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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오신 주님의 은혜 / 마 2:1~12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은 예수님이 태어나을 기념하는 성탄절입니다. 예수님의 생신을 축하합니다. 오늘은 2000년전, 예수님의 첫번째 생일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4복음서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의 관심사와, 읽히기를 바라는 대상에 따라, 강조하는 부분이나 주제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이나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어린시절에 대해 전혀 관심도 없습니다. 바로 공생애를 시작하기 바로 직전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마태와 누가는 각각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는 하지만, 둘이 관점이 많이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 출신의 기독교인들을 위해 쓰여졌다면, 누가복음은 이방지역에 흩어져있는, 이방인들과 기독교인들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이 관심가질 만한 이야기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탄생의 이야기도 스케일이 큽니다. 동방의 박사들, 페르시아에서 별을 보고 찾아온 점성술사라고 알려져 있는데요, 하늘의 별을 보며 점을 치던 그들은, 우주에서 신비한 현상을 발견했나봅니다. 그 별을 따라 가다, 마침내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 귀한 보물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했다고 합니다. 이 동방의 박사들은 더 이상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신기한 우주의 현상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켰을 뿐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 이상의 의미가 없었습니다. 가장 먼저 예수님을 만났지만,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들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저 잠시 스쳐가면서 만났을 뿐입니다. 그들은 다시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한편, 유대인의 왕으로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헤롯왕은, 자신의 라이벌을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 인근의 아기들을 전부 죽일 정도로, 큰 위협을 느낍니다. 마태복음의 성탄절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구세주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이방인들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누가라고 하는 사람은, 선교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는데요, 특히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첫번째 성탄절 이야기를 할 때에, 동방방사들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누가에게 있어서 동방박사들이 왔다 갔는지, 안갔는지가 중요한게 아닙니다. 그런 잘난 사람들 이야기는 쓰고 싶지 않은 겁니다. 누가가 바라보는 첫번째 크리스마스를 한번 볼까요? 누가의 첫번째 성탄절은 캐롤도 없었고, 음악도 없었을 것입니다. 반짝이는 전구도, 화려한 장식도 없었습니다. 마굿간의 구유에 뉘여있는 아기만 있엇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저녁까지, 근처에 빈방을 찾아 헤멨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예수님이 오시는 날, 방 한칸을 비워두지 않았습니다. 아기를 겨우 낳았는데 아기를 뉘일 곳이 없었습니다. 궁리 끝에 그래도 비교적 평평하고, 안전한 곳을 찾은게 말구유입니다. 아기를 강보에 돌돌 싸서, 말구유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이 아기를 말구유에 올려놓고, 이 부부는 첫번째 크리스마스를 맞이합니다.
그런데 이 처량하고 안타까운 풍경을, 하나님께서도 그냥 지켜보시기가 안쓰러우셨나 봅니다.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의 축하파티를 계획하십니다. 누가복음에는 동방박사 대신에 목동들이 등장합니다. 한밤에도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양떼를 지키던 목동들입니다. 한밤 중에 그들에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두려워하는 목동들에게 천사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다 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께서 자식을 낳으셨다는 게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낮아지셔서, 한없이 겸손해지셔서, 연약한 인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사람으로만 오셔도 엄청나게 낮아지신 건데, 그중에서도 더욱더 낮아지셔서, 더이상 낮아질 수 없을만큼 낮은 곳에 임하셨습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예수님을 만날때에,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낮아졌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보고,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만큼 낮아졌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오셔셔, 보잘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슈퍼히어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기 위해, 한없이 보잘것 없어 지셨습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 가장 큰 놀라운 빅뉴스, 바로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신다는 엄청난 소식을,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들이 전해 준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소식이요, 천사가 전해 준 소식이니까, 보통 이 세상 소식과는 다른 소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찾아갈 때, 세 가지 허락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첫째는 내 마음이 허락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사람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가장 움직이기 어려운 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가까운 거리도 갈 수 없습니다. 마음이 움직이기만 하면 아무리 먼 거리도 갈 수 있습니다. 결국 가고 못가고는 거리의 문제가 아닌 마음의 문제입니다. 둘째는 내 환경이 허락되어야 합니다. 북이 고향인 사람의 예를 들어보면, 아무리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합니다. 그곳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존해 있어도, 맘대로 가지 못합니다. 환경이 뒷받침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있어도 도저히 환경이 허락되지 않으면 못가는 것입니다. 셋째는 상대방이 허락해야 합니다. 사람 중에는 아무 때나 찾아가도 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는 내가 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상대방이 원하지 않으면 갈 수 없습니다. 내가 갈 수 있는 환경이 되어도, 상대방이 오는 것을 굳이 싫어하면 갈 수 없습니다. 