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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신계영(辛啓榮)실기 고전
국조보감 제35권
인조9년(신미, 1631)
○ 어사 윤계(尹棨)ㆍ심연(沈演)ㆍ신계영(辛啓榮) 등을 삼남(三南)으로 나누어 보내 무사 시험을 보이게 하고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반정 때 재상ㆍ전조(銓曹)ㆍ삼사(三司) 및 당상 실직(堂上實職)과 당하 청직(堂下淸職)을 개정한 좌수(座首)〉
영의정 박승종(朴承宗)3월 14일 자살. 대(代) 이원익(李元翼)15일 정사에, 귀양중.
좌의정 박홍구(朴弘耈)3월 17일 합계로 갈렸다가 뒤에 파출. 대 정창연(鄭昌衍)23일 정사에, 파산(罷散)중.
우의정 조정(趙挺)4월 초 5일 합계로 삭직. 대 윤방(尹昉)22일 정사에, 산관이었음.
좌찬성 차출하지 않았음.
우찬성 이상의(李尙毅)4월 23일 부계(府啓)로 논박되어 갈렸음.
좌참찬 이경전(李慶全)주문사로 체직. 대 이시언(李時彦)5월 4일 정사에, 파직.
우참찬 오윤겸(吳允謙)
이조 판서 이광정(李光庭)물의가 있어 갈렸음. 대 신흠(申欽)15일 정사에, 파직중.
호조 판서 김신국(金藎國)3월 16일 평안 감사, 뒤에 나포되어 삭직. 대 이서(李曙)장단 부사로 공신, 3월 17일 정사에.
예조 판서 임취정(任就正)3월 17일 원계로 체직, 뒤에 원찬(遠竄). 대 이정귀(李廷龜)16일 정사에.
병조 판서 권진(權縉)3월 17일 원계로 체직, 뒤에 위리안치. 대 김류(金瑬)파산(罷散)으로 공신, 병조 참판에서 승직.
형조 판서 한찬남(韓纘男)복주(伏誅). 대 서성(徐渻)15일 정사에.
공조 판서 이정귀(李廷龜)호조로 천직. 대 이흥립(李興立)17일 훈련대장. 공신.
판윤 윤선(尹銑)3월 18일 원계(院啓)로 체직. 대 이괄(李适)19일 정사에. 북병사, 공신.
대사헌 남근(南謹) 3월 15일 원계로 체직, 뒤에 원찬. 대 오윤겸(吳允謙)15일에 우참찬에서.
이조 참판 이귀(李貴)14일 정사에. 파직되어 산관, 공신.
호조 참판 권분(權昐)
예조 참판 윤휘(尹暉)3월 22일 합계로 파출, 뒤에 원찬. 대 이안눌(李安訥)15일 정사에 파산중.
병조 참판 박정길(朴鼎吉)3월 13일 복주. 대 김류(金瑬)14일 정사에.
형조 참판 최응허(崔應虛)3월 18일 원계로 체직, 뒤에 정배. 대 오백령(吳百齡)19일 정사에. 파산중.
공조 참판 조집(趙濈)
좌윤 박정현(朴鼎賢)사직. 체차. 대 권희(權憘)
우윤 장사철(張士哲)3월 18일 원계로 파출, 뒤에 원찬. 대 이경함(李慶涵)19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도승지 이덕형(李德泂)3월 15일 홍문관에서 논박되어 체직. 대 이수광(李睟光)16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좌승지 유진증(兪晉曾)위와 같음. 대 민여임(閔汝任)17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우승지 정입(鄭岦)사직. 체자. 대 조우인(曺友仁).
좌부승지 박홍도(朴弘道)3월 14일 복주. 대 한여직(韓汝溭)17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우부승지 권진기(權盡己) 대 정홍익(鄭弘翼)14일 정사에. 정배중.
동부승지 민성휘(閔聖徽)경상 감사로 나갔음. 대 신응구(申應榘)
이조 참의 이정원(李挺元)3월 13일 복주. 대 홍서봉(洪瑞鳳)16일 정사에 파산, 공신.
호조 참의 김대덕(金大德)사직. 체차. 대 권첩(權帖)
예조 참의 목장흠(睦長欽)3월 23일 부계로 파직. 대 홍방(洪霶)
병조 참의 백대형(白大珩)13일 복주. 대 이상길(李尙吉)17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병조 참지 배대유(裴大維)18일 원계로 체직, 뒤에 삭판. 대 심집(沈諿)19일 산직.
형조 참의 이위경(李偉卿)13일 복주. 대 이신의(李愼義) 17일 정사에. 정배.
공조 참의 이익엽(李益燁)15일 복주. 대 김몽호(金夢虎)피핵 파출. 대 신경진(申景禛)25일 정사에. 우후, 공신.
부제학 정조(鄭造)14일 복주. 대 정경세(鄭經世)15일 정사에. 산직.
대사간 유대건(兪大建)15일 원계로 체직, 뒤에 삭출. 대 박동선(朴東善)15일 정사에. 산직.
대사성 이대엽(李大燁)15일 자살. 대 정홍익(鄭弘翼)17일 정사에. 정배중.
판결사 심종도(沈宗道)14일 체포, 뒤에 원찬. 대 윤안국(尹安國)17일 정사에. 정배.
직제학 한희(韓暿)14일 복주.
전한 차출하지 않았음.
집의 정도(鄭道)13일 위리안치. 대 김덕함(金德諴)14일 정사에. 정배중.
사간 임건(林健)13일 위리안치. 대 이성구(李聖求)13일 정사에. 산직, 사인(舍人)으로 옮겼음.
보덕 임성지(任性之)3월 21일 원계로 체직, 뒤에 정배.
겸보덕 윤지경(尹知敬)
사인 이성구(李聖求)15일 체직.
응교 한옥(韓玉)15일 원계로 파직, 뒤에 정배. 대 윤지경(尹知敬)15일 정사에.
장령 이시정(李時禎)13일 체포, 귀양. 대 김장생(金長生)14일 정사에.
곽천호(郭天豪)13일 원계로 파직, 뒤에 정배. 대 이명준(李命俊)15일 정사중에. 정배중.
필선 차출하지 않았음.
부응교 오환(吳煥)15일 원계로 체직.
검상 유활(柳活)18일 원계로 파출, 뒤에 위리안치.
이조 정랑 이원여(李元輿)13일 체포, 위리안치.
한정국(韓定國)14일 체포 복주.
교리 이경익(李慶益)15일 원계로 파직, 뒤에 삭출. 대 이민구(李敏求)17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김시국(金蓍國)사신으로 나가 체직.
지평 정담(鄭湛)14일 체포, 위리안치. 대 조정호(趙廷虎)15일 정사에. 파산.
한정국(韓正國) 대 유백증(兪伯曾)15일 정사에. 공신.
헌납 임기지(任器之)14일 체포, 원찬. 대 정온(鄭蘊)15일 정사에. 정배중.
문학 차출하지 않았음.
겸문학 남명우(南溟羽)
부교리 한급(韓昅)14일 체포, 복주. 대 심광세(沈光世)15일 정사에. 정배중.
최호(崔護)15일 계파, 뒤에 위리안치. 대 조성립(趙誠立)19일 정사에. 파산.
이조 좌랑 민심(閔𦸂)16일 부계로 체직, 뒤에 위리안치. 대 최명길(崔鳴吉)14일 정사에, 공신.
박종윤(朴宗胤)16일 부계로 체직, 뒤에 위리안치. 대 조익(趙翼)14일 정사에. 파직중.
수찬 오익환(吳益煥)15일 원계로 파직, 뒤에 위리안치. 대 최현(崔晛)19일 정사에. 파직.
목서흠(睦敍欽)사신으로 나가 체직. 대 조희일(趙希逸)16일 정사에.
정언 한유상(韓惟翔)13일 체포, 뒤에 귀양. 대 이목(李楘)14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이효성(李孝誠)14일 체포, 뒤에 귀양. 대 오숙(吳䎘)15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부수찬 이명한(李明漢)16일 이조 좌랑으로 옮겨 임명. 대 이경여(李敬輿)17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주서 최몽량(崔夢亮)피핵 체직. 대 이계(李烓)15일 정사에. 전천(前薦).
설서 정성(鄭晟)즉시 체직, 뒤에 정배.
봉교 홍경정(洪景艇)21일 원계로 체직, 뒤에 정배. 대 장유(張維)14일 정사에. 전천, 파산, 공신.
유진정(柳震禎)26일 원계로 귀양, 뒤에 삭출.
대교 안헌징(安獻徵)17일 원계로 우매무식하여 천이. 대 신계영(辛啓榮)14일 정사에. 전천.
검열 유명립(柳命立)원찬. 대 엄성(嚴惺) 14일 정사에. 증경피적(曾經被謫).
경기 감사 박자흥(朴自興)14일 자살. 대 홍명원(洪命元)14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평안 감사 박엽(朴曄)임소에서 효시. 대 김신국(金藎國)
충청 감사 박경신(朴慶新)17일 원계로 파직, 뇌물로 임직. 대 이덕형(李德泂)18일 정사에.
강원 감사 임석령(任錫齡)17일 원계로 파직, 뇌물로 임직. 대 정광성(鄭廣成)18일 정사에.
전라 감사 황근중(黃謹中)17일 원계로 파직, 뒤에 삭출. 대 황치경(黃致敬)18일 정사에. 산직이었음.
황해 감사 이명(李溟)잡아서 삭직. 대 임서(林壻)
경상 감사 김지남(金止男)과만(瓜滿)으로 병조 참의 임명.
함경 감사 이홍주(李弘冑)과만으로 도승지 임명.
영돈녕 한준겸(韓浚謙)15일 국구로 서평부원군에 봉함.
대제학 신흠(申欽)7일 정사에서.
