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할머니의 엄마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정유경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할머니의
엄마 이야기,
그러니까 나, 이은솔의
증조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일제강점기에 셋째 딸로 태어나
혼자 몰래 글을 깨친 이야기며,
열일곱에 시집와
가난한 집안의 새애기가 되어
가난은 해도 인물 좋고 똑똑한 남편이
마음에 들었더라는 이야기며,
시집올 때 어머니가 쥐여 준 돈이며 예물을 털어
빚을 갚아 남편의 머승살이를 막고
남은 돈으로 농사지을 땅을 좀 구해
집안의 기반을 세웠다는 이야기며
듣기 좋은 목소리로 이야기책을 하도 잘 읽어
달 밝은 밤이면 마을 사람들이 그 소리 들으러
퍽도 많이 모여들었다는 이야기며
시부모님 사랑받고 남편 사랑도 받고
'신가는 장가 잘 갔다'는 마을 사람 칭찬도
자자하게 들었더라는 이야기며,
딸 셋 아들도 하나 낳아
아쉬울 게 하나도 없었더라는 이야기며,
해방도 되어 그때가
생각하면 제일 좋았더라는 이야기며,
그렇게 계속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 거냐는 이야기며,
그러다 그만 전쟁이 터지고
어느 추운 겨울 하늘도 무심하시게
마을을 지키던 남편이 세상을 떠나게 된 이야기며,
만삭의 몸으로 애들을 데리고
친정 마을로 몸을 피했다 돌아오니
마을 사람들이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있었더라는 이야기며,
그렇게 나이 겨우 스물여섯에
아이 다섯 과부가 되었더라는 이야기며,
어이없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더라는 이야기며,
얼마나 막막하고 기가 막혔을 거냐는 이야기며,
그러고 나서 닷새 뒤에
막내 아기를 낳았다는 이야기며,
허물어진 초가집에서 아기를 낳고는
줄 것이 없어
'복 주시오' '복 주시오'
아기를 안고 끝도 없이 빌었더라는 이야기며,
그때 태어난 아기가 바로 지금
이야기를 전하는 바로 내 할머니라는 이야기며,
그 이후로 끝없이 고생 고생
안 해 본 고생이 없었더라는 이야기며,
그런데 신기하게도 할머니의 엄마가 해 주신 밥은
결게 안 들어가도 그렇게도 맛이 좋았다는 이야기며,
우리 아빠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우리 생각 많이 하고 계실 거라는 이야기며,
내 눈매와 볼록한 이마가 할머니의 엄마,
그러니까 나의 증조할머니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할어니 두 손을 슥 잡게 되지요
다정하게,
다정하게,
엄마가 아기 손을 잡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