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거제도 유명 유배인(流配人) 소개 > 고영화(高永和)
1. 권두기(權斗紀) :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숙장(叔章), 호는 청사(晴沙). 1687년 (숙종 1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96년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갔다. 전적(典籍)·예랑(禮郞)을 역임하고 뒤에 해운판관(海運判官)이 되었다. 1707년 (숙종 33)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논란하다가 해남(海南)에 유배되었다. 11년 유배에서 풀려나 정언(正言)에 이르렀다.
1) 석천(石泉) 내(來)의 증손이며 석계(石溪) 석충(碩忠)의 손자이고 유(濡)의 삼자이며 창설(蒼雪) 두경(斗經)의 제(弟)이고 하당공(荷塘公) 두인(斗寅)의 재종제(再從弟)로 효종(孝宗) 기해(己亥)에 출생하였음.
2) 자는 숙장(叔章)이고 호는 청사(晴沙)로 숙종 22년 병자(丙子)년인 1696년 12월 6일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하였음.
3) 관직은 좌랑(佐郞), 정언(正言), 지평(持平)을 지내고 {청사문집(晴沙文集)}이 있음.
4) 임인(壬寅) 졸로 묘소는 재산(才山) 갈산(葛山) 계좌(癸坐)에 있으며 옥천(玉川) 조덕린(趙德 )이 갈명문(碣銘文)을 찬(撰)하였음.
5) 배위는 숙인(淑人) 재령이씨(載寧李氏) 숭일(崇逸)의 딸이며 병신(丙申) 생이고 무오(戊午) 졸로 묘소는 춘양(春陽) 이전동(泥田洞) 해좌(亥坐)에 있고 무육(無育) 세마공(洗馬公)이 작지명(作誌銘)하였음.
6) 재배는 숙인(淑人) 광산김씨(光山金氏) 윤(玧)의 딸이며 병신(丙申) 생이고 계축(癸丑) 졸로 묘소는 소천(小川) 부태현(扶台峴) 해좌(亥坐)에 있음.
◯간송당문집(澗松堂文集) :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권두기의 시문집이다. 권두기는 권두경(權斗經)의 아우이며, 1687(숙종 13)년 사마시에, 1696년 문과에 급제하고 괴원(槐院)에 들어갔다. 전적, 1701년 예랑(禮郞)을 역임하고, 선생이 예조정랑으로 조정에 있는 것을 즐겁게 여기지 않고 낙상(落傷)했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이에 판당(判堂) 김진구(金鎭龜)가 그 뜻을 알고 뒤에 임금께 아뢰어 선생을 해운판관(海運判官)으로 옮겼다. 1707(숙종 33)년 소(疏)를 올려 시사(時事)를 논단 하다가 오히려 배척되어 남해(南海)에 유배되었다. 1711년 유배에서 풀려 났으며 벼슬이 정랑에 이르렀다.
이 문집은 1910년 7세손 철연(徹淵)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시(詩)는 뜻이 간결하고 운격이 청아하며 각 체의 시가 고루 실려 있다. 「사포즉사(沙浦卽事)」,「노상구점(路上口占)」 등은 즉흥시로 눈앞에 보이는 경치를 읊은 것이나 짜임새나 격에 있어서 품이 높고 직선적인 표현을 피하고 간접적으로 처리한 것이 특색이다. 서(書)는 주로 친지와 사우간에 안부를 묻고 간단한 용무를 상의한 것이나 「종형하당선생(宗兄荷塘先生)」에는 권두인(權斗寅)에게 공부하는 방법과 시사(時事), 문사 등 생활주변의 여러 문제를 상의한 내용이다. 소(疏)의 「의재사정언겸진소회(擬再辭正言兼陳所懷)」에서는 말과 마음과 행동이 일치되어야 덕을 쌓고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으며,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 취하고 버리는 것이 바르고 명확하여야 국가를 잘 다스릴 수 있다고 강조하고 이를 위해서는 배우고 실천하는 데 뜻을 두고 마음이 공평무사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밖에도 이현일(李玄逸)의 학문과 공적을 조상한 「제갈암이선생문(祭葛庵李先生文)」이 있다.
2. 심광세(沈光世) : 1577(선조10)~1624(인조 2)
조선의 문신. 자는 덕현(德顯), 호는 휴옹(休翁), 엄(●)의 아들. 1601년(선조3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감찰(監察)·해운 판관(海運判官)을 거쳐 설서(說書)로 있을 때 무설(巫說)을 믿는 세자 광해군을 간(諫)했다가 미움을 받고 사직했다. 1604년 전적(典籍)으로 다시 기용되고 1611년(광해군 3) 정언(正言)·수찬(修撰)을 거쳐 지평(持平)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문학(文學)을 거쳐 교리(校理)로 있을 때 계축옥사(癸丑獄事)로 거제(巨濟)에 유배(流配)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다시 교리가 되고 응교(應敎)를 거쳐 이듬해 사인(舍人)이 되었다. 이 해 이괄(李适)의 난으로 피난한 왕의 행재소(行在所)로 가던 도중 부여(扶餘)에서 병사했다.
3. 홍무적(洪茂績) 왕조 : 인조 휘 : 홍무적 본관 : 남양 생몰연도 : 1577~1656 유배기간 : 1647~미상 유배시관직 : 대사헌 최종관직 : 형조판서 유배사유 : 소현세자빈의 옥사 홍무적(1577~1656)의 자는 면숙(勉叔)이요 호는 백석(白石)으로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광해군 2년(1610)에 식년시 생원 2등으로 입제하였다.광해군 7년(1615)에 생원으로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은 정조(鄭造)·윤인(尹訒)·이위경(李衛卿)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을 제기하자 이에 반대, 이들을 목 벨 것을 상소하고, 폐모론에 반대하는 이원익(李元翼)이 유배되었다. 이에 정택뢰(鄭澤雷)·김효성(金孝誠) 등과 서로 잇따라 소를 올려 이원익의 충절을 밝히고 폐모론자를 목 벨 것을 주장하다가 거제도로 유배되었다.1623년 인조반정으로 석방, 창녕현감에 기용되고 이듬해 진천현감이 되었다. 인조 10년(1632)에 지평·수찬을 거쳐 김제군수가 되었으며, 이어 공주목사를 역임하였다. 1639년 장령으로 병자호란에 대한 복수설치(復讐雪恥)와 강화도의 수축을 상소하였고 1641년 사간이 되었는데 “과거에 급제하지 않은 자로 언관에 기용함은 전고소무(前古所無)한 일이라.”는 상신(相臣)들의 반대로 동부승지가 되었다.이듬해 우부승지로 사인(士人)들이 염치를 모르고 회뢰(賄賂)가 공행(公行)하며 언로가 막혀 있음을 지적하는 등 시폐(時弊)를 논하였다. 우승지·병조참의를 거쳐 1643년 대사헌이 되어 좌의정 심기원(沈器遠)의 탐종무기(貪縱無忌)하고 교만함을 들어 탄핵하였다.1644년에 판결사가 되고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행호군·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다시 병조참판이 되었는데 백도(白徒) 한신남(韓信男)의 말만 믿고 그를 겸사복장(兼司僕將)에 의망(擬望)한 데 책임지고 파직되었다.1646년 대사헌으로 강빈(姜嬪: 昭顯世子嬪)의 옥사에 “강빈을 죽이려면 신을 먼저 죽여 달라.”고 극간하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소현세자의 세 아들이 제주도에 유배되자 이들과 격리시키기 위하여 남해로 이배되고, 다시 갑산에 이배되었다.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사면되어 전리(田里)에 방귀(放歸)되고, 이듬해 한성우윤에 기용되고, 이어서 대사헌 지의금부사를 거쳐 효종 3년(1652)에 공조판서에 오른 뒤 대사헌·우참찬·좌참찬·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문헌 :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孝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人物考>
4. 이윤(李胤)
1462년(세조 8)∼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자백(子伯), 호는 쌍매당(雙梅堂). 아버지는 사온서령(司醞署令)을 지내고 승정원도승지에 추증된 평(글)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陽川許氏)로 군사(郡事) 추(樞)의 딸이다. 아우 주(胄)와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1483년(성종 14) 성균관유생으로 있으면서 정여창(鄭汝昌)과 함께 수강궁(壽康宮)을 보수하는 역사에 승려들을 동원, 이들에게 도첩(度牒)을 지급하려는 조정의 계획에 반대하였고, 이듬해에 일어난 승려들의 성균관유생 구타사건 때 승려들을 엄벌에 처할 것을 여러 차례 상소하였다.1486년 최세걸(崔世傑)·김후손(金後孫) 등과 함께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498년(연산군 4) 사간원대사간으로 재임중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거제에 유배당하였다.그뒤 1500년 진도에 유배되었던 아우 주와 함께 풀려났으며,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홍문관의 응교·전한 등을 거친 뒤 시강관(侍講官)으로 있으면서 영의정 유순(柳洵)을 탄핵하였고, 그해 10월에는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임금에게 신하의 간언을 따르고 아첨배들을 멀리하며 학풍을 바로잡을 것 등을 포함한 13조목의 국가시책을 진언하기도 하였다.이듬해에는 유자광(柳子光)일파를 여러 차례에 걸쳐 신랄하게 배척하였고, 1510년 이계맹(李繼孟) 등과 함께 성절사(聖節使)의 일행으로 중국에 가서 명나라의 무종(武宗)에게 환대를 받고 돌아왔다.한때 노모의 봉양을 위하여 청도훈도(淸道訓導)에 재임하면서 청렴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등과 깊이 교유하였으며, 1504년 갑자사화 때 아우 주가 장살(杖殺)되는 등 일가가 참변을 겪기도 하였다.만년에는 영산의 마고리(麻姑里)에 쌍매당을 짓고 은거하였다.저서로는 《쌍매당일고》 1책이 있다.
5. 김세필(金世弼)
• 인물구분 : 문신
• 시 대 : 조선중기
• 출 생 지 : 알 수 없음
• 생몰연대 : 1473(성종 4)~1533(중종 28)
• 관련유적 : 충주시 이류면(팔봉서원)
음성군 생극면(지천서원, 십청헌유허비)
경기도 용인시 죽전리(묘소 및 신도비)
가. 생애 및 활동
조선전기의 문신이다. 자는 공석(公碩), 호는 십청헌(十淸軒) 또는 지비옹(知非翁)이라 하였으며 본관은 경주이다. 첨정(僉正) 김훈(金薰)의 아들이다.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아 닭이 울어도 그칠 줄을 몰랐다 한다. 성종 22년(1491) 성종이 친히 유생들에 시험을 보일 때 18세로 수석이 되니 기특히 여겨 많은 상품을 주었다. 연산군 1년(1495)에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의 정자·박사를 거쳐 수찬(修撰)이 되고, 이어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올랐다. 10년(1504)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거제도(巨濟島)에 유배되었다. 중종 1년(1506)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 나와 홍문관 응교로 기용된 후 사가독서(賜暇讀書)(조선시대에, 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의 은전을 입었다. 뒤에 전한(典翰)·형조참판·부제학을 거쳐, 11년(1516)에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었으며, 이어 전라도 관찰사와 대사헌(大司憲)·이조참판을 지내고, 14년(1519)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해 겨울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조광조(趙光祖)가 사약을 받고 죽자, 그 부당함을 규탄하다가 매를 맞고 유춘역(留春驛)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17년(1522)에 풀려났으나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지금의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八聖里)에 십청헌을 지어 숨어살면서 후학들을 가르치니 많은 학도가 모여들었다. 이 무렵 충주목사로 있던 박상(朴祥)이 집 짓는데 도왔으며, 매년 봄에 조곡 100석을 보내와 후원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것이 49세요, 50세에야 그릇됨을 알았다(行年五十而知四九年之非)하여 호를 지비옹(知非翁)이라 하고, 그 집 앞에 흐르는 물을 지비천(知非川)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후 국가에 대한 공로가 인정되어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 음성의 지천서원(知川書院)에 향사되었다. 저서로는 《십청헌집(十淸軒集)》 4권이 전하고 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지천서원 앞에 십청헌유허비(十淸軒遺墟碑)가 최근에 세워졌다. 저서로《십청헌유고(十淸軒遺稿)》가 있다.
6. 홍언충(洪彦忠), 홍직경(洪直頃). 거제유배기간 1504년 겨울~ 1506년 가을
1473(성종 4)∼1508(중종 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직경(直頃), 호는 우암(寓菴). 아버지는 참찬 귀달(貴達)이며, 어머니는 김숙정(金淑正)의 딸이다. 1495년(연산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해에 또다시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부정자에 이어 정자·저작·박사를 역임하였다. 1498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질정관(質正官)·부수찬·이조좌랑을 역임한 뒤 병으로 사임하였다. 이어 1503년 수찬으로 복직하여 교리가 되고, 그해에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글을 올려 임금을 간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가 다시 진안에 유배되었다. 이어 아버지 귀달이 경원으로 유배될 적에 연산군10년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또다시 진안현(眞安縣)에 유배되고 겨울에, 거제(巨濟) 고현(古縣) 바닷가로 이배(移配)되었다. 그가 유배의 명을 받았을 때 집안사람들이 몸을 피할 것을 권하였으나 왕명을 어길 수 없다 하여 조용히 길을 떠났다. 부친 홍귀달(洪貴達)이 王命을 어긴 죄로 賜死되다. 해도에 이배 중에 중종반정(1506년 9월2일)이 일어나 풀려났다. 중종1년 1506년 가을, 反正 후 성균직강(成均直講)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고 시와 술로 생을 보냈다. 그는 천성이 단솔하고 재기가 있어 어릴 때에 이미 학문에 깊이 통달하였다.
