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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이수관목사
다니엘서를 얘기할 때 우리는 흔히 ‘이 다니엘서가 예언서이지만 묵시적 특성이 강한 책이다’ 라고들 얘기합니다. 아마 묵시란 단어를 처음 들어보는 분들도 있을텐데 묵시록이란 영어로 Apocalyptic이라고 하는데, 성경에서 예언서들이 발달된 이후에 나왔다고 해서, 또 내용적으로도 예언된 내용이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다룬다고 해서 ‘예언의 후예’라고 불립니다. 묵시록들은 따라서 종말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책입니다. 즉 이 세상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그 역사의 끝에 있을 사건들을 다루고 있고, 여러분이 잘 아는 요한 계시록이 바로 가장 대표적인 묵시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묵시록은 보통 난해한 상징들이 많아서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내용은 결국 이 세상이 팽배해 있는 악이 징벌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며, 그 결과로 악인은 심판을 받고 의인은 그 의로움을 인정받게 되는 날이 곧 온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고, 그러니 고난가운데 사는 의인들은 희망을 잃지 말고 굳굳히 견디어 내라는 권고의 메세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다니엘서 6장은 그런 어려운 묵시적 내용을 다니엘의 경험으로 쉽게 표현한 것으로서 악이 징벌되고 결국 하나님은 의인을 구해내신다 하는 묵시의 메세지는 가지고 있으면서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그런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아마도 다니엘은 내가 경험한 이런 일이 앞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하는 그런 의미로 자신의 본격적인 묵시가 시작되는 7장 바로 전에 넣어두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 6장에는 두 부류의 사람의 얘기가 나옵니다. 한 부류는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자기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는 다니엘의 모습이고,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은 Typical한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두 부류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는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얘기를 이렇게 보면 다니엘이 처한 상황이 오늘날 직장생활을 하는 우리 현대인들과 별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상황을 이렇게 보면 좋겠습니다. 크리스천 샐러리맨으로서 이렇게 저렇게 노력해서 부사장까지 올라간 다니엘, 그런데 이 사람이 너무 일도 잘하고 청렴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모함을 합니다. 그런 모함에도 불구하고 해고 안 당하고 잘 다닐 수 있을 것인가? 뭐 이런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봐도 좋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크리스천으로서 직장인들이 세상의 직장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 성취보다는 업무(Calling)에 집중한다.
1절부터 4절까지 읽어보면서 다니엘의 모습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크리스천다운 직장인이 되는 첫번 째 가치관은 성취보다는 업무, 즉 그 직업에로의 Calling에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이때는 페르시아가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직후의 얘기인데 페르시아가 옛 바빌론을 정복한 후 그 지역을 다스리기 위하여 120구역으로 나누어 통치했다는 얘기는 헤로도투스의 역사책에도 나오는 얘기입니다. 어째튼 다리우스왕은 120구역으로 나누어 장관들이 다스리게 하고, 그 120명을 다시 세명이 다스리게 했는데 다니엘이 그 중에 한명이었는데 일을 아주 잘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시기의 대상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발견되는 세상 사람들과 다니엘이 가장 차이가 나는 것은 자기 직업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먼저 그는 다른 어떤 것 보다도 그 직업으로의 Calling, 즉 사명에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에게 망해서 끌려갈때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즉, 예레미야서 29장 4-7절 말씀을 보면 그곳에 끌려가서도 정착하고 열심히 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맨 마지막에 보면 그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라, 즉 그 사회에 정상적으로 공헌을 하면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따라서 다니엘은 비록 끌려와 있었지만 자기 업무에 힘썼습니다. 