[좌목]
천계 갑자년 일본 회답사 행중좌목(天啓甲子日本回答使行中座目)
상사(上使) | 형조 참의 | 정입(鄭岦) | |
부사(副使) |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 | 강홍중(姜弘重) 자(字)는 임보(任甫). 정축년(1577, 선조 10)에 출생. 선조 계묘년(1603, 선조 36)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선조 병오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강원 감사(江原監司)에 이름. | |
종사관(從事官) | 예조(禮曹) 정랑(正郞) | 신계영(辛啓榮) | |
역관(譯官) | 가선(嘉善) | 박대근(朴大根) | |
이언서(李彥瑞) | |||
통정(通政) | 홍희남(洪喜男) | ||
상통사(上通事) | 전 정(正) | 박언황(朴彥璜) | |
강우성(康遇聖) | |||
전 직장(直長) | 이형남(李亨男) | ||
장선민(張善敏) | |||
한학(漢學) | 송예수(宋禮修) | ||
정충헌(鄭忠獻) | |||
사자관(寫字官) | 이성국(李誠國) | ||
화원(畫員) | 이언홍(李彥弘) | ||
의원(醫員) | 곽금(郭嶔) | ||
황덕업(黃德業) | |||
서사(書寫) | 김신남(金信男) | ||
별파진(別破陣) | 유태길(劉太吉) | ||
김신종(金信宗) | |||
포수(砲手) | 백사길(白士吉) | ||
김덕련(金德連) | |||
상사 군관(上使軍官) | 절충(折衝) | 노세준(盧世俊) | |
전 부정(副正) | 이동룡(李東龍) | ||
전 경력(經歷) | 정국빈(鄭國彬) | ||
전 감찰(監察) | 김현달(金顯達) | ||
전 만호(萬戶) | 이영서(李榮瑞) | ||
내금장(內禁將) | 송영(宋嶸) | ||
사과(司果) | 이안농(李安農) | ||
부사 군관(副使軍官) | 절충(折衝) | 김사위(金士偉) | |
전 주부(主簿) | 지학해(池學海) | ||
전 선전(宣傳) | 강덕취(姜德聚) | ||
강수(姜綬) | |||
전 만호(萬戶) | 남궁도(南宮櫂) | ||
정득선(鄭得善) | |||
한량(閒良) | 강홍헌(姜弘憲) | ||
종사관 군관(從事官軍官) | 출신(出身) | 강의(姜毅) | |
정몽득(丁夢得) | |||
방진(方璡) |
갑자년(1624, 인조2) / 8월 작음
20일(임인)
맑음. 평명(平明)에 대궐로 나아가니, 상사(上使) 정입(鄭岦)과 종사관(從事官) 신계영(辛啓榮)이 벌써 의막(依幕 임시로 거처하는 곳)에 나와 있었고, 대궐 안 여러 아문(衙門)에서 모두 하인을 보내어 문안[存問]하였다. 숙배(肅拜)한 뒤에 상이 편전(便殿)에 납시어 세 사신(使臣)을 인견(引見)하고 일행을 단속하는 것과 사로잡혀 간 사람의 쇄환(刷還)하는 일을 간곡히 하교하였다. 그리고 호피(虎皮) 1장, 궁자(弓子) 1부(部), 장전(長箭)ㆍ편전(片箭) 각 1부, 유둔(油芚)을 갖춘 통아(筒兒) 2부, 후추[胡椒] 1두, 백첩선(白貼扇) 3자루, 칠별선(漆別扇) 5자루, 납약(臘藥) 1봉을 각각 하사하므로, 공손히 받고 배사(拜辭)한 후 물러나왔다. 좌의정과 봉래(蓬萊 정창연(鄭昌衍)) 두 정승에게 들러 작별 인사를 하고 집에 돌아와 사당에 뵙고 어머니 앞에 배사(拜辭)하니, 일가 친척의 부인들이 모두 와서 송별하였다. 지나는 길에 곽 첨정(郭僉正)ㆍ이 부정(李副正) 두 분에게 들러 인사를 하고 이정(離亭 작별하는 정자)에 이르니, 위로는 명공 거경(名公巨卿)에서 아래로는 평소에 친분이 있던 사대부까지 거의 다 와서 전별하였다. 이날은 도저동(桃渚洞) 삼거리에서 유숙하였다.
을축년(1625, 인조3) / 5월
11일
상소
가선대부 행충좌위 부사직(嘉善大夫行忠佐衛副司直)신(臣)정입(鄭岦), 절충장군 행의흥위 사과(折衝將軍行義興衛司果)신(臣)강홍중(姜弘重), 통훈대부 행사헌부 지평(通訓大夫行司憲府持平)신(臣)신계영(辛啓榮) 등은 황공하여 머리 조아리며 삼가 백번 절하고 주상전하(主上殿下)께 글을 올리옵니다.
신등이 일본에 봉사(奉使)하였을 때에 관백이 증여한 예물을 완봉(完封)한 채 열지도 않고 마도에 돌려준 것은, 사수(辭受 사양하고 받는 것) 일절(一節)이 실로 염치를 격려하고 나라의 체통을 높이는 데 관계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듣자오니, 마도에서 서계를 닦아 부산에 보낸 데 대해서 예조(禮曹)의 복계(覆啓)한 것은 사정을 참작하여 적당하게 조처한 것이온데, 상께서 사신 이하에게 넉넉히 분급해 주라는 하교가 계셨다 하오니, 신등은 모두가 황공하여 몸 둘 바를 알지 못하옵니다. 당초에 신구 두 관백이 보내온 예물을 재삼 사절하였지만, 마침내 권사(權辭)로 받아둔 것은 참으로 부득이한 사세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미 쇄환하는 비용으로써 마도에 주었으니, 이제 아무리 보내왔다 하더라도 마땅히 효유하여 돌려보내서 전후 사수(辭受)가 다름이 없도록 하여야 될 것이므로, 해조(該曹)의 처사가 또한 피차의 권도에 합당하여 그 사체를 생각함이 곡진하다 하겠습니다. 왜공(倭供)의 잡물은 영남의 지탱할 수 없는 폐단이오니, 만약 그 반절로써 그 비용을 판출한다면 일도의 백성이 적지 않은 혜택을 입을 것이요, 왜인의 증여한 것으로 왜인을 공급하는 데에 도로 쓴다면 이름은 비록 받았다 하나 실은 돌려준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외국에 봉사(奉使)하여 명절(名節)을 가다듬고 나라의 명(命)을 욕되게 하지 않은 자가 한둘이 아니었으니, 신등이 비록 무상(無狀)하오나 하찮은 마음만은 거의 옛사람을 저버리지 않으려 하는데, 어찌 다른 나라의 은화(銀貨)를 도리어 자신의 소유로 삼기 위하여, 이미 저 나라에서 사절하고 이곳에서 받을 리가 있겠습니까? 신등이 반복하여 생각하여도 결코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오직 성명께서는 공사(公私)의 사정을 굽어 살피시어 해조(該曹)의 복계(覆啓)에 의하여 시행하시고 사신에게 분급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 주시면 천만 다행하겠습니다.……
비답하였다.
“소를 보아 잘 알았소. 사양할 의(義)가 없으니, 경등은 사양하지 마오.”
동사일기 건(東槎日記乾) / 전후 통신사 좌목(前後通信使座目)
전후 통신사 좌목(前後通信使座目)
홍무(洪武 명 태조(太祖)의 연호) 정사년(1377, 고려 우왕(禑王) 3) : 고려(高麗) 신사 정몽주(鄭夢周).
태조조(太祖朝) : 박돈(朴敦)이 봉사(奉使)하였다고 하나 연조(年條)를 상고할 수 없다.
세종 25년(1443) 대명(大明) 정통(正統) 8년 계해, 왜황(倭皇) 후화원원(後花園院) 언인(彥仁) 15년 : 신사 신숙주(申叔舟).
선조 23년(1590) 대명 만력(萬曆) 18년 경인, 왜황 후양성(後陽成) 주인(周仁) 4년 : 신사 황윤길(黃允吉)ㆍ김성일(金誠一)ㆍ허성(許筬).
병신년(1596, 선조 29) : 신사 황신(黃愼)또 대사(大師) 유정(惟政)이 봉명하여 갔음.
정미년(1607, 선조 40) : 신사 여우길(呂祐吉)ㆍ경섬(慶暹)ㆍ정호관(丁好寬).
을묘년(1615) 광해군 7년, 왜황 후수미원(後水尾院) 정인(政仁) 4년 원가(元加) 원년 : 신사 오윤겸(吳允謙)ㆍ박재(朴梓)ㆍ이경직(李景稷).
인조 2년(1624) 대명 천계(天啓) 4년 갑자, 왜황 후수미원(後水尾院). 일명 선동원(仙洞院), 일명 법황(法皇). 관영(寬永) 원년 : 신사 정립(鄭岦)ㆍ강홍중(姜弘重)ㆍ신계영(辛啓榮).
병자년(1636, 인조 14) : 신사 임광(任絖)ㆍ김세렴(金世濂).
계미년(1643, 인조 21) : 신사 윤순지(尹順之)ㆍ조경(趙絅)ㆍ신유(申濡)숭정(崇禎) 9년, 왜황 명정원(明正院)-후수미원의 맏딸-7년.
효종 6년 을미(1655) 왜황 후서원(後西院) 양인(良人) 수미(水尾)의 넷째 아들. 원년ㆍ명력(明曆) 원년 : 신사 조형(趙珩)ㆍ유창(兪瑒)ㆍ남용익(南龍翼).
숙종 8년 임술(1682) 왜황 영광원(靈光院) 19년 : 신사 윤지완(尹趾完)ㆍ이언강(李彥綱)ㆍ박경후(朴慶後).
신묘년(1711, 숙종 37) : 신사 좌목은 아래에 보인다.
기해년(1719, 숙종 45) : 신사 홍치중(洪致中)ㆍ황선(黃璿)ㆍ이명언(李明彥).
영종 23년 정묘(1747) : 신사 홍계희(洪啓禧)ㆍ남태기(南泰耆)ㆍ조명채(曹命采).
계미년(1763, 영종 39) : 신사 조엄(趙曮)ㆍ이인배(李仁培)ㆍ김상익(金相翊).