문장에 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예서(隷書)를 잘 썼다. 그는 문장으로 정순부(鄭淳夫)·이택지(李擇之 이행(李荇))·박중열(朴仲說) 등과 함께 당대의 사걸(四傑)이라 불렸다. 상주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7. 이행(李荇)
1478(성종 9)∼1534(중종 29).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창택어수(滄澤漁水)·청학도인(靑鶴道人).지돈녕부사 명신(明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온양군사 추(抽)이고,아버지는 홍주부사 의무(宜茂)이며,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로교리(敎理) 희(熺)의 딸이다.
1495년(연산군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권지승문원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예문관 검열·봉교, 성균관전적을 역임하고,≪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0년 하성절질정관(賀聖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홍문관수찬를 거쳐 홍문관교리까지 올랐다.1504년 갑자사화 때 사간원헌납을 거쳐 홍문관응교로 있으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충주에 유배되고,이어 함안으로 옮겨졌다가 1506년 초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약 8개월, 상문동 용산)
이 해 9월에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다시 홍문관교리로 등용되고,이어 부응교로 승진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였다.
1513년(중종 8) 다시 성균관사예가 되었다가 이듬 해 사성으로 승진하였다.
사섬사정(司贍寺正)을 거쳐 1515년 사간원사간이 되고, 이어 대사간으로 승진하였다. 이 때 신진 사류인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순창군수 김정(金淨) 등이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하자 이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어 첨지중추부사·홍문관부제학·성균관대사성·좌승지·도승지를 거쳐 1517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그러나 왕의 신임을 얻고 있는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류로부터 배척을 받아 첨지중추부사로 좌천되자 사직하고 충청도 면천에 내려갔다.
이듬해 병조참의·호조참의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실각하자 홍문관부제학이 되고,이듬해 공조참판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사헌과 예문관대제학을 겸하였다.
그리고 동지의금부사와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도 겸임하였다.
1521년 공조판서가 된 이후 우참찬·좌참찬·우찬성으로 승진하고, 152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다시 좌찬성을 거쳐 1527년 우의정에 올라 홍문관대제학 등을 겸임하였다. 1530년 ≪동국여지승람≫의 신증(新增)을 책임맡아 끝내고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논박하다가 오히려 그 일파의 반격으로 판중추부사로 좌천되고, 이어 1532년 평안도 함종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축출되면서 복관되었다. 문장이 뛰어났으며,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였다.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용재집≫이 있다.시호는 문정(文定)이었으나 뒤에 문헌(文獻)으로 바뀌었다
8. 한충(韓忠) : 1486(성종 17)∼1521(중종 16).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서경(恕卿), 호는 송재(松齋)이며, 주부(主簿) 한창유(韓昌愈)의 아들로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중종 5년(1510)에 생원(生員)이 되고 1513년에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거쳐 정언(正言) · 이조 정랑(吏曹正郞) · 응교(應敎) 등을 역임했다. 1518년에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명(溟)에 가는 주청사(奏請使) 남곤(南袞)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다녀온 후 서로 의견대립으로 인하여 남곤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중종 14년(1519)에 전한(典翰)을 거쳐 직제학(直提學) · 동부승지(同副承旨) ·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고 남곤에 의해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전임되었다. 기묘사(己卯士禍)에 조광조(趙光祖)와 교우가 있었다고 하여 거제도(巨濟島)에 유배되었다.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의금부(義禁府)에 투옥되었다가 중종이 무고당한 것을 알고 보석을 명하였는데 남곤이 옥졸을 시켜 옥에 들어가 왕명이라고 속이고 목졸라 죽였다. 율려(律呂), 음양(陰陽), 천문(天文), 지리(地理), 복서(卜筮)에 모두 능했다. 뒤에 신원(伸老)되고 이조 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며 청주에 서원이 있다.
한충은 병오생이며 자(字)는 서경(恕卿)이다. 계유년 문과에 장원하였고 벼슬이 충청 수사(忠淸水使)에 이르렀는데, 곧 거제(巨濟)에 귀양갔다. 또 무함을 받아서 옥중에서 곤장을 맞고 죽었다.척언 : 승지 한충은 기개가 호방(豪放)하였다. 일찍부터 글을 잘한다는 명망이 있었고, 음률을 좋아하였다. 계유년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홍문관 전한(典翰)으로서 주청사 검찰관(奏請使檢察官)에 충수되어 북경에 갔다. 점 잘 치는 자가 있었으므로 역관(譯官)을 시켜 평생의 길흉을 물었더니, 점쟁이가 운수를 점쳐 보고, 다만 장두체(藏頭體)로 된 시 한 수를 적어서 주는 것이었다. 그 시에,
소년 시절부터 재예는 천마산과 견준 듯 / 少年才藝倚天摩손으로 용천검을 잡아 몇 해나 갈았던가 / 手把龍泉幾歲磨돌 위의 오동은 소리를 발할 참인데 / 石上梧桐將發響소리 가운데 율려는 청화함이 있다 / 音中律呂有淸和입으로는 3대 시서의 가르침을 전하고 / 口傳三代詩書敎글은 천추 도덕의 물결을 일으킨다 / 交起千秋道德波가죽 폐백으로 이미 현사의 값을 정했는데 / 皮幣己成賢士價가생은 왜 홀로 장사를 원망하던가 / 賈生何獨怨長沙
하였다. 돌아와서는 곧 당인으로 몰려서 귀양갔고 오래지 않아 또 곤장을 맞고 옥중에서 죽었다. 평생 운수가 그 점쟁이의 시와 방불하였으니, 매우 괴이한 일이었다. 장두체라는 것은 마(摩) 윗쪽을 떼면 수(手)로 되고 마(磨) 윗쪽을 떼면 석(石)이 되며, 향(響) 윗쪽을 떼면 음(音)이 되고 화(和) 왼편을 떼면 구(口)가 된다. 다른 것도 이와 같다.보유 : 스스로 송재(松齋)라고 호(號)하였다. 정축년 가을에 지평(持平)으로 있었는데 모친의 병보(病報)를 듣고 예궐하여서 사표를 바쳤더니, 특별히 휴가[由暇]를 주도록 명하였다. 청주(淸州)에 있는 어머니에게 가니, 의원이 가르쳐 주기를 목욕하는 것이 치료 방법이라고 하였다. 그 말대로 목욕은 하였으나 또 이질에 걸렸다. 직무를 오랫동안 비워 둘 수 없으므로, 소(疏)를 올려 사직하였다. 또 아뢰기를, “부세(賦稅)와 공(貢)을 바치는 것은 하나같이 그해 농사의 재해 정도에 달렸는데, 다만 수령이 실지로 답험(踏驗)하는 데에 조심하지 않습니다. 농작(農作)은 또 식량과 종자가 있어야 하는데, 두가지에 한 가지라도 없으면 폐농하게 됩니다. 청컨대 묵은 밭의 세(稅)를 혁파하고 지난해의 조곡(糶穀)은 징수하지 말며, 재해를 실지대로 고찰하여 백성의 괴로움을 해소시키소서.” 하였다.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서 그 말을 받아들이고 또 휴가를 하사하였으니, 그가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성심은 천성이 그러한 것이었다. 무인년에 검찰관에 뽑혀서 상사(上使) 남곤(南袞), 부사(副使) 이자(李耔)와 함께 북경에 갔었는데 잘못된 종계(宗系)를 분변하여 바로잡도록 주청하는 일이었다. 공은 바른말로 항쟁하고 대궐 뜰에 서서 황명(皇命)을 기다려서 허가를 얻은 다음 돌아왔다.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할 수 없다 하여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10여 번이나 바쳐, 종백(宗伯 예부의 우두머리)의 제본(題本)을 얻고 칙서(勅書)를 받아 들고서야 돌아왔다. 임금은 일행에게 특별히 장획(藏獲 노비)과 토지를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공은 일이 완결되지도 않았는데 문득 상을 받게 되어[賞賜] 마음이 편하지 못 하였다. 그리하여 그 밭 15결(結)에서 나오는 세를 곤궁한 고모에게 주어서 생활하도록 하였다. 일찍이 북경에 있을 때에 상사 남곤이 병을 얻어 거의 위태하였는데, 부사 이자가 약을 보살피는 것이었다. 공이 이자의 귀에 대고, “저 놈이 반드시 사림을 도륙할 것이오.” 하였더니, 이자가 정색하면서 엄절(嚴截)하게 꾸짖은 일이 있었는데, 남곤이 그 사실을 알고 한을 품었다. 공이 예전에 응교(應敎)로 있을 때 근친(覲親)하고 올라오다가 길에서 유생을 만났다. 그 사람은 민폐를 아뢰는 글 한 편을 주면서 이름은 숨기고 말하지 않았다. 공은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선비라 생각하고 그 글을 계달(啓達)하였다. 물색하여 찾으니 진위(振威)에 사는 무뢰한 권탁(權鐸)이었다. 이해 가을에 공이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니, 충청수군절도사로 제수되었다. 12월에 언관이, 공이 조광조와 서로 붕당을 맺었고 권탁의 익명서를 속여 상달(上達)했다는 것으로써 논박하여, 거제에 안치되었다. 신사년 겨울에 송사련(宋祀連)이 바친 서기(書記)에, 서경(瑞卿)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서경(恕卿)이라고 지목되어서 신문을 받았다. 장차 심리하려던 밤에 옥중에서 죽었는데, 음경(陰莖)이 한 자 넘게 빠져나와 있었다. 액살(縊殺 목졸려 죽음)당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9. 정황(丁熿) : 거제유배기간: 戊申年 37세 때 1548년 ~ 1560년 49세 거제 배소에서 타계, 배소 위치 : 고현 서문골 향교 북쪽, 유자도 남쪽, 계룡산동쪽 정배.
정황 선생은 귀양살이 중에도 거제향교(고현 서문골)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제를 올리고 서울서 면회 오는 지인들을 만나면서 많은 기록을 남기셨다. 1560년 거제 고현에서 사망때까지 선생이 불모지 거제에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당시 거제민초에게 유교와 학문을 전파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은 창원(昌原)이다. 자는 계회(季晦).중종 31년(1536) 친시(親試,:왕이 직접 급제자를 선발)에 합격하여 문원부정자(文院副正字)에 올랐고,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시작으로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병조형조정랑(兵曹刑曹正郞),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이 되었으며, 1547년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노수신 등과 절도안치(絶島安置)되어 곤양으로 유배되었다. 다시 거제로 옮겨지고 1560년 타계(他界)하였다(13년간 유배, 거제에서 타계). 그러다가 을사사화 때, 귀양갔던 사람들이 거의 생환(生還)되었거나, 또는 죽은 사람들은 방환(放還)되어 증직(贈職) 등이 이루어졌으나 오로지 선생만 포증(褒贈)되지 못하다가, 140년이 지난 숙종 34년(1708)에 좌의정(左議政) 이유(李濡)의 상소로 이조판서로 추증(追贈)되었다.
10. 정백창(鄭百昌) : 1588년(선조 21) ∼ 1635년(인조 13)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덕여(德餘), 호는 현곡(玄谷)·곡구(谷口)·대탄자(大灘子)·천용(天容)이며, 공청도관찰사 정효성(鄭孝成)의 아들이다. 1606년(선조 39) 생원·진사가 되고, 1611년(광해군 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주서를 거쳐 검열·봉교·대교 등을 역임하였다. 1613년 경망하고 아첨을 잘한다는 이유로 탄핵받아 파직당하였으나, 곧 대교로 복직하여 오랫동안 사관(史官)으로 있었다. 사필(史筆)이 엄정하였으므로 이이첨 세력의 주목을 받았다. 1613년(광해군 5) 광해군이 사관에게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옛 일을 조사시킴으로써 모후에 대한 사건이 시작되었다. 이이첨(李爾瞻)이 사국(史局)을 위협하여 이방석(李芳碩)의 처치전말(處置顚末)을 자세히 기록하게 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관련시키려 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폐모론이 더욱 심해지자 이이첨 세력에게 몰려 다시 파직되어 경기도 양근(楊根)에 들어가 임숙영(任叔英)·이식(李植) 등과 더불어 은둔생활을 했는데, 세인들은 이들을 삼사(三士)라 불렀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으로 부수찬에 등용되어 헌납·교리·수찬을 거쳐, 1625년(인조 3) 보덕·사간·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이듬 해 집의로 문과중시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국구(國舅)인 장인 한준겸(韓浚謙)의 덕택이라는 비난을 받아 관직에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627년(인조 5) 동부승지, 다음 해 예조참의·대사간을 지낸 뒤 1631년(인조 9) 이조참판이 되었다. 같은 해 이행원(李行遠)의 죄를 태만하게 다스린 죄로 다시 파직당하였다가 1633년(인조 11) 대사간에 복직되었으나, 척신(戚臣)이라는 논란으로 취임하지 않았다. 좌부승지·부제학을 거쳐 도승지를 지냈고, 1635년(인조 13) 경기도관찰사로 재직하다 병으로 죽었다. 저서로는 『현곡집(玄谷集)』 7권 3책이 있으며, 묘는 하남시 초이동에 있다. <참고문헌>『朝鮮王朝實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1. 남구만(南九萬) 왕조 : 숙종 휘 : 남구만 본관 : 의령 생몰연도 : 1629~1711 유배기간 : 1679~1689 유배시관직 : 한성좌윤. 최종관직 : 영의정. 유배사유 : 허견 횡포 탄핵.