나만 좋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만 가능하다고 찾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허락해야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탄하신 예수님께 찾아올 수 있었던 데는, 먼저는 내 마음이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내 마음은 없었는데 온 분들이 있습니까? 아니면 실수로 마음을 빼놓고 온 분들이 있습니까? 다음은 내 환경이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환경이 허락되었고, 교회의 환경이 허락되었고, 가정의 환경이 허락되었고, 건강의 환경이 허락되었고, 더 나아가 상대방이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허락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요 6: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우리가 예수님께 오는 것을, 아버지께서 허락하셨다는 거 아닙니까? 찾아온 우리를 허락하신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환영하십니다. 돌아온 우리를 환영하신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그런데 이거 압니까? 사실은 우리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먼저 찾으셨다는 것을 압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찾기 훨씬 이전에,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때, 아니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성탄절이 바로 그 날입니다. 성탄절은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날입니다. 성탄절은 세상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는 날입니다. 성탄절은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날입니다. 성탄절 예배를 통해,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기 바랍니다. 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기 바랍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올 수 없는 이 땅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 땅은 찾아올만한 곳이 못되었습니다. 온갖 죄와 허물로 오염되어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불의와 불법과 불공평이 난무한 곳이었습니다. 너무나 타락하여 하나님의 눈에 볼썽사나운 곳이었습니다. 메시야를 보내달라고 그렇게도 애원해서 막상 보내주었더니, 환영하기는커녕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우리가 돼지우리에 들어가서 돼지와 함께 생활하기 위해 오는 것과 같습니다. 어쩌면 그 보다 더 낮고 천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육신의 주님을 만나려면, 우리 역시 낮아져야 합니다. 베들레헴에 예수탄생 기념교회가 있습니다.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꼭 들르는 코스인데, 그 교회를 유명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교회 출입문입니다. 출입문이 얼마나 작은지, 한 사람이 허리를 숙이고 겨우 들어갈 정도의 크기입니다. 황제조차 말에서 내려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을 만나러 나오는 자세가 맞는가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배 시간, 예배 복장, 예배 헌금 등 다각도로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이 세상은, 희망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소망이라곤 눈 씻고 봐도 없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이 땅에서, 조그만 희망이라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작은 소망이라도 발견할 수 있습니까? 한 줄기 빛이라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이 땅은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굳이 예수님을 믿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 외에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세상을 비추는 참 빛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가정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래도 가정이 희망이라고 합니다. 그럼 가정이 진짜 희망을 줍니까? 그런데 왜 가정 안에서 받는 상처가 그리도 많습니까? 가족 간의 문제로 겪는 고통이 또한 얼마나 큽니까? 지상낙원이어야 할 가정이, 그렇다면 세상의 다른 곳이야 말 다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이 땅은 희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어떤 곳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참된 기쁨과 즐거움 같은 것은, 애초에 꿈도 꿀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 5:11절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느니라.”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참된 기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즐거움은 하나님 안에서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행복하게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그때부터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불행 중에서도 최고의 불행은 죽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더구나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심판 이후에는 형벌이 따릅니다. 영원한 형벌, 곧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간에게 불행이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럼 행복해지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그건 하나님과 화목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해지지 않고는, 절대로 불행의 짐, 불행의 굴레, 불행의 운명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불행하게 살다가, 영원히 불행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만 불행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자손 삼사 대까지 꼼짝없이 저주를 받게 될 운명에 처한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여기 있습니다. 요일 4: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예수님이 이 땅에 화목제물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입니다. 죄 때문에 겪게 되는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영적인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정신적인 고통에서 자유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찾아오신 주님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요 1:11절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이게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아닌, 자기 백성에게 찾아왔는데,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다는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 일부 영접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주신 약속이 있습니다. 