동춘당집 별집 제7권 / 연보(年譜)
우복(愚伏) 정 선생(鄭先生) 연보
○ 5월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가 행 대사헌(行大司憲)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차자를 올려 사직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고, 재차 차자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나아가서 사은하고서 인피(引避)하니, 지중추부사에 체수되었다. - 이때 옥당(玉堂)이 차자를 올려 대사헌 남이공(南以恭)을 탄핵하니, 상이 크게 노하여 논의를 주도한 박정(朴炡), 유백증(兪伯曾), 나만갑(羅萬甲) 등을 모두 외직에 보임하고, 나머지는 모두 체차하였다. 그러자 양사(兩司)가 여러 날 논집(論執 고집스럽게 논함)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니, 선생은 끝까지 논집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 정계(停啓 계청을 정지함)하기로 상의하였는데, 장령(掌令) 신계영(辛啓榮)이 갑자기 정계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하면서 인피하니, 선생도 부득이 사유를 갖추어서 아뢰고서 인피한 것이다. -
문견별록(聞見別錄) / 왜황 대서(倭皇代序)
인황(人皇)
선동원(仙洞院) : 법황(法皇)이라고도 부르며 이름은 정인(政仁)이니 후양성원의 아들임. 원년은 임자년 명 신종황제 만력 40년(AD 1612)에 해당함. 으로, 정사년에 조선국의 통신사 오윤겸(吳允謙)ㆍ박재(朴梓)ㆍ이경직(李景稷) 등이 왔었고, 갑자년에 조선국의 통신사 정입(鄭岦)ㆍ강홍중(姜弘重)ㆍ신계영(辛啓榮) 등이 왔었음. 위에 있기 18년 만에 선양하고 출가하였으며, 연호는 원화(元和)ㆍ보영(寶永)으로 개원하였고 현재 생존함.
사계전서 제21권 / 전례문답(典禮問答)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경연 석상에서 아뢴 것의 뒤에 쓰다.
경오년(1630, 인조8) 8월 19일에 주강(晝講)을 할 적에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이제 목릉(穆陵)의 지문(誌文)은 반드시 대례(大禮)에 대해 강정(講定)한 다음에 짓는 것이 마땅합니다. 대간(臺諫)이 이에 대한 예는 이미 정하였다고 하나, 신은 이 예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마땅히 국장(國葬)을 지낸 뒤에 이 대례를 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무슨 소견이 있어서 그러는 것인가?”
하자, 이귀가 아뢰기를,
“조정에서는 모두들 이미 정통(正統)이 아니니 사당에 들이는 것은 마땅치 않은바 선조(先朝)에서 행한 옛 규례대로 대원군으로 칭해야 한다고 합니다. 김장생과 같은 경우에는 고(考)라고 칭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숙부라고 칭해야 하는가?’ 하자, 김장생이 말하기를, ‘그것은 마땅치 않다.’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다시 ‘그렇다면 어떻게 칭해야 하는가?’ 하자, 김장생이 끝내 답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 의논과 같다면 순(舜) 임금은 요(堯) 임금의 천하를 전해받아서 계통을 이었으니, 고수(瞽瞍)는 마땅히 상(象)의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고수를 순 임금의 아버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맹자(孟子)는 칭하기를, ‘천자의 아버지가 되었으니 존귀함이 지극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기(禮記)》에서는 교례(郊禮)를 지내면서 순 임금을 제사 지내지 않고 곤(鯀)을 제사 지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우하(虞夏)의 시대에는 소생(所生)을 중히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나라를 받은 것을 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어찌 할아버지에게서 나라를 받고서 아버지를 높이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김장생과 박지계, 정경세 및 신을 불러 들여서 탑전(榻前)에서 면대하여 함께 의논하게 하고서 교례(郊禮)에서 곤(鯀)을 제사 지낸 일을 가지고 조목조목 따지면서 문답하게 한다면, 한마디 말로 정해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장생이 말한 숙이라고 칭해야 한다는 말은 소견이 분명치 않다. 어찌 할아버지를 아버지라고 칭하고 아버지를 아저씨라고 칭하는 도리가 있겠는가. 만약 다른 사람의 양자로 나가서 다른 사람의 후사를 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으나, 양자로 나가서 후사를 잇지 않았는데도 이와 같이 하는 경우가 있단 말인가?”
하였다. 그러자 수찬 최유해(崔有海)가 아뢰기를,
“이귀가 칭한 순 임금의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순 임금이 비록 요 임금의 천하를 이어받기는 하였으나, 각각 스스로 나라를 만들었으므로 이와 같이 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이번의 이 일과는 매우 다릅니다. 한 광무제(漢光武帝)에 이르러서는, 초야에서 일어나 제업을 개창하였습니다. 그러니 비록 남돈령(南頓令)을 추숭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위로 원제(元帝)의 정통(正統)을 이어받았으니, 여기에서도 역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그렇지가 않다. 만약 그렇다면 할아버지가 둘이 되고 아버지가 둘이 되어서 결코 안 될 것이다.”
하자, 이귀가 아뢰기를,
“그것은 변례(變禮)인데 어찌 이것으로써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 살아 계시면 마땅히 임금이 되었을 분을, 죽었다고 해서 어찌 묘(廟)를 세우지 않는 예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개 추숭하는 일은 여러 신하들이 반드시 큰 변례라고 여길 것이다. 무릇 말이라는 것은 옳으면 옳은 것이고 그르면 그른 것이다. 만약 구차스럽게 영합하고자 한다면 말이 대부분 길어지고 구차스럽게 된다. 이외에 다른 근거로 삼을 일이 뭐가 있겠는가.”
하자, 최유해가 아뢰기를,
“소신은 본디 식견이 없으니 다시 계달할 말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에 대해서는 오늘 강정(講定)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시비를 듣고자 하였을 뿐이다.”
하자, 교리(校理) 신계영(辛啓榮)이 아뢰기를,
“국론이 이미 정해졌는데 어찌 탑전(榻前)에서 한 한마디 말을 가지고 다툰단 말입니까.”
하니, 이귀가 아뢰기를,
“군상(君上)의 부자에 대한 예는 반드시 예서(禮書)를 강정(講定)해 보고서 말을 해야 됩니다. 최유해 등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들 예에 있어서 해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시의(時議)에 영합하고자 하여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일에 대해서는 알기가 어렵지 않다. 그런데도 여러 신하들이 근거도 없는 견해를 가지고 결코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그 뜻이 대개 공덕(功德)이 없는 군상(君上)이 사친(私親)을 추숭하는 것은 외람된 짓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내가 이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의 성묘(成廟)께서는 덕종(德宗)을 추숭하였는데, 이는 숙부를 추숭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황조(皇朝)에서도 역시 사친을 추숭하였다고 한다. 황조의 예가 이와 같고 우리나라의 예가 이와 같은바,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아닌 듯하다. 사람마다 각각 시비(是非)를 분별하는 마음이 있으니 어찌 알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대개 외람된 짓이라고 여겨서 이와 같이 운운하는 것일 뿐이다.
예로부터 오늘날과 같은 일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추숭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듯하다. 그런데도 신료들이 반드시 외람된 짓을 하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내가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근래의 일은 너무 심하다. 예조가 정대붕(鄭大鵬)의 일을 두고 통분하다고 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다고 할 수 있지만 양사(兩司)가 함께 발론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몹시 불가하다. 임금이 나이가 어리지도 않으니 만약 이 일을 하고자 하였다면 비록 정대붕의 말이 없었더라도 반드시 하였을 것이다. 만약 하지 않고자 한다면 어찌 정대붕의 말 때문에 속히 하겠는가.”
하였다.
이귀가 경연 석상에서 아뢴 말을 살펴보건대, 나의 말을 인용하면서 “대원군에 대해서 숙부라고 칭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한다.” 하였다.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며, 역시 그런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 이귀는 어째서 이런 말을 하였단 말인가. 나는 지난날의 소견을 바꾸지 않았는데, 이귀가 잘못 들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
나는 이미 대원군에 대해서 고(考)라고 칭하는 것은 그르다고 하였다. 그런즉 또 칭호가 없어서는 안 되니 반드시 숙부라고 칭해야 함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정자와 주자가 한 선제(漢宣帝)가 사황손(史皇孫)에 대해서 고라고 칭한 것에 대해 논하면서 윤리를 어지럽히고 예를 잃은 것이라고 배척한 것은, 선제가 손항(孫行)으로서 들어와 대통을 이어 부자의 도리가 있는데도 또다시 사황손에게 고라고 칭하면 고가 둘이 되는 혐의스러움이 있기 때문이다.
박지계ㆍ이귀ㆍ최명길의 뜻은, 선제는 방지(旁支)로서 들어와 위로 소제(昭帝)를 이었는데 반해, 주상께서는 친손(親孫)으로서 들어와 정통을 이어받았으므로 일이 같지 않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렇지가 않다. 주상께서 비록 친손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바로 소종(小宗)이다. 소종으로서 대통을 이었으니 어찌 한 선제와 다르겠는가. 단지 소종으로서 들어와 이어받은 것만을 보아야지, 방지니 친손이니 하는 것은 참으로 거론해서는 안 된다. 무릇 대종과 소종은 서로 간에 뒤섞이게 해서는 안 되는바, 비록 들어와서 이어받았다고 하더라도 소종인 것은 오히려 예전 그대로인 것이다. 어찌 들어와서 이었다고 하여 그 소종을 모두 아울러서 대종에 합할 수가 있겠는가.
박지계는 《의례》 상복편(喪服篇) 부장기장(不杖朞章)에 나오는 임금의 부모를 위하여 입는다는 조항을 인용하여 오늘날 사친을 높이 받들어야 한다는 증거로 삼았다. 그러나 《의례》의 본뜻이 어찌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겠는가. 나는 《의례》에 나오는 말로써 도리어 오늘날의 잘못된 설을 격파하는 증거로 삼고자 한다.