남구만(南九萬)은 조선 중기 문신이고 서예가이다. 인조 7년(1629)에 출생하여 숙종 37년(1711)에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이고 의령인(宜寧人)으로 시호는 문충(文忠)인데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으로 효종 7년(1656)에 별시 을과에 급제하여 정언, 이조정랑, 사인, 함경감사 등을 거쳐 숙종 13년(1687)에 영의정에 올랐다. 청렴한 신하로서 경사(經史)에 밝았고 문사(文詞)와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남구만의 유명한 시조 한수를 소개하겠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소치는 아이들은 상기 아니 일었느냐/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누구나 잘 알고 있는 시조이다. 약천 남구만의 남해 유배 기록이다. 숙종 2년(1676)에 설치된 도체찰사부(영의정을 중심으로 한 전시사령부, 외방8도의 군사력 통제기관)군권을 남인인 윤휴, 허적이 장악하였고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 등의 횡포가 심하기에 한성좌윤으로 있던 남구만이 숙종 5년(1679)에 탄핵 상소하다가 남해로 유배되었다. 연려실기술 제33권 숙종조 고사본말에 남해로 유배된 내용을 보면 “임금이 이르기를 좌윤 남구만은 일찍이 을묘년에 소를 올려 나를 속인 것이 지극히 음흉하였는데도 조정에서 허물을 용서하고 거두어 쓴 것은 그의 마음가짐을 고치게 하고자 해서였는데 원망과 독한 마음이 더욱 방자해져서 속으로 모함하는 계책을 품고 이에 감히 흉악하고 음험한 글을 던져서 대신과 유신(儒臣)을 얽어 모함하기에 있는 힘을 다하며, 또 사은숙배한 이튿날 아침에 곧 어버이 병을 빙자하여 사직하기를 청하고 잇달아 모함하는 글을 올렸으니 그의 본심이 결코 사은숙배 하러 온 것이 아니고 다만 글을 올려 남을 모함하는 계책을 위한 것이니 간교한 꾀를 부리려 한 마음속이 모두 드러났다. 이에 글 가운데 세 가지 건의 일이 모두 빈말에 돌아갔다. 속에서 남을 모함한 죄를 법에 의해서 차단하지 않을 수 없으니 좌윤 남구만을 멀리 귀양 보내라.”하였다. 처음에는 거제로 정하였다가 뒤에 남해로 옮겼음은 송시열이 거제로 이배되었기 때문이다. 숙종 6년(1680)에 남인의 영수 허적의 유악(油幄. 비가 새지 않도록 기름을 바른 천막. 군에서 비상시 쓰는 장비)을 숙종 몰래 빌려간 사건이 발생하여 남인이 대거 축출 당하고 서인이 다시 중앙 군권을 장악할 때 남해 유배지에서 풀려나 도승지, 부제학, 대제학,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숙종 10년(1684)에 우의정, 숙종 13년(1687)에 영의정을 지냈다. 숙종 15년(1689)에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강릉으로 유배되었다가 갑무사옥으로 풀려나 영의정에 오르는 등 파란만장한 여생을 겪었다. 다시 숙종 27년(1701)에 일어난 무고의 옥으로 남구만은 세자를 옹호하기 위해 희빈장씨의 처벌을 가벼운 형벌로 상소하다가 장희재와 장희빈 간의 편지가 들통나는 바람에 장희빈은 사사되고 서인 소론들이 제거되는데 남구만은 파직되었다.
-
12. 조관빈(趙觀彬) : 1691(숙종 17)∼1757(영조 3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국보(國甫), 호는 회헌(晦軒). 노론4대신인 태채(泰采)의 아들이다. 1714년(숙종 40)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검열이 되고, 1716년 도당록(都堂錄)에 선입되고 수찬·정언·부교리·교리·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1719년 승지로 특채되고, 1720년(경종 즉위년)대사간·대사성·승지를 거쳐 이듬해 이조참의에 올랐다. 1723년 신임사화에 화를 당한 아버지에 연좌되어 흥양현(興陽縣)에 유배되었다가, 1725년(영조 1)노론이 집권하자 풀려나와 호조참의·이조참의·강화유수·대사성·동지의금부사·호조참판·홍문관제학 등을 역임하고, 대사헌으로 신임사화를 논핵하였다.
1727년 동지돈녕부사로 임명되자 노론4대신인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命) 등이 죄적(罪籍)에 있으므로 의리상 취임할 수 없다고 그 삭제를 상소하였다. 그해 정미환국으로 파직되었다. 1731년 대사헌에 있으면서 다시 신임사화의 전말을 상소하여 소론의 영수인 이광좌(李光佐)를 탄핵하였다가, 당론을 일삼고 사감으로 대신을 논척하였다는 죄로 대정현(大靜縣)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났으나 등용되지 못하고 있다가 1736년 도승지에 임명되고, 1740년 호조참판·예조판서를 거쳐 1742년 평안도관찰사를 지낸 뒤, 1744년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의 불화로 면직되었다. 그해 우참찬·홍문관제학에 다시 기용되고, 이듬해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후 판의금부사·판돈녕부사·공조판서·형조판서·강화유수 등을 거쳐 다시 수어사(守禦使)가 되어 남한산성에 군량을 저장할 것을 청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1753년 대제학으로 죽책문(竹冊文)의 제진(製進)을 거부하여 성주목사로 좌천되었고, 이어 삼수부(三水府)에 유배되었다가 곧 단천(端川)으로 이배되었다. 그해 풀려나와 이후 좌빈객(左賓客)·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철저한 노론계열로 아버지의 신원과 포상의 추진에 일생을 보냈으나, 문형(文衡)으로 많은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저서로 《회헌집》 20권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3. 황경원(黃景源) : 1709년(숙종 35)∼1787년(정조 11). 조선 후기의 문신·예학자(禮學者).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대경(大卿), 호는 강한유로(江漢遺老). 기(璣)의 아들이며, 승원(昇源)의 형이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1727년(영조 3) 19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 뒤 의금부도사를 지내다가 174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고, 이어 예문관검열·병조좌랑을 거쳐, 홍문관응교로 있을 때에는 명나라 의종(毅宗)의 추사(追祀)를 건의하여 실시하게 하였다.이로부터 대사성·대사간·대사헌 겸 양관제학(兩館提學) 등의 청화직(淸華職)을 거쳐, 1761년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고서(姑壻) 이정(李涏)의 상언사건(上言事件)에 연좌되어 거제도로 유배되었다.이듬해 합천으로 이배되었다가 고향으로 방환(放還)되고, 이듬해에는 풍천부사로 복관되어 영조가 죽기까지 12년 동안 호조참판·홍문관제학·이조참판 겸 대제학과 형조·예조·공조의 판서 등으로 활약하였다.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모두 사양하고 중추부판사로 죽었다.서예에도 뛰어났으며, 예학(禮學)에 정통하고 고문(古文)에도 밝아, 오원(吳瑗)·이천보(李天輔)·남유용(南有容)등이 그를 따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항상 춘추대의(春秋大義)로 자임하여 1418년(영락 16, 태종 18)부터 1645년(홍광 1, 인조 23)까지의 《남명서 南明書》를 편찬하였고, 또 명나라 의종 이래로 명나라에 대한 절의를 지킨 조선 사람들의 전기(傳記)인 《명조배신전 明朝陪臣傳》을 저술하였다.문집으로 《강한집》 32권 15책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14. 이존중(李存中) : 1703년(숙종 29)∼1761년(영조 3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이(敬以), 호는 척재(惕齋)·하당(荷堂).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의 후예로, 영의정 유(濡)의 손자이고, 서윤 현숭(顯崇)의 아들이며, 홍중복(洪重福)의 사위이고, 홍수헌(洪受瀗)의 외손자이다.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정릉참봉(貞陵參奉)을 거쳐 익위사사어를 역임하고 세자시강원에 출입하여 자주 의견을 진술하였다.1750년(영조 26) 합천군수로 있으면서 다시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므로 삼장장원(三場壯元)의 특전으로 통정대부의 위계에 올라 여주목사·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1751년 대사간에 취임해서는 왕에게 상소하여 권신인 김상로(金尙魯)형제를 신임사화 당시의 적당(賊黨)이라 탄핵하였기 때문에, 대신을 능욕하였다는 죄명을 받아 거제도로 귀양가게 되었으나, 그는 계속 말하기를, “신은 국가의 세록지신으로서 나라의 일이 날로 비뚤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그냥 있을 수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이 글을 올립니다.”라고 하여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투철한 애국심을 보였다.그로부터 4개월 뒤에는 다시 정의현으로 옮겨졌다가 1753년에 풀려나와 초야에서 한적하게 묻혀 살 때 예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하여 학문연구에만 전심하면서 강직하게 살아갔다.그는 오원(吳瑗) 등과 사귀는 한편 특히 윤심형(尹心衡)·이태중(李太重) 등과는 더욱 친밀히 지냈다.그는 평소 강직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졌기 때문에 사색당파의 폐단을 제거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죽은 뒤에는 뒤늦게 김상로 형제의 비위를 힘써 탄핵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조 때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추증되었다.저서로는 《척재집》·《국조명신록》 등이 있다.
15. 조병현(趙秉鉉) : 1791(정조15)~1849(철종 즉위) 한산군파
조선의 문신. 자는 경길(景吉), 호는 성재(成齋)·우당(羽堂), 1822년(순조2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지평(持平)·교리(校理)를 역임하고, 1926년 홍문관(弘文館)에 등용, 이듬해 암행어사(暗行御史)를 지냈다. 이후 조병귀(趙秉龜)와 함께 풍양 조씨의 중심인물로서 1830년 대사성(大司成)이 되고, 이듬해 세자시강원 겸보덕을 겸임, 공충도(公忠道)와 경상도의 관찰사를 거쳐 1838년(헌종 4) 예조 판서에 올랐다. 이듬해 병조 판서에 전직,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을 시작하여 신부 샤스땅과 모방 등을 비롯한 많은 신자들을 잡아 죽이는 등 기해박해(己亥追害)를 일으켰다. 1841년 호조 판서로 전임, 「동문휘고(同文彙考)」의 교정당상(校正堂上)을 겸했고, 이어 병조·예조·이조·공조의 판서를 역임, 1844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었다. 이 해 좌참찬(左參贊)에 올랐다가 과거(科擧)의 부정사건에 연루, 평안도 관찰사로 좌천, 그 후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가 되었다.1847년 왕의 총애를 기화로 부정을 행하고 조정을 문란케 한다는 안도 김씨파의 대사헌 이목연(李穆淵)의 탄핵을 받고 거제도(巨濟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이듬해 풀려나왔으나 1849년(철종 즉위) 앞서의 일로 다시 탄핵을 받아 전남 지도(智島)에 위리안치된 후 사사(賜死)당했다.
16. 송시열(宋時烈,) : 1607년 음력 11월 12일~1689년 음력 7월 24일)은 조선의 문신·성리학자·정치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이자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였다. 본관은 은진이고, 자는 영보(英甫), 아명은 성뢰(聖賚), 호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효종, 현종 두 국왕을 가르친 스승이었으며 존칭은 송자(宋子).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聖人)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이며, 이는 1787년 조선 정부가 《송자대전》을 편찬함에 따라 공식화되었다. 거제유배기간 1679년3월~1680년5월
<송시열 평가>
송시열은 성격이 과격하여 정치적인 적을 많이 두었으나, 학식이 뛰어나 문하에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조선 국왕 효종, 현종 두 임금이 그의 제자였으며, 송상민, 송상기, 민정중, 김만기, 김만중, 이경화, 윤증, 민진원, 김익훈 등은 모두 그의 제자들이었다.
귀양지에서도 끊임없이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등과 같은 저서를 많이 집필하였다. 송시열은 유교 예법을 고수하여 매우 보수적인 정통 성리학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실제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여러 대안을 제시하였다.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양반의 노비증식을 억제하고 양민이 노비화되는 것을 막는 노비종모법을 옹호하였다.
평안도와 함경도의 인재를 등용하고 서얼에게 관직을 줄 것을 주장하고, 양반부녀자들의 개가를 허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가장 역점을 두었던 정책은 양민의 생활안정을 위해 공안(貢案)을 개정하고
대동법을 확대, 시행하며, 양민들의 군비부담을 줄이는 호포제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송시열은 학문에의 치적은 뛰어났으나, 선진 문물의 도입을 통한 국부의 축적의 중요성은 거의 외면하였고, 넓은 시야를 갖추지 못해 결국 조선이 19세기 근대화의 대변혁에 적응하지 못한 점도 있다. 또한 효종과 더불어 북벌 추진에 뛰어든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북벌을 주장했다는 기록이 없다.(고전번역원 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
송시열이 효종과 북벌을 논의했다는 것은 그 본인만의 주장이다. 효종이 죽고 16년 후인 숙종 1년에 그는 유배중이었다. 그는 단지 북벌의 대의만 주장했을 뿐이다. 당시 그가 그런 주장을 한 것은 실제로 북벌에 대한 의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불러들인 전쟁인 병자호란(조청전쟁)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출처: 백지원의 "왕을 참하라" 하권 20쪽)
친명 반청주의자였던 송시열은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를 오랑캐로 보고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을 해 준 명나라에 대한 예는 끝까지 각별했다. 그래서 17세기 후반 명나라가 청에 망해 가는데도 의리와 명분을 내세워 명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성을 보여주는 기록물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을 화양구곡에 남겼다. 송시열이 권력의 중심에 오간 기록들과 그의 죽음을 보면, 현재 대한민국사회가 겪고 있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의 계속된 마찰과 똑같다.