부정한 정부이지만, 그리고 이방의 나라이지만 자기가 열심히 하냐 안하냐에 따라, 선정을 베풀고 피정복민에게 도움을 주고 평화를 줄 방법이 있었을 텐데 바로 그것에, 즉 그 사회에 어떤 식으로든지 공헌하는데 사명을 걸고 일에 집중한 것입니다. 4절에 보면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그의 업무에 문제가 있는지를 찾아보려고 했는데 다니엘이 임무에 충실하여, 아무런 실책이나 허물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그가 청렴한 사람이어서 부정이 없었다는 뜻도 되지만 또 다른 의미로는 그가 자기 임무에 사명감을 가지고 Excellency를 추구하니까 실책이 없더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비해서 직업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먼저 직업을 선택할 때 생각하는 것이 이 직업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성취할 것인가 입니다. 즉, 이 직업을 통해서 내가 얼만큼 돈을 벌 수 있을 것인가? 또 내 소질과 적성이 개발되어 내 자아가 실현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또, 내가 일에 만족하고 내가 행복해 질 것인가? 전부 내 자신이 관점입니다. 이렇게 시작이 철저하게 나에게 집중되어 있으니 그 직업을 가진 후에도 행로가 어떻게 될 것인지 뻔합니다. 우선 가장 큰 관심은 높이 올라가는 거 아니면 보수를 많이 받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희생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대우, 조금이라도 더 나은 기회가 있다고 생각되면 옮깁니다. 그런데 이런 직업관을 가지고는 절대 어떤 직업에도 만족하지 못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에 어떤 직업이 나를 만족시켜줄 수 있겠습니까? 돈은 아무리 많이 받아도 더 많이 받고 싶을 것이고, 만족이란 있을 수가 없지요.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자기 일에 Excellency를 추구하지 않게되고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능력있는 직장인이 되기 힘들어 지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
따라서 우리는 직업을 대할 때 그 직업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얻겠나 하는 것 보다는 그 직업의 Calling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의사면 내가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고통받고 불안해 있는 사람에게 마음과 신체적으로 평화를 주는 것이 Calling 아니겠습니다. 그럼 거기에 집중을 하고 거기에 Excellency를 추구해야지요. 그런데 세상 사람이 그럽니까? 사람들을 내 연습 대상으로 생각하고, 때로는 들어오는 손님을 보면서 “어 돈 들어오네”한다면 절대로 좋은 의사가 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면 손님은 떠날 것이고 수입은 줄 것이고, 그러면 더 불만이 생기니까 더 열심히 안하고… 악순환이지요. 그에 반해서 만약에 어떤 사람이 Realtor인데 내 Calling에 집중하는 사람이라면 무엇보다도 고객이 정말 기뻐할 집을 그에게 구해주기 위해서 애를 쓸겁니다. 집을 구해 주는 것으로 끝내겠습니까? 다른 서비스도 하겠지요. 집을 처음 산 집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관리하는 법도 가르쳐주고 등등 그러면 소문을 타고 일감이 들어오겠지요. 그러면 신이 나서 더 열심히 하고… 순순환이지요. 내 만족에 집중하는가 사명에 집중하는가 에 이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 중에는 이런 성경적인 직업관을 가진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직업에 만족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제가 기억하기로 무슨 Survey에서 자기 직업에 불만하는 사람이 97% 였다고 하지요. 아마. 왜 그렇습니까? 이유가 있는 거예요. 자기 직업을 바라보는 눈이 잘못되어 있는 겁니다. 이렇게 결국 내직업에 만족하고 행복하려면 성취보다는 Calling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좋은 직장인이 되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세상 보스에게 충성을 다한다.
두번째 다니엘에게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자기 윗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그의 보스인 다리우스왕이 얼마나 다니엘을 좋아하고 아꼈는지 알 수 있습니다. 13절부터 20절까지 읽어보면 다니엘을 향한 왕의 총애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가 있지요. 자 그러면 어떻게 보스로부터 이런 사랑을 받을 수가 있었을까? 물론 일도 잘했겠지만, 그것보다는 다니엘이 왕에게 보여준 충성때문에 그렇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충성이라고 하면 꼭 업무적인 충성을 포함해서 그외에도 사적인 충성, 즉 다니엘이 자기의 보스를 지극 정성으로 섬겼기 때문일 겁니다.