《의례》 상복편 부장기장에 이르기를, “임금의 부모(父母)와 조부모(祖父母)를 위하여 입는 것이다.[爲君之父母祖父母]” 하였는데, 이에 대한 자하(子夏)의 전(傳)에 이르기를, “어찌하여 기복(朞服)을 입는가? 종복(從服)인 것이다. 아버지가 졸한 다음에, 할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는 할아버지를 위하여 참최복을 입는다.[何以朞也 從服也 父卒然後爲祖後者服斬]” 하였으며, 이에 대한 정현(鄭玄)의 주(註)에 이르기를,
“이는 임금이 되어서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상(喪)을 당한 경우로, 처음 봉해진 임금을 두고서 한 말이다. 만일 정체(正體)를 이어받았다면,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폐질(廢疾)이 있어서 즉위하지 못한 경우이다. ‘아버지가 졸하였다.[父卒]’는 것은, 아버지가 임금의 손자여서 마땅히 왕위를 이어받아야 하는데 일찍 죽어서, 지금의 임금이 증조(曾祖)에게서 나라를 받은 것이다.”
하였으며,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는 이르기를,
“‘이는 임금이 되어서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상을 당한 경우로, 처음 봉해진 임금을 두고서 한 말이다.’라고 한 것은, 처음 봉해진 임금은 정체를 이어받은 것이 아니어서 혹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임금이 되지 못하고 죽은 경우도 있는데, 임금은 그를 위해서 참최복을 입으며, 신하 역시 종복을 입어서 기년복을 입는 것이다. 만약 정체를 이어받은 경우라면,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즉위하여야만 합당한데 폐질이 있어서 즉위하지 못하고서 자기가 즉위한 것으로, 이는 증조에게서 나라를 받은 것이다.
정현의 뜻은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폐질이 있어서 반드시 지금의 임금이 증조에게서 나라를 받았다는 것이지, 할아버지에게서 나라를 받은 것을 취한 것은 아니다. 할아버지가 훙(薨)하였다면, 여러 신하들은 그를 위하여 참최복을 입어야 하는바, 어찌 종복을 입어 기년복을 입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정현은 새 임금이 증조에게서 나라를 받은 경우로 본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증조는 임금이 되어서 훙하였으니 여러 신하들은 마땅히 참최복을 입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임금의 할아버지가 훙하였을 경우에는 임금은 할아버지를 위하여 참최복을 입으니, 신하는 종복을 입어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아버지가 졸하였다는 것은, 아버지는 임금의 손자가 되어 마땅히 왕위를 이어받아야 하는데, 일찍 죽은 것인즉, 임금의 할아버지 역시 폐질이 있거나 혹은 일찍 죽어서 임금이 되지 못한 것이다. 이는 임금의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서 나라를 받았으나 또 일찍 졸하여서 지금의 임금이 증조에게서 나라를 받은 것이다.”
하였다.
이제 전체 문세(文勢)를 상세히 살펴보면, 여기에서 이른바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정통으로서 마땅히 즉위하여야 하는데 폐질이 있어서 즉위하지 못한 자를 가리켜서 한 말이며, 그 나머지 중파(衆派)에 대해서는 애당초 거론하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니 박지계가 오늘날의 일에 비기어 논한 것은 어디에서 취하여 말한 것인지를 모르겠다. 예가 창업(創業)한 임금인 경우와 합치된다고 여긴 것인가, 아니면 정체(正體)를 이어받은 정통의 임금인 경우와 합치된다고 여긴 것인가?
주상께서 의(義)를 일으킨 공이 참으로 크기는 하지만, 창업한 경우에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대원군은 이미 마땅히 즉위하여야 할 분이 아니어서 일찍이 선묘에게서 나라를 받을 일이 없다. 박지계의 말은 어떻게 보아도 근거가 없다. 그런즉 소종(小宗)이 되고 사친(私親)이 되어서 삼년상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장장(章章)마다 분명하다. 나의 견해가 이와 같으므로 전에 최명길이 물어왔을 적에도 역시 이런 내용으로 답하였는데, 모르겠거니와 여러 사람들의 뜻은 어떠한가?
여러 사람들이 쟁론하는 바는 모두가 친손이 들어와서 정통을 이은 데에 근본을 두고 있는데, 이것으로써 고집하여 말할 바탕으로 삼는 것은 아마도 《의례》의 뜻을 제대로 궁구하지 못한 탓에서일 것이다. 금상께서는 비록 친손이기는 하지만 이미 정통이 아니다. 그러니 사친에게 추은(推恩)할 수가 없으며, 한 선제가 효소제(孝昭帝)의 뒤를 이은 것처럼 마땅히 곧장 선조의 뒤를 이어야 할 것이다.
박지계의 무리는 고위(考位)가 없어서 아버지가 없는 지경이 된다고 하는데, 정자와 주자가 어째서 한 선제가 위로 소제를 잇게 하였겠는가. 그렇다면 정자와 주자가 논한 바가 아버지가 없는 지경이 되게 한 것인가? 이것은 아주 중요한 핵심이 되는 부분인데, 어찌하여 상세히 살펴보지도 않고서 경솔하게 발언하여 시끄러운 단서를 불러온단 말인가.
세상 사람들이 대종과 소종의 뜻을 잘 알지 못하므로 모두들 친손이라는 데에 의심을 두고 있다. 설령 들어와서 정통을 잇는 것이 혹 증손이나 현손의 항렬에서 나왔을 경우, 2대와 3대를 모두 창업한 임금이 선대를 추증하는 것처럼 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소종을 이미 대통에 합해서는 안 되는 것인즉, 예(禰)를 잇는 자만이 유독 소종이 아니란 말인가? 모두들 세대가 멀어지면 소종이 된다는 것은 알고 있으면서 세대가 가까워도 역시 소종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성인께서 예법을 제정함에 있어서 참으로 이와 같이 막혀 통하지 않게 하였겠는가?
이귀가 말한 순(舜) 임금이 고수(瞽瞍)에 대해서 한 것과 우(禹) 임금이 곤(鯀)을 교(郊) 제사 지낸 것은 오늘날의 예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순 임금과 우 임금이 비록 요 임금과 순 임금으로부터 천하를 받기는 하였지만, 부자간에 서로 전한 것과는 같지 않다. 처음 봉해진 임금이 그 조상들을 추존하는 것은 삼대(三代) 시대에도 모두 똑같이 하였다. 우(虞)나라와 하(夏)나라는 다른 나라이니 부자간이 아니다. 그런데 어찌 이를 끌어대어 근거로 삼을 수 있겠는가. 인용한 말이 모두 정밀하지 못하고 밝지 못하니, 여러 사람들의 의논을 어찌 능히 승복시켜서 귀일되게 할 수가 있겠는가.
연려실기술 별집 제18권 / 변어전고(邊圉典故)
서쪽 변방[西邊]
○ 인조 갑자년(1624)에 왜국 추장 가강(家康)《고사촬요》에 수길(秀吉)이라고 잘못 기재되었다 이 그 아들 가광(家光)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중 현방(玄昉)을 보내 동래에 와서 대대로 좋게 지내자고 청하니 정립(鄭岦)ㆍ강홍중(姜弘重)ㆍ신계영(辛啓榮) 등을 보내 회답하고, 이어 포로로 와 있는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우복집 제4권 / 소차(疏箚)
옥당에 있으면서 양사(兩司)에 대해 처치(處置)하여 올린 차자
양사가 모두 인혐(引嫌)을 하고서 물러갔습니다. 말이 승여(乘輿)에 미치자 천자가 용모를 고치었고, 일이 낭묘(廊廟)에 관계되자 재상(宰相)이 대죄(待罪)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간쟁(諫諍)을 하는 신하의 풍채(風采)로, 나라의 원기(元氣)가 되는 것이며, 기강이 이로 말미암아 서는 것입니다. 제갈 무후(諸葛武侯)가 말하기를, “나라에 대해서 충성을 다하면서 염려하고 있는 여러 사람들이 단지 나의 잘못된 점을 공격하기를 부지런히 하면 일을 이룰 수가 있고 적을 물리칠 수가 있어서 공을 이루기를 발돋움하고 서서 기다릴 수가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일에 따라서 서로 바로잡아 주어 이로써 성심성의를 다해 세상을 이롭게 함을 넓히는 것이 바로 오늘날 대신들이 듣고자 하는 바입니다.
폐조(廢朝)가 다스린 10여 년 동안에는 간언을 물리치고 자신의 뜻대로만 하여 자신과 함께하는 자는 좋아하고 다른 의견을 가진 자는 미워하였습니다. 이에 당시에 이익만을 좇고 염치는 없으며, 구차한 얼굴을 하고 영합하는 무리들이 대각(臺閣)에 포진되어 있으면서, 임금의 말에 아부하기만을 일삼고, 임금의 잘못된 점을 감히 바로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끝내는 윗사람은 교만해지고 아랫사람들은 아첨이나 하는 데 이르게 되어, 언로(言路)가 막혀서 화(禍)의 계제가 이루어졌는바, 아, 그런 일들을 어찌 차마 이루 다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상께서 임어하신 처음에는 공손한 태도로 아랫사람들을 접하여, 말을 들어주기를 물 흐르듯이 하였습니다. 이에 간쟁하는 신하들은 각자 분발하여 눈을 크게 뜨고 간담을 펼쳐,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음이 없고, 말을 하면 모든 사실을 다 말할 것으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사이에 비록 풍문만 듣고서 아뢰어 사실대로 말하지 못한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도 있으나, 어찌 이로 인하여 한결같이 모두 물리치기를 음식이 목에 걸린 것을 보고서 먹는 것을 완전히 폐하는 것처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임금이 두려워할 대상은 오직 대간(臺諫)뿐입니다. 만약 추호라도 대간들을 경시하는 마음이 있다면, 끝내는 두려워하는 바가 없게 되어 방자하게 자신의 뜻만이 옳다고 여기는 걱정이 생기게 될 것인바, 몹시 우려스럽습니다. 전하께서 요즈음에 하신 거조는 이러한 점이 조금은 있는 듯합니다. 양사에서 이른바 교만하게 여기는 듯한 말투와 안색에 대해서는, 양사에서만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들 역시 걱정해 온 지 오래입니다.
