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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은혜(사 61:1-3)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수많은 슬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의 슬픔도 있고, 가족의 슬픔 그리고 타인의 슬픔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슬픔을 당하면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말하며 안 좋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신앙에서는 어떨까요?
과연 슬픔이 신자에게 은혜가 될까요?
결론 먼저 말씀을 드리면, 슬픔은 은혜가 됩니다.
정확히 말하면 슬픔이 변하여 은혜가 됩니다.
슬픔은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우리 모두는 슬픔을 가지고 있고,
지금도 그렇고 또한 미래에 많이 울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편 42편 3절에서도 이런 슬픔의 인생을 노래합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시인이 얼마나 고통을 당했으면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되었다고 고백할까요?
또한 시편 56편 8절에서는 사람의 슬픔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슬픔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시편 90편 10절을 보면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는 날이 강건하면 팔십인데 대부분의 날들이 수고와 슬픔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눈물의 골짜기라고 하는데
역설적으로 성경은 슬픔에 큰 은혜가 있다고 합니다.
슬픔에 어떤 은혜가 있는지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슬픔을 당할 때 우리는 위로받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본문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시는데,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며, 슬픔을 대신할 찬송의 옷을 주셔서
그 근심을 대신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이 누가복음 4장에서 인용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슬픈 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슬픔을 당한 자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슬픔을 당하면 여러 가지 세상 방법으로 극복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남자들은 술을 마시거나 아니면 방에 박혀 두문불출을 합니다.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방법은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슬픔을 당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만 슬픔이 극복 되고 위로를 받게 됩니다.
영국 출신이며 이 시대 기독교 사상에 많은 공헌을 한 C.S. 루이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은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였는데 나이가 들도록 혼자 살다가
59세에 조이(Joy)라는 여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인 조이가 결혼한 지 몇 년이 안 되어 암에 걸려 치료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루이스가 암 투병으로 고생하는 부인을 바라보며
“헤아려 본 슬픔”(A Grief Observed)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루이스는 처음에는 마음이 두렵고 떨리고 무기력하고 무감각하게 되어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죽을 생각까지 했다고 합니다.
편지 한 장 읽을 힘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 루이스가 절망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간절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병세가 호전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신앙을 포기하고도 싶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면서 아내를 관찰했는데,
열심히 기도를 하면 아내가 침울하다가 기뻐하는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슬픔 속에서 꿋꿋한 아내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내가 치유되지 않았지만
기도하면서 아내를 볼 때 아내가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아내의 마음을 하나님이 만져주신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부인이 죽었지만 기도하는 순간마다 이상하게 기쁨이 솟아올랐고
기쁨은 슬픔을 집어삼켰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 눈물을 흘리는 자는 주님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슬픔을 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큰 위로를 받습니다.
둘째로 슬픔은 우리에게 깨닫고 변화 받는 은혜를 줍니다.
창세기 42장 21절입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이 말씀은 요셉의 형제들이 한 말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보면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고 이스라엘에 가뭄이 들었을 때,
아버지 야곱이 요셉의 형제들에게 양식을 얻기 위해서 애굽으로 보냅니다.
형들을 요셉을 몰라보았지만 국무총리가 된 요셉은 자신의 형제들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그냥 보내지 않고 첩자라는 죄명으로 형제들을 가두어 버립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아우의 일,
즉 과거 자신들이 요셉을 판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42장을 보면 요셉이 팔려갈 당시에 애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애걸하며 형들에게 살려달라고 하지만
형들은 그 괴로움을 무시해 버렸고 결국 동생을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 내 눈에서는 피눈물이 나는 법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이제야 이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요셉도 편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요셉도 창세기 43장-50장을 보면 네 번 대성통곡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첫 번째가 바로 처음 형들을 만날 때였습니다.
요셉은 사람을 다 내보내고 휘장을 치고 통곡합니다.
사람들이 다 알 정도로 큰 통곡을 했습니다.
그럴 때 요셉이 슬퍼하며 통곡할 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 45장 5절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억울했지만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내 억울함의 배경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이 진리를 깨닫고 형들을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습도 마찬가지인데 진리를 깨달으면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감옥에서 형기를 마친 사람들을 보면
더 부정적인 사람이 되어 계속 재범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출소자의 70-80%가 재범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감옥 속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있습니다.
찰스 콜슨이 그런 경우입니다.
이 사람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서 감옥에 가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변화를 받아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거듭남”이란 책을 썼고, 지금도 미국에서 재소자를 위한 전도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콜슨은 감옥에 간 것이 평생에 큰 은혜가 된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많습니다.
존 번연이 감옥 속에서 천로역정을 썼습니다.
슬픔이 오히려 기쁨이 되고 새로운 삶을 준 것입니다.
서커스단의 코끼리는 어렸을 때 강한 쇠사슬로 온몸을 묶어 놓습니다.
그 어린 코끼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 쇠사슬을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코끼리는 자신은 이제 이 줄을 끊고 탈출할 수 없다고 믿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코끼리가 커져서 어른이 되면 사람들은
그 어른 코끼리에게 쇠사슬이 아닌 일반 밧줄로 묶어놓습니다.
상식적으로 그 코끼리는 밧줄을 끊고 탈출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코끼리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은 탈출할 수 없다고 각인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헐거운 밧줄로 묶어 놓아도 그 코끼리는 탈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코끼리가 줄을 끊고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불을 지르면 코끼리는 줄을 끊고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야 하는데,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불을 지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슬픔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깨닫고 변화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슬픔이 우리에게 오면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더욱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로 슬픔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게 합니다.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슬픔을 당할 때 찬송의 옷을 입히게 하십니다.
우리가 슬픈 일을 당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찬송의 옷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출애굽기 3장 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부르짖었다고 말씀합니다.
이 부르짖음은 하나님께 살려달라는 애원의 소리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모세를 통하여 그들을 애굽에서 구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으면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믿음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잘 해결 된 줄 알고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불평하고 우상을 숭배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거의 안 하는 수준입니다.
그러자 40년 동안 하나님은 그들을 연단시키셨고, 그들은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문제가 해결된 줄 알았는데 그 땅에서 정복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계속해서 슬픔의 날입니다.
기쁜 날이 될 줄 알았는데 슬픔의 날의 연속입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고난의 과정, 슬픔의 과정을 거치고 마지막 때에
여호수아 24장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하나님을 섬길지 아닐지 오늘 택하라고 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경배할지 아니면 우상을 택할지 결단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것, 예배할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에서 가나안 정착까지 받은 축복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하나님 한 분만으로 족하는 은혜입니다.
한국 교회를 보면 수난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수난의 기간 동안 한국교회는 부흥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보면 신자들은 교회만 오면 울며 나라를 돌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교회를 부흥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6.25전쟁을 경험했습니다.
3년 동안 성도들이 모여 울며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교회를 부흥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보릿고개를 거쳤습니다.
농촌에서 모이면 먹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눈물로 양식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한국 교회가 최고로 부흥한 시기는 60년대입니다.
시련 속에서 한국교회는 기도했고
이 기도를 통해 한국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많은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슬픔이 없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시편 126편 5-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망하지 않습니다.
눈물로 씨를 뿌릴 때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슬픔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시고
소망을 잃은 자에게 찬송을 주십니다.
이런 주님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에서 승리하는 신자가 되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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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에게 결코 슬픔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음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가 절망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기 시작하신다고 믿습니다. 슬픔과 절망을 기쁨과 희망으로 바꾸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동감합니다.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