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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늘을 꿈꾸며 - 2011. 7 새땅의 사람들
머 리 글 과 공 동 체 이 야 기
2011-07
돈오돈수(頓悟頓修)냐? 돈오점수(頓悟漸修)냐? 는 이 질문 속에서의 갈등(葛藤)......
류성렬 전도사(신반포교회)
로마서 6:3∼7
빌립보서 3:12∼14
1.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우리 신반포 교회의 개포동 시대를 마감하는 뜻 깊은 날입니다. 이런 특별한 날, 특별한 예배에 마침 제 설교 순번이 돌아온 것이 한편으로는 영광스럽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송구스러운 심정임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예배의 특별한 의미를 살핀다면 나름대로 우리 교회의 한 시대를 정리하는 메시지를 전함이 마땅하겠으나 여러모로 보아 제가 감히 논할 주제가 아닌 탓에 개포동 시대의 의의와 분당 시대의 기대에 대해서는 앞으로 두 분 목사님의 메시지를 기대하는 것으로 하고, 오늘은 그저 평상적인 설교를 전해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오래 전에 다일 공동체 최 일도 목사님의 「밥 짓는 시인. 퍼 주는 사랑」이라는 책에서 최 목사님 부부의 첫 부부 싸움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전도사였던 최 일도 목사님은 한창 진리를 갈구하던 신학생이면서 동시에 시인을 꿈꾸는 문학청년이었고, 사모님은 이미 문단에 등단한 시인이자 전직 수녀로 역시 구도자적인 성향을 가진 천사표였습니다. 꿀맛 같은 신혼 3개월에 접어든 어느 새벽 이른 조반을 준비하러 부엌에 나가 불을 켠 사모님이 ‘으악’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자 아직 이불 속에 누워 있던 최일도 목사님은 비몽사몽간에 강도가 들어온 줄 알고 아내를 보호하고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전속력으로 부엌으로 돌진하다 그만 정수리가 문설주에 부딪히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바로 기절하고 말았답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최 목사님은 강도가 든 것이 아니라 부엌 바닥에 기어 다니는 한 마리 지렁이 때문에 사모님이 비명을 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허탈한 마음에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라 지렁이를 집어 들고서 “여보! 이 지렁이가 싫은 거요?”하고 물었답니다. 하지만 사모님이 별걸 다 묻는다는 식으로 대꾸를 하자, 이에 더 화가 난 최 목사님은 손바닥 위의 지렁이를 두 동강 내버리면서 “이 지렁이가 싫은 거요?”하고 열 댓 번은 더 물었다는 것입니다. 최 목사님의 계속되는 이 집요한 질문에 당시 국어 교사였던 사모님도 더 이상 화를 참기 힘들었는지 급기야 가방을 내동댕이치면서 “나 오늘 학교 안 가!”하고 외치더라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등교도 하지 않고 출근도 하지 않은 채 지렁이가 싫은 거냐, 아니면 좋은 거냐 하는 논쟁을 시작했는데 그 싸움이 꼬박 저녁때까지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루 세 끼를 꼬박 굶으면서 지렁이가 좋은 거냐,? 아니면 싫은 거냐 ? 하는 문제로 싸운 두 사람은 캄캄해질 무렵 너무 지친 나머지 말을 멈추고 한참을 침묵 속에 있었는데 그 때 문득 깨우침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는 다음과 같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여보, 지렁이가 싫은 겁니까?”
“아니오.”
“그러면 지렁이가 좋은 겁니까?”
“아니오.”
“싫은 것도 좋은 것도 아니라면 지렁이가 뭡니까?”