현재는 상란(喪亂)된 나머지이니 더욱더 흔쾌히 받아들이고 널리 시행하여 뭇사람의 의논을 다 따라 주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언자(言者)들로 하여금 각자가 본 바를 다 말하게 하여야지, 억눌러 저지하여 그들의 기운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지난번에 헌부(憲府)에서 논한 바는 애당초에 가부를 헤아리지 않고서 발론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내리신 비답이 지나치게 엄준하여 대신(大臣)과 다른 의견을 주장하는 것을 그르다고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신들은 자사(子思)가 위(衛)나라 임금에 대해서 걱정한 것이 불행히도 가까울까 몹시 염려스럽습니다.
양사의 관원들에게는 단지 직무를 다한 일만 있을 뿐, 본디 피혐(避嫌)해야 할 혐의스러운 점은 없습니다. 대사간 장유(張維), 장령 이윤우(李潤雨)ㆍ권확(權鑊), 지평 이기조(李基祚), 헌납 정백창(鄭百昌), 정언 신계영(辛啓榮) 등에게 모두 출사하도록 명하소서.
우복집 별집 제6권 / 부록(附錄)
연보(年譜)
○ 5월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으며, 행(行) 대사헌(大司憲)에 옮겨 제수되었다.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으며, 다시 차자를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이에 나아가서 사은(謝恩)한 다음 인피(引避)하여 체차되었다.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이 당시에 옥당(玉堂)에서 차자를 올려 대사헌 남이공(南以恭)을 탄핵하였는데, 상이 크게 노하여, 논의를 주도한 박정(朴炡)ㆍ유백증(兪伯曾)ㆍ나만갑(羅萬甲) 등을 모두 외직에 보임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체차하였다. 그러자 양사(兩司)에서 여러 날 동안을 논집(論執)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선생은 종시토록 논집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 서로 정계(停啓)하기로 의논하였는데, 장령으로 있던 신계영(辛啓榮)이 갑자기 정계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이에 선생은 부득이 사유를 갖추어 아뢰고서 인피한 것이다.
응천일록 2(凝川日錄二) 광해 정사(1617, 광해군 9) 1월부터 광해 계해(1623, 광해군 15) 2월까지
임술년(1622, 광해군 14) 3월 26일
3월26일 영상의 계사는 대개, ‘이경직에 대하여는 윤허하는 명을 빨리 정지하고 그대로 부임하게 하는 것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지극히 원하는 바이다.’는 것이었는데, 비답하기를,
“경의 뜻은 좋으나 대간이 경직에게 죄주기를 청한 것은 실로 조정을 높이는 체통을 얻은 것이니, 좇지 않을 수 없소. 경은 안심하며 이런 말을 하지 말고 낯빛을 바로하여 여러 사람을 진정하시오.”
하매, 재차 아뢰니, 비답하기를,
“경에게는 조금도 미안할 것이 없으니, 굳이 번거롭게 하지 마시오.”
하였다. 정부의 한림 취재에, 유명립(柳命立)은 《송감(宋鑑)》에서 통(通)을, 신극(申極)은 《송감》에서 약(略)을, 안헌징(安獻徵)은 《강목》에서 약을 받았으며, 신계영(辛啓榮)은 밖에 있었다.
계해년(1623, 광해군 15) 1월 21일
21일 정부에서 한림을 취재하였는데, 신계영(辛啓榮)은 《좌전》에서 통을, 유흠(柳欽)은 《강목》에서 조를, 정성(鄭晟)은 《송감(宋鑑)》에서 조를 차지했다.
응천일록 3(凝川日錄三) 인조 계해(1623, 인조 1) 6월부터 인조 무진(1628, 인조 6) 3월까지
갑자년(1624, 인조 2)
○ 7월15일 집의 박정(朴炡)ㆍ장령 정기광(鄭基廣)과 최연(崔葕)ㆍ지평 이경용(李景容)과 신계영(辛啓榮)이 아뢴 대개는,
“무릇 논의에 있어 진실로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망령된 것을 참되다고 하는 논의가 있어 임금의 귀를 현혹시키고 사람의 마음을 동요시키게 한다면, 비록 그 사람을 멀리 물리치고 그 죄를 깊이 다스릴지라도 불가함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홍호가 망령되이 논하고 괴이하게 말한 죄는 파직에 그칠 것이 아니건만 신 등은, ‘시골의 어리석고 무식한 소견에서 나온 것이라.’하여, 다만 그 시비나 밝히려고 이 가장 가벼운 형벌로 논죄하였던 것입니다. 옥당의 차자가 말을 많이 늘어놓아 홍호를 구원하고, 승종에까지 언급하였으니, 그 시비의 거리가 홍호에게서 멀지 않습니다. 옥당은 이른바, 공론의 자리이니, 신 등이 스스로 옳다 하여 그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체차하여 물리치소서. 물러나 대죄합니다.”
하였다. 대사헌 정엽이 피혐하기를, ‘병으로 누워 있는 중에 또 옥당의 탄핵을 받았으니 체차하라.’는 것이었는데, 비답하기를,
“옥당에서 파직의 명을 거두기를 청한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뜻이니, 뒷 폐단 때문에 그 논한 바를 그르게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 승종의 죄를 논한 것에 이르러는 귀머거리나 소경의 말과 같아서 사리에 어두우니, 이는 반드시 식견이 밝지 못한 소치일 것이다. 승종은 앞서 홍호의 우매하고 망령된 상소로 인하여 버젓이 사절(死節)의 신하가 되었고, 뒤에 옥당의 식견이 밝지 못함으로 인하여 또 인자한 사람이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승종의 복이다. 옥당의 식견이 이처럼 밝지 못하니, 초야의 사람은 깊이 책할 것이 없다. 경은 사피하지 말라.”
하였다. 직제학 조익(趙翼)ㆍ교리 이윤우ㆍ정자 이행원(李行遠)이 아뢴 대개는,
“어제 내린 성상의 비답을 받자오니, 황공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신 등은 10년 동안 어떤 이는 전야에 물러가 있었고, 어떤 이는 시골로 갔다 왔다 하여 조정의 일은 들을 길이 없었습니다. 신 등이 다만 듣기로는 승종이 이첨과는 서로 반대되어 모든 옥사에 있어 구해 준 자가 꽤 있었다 하므로 망령되이 운운한 바가 있었던 것인데, 비답을 받자옵고 또 물의를 듣고 보니, 신 등의 들은 바가 분명치 못하고 망령되이 말한 죄가 크옵니다. 신 등의 관직을 깎으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 사간원의 계는 대개,
“대사헌 정엽과 사간 이하가 인혐하고 물러났습니다. 홍호는 나라는 팔아먹은 간적을 사절(死節)한 신하로 보기까지 하였으니, 사람들의 귀를 현란시키고 조정을 가벼이 본 죄를 어찌 언관이라 하여 너그러이 용서해서야 되겠습니까? 시끄럽게 홍호를 구원하기 위하여 말을 많이 허비한 옥당은 으레 그 죄책을 받아 마땅하거니와, 가장 가벼운 형벌로 논죄하자는 의논을 주장하여 시비의 귀추나 정하려 한 대간은 애당초 과격한 실수가 있는 것은 아니니, 아울러 출사할 것을 명하소서. 경연의 신하는 의리를 강론하여 밝히고 공론을 널리 펴는 것이 그 직책인데, 소를 올려 너절하게 홍호를 위해 변명하였고, 또 승종까지 언급하였습니다. 이첨이 폐모론을 주장할 적에 승종은 이첨과 반대였다고 하고, 이첨이 참혹한 옥사를 일으킬 적에 승종은 도리어 구해 주었다 하니, 식견의 밝지 못함이 이러합니다. 그리고 한갓 언로가 행여 막힐까 염려하고, 사론(邪論)이 나라를 병되게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논의가 그릇됨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청하옵건대, 조익 이하는 체차하고 홍호는 전대로 파직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출사에 대하여는 아뢴 대로 하라. 옥당은 언로가 막힐 것을 염려하여 차자를 올려 논변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뜻이므로 죄줄 만한 잘못이 없다. 홍호는 이미 파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었으니 결코 다시 파직할 수는 없다.”
하였다.
○ 10월20일 사헌부의 계목에,
“장만(張晩)의 소명(召命)이 내렸는데도 병을 핑계하고 올라오지 않은 죄는 결장(決杖) 1 백에 고신(告身)을 모조리 추탈할 것을 아룁니다.”
하니, ‘속(贖)만 바치고 파직하라’고 비답하였다. 홍문관의 본관록에, 이기조(李基祚)ㆍ윤지(尹墀)ㆍ이경의(李景義)ㆍ윤순지(尹順之)ㆍ나만갑(羅萬甲)ㆍ이경석(李景奭)ㆍ김설(金卨)ㆍ김반(金槃)은 5 점을 받고, 정종명(鄭宗溟)ㆍ최연(崔葕)ㆍ신천익(愼天翊)ㆍ김영조(金榮祖)ㆍ정세구(鄭世矩)ㆍ권도(權濤)ㆍ오준(吳俊)ㆍ이경용(李景容)ㆍ김남중(金南重)ㆍ홍명구(洪命耈)ㆍ신계영(辛啓榮)은 4점을 받았다.