17. 김진규(金鎭圭) : 본관 광산. 자 달보(達甫). 호 죽천(竹泉). 시호 문청(文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오빠.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1682년(숙종 8) 진사시에 합격, 1686년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이조좌랑(吏曹佐郞) 재직 중,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거제도에 귀양갔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지평(持平)에 기용되었다. 이듬해 소론 남구만(南九萬)으로부터 척신으로서 월권행위가 많다는 탄핵으로 삭직되었다.
1699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서, 송시열을 배반한 윤증(尹拯)을 공박하여 소론과 대립하였다. 대사성 ·이조참판을 거쳐, 1706년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소론의 집권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1710년 대제학을 지내고 공조판서를 거쳐, 1713년 좌참찬(左參贊)이 되었다.
문장에 뛰어났고 전서 ·예서와 산수화 ·인물화에 모두 능하였다.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죽천문집》, 편저서에 《여문집성(儷文集成)》, 작품으로 글씨에 《강화충렬사비문(江華忠烈祠碑文)》 《대헌심의겸비문(大憲沈義謙碑文)》 《증지평이령비문(贈持平李翎碑文)》 등이 있다.
김진규 선생은 다른 사람이 가진 기개와 학술을 한 몸에 모아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었으나 그가 타고난 학파와 가문의 영향 속에서 숙종 당대의 격렬한 당쟁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았다.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는 바로 숙종 당대의 정치적 평가와 직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은 검소하고 준법정신이 뛰어 났지만 시기심이 많고 각박하며 편안한 기색이 없었다. 당시 시대 상황이 선생을 그렇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유배기간 동안 많은 거제의 지리 문화를 기록하고 사랑해 주신 김진규 선생께 삼가 존경의 념(念)을 바치는 바이다.
거제유배 기간 1689년~1694년
▶ 죽천(竹泉) [주: 在盤谷書院之西十數步金文淸公謫時 嘗遊於此名曰竹泉因以自號]
거제시 거제면 반곡서원 서쪽 십 수보에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文淸公)이 귀양살이 할 시절에 일찍이 노닐며 즐긴, 대숲 샘물 "죽천"이라는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은 계기가 되었다.
◯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던 중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가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서인이 재집권함에 따라 사헌부지평으로 기용되었다. 이후 노론과 소
론의 대립이 깊어지자, 1695년 소론인 남구만(南九萬)에 의하여 척신(戚臣)으로서 월권행위가 많다는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1699년 스승을 배반하였다는 명목으로 윤증(尹拯)을 공박하였다. 1701년 성
균관 대사성을 거쳐, 홍문관 부제학․대제학․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713년 강화유수에 임명되었다.
그 밖에도 세자빈객.이조참판.병조참판.공조판서.좌참찬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병조참판으로 재직중
일 때 소론에 의하여 유배당했다가 2년 뒤 풀러났다. 문장에 뛰어나 국왕의 반교문(頒敎文), 교서(敎書),
서계(書啓)를 많이 작성하였다. 또 전서․예서 및 산수화․인물화에 능하여 신사임당의 그림이나 송시열의
글씨에 대한 해설을 남기기도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대표적인 노론 정객으로서, 스승인 송시열의 노선을
충실히 지켰다. 경남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영조가 1766
년(영조 42) 왕이 치제하였으며, 1773년 문집 간행에 재물을 하사하고 서문을 친제(親製)하였다. 문장에
뛰어 났으며 산수와 인물을 잘 그렸다. 화격이 매우 높아 채녀(彩女)와 수선(水仙 : 물에 사는 신선)을 잘
그렸고, 공제 윤두서(尹斗緖)도 죽천의 「채녀도(彩女圖)」는 선비 그림 가운데 제일이라는 평을 했다. 열
성어제숙종대왕(列聖御製肅宗大王)의 글을 인용하면, “국구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 金萬基)의 둘째
아들이며 김진규의 그림은 중국의 이름난 화가 못지 않다. 연히 김진규의 조카 김보택(金普澤)의 그림을
보았는데 화법의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다. 선비는 전문화가가 아닌데, 이런 경지에 이른 것은 천재이다.
두 폭의 가리개에 제시(題詩)하기를
畵生餘事學丹靑 선비가 여줄가리로 일로 그림을 배워
才品超凡自爾成 재주가 보통사람보다 뛰어나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相傳正似傳衣鉢 서로 전하는 것이 의발(衣鉢)을 전하는 것 같으니
難弟難兄並著名 누가 낫고 누가 못한가 두 이름 뚜렸하구나.
承題畵了九重呈 명령에 따라 그림을 그려 구중궁궐에 바치니
粧粘分明亦妙精 표구도 잘했고, 그림 또한 묘하게 되었구나
自愛眞如松雪樣 집상전 안에 가리개로 만들어 졌구나
김진규가 그린 「수묵선인도(水墨仙人圖)」에
紅洛雙圖昔己殿 홍낙쌍도릉 옛날에 보았다만
神仙日幅又何善 신선이 그림을 또 어찌 이다지도 잘 그렸나
書畵屛文宜謂能 글씨와 그림과 글이 모두 능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三才備具古來鮮 시․서․화 삼재가 구비되기는 옛날에도 어려운 일.
라고 하였다. 글씨는 획이 단정하고 굳세며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에 뛰어났다. 작품으로는 남양주 김
수증(金壽增) 묘갈, 유철(兪㯙) 시비, 광주 김만기(金萬基) 비, 파주 심의겸(沈義謙) 묘갈, 장단 윤계(尹
堦) 비, 영동 송시술(松時述) 묘표, 용인 정몽주(鄭夢周) 신도비 추기(追記), 강화 충렬왕비(江華忠烈王
碑), 증지평이령비(贈持平李翎碑) 등이 있다. 문집으로 『죽천집』, 편서로 『여문집성(儷文集成)』이 있다.
묘역은 남양주 진건읍 신월리에 소재해 있다.
18. 김창집(金昌集) : 1648년(인조 26)∼1722년(경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 좌의정 상헌(尙憲)의 증손이며 영의정 수항(壽恒)의 아들, 창협(昌協)·창흡(昌翕)의 형이다.1672년(현종 13)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1675년 아버지 수항이 화를 입고 귀양가 있었으므로 과거응시를 미루었다. 1681년(숙종 7) 내시교관을 제수받았고, 1684년 공조좌랑으로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언·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아버지가 진도의 유배지에서 사사되자, 귀향하여 장례를 치르고 영평(永平)의 산중에 은거하였다.1694년 갑술환국으로 정국이 바뀌어 복관되고, 병조참의를 제수받았으나 사임하였다. 다시 동부승지·참의·대사간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뒤 철원부사를 제수받았는데, 이때 큰 기근이 들고 도둑이 들끓어 민정이 소란하자 관군을 이끌고 토평하였다. 강화유수·예조참판·개성유수 등을 역임하고, 호조·이조·형조의 판서를 지냈다.1705년 지돈령부사를 거쳐 이듬해 한성부판윤·우의정, 이어서 좌의정에까지 벼슬이 이르렀다. 1712년에는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1717년 영의정에 올랐다. 노론으로서 숙종 말년 세자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다가 소론의 탄핵을 받았고, 숙종이 죽은 뒤 영의정으로 원상(院相)이 되어 서정(庶政)을 맡았다. 경종이 즉위하여 34세가 되도록 병약하고 자녀가 없자, 후계자 선정문제로 노론·소론이 대립하였다.이때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등과 함께 노론 4대신은 연잉군(延祁君: 영조)을 왕세자로 세우기로 상의하여, 김대비(金大妃: 숙종의 계비)의 후원을 얻었다. 이에 경종의 비 어씨와 아버지 어유구(魚有龜), 사직 유봉휘(柳鳳輝)등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으나 결국 실행하게 되었다. 1721년(경종 1) 다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하여, 처음에 경종은 대소 정사를 세제에게 맡길 것을 허락하였으나 소론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하였다. 수개월 뒤 소론의 극렬한 탄핵으로 노론이 축출되고 소론 일색의 정국이 되었다. 곧 이어 소론의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등이 노론의 반역도모를 무고하여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거제도에 위리안치(1721년 12월~1722년 4월23일)되었다가 이듬해 성주에서 사사되었다. 1724년에 영조 즉위 후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영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영조때 과천에 사충서원(四忠書院)을 세워 이이명·조태채·이건명과 함께 배향하였으며,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도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국조자경편 國朝自警編》·《몽와집》 등이 있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몽와 김창집(金昌集) : 거제도에 위리안치(1721년 12월 30일~1722년 4월23일)
▶ 몽와 김창집 선생 유배 : 1721년(경종 1, 辛丑 신축년) 12월 김일경(金一鏡)의 논핵으로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이命),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등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을 유배함. 12월 12일에 서울 출발하여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1722년(경종 2, 壬寅 임인년) 4월29일 김창집(金昌集, 1648-1722)은 경북 성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5월2일 금부 도사(禁府都事)가 죄인 김창집(金昌集)이 지난 달 29일 성주(星州)에 도착하여 사사(賜死)된 일을 장문(狀聞)하였다.
(조선왕조실록)
▶ 귀양길 : 소론의 집권으로 거제도 유배형이 확정되어 1721년 12월12일 남산을 지나 한강을 건너고 용인에 도착, 이어 경북 성산에서 진주 안간역에 도착, 통영거제 사이 견내량 앞 바다 건너 거제면 배소로 향하였다 12월 30일경 거제면 배소에 도착 후 위리안치 되었다.
19. 이유원 (李裕元) : 1814(순조 14)∼1888(고종 25).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춘(京春)이고, 호는 귤산(橘山)·묵농(默農)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이항복의 9세 손이며 이조판서 계조(啓朝)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예문관검열·규장각대교를 거쳐 1845년 동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에 다녀왔으며 의주부윤과 함경관찰사를 지냈다. 철종연간의 안동 김씨 세도정치시대에 승진을 계속하여 고종 초에는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대원군이 집권하자 1865년(고종 2) 수원유수로 좌천되었다. 그 해 말 다시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어 정조 때 편찬된 법전인 『대전통편(大典通編)』을 저본으로 하여 정조 이후 90년간의 왕의 교명(敎命)과 규칙·격식을 보충 수록한 『대전회통(大典會通)』을 편찬하는 총재관이 되었다. 1867년 그의 선조와 방계 여러 권속의 지장(誌狀)과 기타 전래하는 기록 등을 수록한 『경주이씨금석록(慶州李氏金石錄)』을 편찬하였다. 대원군 집권하에서도 세자(순종) 책봉문제로 일본의 화방의질(花房義質)과 결탁하여 주청일본공사(駐淸日本公使)를 통하여 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민비의 신임을 받고 있었으며 사대외교 등 대청 관계 때문에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영의정이 되었다. 이후 대원군과 반목하였으며 1875년 주청사(奏請使)의 정사(正使)로 청에 가서 이홍장과 세자 책봉문제를 논의하였다. 1879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청의 북양대신(北洋大臣)으로 외교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이홍장으로부터 영국·프랑스·독일·미국 등 구미제국과 수호 통상하여 일본의 진출과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라는 권유를 받고 개항을 주장하였다. 1880년 조선시대 전직 관료들을 예우하는 호칭인 봉조하(奉朝賀)에 임명되자 그의 개화를 반대하는 유생 신섭(申?)의 상소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방면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후 일본과 제물포조약이 체결될 때 전권대사(全權大使)로, 공조참판 김홍집을 전권부사로 하여 일본 대표인 변리공사(辨理公使) 화방의질과 제물포 가관(假튽)에서 담판하였다. 그러나 원래 대청 외교만을 전담하고 70여 세의 고령으로 일본의 강압적인 압력에 무력하게 대처한 결과 화방의질의 주장대로 일본공사관을 경비한다는 명목으로 서울에 일본군의 주둔을 허락하는 굴욕적인 내용 등을 포함한 6개 조목과 수호조규속약(修好條規續約) 2개 조항에 조인하였다. 박학하여 외교문서와 예서(隸書)에 뛰어나 연경에 갔을 때 청 조정에서도 그의 문장과 글씨를 높이 평가하였다. 저서로는 『임하필기(林下筆記)』, 『가오고략(嘉梧藁略)』, 『귤산문고(橘山文稿)』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화도읍 가곡리에 거처하였으며,남양주 수동면 송천리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 거제유배기간 ; 1881년 8월1일 ~ 동년 12월까지(거제면)
20. 김문현(金文鉉 전라감사) 高宗 32年 6月 27日1895년 정배.1858(철종 9)∼?.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원부(元敷)이며 이조 참의 김재홍(金在弘)의 아들로서 김재청(金在淸)에게 입후(立後)하였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고종 15년(1878)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안악 군수 · 한성부 좌윤 · 이조 참의 · 공조 참판 · 대사헌 · 형조 · 예조 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893년 동학교도의 보은(報恩)집회가 있자 전라도 관찰사로 파견되었으며, 이듬해 2월 고부(古阜)민란이 발생하자 군수 조병갑(趙秉甲)을 체포하는 한편 민란의 주동자인 전봉준(全琫準)을 회유 내지 체포토록 했으나 실패했다. 그 뒤 민란이 농민전쟁으로 확대되어 농민군이 대규모로 봉기하자 영장(營將) 이광양(李光陽) 등으로 하여금 이를 토벌케 했으나 황토현(黃土峴) 전투에서 패퇴함으로써 문책을 받아 파면되고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21. 이장곤 [李長坤, 1474~?]