요 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는 이미 이 약속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으므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받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히 13:5절하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찾아올 가치가 없는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무 뒤에 숨은 아담을 찾아오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약속을 깬 사람입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보기 좋게 어긴 불순종의 사람입니다. 그는 창조주 하나님의 첫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창조주를 실망시킨 첫 번째 사람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한 거짓말쟁이였습니다. 그는 범죄한 것에 대해 회개하기보다, 하나님이 준 아내 때문이라고 핑계댄 남자답지 못한 비겁자였습니다. 그런 아담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셔서 그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죄 없는 양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그들의 벗은 수치를 가려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의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한 배신자입니다. 수제자로서의 임무를 감당하지 못한 실패자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 시몬에서 베드로란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베드로라는 이름값을 하지 못했습니다. 반석처럼 굳건하지 못하고, 갈대처럼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주님을 배신했던 베드로를, 수제자로서 실패했던 베드로를,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실망과 낙담에 빠진 채, 갈릴리 호수에 와서 그물질하고 있는 베드로를,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에게 찾아오셔서, 그에게 재차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지를 확인한 후, 다시 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갈 길을 잃은 양인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인생길에 지쳐 쓰러져 있는 우리였습니다. 무거운 짐을 홀로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진 우리였습니다. 이 땅의 것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는 우리였습니다. 지옥을 향하여 급행열차를 타고 달려가는 우리였습니다. 하나님과는 무관한 방향으로 달려가는 우리였습니다. 인생의 목적도, 목표도 분명하지 않은 우리였습니다. 꿈도 비전도 없이 되는대로 살아가는 우리였습니다. 참된 나를 숨기고 거짓된 나를 내세우고 살아가던 우리였습니다. 무가치한 일에 시간과 물질과 열정을 쏟으며 살아가는 우리였습니다. 한 마디로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였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올 만한 구석이 있어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영원한 지옥불 가운데서,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였다는 말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 아닌, 사람의 아들로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책망하고 훈방조치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몸을 대속물로 바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에게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이지만,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에서는 기쁜 일이 아닙니다. 아들을 세상에 왕으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독생자를 세상을 다스리고 지배할 통치자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죽는 자리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것도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죽으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인류가 받아야 할 율법의 저주를 뒤집어쓰고 죽으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 입장에서는 성탄절이 고통스러운 날입니다. 우리에게는 더 없이 큰 은혜이지만, 하나님께는 대가지불인 것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라는 영화의 원작자인 C. S 루이스가, 종교 토론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무엇이 다르냐”는 토론이 있을 때에, 자기들끼리의 토론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부활이 있고, 성육신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종교에도 부활과 성육신 비슷한 개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학자가 C. S 루이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기독교의 독특함이 어디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는 간단하게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은혜입니다.”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타종교에는 없고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성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은혜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크고 작은 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런데 죄에 따른 율법의 저주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말씀에 순종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의 불순종의 대가를 예수님이 지불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의 십자가로 화목하게 하시고, 대신 우리를 자기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이걸 은혜가 아닌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나 좋아하는 찬양이 있습니다. 복음성가 ‘하나님의 은혜’란 찬양입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 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 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목회자 세미나에서 박종호 씨가 간증하며 이 찬양을 부를때, 너무나 좋아서 CD를 사고 간증집도 사고, 그리고 듣고 또 들었습니다. 따라 불러 보고 혼자도 많이 흥얼거렸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 앞으로도 달려갈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엡 2:8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전 15:10절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자신이 은혜로 된 존재라는 것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자기가 없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오르면 어깨에 힘을 줍니다. 