응천일록 3(凝川日錄三) 인조 계해(1623, 인조 1) 6월부터 인조 무진(1628, 인조 6) 3월까지
정묘년(1627, 인조 5)
○ 1월6일 순안 어사(巡按御史)로 충청우도에는 심지원(沈之源)이, 충청좌도에는 최유해(崔有海)가, 경상좌도에는 신계영(辛啓榮)이, 경상우도에는 강석기(姜碩期)가, 황해도에는 민응회(閔應恢)가, 평안도에는 홍명구(洪命耈)가, 강원도에는 이경의(李景義)가, 함경도에는 조정호(趙廷虎)가, 전라우도에는 박황(朴潢)이, 전라좌도에는 이경여(李敬輿)가 나가게 되었는데, 명하여 인견하였다. 비망기에,
“지금 이 호패를 정돈하는 일은 국가의 안위에 관계되므로 상하(上下)가 경영하여 한 해만에 정탈하였으니, 그 수고가 지극하다. 각 도의 어사가 마음을 다하여 봉행하지 않는다면 국사가 틀어지게 된다. 어사 가운데 만일 사정을 따라 국사를 생각하지 않고 오래 머무르는 것을 싫어하여 심력을 다하지 않는 자나, 위세만 뽐내고 억울함을 살피지 않는 자나, 출척을 공정하게 하지 않아 국사를 무너뜨리는 자나, 주연(酒宴)에 빠져 여러 고을에 폐를 끼치는 자가 있다면, 다만 일시의 이조참의를 면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한평생 누를 짊어져서 영원히 조정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조금도 용서가 없다. 각기 공경하고 조심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비망기에,
“정경세(鄭經世)의 소장을 살펴보니 극히 가엾다. 본관으로 하여금 장례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제급(題給)하게 하여 유신(儒臣)을 우대하는 뜻을 보이고 가난하여 장사 비용을 마련하지 못하는 걱정을 구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5일 홍문관의 신록(新錄)에, 이경의ㆍ한흥일(韓興一)ㆍ김육(金堉)ㆍ오전(吳竱)은 8 점을, 조위한(趙緯韓)ㆍ민응형(閔應亨)ㆍ강대진(姜大進)ㆍ정세구(鄭世矩)ㆍ신계영(辛啓榮)ㆍ이경증(李景曾)ㆍ김광혁(金光爀)ㆍ여이징(呂爾徵)ㆍ최혜길(崔惠吉)ㆍ조경(趙絅)은 7점을 받았다. 이귀의 차자는, ‘대원군의 영여(靈與)를 순탄한 길을 따라 도성으로 모셔 들이는 것이 정분으로 보나 예의로 보나 조금도 해로움이 없으니, 바른 길을 버리고 민력을 허비해가며 험한 길로 들어오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었는데, 입계하였다.
○10월 20일 정부의 홍문록에, 한흥일(韓興一)ㆍ김육(金堉)ㆍ여이징(呂爾徵)은 8점을, 조경(趙絅)ㆍ오전(吳竱)ㆍ신계영(辛啓榮)ㆍ채유후(蔡裕後)ㆍ이경증(李景曾)은 7점을, 민응형(閔應亨)ㆍ이경의(李景義)ㆍ구봉서(具鳳瑞)ㆍ오단(吳端)은 6점을, 조위한(趙緯韓)ㆍ최유해(崔有海)ㆍ조문수(曹文秀)ㆍ김광혁(金光爀)ㆍ최혜길(崔惠吉)ㆍ이명웅(李命雄)은 5점을 받았다.
경상우병사의 서목은, ‘역적 이인거의 매부 정유한(鄭維翰)이 자수하였기에 가두었다.’는 것이었다. 합사가 아뢰기를,
“ 광선(朴光先)ㆍ임성지(任性之)ㆍ홍경정(洪景艇)ㆍ채승선(蔡承先)ㆍ이청(李淸)ㆍ곽천성(郭天成)ㆍ김륜(金崙)은 모두 흉적의 남은 무리로서 악한 일을 서로 조장해 오다가 지난번에 대사면령으로 인하여 모두 너그럽게 처결하는 은택을 입었는데, 어찌 다시 직명을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직첩을 주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박광선 등의 죄목은 매우 중한 데 이르지는 않았으니, 직첩을 도로 주는 것이 불가함이 없다.”
하였다.
응천일록 4(凝川日錄四) 인조 무진(1628, 인조 6) 4월부터 인조 경오(1630, 인조 8) 9월까지
기사년(1629, 인조 7)10월 10일
10일 진부총 접반사의 서목에,
“부총의 자문 게첩을 베껴서 보냅니다. 총병 게필기(揭筆基)가 모문룡을 대신하여 나옵니다.”
하였다. 의금부의 계본(啓本)에,
“수찬 신계영(辛啓榮), 부응교 이소한(李昭漢), 응교 김광현(金光炫) 등은 계해년의 일기를 이제껏 수찬하지 않았으니, 죄가 장형 1백으로 속(贖)바치는 공죄(公罪 공무상 지은 죄)에 해당함을 아룁니다.”
하니,
“신계영ㆍ이소한을 수속은 제하고 파직하라.”
하였다.
응천일록 4(凝川日錄四) 인조 무진(1628, 인조 6) 4월부터 인조 경오(1630, 인조 8) 9월까지
경오년 상 (1630, 인조 8)
24일 연평부원군 이귀의 차자는 대개, 추숭(追崇)에 관한 것이었는데, 입계하였다. 저번 주강(晝講)에 입시하였을 때 추숭할 것을 극력 요청했고, 이어서 바로 절목(節目)과 같은 별지를 올렸는데, 상께서도 역시 그 뜻이 옳다는 것으로 응수했었다. 옥당의 신계영(辛啓榮)과 최유해(崔有海)가 아뢴 것을 조정의 의논이 모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이귀가 극력 헐뜯자 상께서도 또한 ‘미안하다’고 전교를 내렸었는데, 그들은 다시 차자를 올려, ‘바라건대 성명(聖明)은 옛 성인들이 아버지를 존대하던 지극한 의리를 본받아서 성상의 마음으로 단안을 내리되, 조정의 의논에 저지당하지 말고 빨리 큰 예를 바루소서’ 하였다. 정경세의 차자에 비답하기를,
“경은 문장이 남보다 뛰어나며 기력도 아직 그다지 노쇠하지 않았으니, 사직하지 말아야 하오.”
하였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묘(墓)에 제사지내는 것은 옛날의 예가 아닙니다. 한대 이래 비록 고치지는 못하였으나, 부인이 무덤에 가는 것으로 말하면, 예(禮)에 실리지 않았으니, 그 예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여염간에도 이런 일이 없는데, 하물며 엄숙한 궁중의 존귀한 국모께서 그렇게 하셔야겠습니까? 높은 산에 능을 옮겼는데 서리와 이슬이 내리게 되므로 자전께서 비록 지극한 심정을 억지로 억제하지 못하여 이런 뜻이 계시는 것이나, 전하께서 진실로 반복, 종용하시어, 기어코 정지시키셔야 하고, 당초부터 외정으로 하여금 알게 해서는 안됩니다. 예관(禮官)이라면 예에 의거하여 방지하도록 아뢰어야 할 것인데, 바로 연기하여 거행하라고 청하였으니, 그 불찰이 대단합니다. 당해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시고 자전께서 능에 참배하시는 일을 빨리 정지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번 능에 참배하시는 일은 무방할 듯하니, 번거롭게 할 것 없다.”
하였다.
응천일록 5(凝川日錄五) 인조 경오(1630, 인조 8) 10월부터 인조 신미(1631, 인조 9) 12월까지
신미년(1631, 인조 9)
1월29일 양사의 대사간 권태일(權泰一)ㆍ사간 김반(金槃)ㆍ헌납 이경증(李景曾)ㆍ정언 이상질(李尙質)과 심연(沈演)ㆍ대사헌 장유ㆍ집의 유성증(兪省曾)ㆍ장령 신계영(辛啓榮)ㆍ지평 박안제(朴安悌)가 어제 있었던 간원에서의 미안했던 일로 모두 인피하였으며, 지평 김종일(金宗一)은 외방(外方)에 있다가 오늘 들어왔는데, 처치하여 모두 출사(出仕)토록 명하였으나, 특히 이경증과 이상질 두 사람은 체직하도록 명했는데, 곧 발론하던 당시 대간이었다.
3월24일 이조에서 도중 문안관(島中問安官)으로 신계영(辛啓榮)을 품계하였다.
8월8일 사헌부에서 올린 계본에,
“교리 신계영(辛啓榮)과 수찬 이명웅(李命雄) 등은 하배들이 이웃 사람과 싸운 일은 관원이 알바가 아닌 것인데, 국법을 생각하지 않고 하인을 보내 잡아 가면서 민간에 폐단을 끼쳐 일이 매우 불미스러웠으니, 죄로 태(笞) 50대를 때린 다음 부과(附過)하고, 환직(還職)합니까.”
하였는데,
“공으로 한 등을 감하고, 아울러 체차하라.”
하였다.
임하필기 제21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기사(耆社)의 최고령
98세에 윤경(尹絅), 97세에 이구원(李久源), 96세에 민성남(閔聲男), 94세에 이진기(李震箕), 김환(金鍰), 신경(申絅), 93세에 원혼(元混), 신계영(辛啓榮), 이산두(李山斗), 92세에 송순(宋純), 송찬(宋贊), 황흠(黃欽), 91세에 고형산(高荊山), 이경(李坰), 박태항(朴泰恒), 90세에 황희(黃喜), 윤금손(尹金孫), 김계도(金繼燾), 윤이지(尹履之), 이광적(李光迪)이 있었다.
임하필기 제29권 / 춘명일사(春明逸史)
우리나라의 장수한 노인들
열성공(烈成公) 황수신(黃守身)과 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 문강공(文康公) 정제두(鄭齊斗)는 88세를 살았고, 효절공(孝節公) 이현보(李賢輔)와 성안공(成安公) 상진(尙震)은 89세를 살았고, 해은(海恩) 윤이지(尹履之)와 판서 이광적(李光迪), 경헌공(敬獻公) 김사목(金思穆)과 연천(淵泉) 김이양(金履陽)은 90세를 살았고, 헌의공(獻懿公) 윤금손(尹金孫)과 익충공(翼忠公) 안윤덕(安潤德), 익장공(翼莊公) 고형산(高荊山)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경(李坰), 판서 박태(朴泰)는 91세를 살았고,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와 지중추부사 송순(宋純),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송찬(宋贊)과 판서 황흠(黃欽)은 92세를 살았고, 문절공(文節公) 조원기(趙元紀)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원혼(元混), 정헌공(靖憲公) 신계영(辛啓榮)은 93세를 살았고, 지중추부사 이진기(李震箕)는 95세를 살았고, 이맹전(李孟傳)과 문장공(文莊公) 민형남(閔馨男)은 96세를 살았고,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이구원(李久源)은 97세를 살았고, 정희공(靖僖公) 윤경(尹絅)은 98세를 살았다.