이장곤의 본관은 벽진(碧珍)이고, 자는 희강(希剛)·용가(龍哥)요, 호는 금헌(琴軒)·우만(寓灣)·학고(鶴皐)
등 이며, 시호는 정도(貞度) 로. 한성참군(漢城參軍)을 지낸 승언(承彦)의 넷째 아들이다. 1474년(성종
5)에 출생하였으며 김굉필(金宏弼)의 문인. 1495년(연산군 1)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02년 알
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04년 홍문관 교리(校理)로 있으면서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거제로 귀양 갔으나, 함흥으로 도주하여 양수척(楊水尺)의 무리에 섞여 살면서 목숨을 유지했다. 그 뒤
복직된 이래 중앙과 지방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박원종(朴元宗)의 추천으로
관직에 다시 임명되어 교리 ·장령(掌令)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으며. 학문과 무예를 겸비한 인물로 중
종의 신임을 받았다. 1512년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이듬해에 이조참판이 되었다.
1514년 예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이후 대사헌 ·이조판서 ·좌찬성 등
을 지냈다. 1519년 병조판서 재임시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이 주도한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참여하
였으나, 조광조(趙光祖) 등 사화에 연루된 사림들의 처형에는 반대하다가 삭직되었다. 1522년 복관되었
으나, 여강(驪江) ·창녕(昌寧) 등지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창녕의 연암서원(燕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에는 《금헌집》이 있다
22. 권질(퇴계이황의 둘째 부인인 권씨 부인 아버지) 갑자사화 1504. 연산군 10년)위리안치(圍籬安置)의 귀양을 살게 되었는데, 거제에서 딸 권씨 부인을 낳았다.
퇴계의 두번째 부인인 권질의 여식 이야기.권질의 아버지 권주는 연산군이 폐비윤씨 사건을 트집잡아 일으킨 갑자사화때 사사되고 집안은 풍비박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늘이 의를 저버리지 않아 중종반정을 계기로 다시 복권된다. 복권도 잠시 권씨의 아버지 권질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를 당한다. 집안은 다시 결단나고야 말았다.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소녀가 겪기에는 너무나 큰 아픔이었다. 결국 권질의 여식은 정신이 온전치 못하고야 말았다. 권질의 유일한 혈육. 퇴계가 권질에 문안을 갔을 때 권질은 퇴계에게 물었다. 부인의 여의고 새장가를 들었냐고. 아직 못했다는 퇴계의 말을 듣고 권질은 딸을 불러 퇴계에게 차를 대접케한다. 그리고 권질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죽고 나면 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이를 맡길 사람은 자네밖에 없는데 맡아 주겠나하고 물었다. 퇴계는 생각을 한참하고 난 후 그러하겠다고 수락을 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으로 의(義)하나에 의지해 부인으로 맞을 것을 수락했으니 그 사는 고통이 어떡했을까. 보통사람도 견디기 힘들 거늘...결국 정신이 온전치 못한 부인은 사고를 쳤다. 제삿날 젯상에 올릴 배를 치마 속에 감춘것이다. 동서들의 놀림을 받는 모습을 보고 퇴계는 조상에게 손자며느리의 모르고 한 일이니 용서해 달라 빌고 제사를 마쳤다. 잠자리에 들어 퇴계는 부인에게 말을 했다. 배를 어디에 감추었냐고. 부인이 배를 내놓자 말없이 그 배를 깎아 부인에게 먹였다고 한다. 한번은 문상을 가야하는데 도포가 헤어져 부인보고 꿰메 달라 하자 부인은 빨간 천을 덧대서 꿰멨다는 것이다. 그러나 퇴계는 사람들의 놀릴 것을 뻔히 알면서도 태연자약하게 그 도포를 입고 문상을 했다고 한다.배를 깎아 부인에게 먹이고 빨간 천을 덧댄 도포를 입고 문상을 한 퇴계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그런 부인을 단 한마디 탓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부부의 도를 잃지 않았다.
23. 송상민(宋尙敏) 숭정(崇禎) 52년1679년 거제 정배. 송상민은 조선 후기의 효자·학자로 호는 石谷(석곡), 본관은 은진이다. 부호군 송시흥의 아들이다. 송시열·송준길의 문인이며 程子(정자)를 스승으로 삼았다. 11살 때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곡하며 슬퍼하는 것이 성인과 같았다. 부친이 병환이 들었을 때는 북두칠성에 기도하여 몸으로서 대신하기를 원했고, 상을 당하여는 슬퍼함이 지나쳐서 건강을 해칠 정도였다. "잠잘 때는 몸을 반듯이 시체처럼 하지 않는다(寢不尸)"는 말을 듣고서는 반듯하게 누운적이 없었다. 1660년(현종1)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72년(현종13)에 동춘 송준길의 상을 당하여는 스승을 위하여 5개월간 상복을 입었다. 2년 후 윤휴와 허목 등이 예론을 가탁하여 2차 예송을 일으켰다. 이때 송시열은 위리안치를 당하고 송준길은 삭탈관작을 당했다. 그후 1677년(숙종3)에 조정에서는 송시열을 처형하고자 하여 고묘론이 일어났다. 이에 송상민은 원통하고 박절함을 견디지 못하여 2년 뒤 예경에 근거를 두고 소장을 만들어 왕에게 제출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때였으므로 그의 상소는 배척을 당하였고, 결국은 영의정 허적의 탄핵을 받아 죽게 되었다. 이때 송상민은 공사(피고인의 진술)를 통해 말하기를 " 예론을 들지 않으면 원통함을 송사 할 수 없고, 스승의 원통함을 설원하지 못하면 사람 노릇을 할 수 없다. " 라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혹독한 형벌을 받아 목숨을 잃었으니 이때가 향년 54세였다. 이듬해 허적이 궁중의 기름을 먹인 천막을 임의로 반출한 사건이 발각되고, 허견·윤휴 등의 역모사건이 드러나자, 숙종은 남인들을 배척하고 출적했던 서인들을 다시 등용하게 되었다. 이때 민노봉과 김청성이 송상민의 억울함을 아뢰니, 왕은 그에게 공조좌랑을 추증하고 그의 자제를 등용하도록 명하였다. 1689년(숙종15)에 남인이 다시 집권하자 추증한 벼슬을 삭탈하도록 하였으나, 1694년에 신용제의 상소에 의하여 직함이 회복되었다. 1699년(숙종25)에는 효행으로 정려를 받았으며, 1873년(고종10)에는 좌의정 송근수가 그때 일을 상소하여 사헌부 집의로 추증되었다. 묘와 묘비는 마산동에 있고, 근처에 효행으로 받은 효자 정문이 있으며, 스승을 높이는 정신이 사림에 추앙되어 정절서원(가양동)과 남간정사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석곡집』이 있다.
24. 민백상(閔百祥) (1751년~1752년)거제유배 조선 영조 때의 문신(1711~1761) 자는 이지(履之),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조부는 좌의정 진원이고 부는 관찰사 형수이다. 1740년 영조16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교리 등을 지냈다. 1745년 동지사 조관빈의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뒤, 동래부사 경상도 관찰사 대사성을 지냈다. 1751년 신임사화 때 화를 입은 아버지의 신원(伸冤)과 화를 가한 소론(少論)에 대한 중벌을 주장하다가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그 후 풀려나와 대사헌, 이조판서, 1760년 우의정에 올랐다. 홍봉한 김상복 등과 우의가 깊었는데 이들이 차례로 정승이 되자 사람들이 삼태지우라고 불렀다.
사도세자의 서도(西都)밀행을 막지 못한 책임을 느껴 좌의정으로 세자의 스승을 겸하고 있던 이후(李, 1694∼1761)와 우의정 민백상(閔百祥, 1711∼1761)이 차례로 자결하였다.
25. 이형령(李亨齡) : 1566년(명종 21)∼1614년(광해군 6). 조선 중기의 왕족.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수원(壽元). 아버지는 하원군(河原君) 정(鋥)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로 영의정 섬(暹)의 딸이다. 1578년(선조 11) 13세 때 익성정(益城正)에 봉해지고 얼마 후 도정(都正)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파천하자 아버지와 함께 걸어서 의주 행재소(行在所)에 호종(扈從)하였으며, 1596년 정의대부(正義大夫)로 가자(加資)되고 익성군(益城君)에 봉해졌다. 이 무렵 그가 왕족의 위세를 빌려 백성의 서적(書籍)을 침탈했다는 대간의 탄핵이 지속되었으나 왕이 두둔하여 돌보아줌으로써 무사하였고, 오히려 왕이 수십권의 서책을 하사하고 승헌대부(承憲大夫)에 가자하였고, 1610년 종1품인 가덕대부(嘉德大夫)가 되었다.1612년 대북파가 소북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김직재(金直哉)등이, 순화군(順和君)에게 입양한 그의 아들 진릉군(晋陵君) 태경(泰慶)을 받들어 반역을 꾀하려 했다는, 이른바 김직재의 무옥 사건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1623년 인조반정 이후 신원되었다.
26. 전벽(田闢) 1586년(선조 19)∼1659년(효종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자서(滋墅), 호는 서정(西亭). 대복(大福)의 아들로, 대록(大祿)에게 입양되었다. 1606년 선조39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이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계속 독서에만 전심하다가 1612년(광해군 4) 정자에 임명되었다. 1612년(광해군 4) 이때 전 박사 김직재(金直哉)의 아들 백함(百緘)이 많은 무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속에 문과출신 전벽도 있다는 황해병사의 비밀보고와, 양서(兩西:평안도 황해도)에서 걸객 행세를 하던 김제세의 자복에서도 그가 모역에 끼어 있다는 무고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보령현감이 되었다. 이듬해 이괄의 난에 주병 1000명으로 인조를 공주로 호종하였다. 1627년 인조5년 정묘호란때에는 전향종사관으로 참전하였다. 1638년 예조정랑으로 명나라를 공격하는 청나라 원병장 이시영의 종사관으로 출정하다가 의주에 이르러 출병을 반대하고 돌아왔으며, 예빈시정에 이르러 죽었다. 좌승지에 추증되고 평양 송호사에 제향되었다.
27. 조성환(曺成煥) : "거제도 마지막 유배자". 1912년. 1875년(고종 12)∼1948년. 독립운동가. 본관은 창녕(昌寧). 일명 욱(煜). 호는 청사(晴簑). 서울 출신. 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군부의 부패함을 숙청하려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그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3년 만에 칙령으로 특사되어 참위(參尉)로 임관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906년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하였으며, 1907년 1월 연해주로 망명하여 헤이그특사 파견 때 이상설(李相卨)을 원조하였다. 그리고 1908년 노우키에프스크(煙秋)에서 최재형(崔在亨)과 구국방략을 협의하고 북경으로 가서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한 뒤 귀국하여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다. 그 뒤 북경으로 건너가서 북경을 근거지로 하여 간도·연해주를 왕래하면서 중국혁명 원로 진기미(陳其美)와 함께 한중공동전선을 펴, 항일투쟁을 전개할 것을 주창하였다. 1912년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桂太郞)가 중국동북지방(만주)을 시찰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암살을 기도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 체포되어 거제도에 1년간 유형(流刑)되었다. 석방된 뒤 또다시 항일독립운동의 책원지인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망명하였다. 그 뒤 지린성 당국과 교섭하여 흑룡강성(黑龍江省) 오운현(烏雲縣)에 약 5,000호가 거주할 수 있는 농지를 마련하고 항일독립운동의 기지와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려고 기도하였으나 러시아혁명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일(徐一)·계화(桂和) 등과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할 것을 결의한 뒤 상해로 건너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군무부차장에 임명되었다. 1919년 4월 10일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에 노령(露領)대표의원으로 당선되고 군무부위원이 되었다. 또한, 1919년 4월 23일 국내에서 13도대표로 구성된 국민대회에서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가 조직되자 평정관(評政官)으로 피선되었다. 1919년 8월 7일 상해에서 다시 만주로 돌아와 서일·현천묵(玄天默)·김좌진(金佐鎭) 등과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고 12월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하여 군사부장에 취임, 청산리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청산리전쟁 이후 작전상 밀산(密山)으로 이동, 전만군사단체(全滿軍事團體)를 통일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여 외교부장이 되었다. 그 당시 러시아의 극동당국·동북군벌당국과 군사문제·재만한인문제를 교섭하였다. 그 뒤 대종교 총본사전리대판(總本司典理代辦)으로서 제2회교의회에서 홍범규제(弘範規制)를 수정하고 박찬익(朴贊翊)과 함께 정교가대형호(正敎加大兄號)로 승진하였다. 1925년 대종교의 민족의식과 북로군정서의 정신을 계승하여 신민부(新民府)를 조직, 외교위원장에 임명되었고, 신민부가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자 이 학교의 고문으로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경주하였다. 1925년과 1926년 두 차례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926년 북경에서 북경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北京韓國唯一獨立黨促成會)를 조직하고, 1927년 상해에서 개최된 각지 촉성회연합회 북경대표로 참가하였다.1931년 임시의정원 경기도위원으로 당선되었고, 1933년에 재선되었으며, 1934년에는 국무위원에 피선되었다. 1936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군무총장으로 봉직하였으며, 1937년 한국광복전선(韓國光復戰線)을 결성할 때에는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의 이동녕(李東寧)등과 함께 참가하였다. 그리고 1938년 군사학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군사학을 편수하였으며, 1939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피선되었다. 그해 11월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장으로 시안(西安)에 파견되어 중국정부와 협의하여 한국광복군 창설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1941년 대원수부(大元帥府)의 막료로 군무부장에 임명되어 다시 최고원수부의 판공처장(辦公處長)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 12월 임시정부 요인과 같이 환국한 뒤 한국장교단장·대한독립촉성회위원장·성균관부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8. 정서(鄭敍)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 문인. 본관은 동래(東萊). 호는 과정(瓜亭). 정사문(鄭嗣文).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항(沆)의 아들이다. 인종비 공예태후(恭睿太后) 동생의 남편으로서 왕의 총애를 받았다. 음보로 내시낭중(內侍郞中)에 이르렀으며, 1151년(의종 5)에 폐신 정함(鄭諴),김존중(金存中)의 참소로 동래 및 거제로 유배되었다가 1170년(명종 1)에 풀려났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성격이 경박하였다고도 하나 그에 대한 뚜렷한 기록은 없다. 저서로는 《과정잡서 瓜亭雜書》가 있고, 배소에서 지은 〈정과정곡 鄭瓜亭曲〉이 있다.