“지렁이는 지렁이일 뿐이지요.”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의 심장에 손을 올려놓고 다친 마음을 어루만져 주듯 서로를 쓰다듬으며 거짓말처럼 화해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최 목사님 부부의 이 웃지 못 할 논쟁은 사물을 대함에 있어 어떠한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작은 깨달음을 결론으로 남긴 작은 헤프닝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이와 같이 크고 작은 많은 논쟁들을 접하게 됩니다. 수학이나 과학처럼 명확한 정답이 나올 수 있는 문제의 경우 그 풀이법을 찾아내면 그만이지만, 철학이나 종교처럼 추상적이고 선험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논쟁들은 결론을 내리기가 참으로 어려울 뿐만 아니라 어느 한편의 손을 들어주기도 쉽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최 목사님 부부는 그런 면에서 매우 적절한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지혜로운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불교계의 오랜 논쟁 하나를 소개해 드림으로써 오늘 말씀의 화두를 던지고자 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성철 스님은 1981년 한국 선(禪) 사상의 일대 명저로 꼽히는 자신의 저서『선문정로(禪門正路)』에서 ‘깨닫는 그 자리에서 바로 부처가 된다’고 단언하며 소위 돈오돈수론(頓悟頓修論)을 주창했습니다. 복잡한 설명을 생략하고 쉽게 말하자면, 한꺼번에 단박 깨달음으로 더 이상 도를 닦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깨달음 자체가 궁극의 경지이기 때문에 만약 도를 더 닦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면 그것은 아직 덜 깨달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조계종이 고려시대의 선종 승려 지눌 때부터 지켜온 소위 돈오점수론(頓悟漸修論)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돈오점수란 단번에 깨쳤다고 하더라도 아직 과거의 잘못된 습관이 남아 있으므로 깨달음 후에도 꾸준히 도를 닦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대한 이 논쟁은 한국 불교사에 있어 가장 치열하고 화려한 논쟁이었고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 결론을 내리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주제들이었습니다.
돈오돈수가 맞느냐, 돈오점수가 맞느냐 하는 이 문제를 오늘 설교의 도입부에 이와 같이 화두로 던지는 이유는 사실 우리 기독교에도 이와 거의 흡사한 신앙적, 신학적 갈등이 존재하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제부터 오늘날의 교회와 신앙을 불교적인 용어인 돈오돈수, 돈오점수의 관점으로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2.
특별히 저는 오늘 초기 기독교의 구원론을 정립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사도 바울의 서로 다른 두 개의 본문을 통해 이 두 관점을 살펴보려 합니다.
첫째, 돈오돈수(頓悟頓修)적인 기독교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다시 한 번 설명 드리자면 성철 스님이 주장했던 돈오돈수란 깨달음 자체가 궁극적인 것이므로 깨달음을 얻은 자는 바로 부처가 되고 더 이상 도를 닦을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6장 3절은 이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을 때 우리의 옛 사람은 모두 죽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6절과 7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고 ‘거듭남’이라는 체험을 하게 되면 옛사람은 죽고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을 죽인 사람은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실로 기독교의 돈오돈수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위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라는 심플하면서도 강렬한 기독교의 명제가 바로 이러한 돈오돈수적인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오랜 세월 교회가 많은 풍파를 겪으면서도 끝내 지켜온 신앙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1517년 10월 31일 말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문에 95개조의 논제를 내걸고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든 것도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가 구원에 대한 이러한 분명한 명제를 훼손하고 면죄부나 보속행위나 다른 어떤 선행 등 구원에 대한 추가 옵션을 계속하여 만들어 냈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루터의 뒤를 이은 개신교인들이라면 모두 다 ‘예수를 믿는 순간 구원을 받는다’라는 이 단순한 진리에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돈오돈수적인 이 진리는 교회가 분명히 지켜 나가고 또 전해야 할 복음의 정수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돈오돈수적인 기독교에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군대에서 간부 자녀들을 모아 놓고 주일마다 성경을 가르치는 군인교회 주일학교를 도운 적이 있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제가 군종병이 되어 그 일을 아예 전담하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신학생 출신이라는 이유로 조금 돕는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저희 부대 군종병은 영남 지역의 무슨 보수적인 신학교를 다니는 말년 병장이었는데 어느 날 아이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는 것을 듣고 저는 제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한 사람은 너무 너무 착하고 성실하고 정직 하지만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도둑질에 살인에 나쁜 짓만 골라서 저지르는 사람이지만 결정적으로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었어요. 이 두 사람이 죽으면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갈까요? 그래요. 아무리 착해도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에 가고,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가는 거예요.