전후사행비고(前後使行備考) / 비고(備考)
전후사행비고(前後使行備考)
징비록(懲毖錄)에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일찍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경조(慶弔)의 예를 수행하였으니,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신숙주(申叔舟)가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왕래한 것이 바로 그중 하나이다.”
하였고, 신숙주의 행장(行狀)에,
“공(公)이 출발한 날로부터 돌아온 날까지는 대체로 9개월이 걸렸으니, 앞서 다녀온 통신사(通信使) 중에 이 분처럼 빠른 이가 없었다.”
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볼 때 개국(開國) 이래로 일본에 왕래한 자가 아마 많았을 터인데 사적(史籍)이 유실되어 지금 상고할 길이 없다. 다만 태종(太宗) 기축년(1409)에 박화(朴和)가 왕래한 행적이 야승(野乘)에 보일 뿐이고, 선조(宣祖) 경인년(1590)의 통신사가 다녀온 후로 그 행적이 역력하다. 이때부터는 그들이 와서 청원해야만 차송(差送)하였다. 조선 초기부터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사람을 모두 통신사라 일컬어 왔으나, 선조 병오년(1606)에 여우길(呂祐吉)이 가게 되었을 때 조정에서는 통신(通信)이라는 칭호에 혐의가 있고 또 명(明) 나라에도 주달(奏達)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사신의 호칭을 의논하여 고치도록 하였다. 어떤 이는 “쇄환사(刷還使)라고 해야만 한다.” 하였는데, 이것은 포로인[俘口]을 쇄환한다는 뜻이다. 어떤 이는 “통유사(通諭使)라고 해야만 한다.” 하였으나, ‘유(諭)’자를 이웃 나라에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와 이때 마침 덕천가강(德川家康)이 글을 보내와 화친을 요청하므로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고 일컫게 되었다. 그 후 정사년(1617, 광해군 9)에 오윤겸(吳允謙)과 갑자년(1624, 인조 2)에 정립(鄭岦)이 갈 때까지도 모두 회답사라고 일컬어 오다가 병자년(1636, 인조 14)에 임광(任絖)이 갈 때부터는 다시 통신사라고 일컬었다. 병오년에 통신사를 차출할 당시에 비변사가 아뢰기를,
“최근에 있었던 전례를 상고하건대, 경인년에는 상사(上使),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을 모두 문신(文臣)으로 차송하였고, 병신년에는 상사는 문관(文官)으로, 부사는 무관(武官)으로 차송하였으나 서장관은 없었습니다. 지금 사신을 보내기로 허락하셨으니, 경인년의 예에 따라 인원을 갖추어서 차송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살피건대, 병신년(1596, 선조 29)에 다녀온 사신으로 문관에는 황신(黃愼), 무관(武官)에는 박홍장(朴弘長)이었는데, 이들은 명 나라의 책봉사(冊封使)를 수행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근수배신(跟隨陪臣)이라 일컬었던 것이니, 후세에 이를 전례로 삼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경인년부터는 당상관(堂上官) 3품(品)으로 상사(上使)를 차출하고, 당하관(堂下官) 3품으로 부사(副使)를 차출하고, 5품~6품으로 서장관(書狀官)을 차출했는데, 서장관(書狀官)의 경우는 반드시 대간(臺諫)이 결함(結銜)된 까닭에 경인년의 서장관 허성(許筬)은 감찰(監察)의 직임을 겸임하고 갔었다. 병오년에 회답사(回答使)가 가려할 때 묘당(廟堂)이 의논드리기를, “사신의 호칭을 고쳤으니 서장관도 종사관(從事官)으로 고쳐야 합니다.” 하면서, 세종 계해년(1443, 세종 25)에 사신을 보낼 때에 훈련봉사(訓練奉事) 한 사람을 수행하게 하고서 종사관으로 호칭했던 사실을 가지고 증거를 대자, 상이 이 의논을 따랐다. 그 후부터는 이것을 준행하고 고치지 않았다. 강희(康熙) 신묘년(1711, 숙종 37)부터 삼사(三使)에게는 반드시 가화함(假華銜)을 제수하였다. 전례(前例)에 사신이 이미 돌아오면 상사와 부사에게는 모두 가자(加資)하고, 종사관에게는 승서(陞敍)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병오년에 다녀온 사신에게만은 그렇지 않았다. 왜인(倭人)의 답서에 거만스러운 말이 많았는데도 여우길 등이 논쟁하지 않았다 하여, 대신(臺臣) 최유원(崔有源)이 논핵하여 그의 가자를 삭탈하였다. 고려(高麗) 우왕(禑王) 3년 정사년(1377) 9월에 전 대사성(大司成) 정몽주(鄭夢周)를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이듬해 7월에 돌아왔다. 조선조(朝鮮朝) 태종(太宗) 9년 기축년(1409)에 부사직(副司直) 박화(朴和)를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박화가 일본에 이르자, 일본은 박화를 억류시키고 뇌물을 요구하였다. 정부가 왜사(倭使)가 돌아갈 때 서신을 보내 그들을 달래서 이듬해 돌아오게 하였다. 세종(世宗) 25년 계해년(1443)에 변중문(卞仲文)과 신숙주(申叔舟)를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당시 일본 국왕(國王)이 죽고 신왕(新王)이 사립(嗣立)하였다. 변중문을 통신사로, 신숙주를 서장관으로 삼았는데, 그들은 사신간 일을 이미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對馬島)에 들러서 도주(島主) 종정국(宗貞國)과 세견선(歲遣船)의 수효를 의정(議定)하였다. 당초 일본 사선(使船)에는 모두 일정한 수효가 있었으나, 유독 대마도의 배[船]만이 혹은 많기도 하고 혹은 적기도 하여 일정한 수효가 없었는데, 이때에 비로소 50척으로 약정(約定)하였다. 신숙주는 돌아와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찬집하여 올렸다. 세조(世祖) 12년 병술년(1466)에 세조가 비로소 일본에 통신(通信)할 것을 의논했으나 풍랑이 험하고 거리가 먼 때문에 제추(諸酋)에게 부쳐 보내려 했다. 그때 수린(壽藺)이란 자가 왜관(倭館)에 있었는데 사리를 조금 이해하는 편이었다. 드디어 그에게 명하여 서계(書契) 및 예물(禮物)을 주어서 국왕에게 전하도록 하고, 또 글을 부쳐서 대내전(大內殿) 및 뇌영(賴永)을 유시하였다. 뇌영이란 자는 서해도(西海道)의 비전주(肥前州)에 살며, 수린은 바로 그의 사역(使役)이었다. 세월이 꽤 지난 뒤에 수린이 돌아왔으나 그의 말은 대부분 허황하여 믿을 수가 없었다. 성종(成宗) 10년 기해년(1479)에 부제학(副提學) 이형원(李亨元) 등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으나 도착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신숙주의 임종 당시에 세조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를 묻자, 숙주가 대답하기를,
“바라건대, 일본과 친화(親和) 관계를 잃지 마소서.”
하였다. 세조는 그 말에 감동하여 이형원을 상사로 삼고, 서장관 김흔(金訢), 압물관(押物官) 조신(曹伸)과 함께 가도록 명하였다. 대마도에 이르러 사신들이 풍랑에 놀라 병을 얻었다고 글을 올려 상황을 보고하자, 세조는 서장과 폐백을 도주(島主)에게 전하고 돌아오도록 명하였다. 그 후로 다시는 그를 사신으로 보내지 않았다. 선조(宣祖) 21년 무자년(1588)에 황윤길(黃允吉), 김성일(金誠一), 허성(許筬)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당시 평수길(平秀吉)이 새로 원씨(源氏)를 대신하여, 관백(關白)이 되어 웅건(雄健)한 무력으로 8도(道)를 평정하였다. 무자년에 이르러 그의 신하에게 이르기를,
“우리 사신은 매번 조선에 가는데, 조선 사신은 오지 않으니, 이것은 우리를 깔보는 것이다.”
하고, 대마도 왜인 귤강황(橘康黃)을 보내와서 통신하기를 요구하였는데, 그 서사(書辭)가 매우 거만했다. 조정에서는 수로를 잘 모른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사신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더니, 이때에 와서 수길은 다시 대마도태수(對馬島太守) 평의지(平義智)와 왜승(倭僧) 현소(玄蘇)를 보내와서 전에 포로 된 사람 80여 명을 쇄환(刷還)하고, 또 공작(孔雀)을 바쳤다. 공작은 남양해도(南陽海島)에 놓아주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평의지가 또 동평관(東平館)에 머물면서 기필코 우리 사신을 데리고 같이 가려 했다. 이때에 첨지(僉知) 황윤길을 통신 정사(通信正使)로, 사성(司成) 김성일을 부사로, 전적(典籍) 허성을 서장관으로 차정하여 가서 이를 보답하고, 적중의 형편도 탐지해 오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의지와 함께 떠났다. 이때부터 준례가 되어서 통신사가 대마도에 이르면 대마도주는 이들을 호송하고, 돌아올 때에도 역시 그와 같이 하였다. 이듬해 봄에 윤길 등이 돌아왔다. 선조 28년 을미년(1595)에 황신(黃愼)과 박홍장(朴弘長)을 보내어, 명 나라의 책봉사(冊封使) 이종성(李宗城)ㆍ양방형(楊邦亨)ㆍ심유경(沈惟敬)을 따라서 일본에 가게 하였다. 이듬해 4월, 정사(正使)이종성이 부산(釜山)에서 탈출하므로 우리나라가 심우승(沈友勝)을 명 나라로 보내어 사유를 갖춰서 주달(奏達)하였더니, 명 나라는 양방형을 상사로 삼고, 심유경을 부사로 승급시켜 6월에 바다를 건너게 하였다. 황신 등은 양방형 등을 따랐으나 그들이 책봉하는 일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니, 황신 등도 따라 돌아왔다. 정기원(鄭期遠)을 보내서 명 나라에 주달하였다. 선조 40년 정미년(1607)에 회답사(回答使) 여우길ㆍ경섬(慶暹)ㆍ정호관(丁好寬) 등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무술년 이후로 대마도의 왜인이 귤지정(橘智正) 등을 연달아 보내와 화친을 요구하므로 조정에서는 중 유정(惟政)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가 실정을 탐지케 하였다. 그가 돌아와서 가강(家康)의 의사를 전달하기를,
“나는 임진년(1592)에 관동(關東)에 있었으므로 병조(兵曹)에 간여한 일이 없었으니, 조선과 나와는 원한이 없소.”