그에 비해서,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 중에 하나가 뭔가하면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윗사람에게 충성하는 것을 안좋은 눈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어요. 이상해요. 아마 우리나라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만들어 진 경향이 아닌가 싶은데요. 우리는 윗사람에게 충성하는 사람을 보면 ‘아부한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뭔가 반항하는 사람들이 옳은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제 경우를 생각해 봐도 말이죠. 예를 들면, 저는 명절이 되면 가능하면 보스에게 과일이라도 하나 사들고 인사를 가거든요. 그것은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에게 당연한 것이거든요. 저는 그렇게 배웠구요. 그런데 그러고 나면 꼭 비꼬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유- 우리는 그렇게 아부하는게 습관이 않되서요.” 사람들이 예절 바른것과 아부를 구분을 못하더라구요. 또 이런 경우도 있었어요. 제가 회사생활할 때 이런 사람이 한분 있었어요. 이 사람은 윗사람이 얘기하면 탁탁 받아쳐요. 자기는 옳은 소리한다면서 반항을 해요. 저보다 2년 먼저 들어온 분인데 제가 회사를 들어가서 3년째가 되니까 같아졌어요. 그래서 옆자리에 앉게 됐어요. 그래서 이렇게 얘기를 해보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보스와 사이가 좋은 사람들을 속으로 은근히 부러워하더라구요. 그러면서도 반항적인 자기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더라구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가르칩니까? 아니예요. 베드로전서 2:18절에서 베드로는 자기 보스에게 전심을 다해 존중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2:13-14절에 왜 그래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권위구조는 하나님이 허락하셨고 또한 그 권위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권위를 위임하셨기 때문에 내 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고 성심껏 섬기라는 겁니다.
성경에서 큰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모두 자기 보스를 지극으로 섬겼고 그래서 보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사람들입니다. 보세요, 요셉이 그랬지요. 이 사람은 자기 윗사람하고는 끝내주는 관계를 유지한 사람입니다. 보디발과도 좋았지요. 감옥에 있을 때 간수장하고도 좋았지요. 또 정승이 되어서는 왕에게 총애를 받았잖아요. 느헤미야도 그랬습니다. 술맡은 관원장이었는데 나중에 예루살렘을 재건한다고 하니까 모든 노력을 다해서 도와주잖아요. 에스라도 그랬구요. 다니엘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그러니까 하나님께 쓰임을 받잖아요. 당연하지요. 직장생활을 하면서 자기 보스에게 사랑을 못받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앞에서 일하는 척하고 뒤에서 욕하고, 험담한다던지, 사사건건 내 생각이 더 옳다고 주장하고, 그러면서 버릇없이구는 사람은 절대로 그 직장에서 자기 자리를 확보하지 못하구요. 자기 위치도 분명하지 못한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크리스천들은 자기 보스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아부하라는 얘기가 아니고, 개인적으로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면서 섬기고, 그러면서 업무적으로는 최선을 다해 Support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 보스가 나 때문에 성공하는 사람이 되게 하겠다하는 마음으로 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한걸음 더 나가서 자기 밑에 있는 사람을 챙겨주는 사람이 되어야 겠지요.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다니엘은 자기 밑에 있는 사람을 잘 챙겨주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저도 직장 생활을 하면서 보니까요. 중간간부에게까지는 윗사람에게만 잘 보이면 그럭저럭 올라갑니다. 그런데 어느 단계가 지나면 그 다음부터는 밑에서 받쳐줘야지 올라가더라구요. 밑에 사람들에게 함부로 하고 그래서 아무도 따라주지 않고 협조하지 않는 사람은 아주 높은 위치로는 못가더라구요. 그래서 보스를 잘 섬겨서 사랑받고, 그러면서도 아랫사람을 잘 챙겨주고 보호해 주면서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서 높은 위치까지 올라가시고 그래서 때가 오면 하나님께 쓰임도 받으시는 그런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3 원칙을 타협하지 않는다.