성공의 자리에 오르면 목에 깁스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꼴불견인데, 자기만 그걸 모릅니다. 나이 30세에 벼락 출세를 한 사람이 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그의 됨됨이를 알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창 45:8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이게 그의 단순한 고백이 아닙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의 고백입니다. 은혜를 아는 요셉은, 자신을 노예 상인들에게 판 형들을 눈물로 품어주었습니다.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형들을 진심으로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모든 형제들과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그것으로서 요셉은 자신이 은혜를 아는 자임을 증명했습니다. 은혜를 아는 자는 다릅니다. 은혜를 아는 자는 확실히 다릅니다. 신앙생활하는 모습이 다릅니다. 교회생활이 다르고, 예배생활이 다릅니다. 말씀과 기도생활이 다르고, 헌금생활이 다릅니다. 가정에서의 생활이 다르고, 직장에서의 생활이 다릅니다. 절대로 은혜를 모르는 사람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은혜로 된 삶은 잃을 게 없습니다.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이니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은혜로 사는 사람은 자유인입니다. 은혜로 살 때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고든 맥도날드 목사님이, 미국 유명병원의 여의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여의사는 나이지리아 사람이었는데, 나이지리아어로 매우 긴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름이 너무 특이해서, 목사님은 “이름의 뜻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이름의 뜻이 ‘분노를 사라지게 한 아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이름을 얻게 된 사연을 말해주었습니다. 여의사의 부모는 서로 매우 사랑했는데, 조부모는 그들의 결혼을 극구 반대했습니다. 그래도 서로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부모와 가족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결혼을 했고, 그들은 몇 년 동안 가족사회에서 추방됐습니다. 그후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낳게 되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손녀인 자신을 안으면서, 부모를 모두 용서했다고 합니다. 부모와 조부모 사이에 있었던 분노와 적대감이 사라지자, 부모는 그녀에게 ‘분노를 사라지게 한 아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맥도널드 목사님은 여의사의 이름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분노를 사라지게 한 아이’ 바로 ‘평화의 아기’로 오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2천 년 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는 눈 녹듯 녹아버렸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에게 상처 입힌 이웃에 대한, 분노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를 보내신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제 분노를 사라지게 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고, 주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며, 어디를 가든지 평화의 다리를 놓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이번 성탄절을 맞으며, 왜 성탄절이 연말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난 번에 보았던 창조과학 영상에서, 성탄절이 여름철이어야 한다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성탄절을 우리는 연말에 맞이 합니다. 우연히 날짜가 그렇게 된 것일까요? 저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탄절에 우리가 할 일 중에 하나가, 지나간 한 해 동안 힘들었던 사람들, 불편했던 사람들, 화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다면, 예수님의 사랑과 평화로 용서하고 화해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 부모나 자녀, 또는 성도나 주변 사람들과 말입니다. 털어버릴 것 다 털어버린 수 새해를 맞아하게 하려고, 성탄절이 년말에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아들 예수님을 멸시하고 죽일 것임을 알면서도, 우리와 화해하시기 위해 ‘화해의 제물’로, ‘평화의 아기’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평화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값없이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먼저 이웃에게 화해의 손을 내미는, 성탄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기쁘고 아름다운 성탄절에,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가정과 이 세상 속에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이 땅에, 우리에게, 사람의 몸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맞는, 성탄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걸어온 인생이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앞으로 걸어갈 날들도,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가기를 바랍니다. 다른 것은 잊어도 주님의 은혜만은 결코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적극적으로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하기를 바랍니다. 은혜가 나를 다스리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은혜의 시각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성탄에 찾아오신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 바랍니다. 올해 남은 며칠도 주님의 은혜에 붙들려 살다가, 새해를 아름답게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는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기쁨을 간직한 자의 모습으로, 그렇게 성탄을 맞이하게 하옵소서. 진정 이 세상에 구주가 나신 이 차원이 다른 기쁨, 이 기쁨을 새롭게 회복하는 그런 성탄절이 되게 하옵소서. 아무쪼록 이번 성탄절은 예수님이 주인공이심을, 구주가 나신 날임을 새롭게 깨닫고, 큰 기쁨을 새롭게 회복하는 성탄절이 되어서, 지금까지의 그 어느 성탄절보다도 더 감격적인 성탄절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진정으로 Merry Christmas를 외치는 복된 성탄절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믿는 제자들에게, 첫번 크리스마스의 평화가 임한 것처럼, 2023년 성탄을 축하하는 우리 모두에게, 임마누엘의 평강이 주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넘쳐나게 하옵소서.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은헤를 마음껏 누리는 성탄절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