정서는 인종의 총애를 받은 신하로 풍류(風流) 재예(才藝)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가 궁중을 중심으로 한 문관계 내직과 환관계 내료들의 정쟁(政爭)으로 발생한 대령후 사건으로 조정의 여러 사람으로부터 참소를 받게 되자 그의 고향인 동래(東萊)에 귀양가게 되었다. 그때 의종의 말이 오래지 않아 곧 부르겠다고 했는데도 오랫동안 아무 기별이 없자 이를 슬퍼하여 지어 불렀다고 한다.
1151년 의종5년 참소를 받고 동래로 유배갔는데 곧 부르겠다는 왕의 약속을 믿고 20년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 소식 없이 세월만 흐르던 차에 이 작품은 정서가 유배생활을 했던 1151년∼1170년 사이에 창작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창작 시기는 알 수 없다. 의종 11년 2월12일 거제도로 이배(오양역 부근)되었다. 1170년 정중부의 난으로 의종이 축출되고 명종이 즉위하였으나 곧 소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과정은 국문으로 전해지는 고려 가요 중에서 유일하게 작자가 확실한 작품으로, 충신연주지사의 원류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유배문학이다. 도이장가와 함께 향가에서 고려 가요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향을 보인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 지금부터 이러한 정과정의 작자와 역사적인 창작 배경을 통한 원문 해독, 내용과 형식의 특징 그리고 작품의 문학사적 의의에 대하여 심도있게 살펴보자.
정과정은 국문으로 전해지는 고려 가요 중에서 유일하게 작자가 확실한 작품으로, 충신연주지사의 원류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유배문학이다. 도이장가와 함께 향가에서 고려 가요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향을 보인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 지금부터 이러한 정과정의 작자와 역사적인 창작 배경을 통한 원문 해독, 내용과 형식의 특징 그리고 작품의 문학사적 의의에 대하여 심도있게 살펴보자.정서(鄭敍)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에 맞서고 공을 세운 아버지, 정항(鄭伉) 덕분에 음서로 정계에 진출하였고, 정서의 누이들은 왕가와 명가의 혼인으로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정5품인 내시낭중(內侍郎中)에 이르고 동서간인 인종의 총애를 받았다. 이러한 정서가 유배를 가게 된 것은 의종의 즉위를 둘러싼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인종에게는 아들이 다섯이 있었는데 그 중에 장남이 현(晛)인 의종이고 차남이 대녕후 경이다.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대녕후 경은 도량이 넓고 인품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인종은 현(晛)인 의종을 태자에서 폐위하고 대녕후 경을 태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현을 보좌하고 있었던 정승명의 옹호로 태자를 폐하려는 논의는 무(無)로 돌아갔다. 그리고 결국 현이 왕위에 올랐다. 이러한 왕위 계승의 배경을 갖고 있던 의종은 대녕후 경을 멀리했으며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경계했다. 정서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대녕후 경과 매우 친밀한 관계였던 사람 중 하나였다. 이것은 권력을 탐했던 무리들에게 좋은 구실이 되어 참소한 결과로 의종 5년, 고향인 동래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의종에게는 이모부이기도 했던 정서는 배척해야하는 대상 중 한명으로 ‘머지않아 다시 소환하겠다’라는 약속을 하였으나 이것은 여러 번의 소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예의 상 했던 약속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러한 이유로 명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소환되지 않았고 이런 배경 가운데 정과정이 창작되게 되었다. 현존하는 고려가요 중 유일하게 작자가 드러나는 작품인 만큼 작자가 처한 처지, 그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미리 파악하고 작품 분석을 하면 쉽게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튼 정과정은 유배문학의 효시이며 형식면에서 향가와 시조 그리고 가사를 이어준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뛰어난 작품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러한 문학적 가치를 더욱 빛 낼 수 있도록 보다 많은 연구와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라는 점을 이 자리를 빌어 밝혀둔다. 또한 위 작품을 논함에 있어 정과정의 현대적 재 창조 가능성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덧 붙이려고 했으나 후고로 미룬다.
〈정과정곡 鄭瓜亭曲〉
이제현의 소악부(小樂府) 시.
억군무일불점의(憶君無日不霑衣) 님 그려 옷을 적시지 않는 날이 없으니
정사춘산촉자규(政似春山蜀子規) 바로 봄산의 자규와 비슷하지요.
위시위비인막문(爲是爲非人莫問) 옳거니 그르거니 사람들아 묻지 마오.
지응잔월효성지(只應殘月曉星知) 다만 새벽달과 별이 알 것입니다.
한글 번역 시.
내 임을 그리워하여 울고 지내더니
산 접동새와 비슷합니다.
옳지 않으며 거짓인줄을 지는 달과 새벽별은 알것입니다.
혼백이라도 님과 함께 가고 싶습니다.
나를 헐뜯는 이가 누구였습니까?
잘못도 허물도 전혀 없습니다.
뭇 사람들이 참소하는 말입니다.
가슴이 미어집니다.
아흐 님께서 이미 나를 잊으셨습니까?
마소서, 돌이켜 들으시어 다시 사랑해 주소서
얼마나 곡진한 울부짖음입니까?
고려 의종 때 정서(鄭敍)가 지은 삼진작(三眞勺)이라고도 하는 가요입니다.
유배지에서 임금을 그리는 충신의 연주지사(戀主之詞)로 800여년을 격하여 정서의 그 울림이 들리는듯합니다.
<題墨竹後> 묵죽 그림에 제목을 달고../정서(鄭敍)
한가한 나머지 붓과 벼루를 희롱하여 / 閑餘弄筆硯
한 줄기 대를 그리었네 / 寫作一竿竹
벽에 붙여 놓고 이따금 보노니 / 時於壁上看
그윽한 자태가 짐짓 속되지 않네 / 幽姿故不俗
29. 정규(鄭逵)
선조(宣祖) 38년(1605) 을사(乙巳) 진사시(進士試). 광해군(光海君) 8년(1616) 병진(丙辰)증광시(增廣試). 광해군(光海君)8년(1616년), 증광시(增廣試) 갑과2(甲科2)
생년(生年) 1567년, 정묘. 자(字) 유지(由之). 본관(本貫) 해주(海州). 부(父) 정문영(鄭文英). 조부(祖父) 정척. 증조부(曾祖父) 정언각(鄭彦慤). 외조부(外祖父) 홍순(洪純)형(兄) 정조(鄭造). 소과(小科) 1605(을사) 진사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직장(直長).광해군10년 형조 참의 , 연위사(延慰使) , 동부승지, 우부승지, 병조 참의, 좌부승지, 병조참의 대사간(大司諫 광해13년) 인조1년,1623년에 전 대사간 정규(鄭逵)가 인조반정후에 지세포(知世浦)로 정배(定配) 그 후 유효립의 옥사 때 인조6년 2월16일(무신) (허유 역모사건 진압, 관련자처벌)때 거제부 안치.
30. 유현립(柳顯立)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원찬류(遠竄類) 계해년(인조 1, 1623년), 유희발 [柳希發, 1568~1623]의 아들, 유희분은 숙부. 형제 :급제 유중립(柳中立)ㆍ현감 유시립(柳時立), 유유립(柳有立)ㆍ유영립(柳英立), 출처 :연려실기술 제23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인조반정후 유배후 다시 유효립의 옥사때 인조 6년 1628년 2월16일(무신)때 義禁府에서 巨濟 知世浦 유현립(柳顯立) 定配함. 인조6년 2월16일(무신) 승정원일기.
31. 류명립(柳命立) : 1600(선조33)~1647(인조25), 조선의 문신. 자는 낙천(樂天), 병조 판서 희분(希奮)의 아들. 1621년(광해군13) 진사(進士)로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에 등용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光海君) 때 득세했던 유경종(柳敬宗) 등 유씨가 제거되자 거제도(巨濟島)에 유배당했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방환(放還), 전적(典籍)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조부(祖父) 유자신(柳自新), 증조부(曾祖父) 유잠(柳潛), 처부(妻父) 윤중삼(尹重三), 본관(本貫) 문화(文化). 유배기간 :인조 6년 1628년~1636년
32. 유한인(兪漢人) : 1741(영조 17)∼1806(순조 6).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여옥(汝玉), 호는 도암(陶庵). 아버지는 진사 언익(彦益)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이다.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74년(영조 50)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788년(정조 12) 정언이 되었다. 1804년(순조 4) 외직인 단성현감으로 나가 민막(民#막05)을 제거하고 기민(饑民)을 구휼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그 고을 백성들이 뒤에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그는 인품이 청간(淸簡), 엄정(嚴正)하였으며 공무를 수행함에 있어서는 사사로운 일을 돌보지 아니하였다. 또한, 여가에는 경의(經義)를 강론하며 백성들의 교화에 힘쓰는 한편, 청담(淸淡)한 시취(詩趣)로 시영(詩詠)을 즐기기도 하였다. 1806년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가던 길에 갑자기 죽었으며, 왕이 예관을 보내어 사제(賜祭)하였다. 1810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이듬해에 모현사(慕賢祠)를 사액받아 그곳에 제향되었다.
33. 김약로(金若魯) : 1694년(숙종 20)∼1753년(영조 2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풍. 자는 이민(而敏, 而民), 호는 만휴당(晩休堂). 아버지는 대제학 유(楺)이다. 1727년(영조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고, 그뒤 《숙종실록》 보충의 잘못을 논하다가 유배당하였으나 이듬해에 석방되었다. 1731년 정언이 된 뒤 지평·교리·수찬을 거쳐 1736년 승지, 1740년 개성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병조참판·예조참판을 거쳐 1742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744년 공조·호조·병조의 판서가 되었고, 1746년 우참찬, 이듬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거쳐 1749년 우의정, 그뒤 좌의정이 되었다. 1752년 약방도제조(藥房都提調)가 되었는데, 왕세손이 죽자 파직당하였으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다시 기용되었다. 한때 아우 취로(取魯)·상로(相魯)와 함께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 세도를 부리기도 하였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34. 이정(李楨) : 복창군정(福昌君楨), 미상∼1680년(숙종 6). 조선 후기의 종실. 본관은 전주(全州). 인조의 3남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아들이다. 복창군(福昌君)에 봉하여졌다. 진하 겸 사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680년 경신대출척 때에는 남인 허견(許堅) 등의 추대를 받아 역모를 한다는 무고를 받고, 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의 두 아우와 함께 삼복(三福)이 역모죄로 유배, 사사되었다.
35. 이민곤(李敏坤) : 1695(숙종 21)∼1756(영조 32).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후이(厚而), 호는 임은(林隱). 아버지는 헌기(軒紀)이며, 어머니는 능성구씨(綾城具氏)로 환(奐)의 딸이다.1718년 박필주(朴弼周)에게 사사하였고, 그뒤 김한간(金翰榦)·이재(李縡)의 문하에도 출입하였으며, 〈오자근사록변 五子近思錄辨〉 등을 저술하여 학계의 중망(重望)을 받았다.1727년(영조 3)사마시에 합격하고, 1735년 문과에 급제한 뒤 승정원의 주서가 되었다. 이어 사헌부의 지평이 되어 경연(經筵)에 나가 의리를 밝히고 언로를 개척하게 하였다.그뒤 시임(時任)정승을 탄핵하다가 삭직되었다.1746년 다시 보령현감이 되어서는 〈황극연의 皇極衍義〉를 지어 왕에게 바쳐서 왕도정치를 촉구하였다.1755년 사간이 되었을 때 이천보(李天輔)를 탄핵하다가 귀양가는 조종보(趙宗輔)를 신원하는 상소를 올려, 언로를 막는 것은 망국의 근본이라 직간하다가 거제로 귀양갔다. 그해 다시 풀려나 시강원의 보덕으로 승진되었고, 다시 사헌부의 집의와 사간에 임명되었다.이때 강도유수(江都留守)의 독직사건이 있어 이를 논핵하다가 육진(六鎭)으로 귀양가던 도중 금성(金城) 창도역(昌道驛)의 숙소가 불탈 때 타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귀양을 풀고 관직을 회복, 도승지에 추증하였다.저서로는 《임은집》이 있다.