저는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사람마다 죄 씻음 받는다는 기독교 신앙을 저도 부인하는 바는 아니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면 어린이들은 신앙과 윤리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여길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것으로 게임 끝입니까? 천국행 티켓은 예수 믿는다고 고백하는 순간 이미 받아 놓았고 모든 죄는 예수님이 다 용서해 주실 터이니 이후로는 막 살아도 되는 것입니까? 저는 분개했지만 계급이 원수라 찍 소리도 못하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기독교가 왜 이렇게 욕을 먹습니까? 인터넷에 기독교에 관련된 기사가 한 줄 뜨기라도 하면 네티즌들은 벌떼처럼 달려들어 ‘개독교’라는 험한 표현을 써 가며 무수한 댓글을 남깁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것으로 끝나 버리는 신앙. 바로 그것 때문 아니겠습니까? 세상에서는 막 살다가 교회만 가면 천국의 기쁨을 노래하는 이중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돈오돈수 기독교의 참의미를 왜곡시키고 역기능만 초래하는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둘째로, 돈오점수(頓悟漸修)적인 기독교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모두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돈오점수란 한 번 깨달음을 얻었더라도 과거의 잘못된 습관이 계속 몸에 배어 있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자도 계속해서 도를 닦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두 번째로 읽은 빌립보서 3장 1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이미 거듭남의 큰 체험을 한 사도 바울이었지만, 여전히 자신은 완전하지 않으며 목표점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어지는 13절에서는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고 14절에서는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돈오점수적인 기독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돈오점수적인 기독교의 가치 역시 우리가 보존해야할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훈련하고 성화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이 성장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초대 교부 닛사의 그레고리는(Gregory of Nyssa,533∼395)는 그의 유명한 책 「모세의 생애」(THE LIFE OF MOSES)에서 우리 영혼에는 항상 더 높이 오르고자 하는 상승의 욕구가 있는데 이 영혼은 어떤 것을 성취했다고 해서 그 상승 운동을 멈추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자신의 목표점에 도달한 순간 필연적으로 그 보다 더 높고 고결한 지점과 목표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삶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날마다 성장하며 도를 닦아 더 높은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행동의 연속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솔직하게 한 번 돌이켜 봅시다. 기도 생활에 발전이 있으십니까? 성서 연구에 진보가 있으십니까? 봉사활동이나 구제 활동은 어떠십니까? 오랜 세월 늘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선교사 리빙스턴에게 다른 선교사가 찾아와 물었습니다. “자네는 어디로 선교하러 갈 생각인가?” 그러자 리빙스턴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어디로 가도 좋다네.” 선교든 목회든 평신도의 신앙생활이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전진하고 성숙해 가야 한다는 것, 이것이 기독교적인 돈오점수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돈오점수적인 기독교 역시 절대적으로 옳은 것만은 아닙니다. 중세 수도사들의 지나친 금욕주의에 대하여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유혹하는 죄와 싸우는 방법으로 고행을 택했는데 채찍으로 자신의 몸을 때리거나 예수님이 빌라도의 심판을 받기 위해 오르셨다는 28개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거나 면벽 수련을 하는 스님들처럼 토굴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주상 성자라고 불리우는 시므온은 평생 높은 기둥 위에서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글쎄요. 저도 영성 신학에 대하여 관심이 많습니다만, 이러한 극단적인 금욕 수행에 대해서는 부정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 안에 있는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처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고 마음의 평안을 얻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확신이 없기에 고행과 같은 다른 방법을 통하여 죄책감을 덜어내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훈련을 중시하는 돈오점수 기독교가 극복해야할 과제입니다.
