단을 했다 그 말여.
박돌이 이신통에 대한 불길한 소식을 남기고 떠난 뒤에 나는 뜸을 들였다가 어느 날 영업이 끝나고 엄마와 나란히 누워서 잠을 청하던 때에 슬며시 묻게 되었다.
엄마, 천지도가 뭔지 알우?
자다가 봉창 두들긴다더니, 뜬금없이 천지도는 왜…… 한번 믿어볼라구?
관에서 금한다며?
양반 것들이 저희 자리 내노랄까 봐 노심초사하는 게지. 천지도에서 사람은 누구나 하늘이다 그런다는구나. 그 말본새 하난 마음에 들더만. 나두 주문 외우는 소린 여러 번 들었다. 우리 집에 묵어가는 길손들 중에 겉으로 말은 안 해두 내가 대강 눈치를 채는데 하나둘이 아녀. 천지도인들 점잖은 사람들이더라. 소문에 듣자 허니 촌에는 동네마다 모여서 기도하구 그런다대.
하면 엄마는 왜 안 믿었어?
봄꽃두 먼저 피면 반갑고 이쁘기는 하더라만 그것이 천기를 보는 거여. 꽃샘바람 불고 눈보라 치면 속절없이 지는 법이니라. 세상이 만화방창할 제 더불어 피어나야 절기를 누리는 거란다.
그러면 어여쁜 본색을 어찌 드러낼 수 있남?
글쎄, 남이 한다고 성급히 따라 할 것이 아니다. 작은 복을 제 복이려니 하고 살아야지, 언제 하늘 복까지 바라겠냐.
나는 어쩐지 엄마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산전수전 다 겪어온 우리 모녀의 지혜이기도 하고, 열없는 쓸쓸함이기도 하리라.
◆ 작가_ 황석영 – 1962년 《사상계》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하여 등단 50년을 맞았다. 소설집『객지』,『삼포 가는 길』,『몰개월의 새』, 장편소설『장길산』,『무기의 그늘』,『오래된 정원』,『손님』,『심청, 연꽃의 길』,『바리데기』,『개밥바라기별』,『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등이 있다.
◆ 낭독_ 빈혜경 – 배우. 연극 <블랙박스>, <큰아들> 등에 출연.
변진완 – 배우. 연극 <블랙박스>, 뮤지컬 <천상시계> 등에 출연.
◆ 출전_ 『여울물 소리』(자음과모음)
◆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 애니메이션_ 박지영
◆ 프로듀서- 김태형
올해 ‘광화문 글판’에는 ‘황새는 날아서 알은 뛰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는 시구가 걸렸더군요. 연말에 읽은『여울물 소리』의 감상을 새해에 전하니 느낌이 새로워요. 작가의 등단 50주년 소식과 함께 찾아온 소설이지요. 한국근대문학 100년 잔치가 엊그제였는데, 반세기를 뜨거운 기관차처럼 달려온 작가가 독자들에게 내놓은 작품입니다. 정작 작가 자신은 덤덤하지 않을까 짐작해봅니다. 늘 질주해온 작가라는 이미지가 있고, 마라토너가 30Km를 돌파했다고 잠시 멈춰서 퍼포먼스를 벌이는 일은 없으니까요. 말이 50년이지 그 고독한 시간이 어땠을까, 소포를 뜯어놓고 한동안 묵묵했습니다. 내가 알기로 황석영의 작품 목록에서 가장 심심한 제목인데, 이야기꾼의 운명에 작가의 생애가 겹치고, ‘여울물 소리는 속삭이고 이야기하며 울다 흐느끼다 또는 외치고 깔깔대고 자지러졌다가 다시 어디선가 나직하게 노래하면서 흐르고 또 흘러갔다’와 같은 문장에 이르러 문학의 자리가 선연히 암시되었을 때 비로소 멋들어진 제목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원로로서 신진들을 크게 독려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문학집배원 전성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