36. 안양군(安陽君) : 성종 11년(1480) ~ 연산군 11년(1505). 안양군(安陽君)은 조선 초기의 왕자(王子)로 이름은 행이다. 성종(成宗)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성종의 후궁인 귀인(貴人) 정씨이다. 부인(夫人)은 판서를 지낸 능천궁(綾川君) 구수영(具壽永)의 딸이다. 연산군(燕山君) 10년(1504)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연산군은 생모인 폐비윤씨사건의 원인이 성종(成宗)의 후궁(後宮)인 정씨와 엄(嚴)씨의 참소에 있다고 판단하여,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안양군의 친동생인 봉안군(鳳安君) 봉을 이에 연루시켜 생모(生母) 정씨를 때리게 하였다. 봉안군은 자기 어머니인 줄 알고 있었으나, 안양군은 누구인지도 모르고 생모(生母) 정씨를 때릴 정도로 우둔하였다. 같은 해 안양군은 제천으로 안치되고 집안의 재산은 적몰되었다. 그리고 노비 전토(田土) 사채(私債)는 추쇄되었고, 처는 견성군(甄城君)에게 사여되었으며 봉안군과 함께 사약을 받고 죽었다. 중종(中宗) 1년(1506)에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중종(中宗)이 즉위하면서 안양군의 생모인 정씨에게는 삼년제물이 내려지고 안양군과 봉안군이 복작(復爵)되어 쌀 종이 정포(正布)․면 등이 내려짐과 동시에 관리(管理)를 파견하여 제사(祭祀)지내도록 하였다. 중종(中宗) 15년(1520)에 안양군 부인(夫人)의 상소에 따라 좋은 땅을 골라 양주에 개장하고, 고종(高宗) 2년(1865)에 지금의 군포시 산본동 광정으로 옮겼다. 시호(諡號)는 공회(恭懷)이다.
37. 봉안군(鳳安君) : 1482(성종 13)∼1505(연산군 11), 휘(諱)는 봉(봉), 자(字)는 성지(誠之) 또는 풍애(楓崖), 시호(諡號)는 정민(貞愍). 성종대왕의 6남이며 어머니는 귀인 초계정씨, 판서 발(潑)의 딸로 2남 1녀를 낳았다. 곧 안양군과 봉안군이고 1녀는 정혜옹주이다. 공은 1505년(연산군 11) 어머니와 형(兄) 안양군과 같은 날에 화를 당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안양군은 복권이 되어 시호(諡號)가 공회(恭檜)라고 내려졌으나, 공은 1872년(고종 9)에 시호(諡號)가 정민(貞愍)으로 내려졌다. 같은 해 3월에 종정경 인설(寅卨)을 보내어 제사(祭祀)를 지냈다. 배위(配位)는 의춘군부인 평양조씨로 판관(判官) 증(贈) 좌찬성(左贊成) 기(紀)의 딸이다. 묘소(墓所)는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 합폄이다.
38. 이총(李摠) : 미상∼1504년(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왕족.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원(百源), 호는 서호주인(西湖主人)·구로주인(鷗鷺主人)·월창(月牕). 태종의 증손이며, 우산군(牛山君) 종(踵)의 아들로, 부인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의령남씨(宜寧南氏) 효온(孝溫)의 딸이다. 유년에 무풍부정(茂豊副正)에 제수되었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일손(金馹孫)·강경서(姜景敍) 등과 교유하였으며, 1498년(연산군 4)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고, 1504년 갑자사화 때 아버지를 비롯하여 형인 한산정(韓山正) 정(挺), 화원부정(花源副正) 간(揀), 청양부정(靑陽副正) 건(揵), 금성부정(金城副正) 변(抃), 동생인 용성부정(龍城副正) 간(秆) 등과 함께 7부자가 죽임을 당하였다. 남효온·손유손(孫裕孫) 등과 함께 청담파의 중심인물로서 시문·음률·서예에 뛰어났으며, 양화진에 집을 짓고 고기잡이로 유유자적하였다. 시조 약간이 전한다. 1506년(중종 1) 무풍도정(茂豊都正)에 추증되었으며, 1705년(숙종 31)정려를 받았고, 1738년(영조 14) 무풍군(茂豊君)에 가증,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39. 조국빈(趙國賓) (1570(선조 3) ∼ ? )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양이며 자는 경관이고 호는 설죽이다. 참봉 조유백의 아들이다. 1906년(선조 39) 진사시에 합격하고 바로 중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에 임용되었다. 그 뒤 정언·지평 등을 역임 하면서 언관으로 활약 하다가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다가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그 뒤 인조반정으로 다시 관직에 나아가 1632년(인조 10) 형조참의를 지내기도 하였으나 반대파의 박해로 벼슬에서 물러나 충주에서 은거 하였다
40. 김복택(金福澤) : 미상∼1740년(영조 1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광성부원군(光成府院君) 만기(萬基)의 손자이며, 인경왕후의 조카이다. 1721년(경종 1)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4대신이 경종의 건강이 나쁘고 세자도 없어 세제(世弟) 책봉을 논의하자, 그는 서덕수(徐德修)를 통하여 당시 잠저(潛邸)에 있던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에게 이 말을 전하였다. 김창집 등의 주장으로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어 정무를 대리하므로, 책봉에 반대하던 소론 승지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등은 노론 4대신을 무고하여 신임사화를 일으켰다. 이때 그도 이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1724년 유배에서 풀려난 뒤 영휘전참봉(永徽殿參奉)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신임사화 때 노론파의 대다수가 죽었는데도 유배만 당하였던 사실과 신임사화를 비난한 것이 영조의 비위에 거슬려 1740년 투옥되어 옥사하였다. 그 뒤 영조는 자신의 지나친 조처를 후회하였다. 1779년(정조 3) 신임사화 때 죽은 노론파 대신을 증시(贈諡)하면서 그도 증질(贈秩)되고 자손은 녹용(錄用)하도록 하였다.
41. 이형령(李亨齡) : 1566년(명종 21)∼1614년(광해군 6). 조선 중기의 왕족.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수원(壽元). 아버지는 하원군(河原君) 정(鋥)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로 영의정 섬(暹)의 딸이다. 1578년(선조 11) 13세 때 익성정(益城正)에 봉해지고 얼마 후 도정(都正)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파천하자 아버지와 함께 걸어서 의주 행재소(行在所)에 호종(扈從)하였으며, 1596년 정의대부(正義大夫)로 가자(加資)되고 익성군(益城君)에 봉해졌다. 이무렵 그가 왕족의 위세를 빌려 백성의 서적(書籍)을 침탈했다는 대간의 탄핵이 지속되었으나 왕이 두둔하여 돌보아줌으로써 무사하였고, 오히려 왕이 수십권의 서책을 하사하고 승헌대부(承憲大夫)에 가자하였고, 1610년 종1품인 가덕대부(嘉德大夫)가 되었다. 1612년 대북파가 소북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김직재(金直哉) 등이, 순화군(順和君)에게 입양한 그의 아들 진릉군(晋陵君) 태경(泰慶)을 받들어 반역을 꾀하려 했다는, 이른바 김직재의 무옥 사건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신원되었다.
42. 김신겸(金信謙) : 1693년(숙종 19)∼1738년(영조 14).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 자는 존보(尊甫), 호는 증소(橧巢). 아버지는 진사 창업(昌業)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익풍군(益蘴君) 속(涑)의 딸이다. 숙부인 김창흡(金昌翕)을 사사하였다. 1721년(경종 1)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큰아버지인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 신임사화에 거제도로 유배될 때 연루되어 함께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에 풀려나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강원도 영월의 산중에 들어가 산수를 즐기면서 후진교육에 힘썼다. 그는 당시의 석학인 민우수(閔遇洙)·유숙기(兪肅基)·이봉상(李鳳祥) 등과 더불어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명덕설(明德說) 등을 강론하였다. 그는 시문에 뛰어나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특히 〈백육애음 百六哀吟〉이라는 사우(師友)들 106명의 행적을 읊은 대서사시를 남겼다. 그는 전국 각지의 명승고적·명산·바다·도서 등지를 두루 구경하고 사적·풍속·지리·산물 등을 소개한 기행문을 많이 남겼다. 이조판서 겸 좨주(祭酒)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증소집(橧巢集)》 10권 5책이 있다.
43. 유희량(柳希亮) : 1575(선조 8)∼1628(인조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용경(龍卿), 호는 제교(霽嶠)·봉음(峯陰). 국구(國舅)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 자신(自新)의 아들이다. 1603년(선조 36)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설서·정언·전한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이조정랑·교리·수찬을 역임하였고, 지평·사인을 거쳐 직제학에 이르렀다. 1610년 분승지(分承旨)·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고 예조참판이 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집안이 주살 또는 유배될 때 그도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1628년 귀양가 있던 아들 두립(斗立)과 조카 효립(孝立)의 모역사건에 연좌되어 유배지에서 교살되었다.
44. 이노춘(李魯春) : 1752년(영조 28)∼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군정(君正). 여주 출신. 동지돈령부사 용모(龍模)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윤동석(尹東奭)의 딸이다. 1779년(정조 3) 유생강제(儒生講製)에서 제거수(製居首)가 되었으며, 178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홍문관에 등용되었다. 1782년 강화경력(江華經歷)이 되고 이듬해 교리·부응교·서장관을 거쳐, 1784년 응교로서 채제공(蔡濟恭)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운산군에 유배되었다. 1785년 흑산도에 안치되었다가 1799년에 풀려나 이조참의가 되었다. 1800년(순조 즉위) 강원도관찰사가 되고, 1802년 실록청당상으로 《정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대사성이 되었다. 1803년 예조참판이 되었으나 1806년 탄핵을 받고 거제부에 유배되었다. 편서로 《홍문관지 弘文館志》가 있다.
45. 신구(申球) : 1666년(현종 7)∼1734년(영조 10). 조선 후기의 유생(儒生).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관(綰). 자는 군미(君美). 고려개국공신 숭겸(崇謙)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육(堉)이며, 아버지는 여규(汝逵)이고, 어머니는 청주한씨(淸州韓氏)로 수(脩)의 현손녀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제주에 안치된 송시열을 위하여 소를 올렸고, 1716년 7월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유생 60명이 연명하여 소를 올릴 때 그 소두(疏頭)가 되어 윤선거(尹宣擧)와 그의 아들 증(拯)을 논핵하여 그들의 관작을 추탈하고 윤선거의 문집을 훼판하게 하였다. 1722년 신임사화로 거제에 유배되었다가 영조가 즉위하자 방환되어 영릉(英陵)·희릉(禧陵)의 참봉을 지냈으나 1727년(영조 3) 정미환국으로 다시 쫓겨나 고향으로 은퇴하였다
46. 유기창(兪起昌) : 1437(세종 19)∼1514(중종 9).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자성(子盛), 호는 서호산인(西湖山人). 참판 해(解)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한 뒤 1496년(연산군 2) 만포진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가 되고 뒤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504년 좌의정 성준(成俊)이 왕의 난정(亂政)을 극간하다가 교살될 때 그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으며, 그 뒤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석방되어 비인현(庇仁縣)에 은거하면서 사냥으로 나날을 지냈다.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근엄하며 9군(郡)을 역사(歷仕)할 때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燕山君日記, 國朝人物考. 〈權仁赫〉
공은 선공 참판공(휘 해)과 모부인 죽산박씨 사이에 세종19년 정사에 유복자로 태어나셨다. 공은 세종조의 명신 집현전 직제학 유효통공(영의정 황보인공의 사돈)의 재종질이며, 사육신 매죽헌 성삼문 선생과는 이종사촌 간이시다. 이로 인해 세조 때의 계유정난과 단종복위사건으로 인한 참상을 남달리 겪으셨다. 성종조에 무과에 급제하여 구읍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벼슬이 첨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연산군의 난정에 극간하다 죽은 영의정 성준공(성삼문 선생의 당숙)의 친당으로 몰려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이 되어 병조참의에 특배되었으나 공은 이를 사양하고 향리인 비인으로 낙향하여 78세에 고종명하시니 '연산 사절신'으로 일컬었다. 그러한 칭송을 받게 된 것은, 공께서 비록 구주(연산군)에게 부당하게 유배를 당하였으나 새임금인 중종조에 벼슬한다는 것은 '충신불사이군'의 의리에 어긋난다는 절개에 투철하였기 때문이었다. 임종에 자손들에게 "새 임금 중종이 제수한 병조참의의 관직을 신주에 쓰지 말고 연산군 때의 벼슬인 첨지중추부사를 쓰라."라고 유언하셨다. 세상에서는 공의 절개와 청덕을 백이숙제에 비유하였다. 호는 서호산인이요,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
47. 복창군 이정(福昌君 李楨) : 1641-1680년, 조선중기의 왕손으로 인조의 손자이자 원종의 3남 능창대군 이전의 손자이다. 조선중기의 왕손으로 본관은 전주, 휘는 정(楨)이다. 인조의 손자이자 원종의 3남 능창대군 이전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인조의 3남 인평대군 이요(李㴭)이며, 어머니는 감사 증 우의정 오단의 딸로 복천부부인이다. 부인은 창원황씨로 군수 도명(道明)의 딸이다. 대군의 2남으로 1641년 탄생하였다. 진하(進賀) 겸 사은정사(謝恩正使)로 청나라에 파견 되었으나 1680년(숙종 6) 남인 일파가 정치적으로 대거 실각하자 서인이 득세를 하게 되므로 1674년(현종 15)에 예론(禮論)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은 남인들은 숙종으로부터 그다지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던 차 당시의 영의정 허적(許積)의 유악남용사건(油渥濫用事件)으로 왕은 더욱 남인들을 꺼려하게 되었다. 이 때 서인 중 김석주 · 김익훈 등이 허적의 서자인 허견(許堅)이 종실인 복창 · 복선 · 복평군 3형제와 같이 역모(逆謀)한다고 고발하여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복창군의 3형제와 허견 · 허적 · 윤휴도 죽음을 당하고 나머지 일파도 옥사(獄死) · 사사(賜死) 파직, 유배되었다. 이로써 남인들은 큰 타격을 받고 실각하였으며 후에 서인 김수항(金壽恒)은 영의정이 되고 김석주(金錫胄)는 우의정이 되어 정권은 서인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1680년(숙종 6)에 횡피죄명(橫被罪名)으로 사사되었고 묘소는 대군묘에서 서쪽 1강에 있다. 1864년(고종 1) 7월에 복관작위되고 특명으로 완원군의 뒤를 잇게 하였다.