이상과 같이 돈오돈수의 기독교와 돈오점수의 기독교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둘은 사실 오랜 교회 역사 속에서 계속 되는 논쟁거리였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것에 집중하는 돈오돈수적인 신학이 루터교나 장로교의 것이라면, 예수 믿은 후에 성화되는 삶을 훈련하도록 강조하는 신학은 우리 감리교의 것이라 할 것입니다. 어느 것이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논쟁이 지렁이가 싫은 것이냐, 좋은 것이냐 하는 논쟁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지렁이를 좋아한다고 해서 상대방도 지렁이를 좋아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지렁이를 싫어한다고 해서 상대방도 지렁이를 싫어해야할 의무 역시 없습니다. 지렁이는 그대로인데 사람에 따라 각자 다르게 느끼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관점을 인정해 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논쟁의 결론입니다. 예수를 믿는 그 순간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냐, 아니면 예수를 믿은 후 변화된 삶의 훈련으로 구원을 완성해 가는 것이냐 하는 문제도 이와 같이 둘 다 맞는 말입니다. 무엇보다 오늘 제가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라는 서로 다른 관점의 근거로 제시한 로마서와 빌립보서의 두 성서 본문이 모두 사도 바울이라는 한 사람의 작품임을 기억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적어도 바울에게 있어 이 두 문제는 서로 충돌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돈오돈수도, 돈오점수도 모두 포함하는 폭넓은 신앙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할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공통된 단어가 하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두 단어의 앞에 붙어있는 말인 ‘돈오’, 즉 ‘깨달음’이라는 말입니다. 돈오돈수이든 돈오점수이든 일단 ‘돈오’ 즉 ‘깨달음’이 있어야 논쟁도 할 거리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열정이 없는 사람에게 돈오돈수이든 돈오점수이든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것을 우리 기독교적으로 해석해 보자면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든 지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든 아니면 인격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든 어쨌든 우리가 예수를 믿었으면 새로운 차원의 삶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단 하나님과 깊이 만나는 경험부터 하십시오. 기도를 하시든 성서를 보시든 자연 속의 주님을 묵상하시든 어쨌거나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뭔가 달라진 게 있다는 느낌이 들어야 합니다. 일단 ‘돈오’가 되어야 ‘돈수’를 하든지 ‘점수’를 하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돈오’의 경험, 즉 하나님의 마음을 만나보신 분들이라면 자신의 신앙을 돌이켜 보고 돈오돈수에 치우쳐 있는지 돈오점수에 치우쳐 있는지 냉철하게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양쪽의 균형을 잡으려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구약 성서에서 끊임없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친구 윤(尹)은 돈오돈수인지? 돈오점수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윤(尹)과 싸우다시피 하면서 얻어낸 결과물은 돈오돈수면서 찰라적인 깨달음을 얘기한 성철 스님의 그 위대함을 말하는 그 감격을 같은 병을 앓고 있기에 결혼해서 16∼17년을 보내면서, 나의 엄마 아버지의 아픔의 찌꺼기들을 나의 큰 딸아이에게까지 안겨다 줄 수밖에는 없었던, 이 처절한 현실 가운데, 한 복판에서 처(妻)에게 까지 무심 할 수밖에는 없었었던 내가 바로 그녀와 하룻밤을, 시내에서 보내면서 몸부림치는 막달은 골목 속에서 하나님과 사투를 벌릴 수밖에는 없었던 마지막 그 순간들....... 그래서 결과물로 승리의 개가를 불을 수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처(진짜로 순박한 사람이다 때가 묻지 않은, 지금도 환경문제를 얘기하는.....)가 서로간의 마음을 열지 못했음이지 그래서 싸움도 못한 무덤덤한 그 자체. 그런데 어제의 그 몸부림침의 사투로 인해서 돈오돈수(頓悟頓修)의 획기적인 빛을 경험하였다. 내가 바라는 것은 치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공영(人類共榮)을 위함이다. 그래서 앞에 놓고 들여다보며 치료한다는 대상화(對象化)의 물결을 넘어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 나의 떠않음이리라. 꼭 나에게 안겨지리라는 것이다.........
친구 윤(尹)이 많이도 들려준다. 여기에 곁들여 본다. 오늘의 하룻밤 이야기가 십년의 독서보다 났다. 우리는 튕겨 치는 말을 하면서 다듬어져 간다. 가볍게 한 것이 무겁게 되기를. 또 호랑이 등에 올라 탄 형국이라는 말이 있다. 호랑이 등에 올라탔으니 내리면 호랑이에 물려 죽을 밖에 없으니, 호랑이와 함께 끝까지 간다는 말이다. 고독과 외로움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해줘. 그래서 나쁘지 만은 않아...... 임재범의 노래 비상중.
* 지면 관계로, 2011년 7월의 표지 사진을 못 올렸으며, 공동체 소식에서 공동체 가족들은 지난달과 변동이 없이 잘 계시고들 있으시며, 후원의 소식은 다음 달로 또 미루어짐을 양지하여 주시기를 부탁 올리오며, 한 가지 광고의 말씀은 제천시의 새생명전원교회 손태흥 목사님께서 2011.8.15-17에 새터공동체에서 집회 모임을 인도하여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새 터 공 동 체(041)754-1488. (010)2405-14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