자, 여기까지 얘기하면 우리한테는 이런 생각이 들지요. “아, 물론 좋은 상사에게 충성하는 것은 쉽지. 하지만 거지같은 상사에게 어떻게 충성하는가?” 즉, 상사에게 충성하는데 어디까지 복종하고 충성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지요. 아주 못된 상사에게도 순종하고 섬겨야 하는가? 하나님은 그렇다라고 얘기하십니다. 그리고 딱 한가지 권위에 순종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를 얘기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원칙과 어긋나는 것을 시킬때입니다. 다니엘도 바로 그점에서는 타협하지 않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앞으로 삼십 일 동안만 기도하지 않는 것이었거든요. 앞으로 영원히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어요. 우리같으면 그래 30일만 조용히 있자 그럴 수 있잖아요. 그런데 다니엘은 그렇게 타협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나의 의사와 반하게 나쁜 짓을 해야 할 것을 강요받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도록 한다든지, 가짜를 속여서 팔라고 한다든지, 문제가 있는 물건인 줄 알고 있는데 팔도록 강요한다던지 이런 것들은 거부해야 겠지요. 또 특별히 신앙에 반하는 일을 시킬 때, 예를 들면 술상무를 하게 한다던가, 아니면 업체사람을 좋지 않은 방법으로 접대하게 한다던지 할 때 거절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이런 경우에 거절할 때도 상사와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크리스천이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이런 경우일 수가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문제가 있는 물건을 팔라고 했을 때, 이런 문제로 상사와 싸우는 거예요. “당신들 어떻게 이렇게 비열할 수 가 있냐? 난 크리스천인데, 이까짓 직장 때려치우면 치웠지 이런 비열한 짓을 못하겠다” 이러니까 문제가 되지요. 그리고 이런식으로 하니까 크리스천이 미움을 받지요. 그런데 다니엘 보세요. 가서 따지고 그러지 안잖아요. “당신 말이야, 내가 당신을 얼마나 섬겼는데 나를 사자굴에 던지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안그러지요. 거절도 권위를 인정하면서 하고, 또 21절에 자기의 무죄가 들어난 후에도 얼마나 마지막까지 품위를 잃지 않고 자기 보스를 높혀줍니까?
그래서 우리가 만약 이런 품위를 지키다면, 그래서 나쁜 일을 시킬때 “죄송합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일만은 제 신앙 양심상 도저히 할 수 가 없습니다. 못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라고 하면 뭐라고 그러겠어요. 자기도 양심이 있는 사람인데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리고는 결국은 크리스천에게 매력을 느끼게 되겠지요. 그것이 로마서 12:17-20절까지의 말씀, 선으로 악을 이기고 그것으로 상대방을 부끄헙게 하는 것이겠지요. 얼마전에 제가 들은 얘기인데, 어떤 자매님이 병원에서 일을 하는데 어떤 분야에서 이분의 실력에 문제가 있는 것 같더래요. 그래서 이렇게 기록을 보니까 몇번 같은 문제가 반복된 기록이 있더래요. 그런데 이분이 말하기를 내가 이곳에서 계속 일을 하면 사람들의 문의 전화를 받는데, 이사람 잘 못한다고 하자니 자기가 일하는 보스에게 할 일이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잘한다고 말해 주자니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얘기였어요.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결국 보스에게 정중하게 이런 사실을 털어 놓고 그만 두겠다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의사분이 그러더래요. 불편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그러면서 내가 쓰는 재료와 Sub-Contractor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면서 그 업체를 바꾸어 보겠다고 얘기를 하더래요. 그래서 좋게 헤어졌는데 얼마 안되서 들어보니까 Job을 구했어요. Job을 구했다는 말을 듣고 제가 생각을 했어요. “그래 하나님이 그냥 버려 두실리가 없지. 신앙에 양심에 따라 살겠다는데”
이렇게 원칙과는 타협을 하지 않되 그럴 경우에도 보스에게는 순종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셔서 두가지를 다 만족시키시는 그런 크리스천이 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4. 시기와 질투를 제어한다.
네번째 우리가 살필 문제는 시기와 질투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물론 다니엘의 문제가 아니고 그의 경쟁자들의 문제입니다. 그 경쟁자들은 다니엘이 우수하게 일을 처리하고 또 왕에게 총애를 받으니까 제일 먼저 시기심을 느낍니다. 결국 이 시기심이 죄없는 사람을 무고하게 죽게 만들고 다행히 다니엘은 안죽었지만 결국 그들 자신에게 불행을 초래합니다. 직장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이 시기심은 암과 아주 비슷합니다. 시기심은 아무도 모르게 내 안에서 자랍니다. 어떨때는 저 자신도 잘 몰라요. 그리고 날 병들게 만듭니다. 그리고는 내 안에서 다른 마음의 병으로 전이가 됩니다. 낮은 자존감으로, 울화병으로, 외로움으로… 다른 많은 병들을 만들어 내는 아주 위험한 병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잠언 14:30절에서 시기는 뼈를 썩게 한다고 합니다.