48. 권익관(權益寬) : 1676년(숙종 2)∼1730년(영조 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홍보(弘甫). 아버지는 사간 두기(斗紀)이며, 어머니는 대사간 이합(李柙)의 딸이다.1711년(숙종 37)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사서·홍문관수찬·부교리·헌납·세자시강원문학·보덕·홍문관부응교를 지냈으며, 1723년(경종 3) 충청감사가 되었다. 1724년(영조 즉위) 대사간에 오르고, 이어 승지를 지냈다. 신임사화로 실각당했던 노론이 영조의 즉위로 재집권하자 소론을 축출하였는데, 이때 소론이었던 관계로 함경도 경원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거제에 정배되었다. 1727년에 풀려나와 공조참의·함경감사에 올랐으나, 1728년 같은 소론이었던 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 연좌되어 다시 절도(絶島)에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그러나 그해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또다시 변방에 정배되었다. 1735년 관작이 회복되었으나, 1776년에 다시 반역의 죄상이 추궁되어 관작이 추탈되었다.
49. 익성군 이향령(益城君 李享齡, 1566년 - 1614년) : 조선 중기의 왕족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휘는 향령(享齡), 자는 수원(壽元)이다. 덕흥대원군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하원군(河原君) 의헌공 이정(李鋥)이며, 어머니는 남양군부인 홍씨(南陽郡夫人 洪氏)로 영의정 홍섬(洪暹)의 딸이다. 부인은 군수(郡守) 진주인(晋州人) 소수(蘇遂)의 딸로 진주군부인(晋州郡夫人) 소씨(蘇氏)이다. 하원군 2남으로 1566년(명종 21) 3월 24일생으로 탄생하여 1578년(선조 11) 13세 때 익성정(益城正)에 봉해지고, 얼마 후 도정(都正)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파천하자 아버지 하원군과 함께 걸어서 의주 행재소(行在所)에 호종(扈從)하였으며, 1596년 정의대부(正義大夫)로 가자(加資)되고, 익성군(益城君)에 봉해졌다. 이무렵 그가 왕족의 위세를 빌려 백성의 서적(書籍)을 침탈했다는 대간의 탄핵이 지속되었으나 왕이 두둔하여 돌보아줌으로써 무사하였고, 오히려 왕이 수십권의 서책을 하사하고 승헌대부(承憲大夫)에 가자하였고, 1610년 종1품인 가덕대부(嘉德大夫)가 되었다. 1612년 대북파가 소북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김직재(金直哉) 등이, 순화군(順和君) 이보(李王+土)에게 입양한 그의 아들 진릉군(晉陵君) 이태경(李泰慶)을 받들어 반역을 꾀하려 했다는, 이른바 김직재의 무옥 사건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어 1614년(광해 6) 7월 1일 배소(配所)에서 향년 49세로 별세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신원되었다. 묘소는 충남 논산시 은진면 용산리 산 93-3 익성군신도비 및 무석(益城君神道碑 및 武石)으로 충남유형문화재 제86호로 지정 보호되어지고 있다.
50. 이수백(李守白) : 미상∼1634년(인조 12). 조선 중기의 무신. 1606년(선조 39) 경원판관을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에 포도청종사관으로 있었다. 사람이 본래 음란하고 도의에 어긋난 일을 무상으로 하여 추행이 훤히 드러났으나 징계하여 감금하지 않았기에 포도청의 위엄을 빙자하여 수절과부를 모욕, 겁간하는 등 악한 짓을 계속하여 그 행태가 사람같지 않았다. 또한,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고 큰 옥사를 일으킬 적에 공이 따르지 않자 노하여 가버린 적도 있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변을 일으키자 그의 부하로 난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괄의 목을 베어오는 자에게 부원군에 봉하고 천금을 주겠다는 현상이 붙자 기익헌(奇益獻)과 함께 괄과 괄의 아우 수(邃) 및 괄의 아들 전(旃), 한명련(韓明璉) 등 9명의 목을 베어 원수부(元帥府)에 전하였다. 이 사실로 죽음을 특별히 면제받고 귀양갔다가 수년 후 사면되어 편의대로 거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괄의 난 때 희생당한 청흥군(靑興君) 이중로(李重老)의 아들 문웅(文雄)과, 풍천부사 박영신(朴榮臣)의 아들 지병(之屛)에 의하여 대낮에 서울거리에서 목이 베어 죽음을 당하였다.
51. 김보택 (金普澤) : 1672년(현종13)~1717(숙종4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중시(仲施), 호는 척재(척齋), 아버지는 병조판서 김진구(金鎭龜)이며 할아버지는 숙종의 장인 광성부원군 김만기(金萬基)이다. 1695년(숙종21)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연원도 찰방(察訪)이 되었다가 검열, 정언 등 삼사(三司)의 언론직을 역임하였다. 1701년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처벌문제를 놓고 노론과 소론이 정면으로 대립하였을 때 형 김춘택(金春澤)과 함께 노론의 선봉이 되어 희빈을 인현왕후 민씨에 대한 역(逆)으로 단정, 그 처형을 주장하면서 전은설(全恩設)을 펴는 소론 영수 남구만(南九萬)과 최석정(崔錫鼎)을 호역(護逆)으로 몰았으며, 소론의 산림(山林)이었던 윤증(尹拯)에 대해서도 배사(背師)를 들어 배척하였다. 문장과 글씨, 그림에 능하였다. 시호는 익헌(翼軒)이다.
52. 고려 의종(毅宗, 1127년 ~ 1173년) : 고려 제18대 임금(재위: 1146년~1170년)이다. 휘는 현(晛), 자는 일승(日升), 시호는 의종강과장효대왕(毅宗剛果莊孝大王). 인종과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의 맏아들이다. 1134년에 왕태자(王太子)가 되었으며 1146년 인종이 죽자 즉위하였다. 즉위한 뒤에 그는 이미 인종 때에 일어난 이자겸의 전횡과 반란, 묘청의 난 등으로 크게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여 쇠약해진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무신(武臣)들을 총애하여 친위군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정중부, 이의방, 이고, 이의민 등이 발탁되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문신(文臣)들 및 환관(宦官)들과 어울려 유흥과 오락에 깊이 빠지고, 지나치게 불교·음양설(陰陽說)·선풍(仙風)을 중요시하고 유교를 멀리하는 등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초래하였고, 이 과정에서 무신들을 소외시켜 천대받게 만들어 무신정변(武臣政變)의 계기를 낳았다. 1170년 보현원(普賢院)에 거동하였을 때에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의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무신정변이 일어남으로써 무신 정권에 의해 폐위되어 3년간 거제도의 폐왕성(廢王城)에 유폐되었다. 그 뒤 1173년에 김보당(金甫當) 등 의종 복위 세력이 무신 정권에 항거하여 거병하면서 사람을 보내어 유배된 의종을 모셔와 받들고 경주로 가서 웅거하였다. 그러나 무신 정권이 보낸 군대에게 모두 패하였다. 이때 의종은 총애하던 장수 이의민에 의해 곤원사(坤元寺) 연못가에서 술을 두어 잔 마신 뒤에 등뼈가 꺾여지고 시체는 그대로 연못에 수장당하는 비참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 47세였으며 이후 동생인 명종에 의해 능이 조성되었는데 바로 희릉(禧陵)이다. 현재 희릉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개성 동쪽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53. 승통(僧統) 정(竀){僧統竀(승통탱)}, 왕수(王㸂)부여후, 부여공(夫餘公) 수(燧), 1112년(예종 7).
① 부여공(夫餘公) 수(燧), : 1112년(예종 7) , 문종의 12번째 아들(인경현비 이씨 둘째아들,순종 선종 숙종의 배다른 형제.) 移置扶餘公燧于巨濟縣(이치부여공수우거제현)
② 僧統竀(승통탱) : 流俗離寺住持(류속리사주지) 속리사(俗離寺) 주지. 僧統竀(승통탱) : 승통 정(竀)을 于巨濟縣(우거제현) : 거제현으로 귀양보냈다. 1112년
僧統竀(승통탱) : 문종의 여섯째 아들. 순종 선종 숙종 형제임.
1112년 8월, 속리사(俗離寺) 주지승통(住持僧統) 정(竀)은 문종의 아들로 속리사에 주지로 있으면서 많은 재산을 축적하여 사람들에게 후히 베풀어 주어 귀부하는 자가 많았는데, 누군가 정이 전주목사 이여림, 상서우승 김인석등과 반역을 꾀한다고 고해 정은 거제로 귀양가고 그 외 수십명이 귀양가거나 목이 잘렸다.
승통(僧統)정(竀) : 1112년 고려 예종7년 4월, 송 정화 二年 2년, /고려사宴群臣于賞春亭. 時, 又御禁內紗樓, 製牧丹詩命儒臣應製, 顯宗嘗手植牧丹於樓前, 自德宗肅宗皆有詩. 流, 僧統竀于巨濟.
봄을 맞아 즐기는 정자(상춘정)에서 뭇 신하들이 잔치를 열었다. 이때, 또 대궐 안의 사루(沙樓)에 거둥하여 모란시(牧丹詩)를 유신에게 명하여 짓게 하고 현종이 일찍이 누각 앞에서 모란을 손수 심었더니 덕종으로부터 숙종에 이르기까지 모두 영화시(詠花詩)가 있었다. 8월 승통정을 거제로 귀양보냈다.
54. 김보(金普) :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문신. 공민왕의 수종공신(隨從功臣).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죽강(竹岡). 당시의 권신 김용(金鏞) 등과 더불어 권행(權幸)을 다투던 친원파 인물이다.1351년(공민왕 즉위년)공민왕이 고려왕으로 지명됨에 따라 왕을 호종하여 입국하였으며 그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임명되었다.이듬해 다시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임명되고 의성(義城) 덕천창제조(德泉倉提調)를 겸하였다.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부터 따랐던 수종공신들을 녹훈(錄勳)할 때 찬성사(贊成事) 조일신(趙日新) 등과 더불어 일등공신에 오르고 아울러 충근양절광보공신(忠勤亮節匡輔功臣)의 호를 하사받았으며, 뒤에 금녕부원군(金寧府院君)에 봉해졌다.1354년 찬성사에 임명되어 지밀직사사 전보문(全普門)과 더불어 하정사(賀正使)로 원나라에 파견되었으며, 그뒤에도 여러 차례 원나라에 드나들었다. 공민왕의 비호를 받고 김용과 권세를 다투면서 인사행정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그 세력이 자못 강성하였다.그러던 중 1355년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게 되자 김용은 복직을 봉쇄하기 위하여 거짓 왕명을 꾸며 백관들로 하여금 부모상에 3년간 벼슬을 쉬도록 하는 법을 시행하게 하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왕이 3년상을 폐지, 다시 불러들여 첨의평리에 복관하고, 이어 중서문하시랑평장사판밀직(中書門下侍郎平章事判密直)에 제수하였다.1356년에 반원정치(反元政治)가 결행됨에 따라 부원배(附元輩)의 거두였던 기철(奇轍) 등이 주륙되면서 함께 체포되어 장형(杖刑)을 받고 가라산(加羅山)으로 유배되었다. 그뒤에 신돈(辛旽)이 집권하면서 이춘부(李春富)와 함께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발탁되더니, 곧 이어 수시중(守侍中)에까지 이르렀다.그러나 신돈과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같은해 9월에 면직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55. 오희길(吳希吉) : 1556~1625년.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길지(吉之), 호는 도암(鞱庵). 언기(彦麒)의 아들이다. 김인후(金麟厚)·정여립(鄭汝立)의 문인이다. 고창에 살았는데 스승 정여립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비방하는 말을 듣고 그 잘못된 점을 적어 정여립에게 주어 노여움을 샀다.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그의 편지를 정여립이 보관하고 있다가 나타남에 따라 석방되어 천거되었다. 후릉참봉(厚陵參奉)을 거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주의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으로서 태조의 어진(御眞)을 비롯한 제기(祭器)와 역대 실록을 내장산에 숨겨 보전하였다. 그 뒤 전쟁의 참화를 수습할 쇄신책과 인심수습을 상소하였다.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과 태인현감을 지내고 70세에 죽었다. 고창의 월계정사(月溪精舍)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도동연원록(道東淵源錄)》이 있다. 1619년 적당(賊黨)의 무함으로 거제로 유배, 도동연원록(道東淵源錄)과 명척난역문(明斥亂逆文)을 지음. 1635년 거제배소에서 사망.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