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의 전신은 어디일까?
이를 해결해주는 장소가 이번에 서울교구 성지로 추가되었다.
명동성당 아래쪽 대로변에 비석을 마련하고 김범우 토마스의 집터를 확인 한 것이다.
또한 김범우에게 신앙을 권면한 이벽 집터도
청계천 수표교 인근에서 찾아 비석을 세우고 순례지로 지정하였다.
김범우 집터가 왜 한국가톨릭교회사에서 이토록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을가?
당시 명례방으로 불렀던 김범우의 집에서 신자들의 집회가 이루어졌다.
한국천주교회 최초 천주교회창립터는 이벽의 집터이다.
이곳에서 이승훈 베드로는 이벽, 권일신, 정약용 등 남인계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명례동 김범우의 집에서 한국천주교회 최초로 집회가 이루어져
초기공동체 미사를 베풀었기에 명동성당전신으로 보는 거다.
명례방은 조선시대 한성5부에 속하는 남부11방 중 하나로
남산 아래 마을과 명동성당 주변을 아우르는 구역명칭이다.
당시 김범우 집은 명례방 장악원 앞에 있었으며 장악원은 조선시대 음악에 관한 일을 보던 관청이다.
현재 을지로1가 외환은행본점 앞에 있다.
명동성당 역사관에 전시되고 있는 당시의 사진을 보면 지금 쓰고 있는 글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김범우 집터에서 위로 올려다보면 명동성당 자리는 남산 아래 큰 언덕이며
사진 속에 명동성당 자리가 드러난다.
선교사들은 명례방을 중심으로 가장 높은 곳에 성당터를 마련하여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복음이 선포되는 입지를 잡은 것이다.
한국천주교회 첫 성당건축의 시작은 명례방 구역 김범우집터를 중심 두고 이루어진 거다.
이제서 아쉬움이 남는 것은 선교사들이 당시에 김범우집터를 매입하였더라면
한국교회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적지로 남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다.
이번 순례에서 김범우 집터와 이벽의 집터를 찾은 것은 초기교회공동체의 신앙을 묵상하기 위함이었다.
복음선포를위해서 자신의 집을 내어놓고 모든 것을 함께 나누었던 자비의 손길을 만나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이기적 신앙이 나를 지배하는 세태에서 그대로 멈추어
마태오복음 제25장을 묵상하며 높이 솟은 명동성당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건가? 물음을 던지면서 나 자신의 검은 속을 들여다보았다.
성당에 들어가 앞자리에 앉아 벽에 걸어놓은 조선시대 양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1984년 한국천주교 200주년 신앙대회 및 103위 시성식 때
김범우집 초기 집회과정을 그린 <명례동집회> 그림을 보면서 당시를 회상해보았다.
명례동 초기신앙공동체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리스도교 초기공동체의 모습을 재현하였을 거다.
1785년 봄 정기적으로 신앙집회를 가져오다가 이승훈, 정약용 3형제, 권일신부자, 이벽,
김범우가 형조에 체포되어 김범우만 투옥되었다가 밀양으로 유배시킨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났다.
초기신앙공동체를 이끌었던 이벽, 김범우, 이승훈을 쳐다보며
벌어진 나는 그만 입을 굳게 다물고 벙어리가 되었다.
<2020.1.11 김범우집터와 이벽집터순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