특별히 시기심이 위험한 이유는 시기심은 결코 자기 자신만 병들고 마는 것이 아니고 나중에 가서 결국 공동체를 헤치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이 사람들도 그랬을 겁니다. 아마도 다른 정승들과 지방장관들이 모두 동시에 다니엘에게 시기심을 느끼지는 않았을 거예요. 기껏해서 그 중에 한명이었을 겁니다. 딱 다니엘하고 peer가 되는, 적수가 된다고나 할까요. 그 한명이 시기심을 느꼈을 겁니다. 그런데 제어하지 못는 시기심은 반드시 다른 사람을 전염시킵니다. 야, 저게 올라간다는데 가만히 둬서야 되겠냐? 이렇게 들쑤시니까 결국 하나되는 것을 파괴하고 파당을 만들고, 그러니까 마지막에는 무고와 묘략으로 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야고보서 3:14-15절에서 시기심은 악마적이다 라고 얘기하면서 사역한다면서 시기심이 있으면 그거 사역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당신의 만족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시기심은 누구나 있습니다. 우리는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예외없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제부터 얼마나 효율적으로 시기심을 제어하고 이기는 습관을 배우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불끈불끈 솟아 오르는 시기심을 이길 수 있는가? 적극적인 방법과 소극적인 방법이 있는데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은 초기에 얘기했던 것처럼 Calling에 집중하고 자기 업무에 Excellency를 추구하는 거예요. 이렇게 자기 업무에 집중하는 사람은 늘 부족하다고 느끼고 거기에 몰두하기 때문에 별로 시기심을 느끼지 않습니다. 가만보세요. 회사일도 그렇고 사역도 그래요. 시기심은 자기 일은 똑바로 안하면서 남과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가지기 쉽습니다.
두번째는 소극적인 방법 몇가지를 소개하면 시기심이 느껴질 때면 죄라고 인정하고 하나님께 고백하는 거예요.
그리고 시기심이 느껴지는 사람을 인정하고 칭찬해 주세요. 그러다보면 극복이 되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시기심이 느껴지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경쟁자로 여기고 자꾸 그 사람과 멀어질려고 하지말고 그 사람과 관계를 만들고 가까와 지려고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여러분 다윗과 요나단 아시지요? 둘은 절친한 사이로 유명하지요. 다윗이 중요한 인물로 떠올랐을때 사실은 왕이었던 사울보다는 왕자였던 요나단이 더 질투를 느껴야 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사울은 이미 60이 넘은 할아버지였거든요. 그런데 사울은 경쟁심을 느끼고 다윗을 멀리합니다. 결국 시기심은 극에 달하지요. 하지만 요나단은 어떻게 합니까? 다윗을 가까이 하고 관계를 만들잖아요. 그러니 그에게 시기심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요나단은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잖아요. 이렇게 직장일뿐만 아니라 사역에서도 시기심을 잘 극복하셔서 아름다운 크리스천으로 남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자 23절부터 있는 이 이야기의 결론은 다니엘은 살아나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뜻에 맞게 사는 다니엘을 구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야기는 다니엘의 경우는 이랬다라는 단순한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 얘기한데로 다니엘서는 묵시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책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세상가운데서 의롭게 사는 하나님의 백성을 절대로 보상없이 두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고 그 약속을 마지막에 어떻게 이행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묵시입니다.
우리가 세상가운데서 크리스천답게 살고, 직장 생활을 하고 그러다보면 때론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경우도 있고 어려운 경우를 당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때 하나님은 데살로니가후서 1:6-7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를 베푸십니다. 여러분을 괴롭히는 자들에게는 괴로움으로 갚아주시고, 괴로움을 받는 여러분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아주십니다” 이 말씀에 희망을 거시고 아름다운 크리스천의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