하였다. 그 후 그는 또 사람을 보내와 글로 수교를 요청하고, 지난 임진년 난리에 왜인이 선ㆍ정(宣靖) 두 능(陵)을 도굴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의 도굴범 두 사람을 결박하여 바치므로 저자에서 참형에 처하도록 명하였다. 첨지(僉知) 여우길을 정사로, 교리(校理) 경섬을 부사로, 도사(都使) 정호관을 종사관으로 삼은 다음, 통신(通信)이란 호칭을 회답(回答)으로 고치고는 가서 사기(事機)를 정탐해 오도록 하였다. 정월에 출발하였다가 7월에 돌아왔다. 당시 가강이 국정을 도맡아 수길의 정책을 모두 뒤엎고 그 아들 수충(秀忠)에게 전위하였던 까닭에 사신이 돌아올 때에 수충의 답서를 가져왔다. 또 포로 1천여 명을 쇄환해 왔으므로 사유를 갖추어 명 나라에 주달하였다. 광해군(光海君) 9년 정사년(1617)에 회답사 오윤겸(吳允謙)ㆍ박재(朴梓)ㆍ이경직(李景稷) 등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이에 앞서 수충이 평수뢰(平秀賴)를 멸하고 통신사를 요청하면서, 그들의 사신을 자주 변경에 보내왔다. 그리하여 첨지중추(僉知中樞) 오윤겸을 정사로, 행 호군(行護軍) 박재를 부사로, 행 사과(行司果) 이경직을 종사관으로 삼았다. 7월에 출발하였다가 10월에 돌아오면서 포로인 약간 명을 쇄환하였으므로 또 사유를 갖추어 명 나라에 주달하였다. 인조(仁祖) 2년 갑자년(1624)에 회답사 정립(鄭笠)ㆍ강홍중(姜弘重)ㆍ신계영(辛啓榮) 등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관백(關白) 수충이 그 아들 가광(家光)에게 전위하고 승려 현방(玄方)을 보내와 동래(東萊)에 이르러 수교를 요청하므로 정립 등을 보내어 회답하게 한 것이다. 이듬해 을축년에 정립 등이 돌아오면서 포로인 1백여 명을 쇄환하고, 또 관백의 의사를 전달하기를,
“포로인들이 자손을 낳아 벌써 성장하였으므로 헤어져 돌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인조 14년 병자년(1636)에 통신사 임광(任絖)ㆍ김세렴(金世濂)ㆍ황호(黃㦿)를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이보다 앞서 대마도 부관(副官) 평조흥(平調興)이 도주(島主) 의성(義成)과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조흥이 관백의 곁에 있으면서 8년 동안 돌아가지 않더니, 관백에게 참소하기를,
“조선이 우리를 매우 박절하게 대하는 데도 의성은 그들과 통호(通好)하는 일을 이롭게 여겨 업신여김을 받는 것도 마음에 달갑게 생각하니, 의성은 바로 조선의 한낱 번신(藩臣)일 뿐입니다. 지금까지 통신사가 올 때마다 예단 물건(禮單物件)은 모두 그가 스스로 마련한 것이고, 조선에서 보내온 것은 보잘것없는 1, 2건에 불과할 뿐입니다. 만약 군대를 출동시키지 않는다면 본국이 받는 수모를 지울 수 없을 것입니다.”
하자, 가광(家光)이 크게 노하여 모든 장수를 모으고 동병(動兵)을 꾀하니, 때는 을해년(1635) 12월이었다. 마침 가강 당시의 노장(老將) 정종(正宗)이란 자가 그곳에 있다가 큰소리로 말하기를,
“조선은 동맹국입니다. 수길이 이유 없이 동병했다가 오래지 않아 멸망하니, 사람들은 하늘이 내린 재앙이라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권현(權現)께서 수길의 죄목을 잡은 것은 무슨 일이겠습니까. 지금 조흥의 한마디 말을 가지고 화친을 깨고 군대를 출동시킨다면 전하께서는 무슨 면목으로 권현을 지하에서 뵙겠습니까.”
권현은 가강을 가리킨다. 하니, 관백이 의성과 조흥을 대면하여 힐문하자, 조흥의 말에는 설득력이 없었다. 정종이 아뢰기를,
“지금 만일 조흥을 죄 주지 않으면 여러 장수들은 각자 자신을 위태롭게 여길 것이오.”
하자, 관백이 드디어 조흥을 육오(陸奧)로 귀양 보냈다. 또 의성에게 이르기를,
“조선이 우리를 업신여긴다면 이것이 어찌 화호(和好)의 뜻이겠느냐. 너는 시험 삼아 통신사를 청해 오라.”
하였다. 의성이 우리 예조(禮曹)에 글을 바치기를,
“전번 우리 대군(大君)께서 수선(受禪)하던 날 사신이 비록 왔었으나 선대군(先大君)께서 훙서(薨逝)하신 후로 갑절 태평해졌으니, 통신사를 청합니다.”
하므로, 조정에서 그의 정상을 살피고, 승지 임광을 통신 상사로, 사복시 정 김세렴을 부사로, 장령 황호를 종사관으로 삼아 가서 하례하게 하고, 또 예조로 하여금 집정(執政)에게 글을 보내 포로인을 돌려보내도록 하게 한 것이다. 임광 등이 8월에 출발하여 12월에 그 경도(京都)에 이르니, 가광이 매우 기뻐하며 말하기를,
“조선의 통신사는 나에게 경사가 되오. 이처럼 한 사람이 조선 사신을 두 번이나 보게 된 것은 나의 할아버지나 아버지도 못했던 일이오.”
하고, 대접을 극진히 하였다. 이듬해 임광 등이 돌아왔다. 그 편에 집정 등원정성(藤原正盛)이 답서를 보내오기를,
“이른바 포로인을 우선적으로 모두 쇄환하였습니다.”
하였다. 인조 21년 계미년(1643)에 통신사 윤순지(尹順之)ㆍ조경(趙絅)ㆍ신유(申濡) 등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신사년(1641) 겨울에 도추(島酋) 의성이 왜인 평성행(平成幸)을 보내와 예조에 글을 바쳤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대군께서 나이 40에 비로소 득남(得男)하였으니, 귀국은 이웃 화친의 나라이므로 의당 경하의 사신이 있어야 할 것이오.”
하였다. 조정에서는 전례에 없던 일이라 하여 난색을 표명하자, 의성이 역관(譯官) 홍희남(洪喜男)에게 글을 보내 간청하였다. 조정에서 이에 의거하여 중국 병부(兵部)에 자보(咨報)하니, 회보에 이르기를,
“조선과 일본은 이웃 나라의 우의가 있으니, 왕이 참작하여 행할 일이오.”
하였다. 이때에 병조 참의 윤순지를 통신 상사로, 전한(典翰) 조경을 부사로, 이조 정랑(吏曹正郞) 신유를 종사관으로 삼아 가서 경하하게 한 것이다. 의성이 또 이르기를,
“일광산(日光山) 가강의 사당 뒤에 새로 사당(社堂)을 세우고 이름을 대권현(大權現)이라 하였소. 가강은 조선을 위해 수길을 섬멸한 분이니, 마땅히 제전(祭奠)을 드려야 할 것이오.”
하자, 조정은 또한 이 말에 따라 순지 등으로 하여금 가서 배알(拜謁)하게 하였다. 계미년 3월에 출발하였다가 11월에 돌아왔는데, 포로인 14명을 쇄환하였다. 또 이런 사유를 갖춰 중국 병부에 자문을 보냈다. 일광산에 치제(致祭)하는 일은 이때부터 준례가 되었다.효종(孝宗) 6년 을미년(1655)에 통신사 조형(趙珩)ㆍ유창(兪瑒)ㆍ남용익(南龍翼)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계사년(1653) 겨울 대마도 차사[差倭] 등성방(藤成方)이 와서 말하기를,
“관백 원가광(源家光)이 죽고 그의 아들 가강(家綱)이 대를 이었으니, 마땅히 경하사(慶賀使)가 있어야 하오.”
하므로, 이때에 참의(參議) 조형을 통신 상사로, 사복시 정유창을 부사로, 교리(校理) 남용익을 종사관으로 삼아 빙문(聘問)하게 한 것인데, 6월에 출발하였다가 이듬해 2월에 돌아왔다. 통신사가 출발하기 전에 왜인이 또 말하기를,
“가강의 사당이 권현당(權現堂)의 서쪽에 있으니, 악기(樂器)를 하사하시고 치제(致祭)도 해 주시기를 비옵니다.”
하므로, 명하여 권현의 예에 의거하여 시행토록 하고, 중국 예부에 전례와 같이 자문을 보냈다. 숙종(肅宗) 8년 임술년(1682)에 통신사 윤지완(尹趾完)ㆍ이언강(李彥綱)ㆍ박경준(朴慶俊)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관백 원가강에게 두 아우가 있었는데 좌마두(左馬頭)와 우마두(右馬頭)였다. 좌마두는 먼저 죽었으므로 가강이 임종할 때에 우마두를 세우라고 유명(遺命)하였는데, 이때에 우마두가 사위(嗣位)하여 강길(綱吉)이라 개명하고, 그의 아들 덕송(德松)을 세워 저사(儲嗣)로 삼았다. 신유년(1681) 가을에 대마도 차사 등일정(藤一政)이 와서 경하사를 요청하므로, 윤지완을 통신사로 차정하여 가서 빙문토록 하였다. 이언강을 종사관으로 삼았으나 임술년 정월에 4품직에 승직되었기 때문에 올려서 부사로 삼고, 박경준을 종사관으로 삼았다. 6월에 출발하였다가 10월에 돌아왔다. 중국 예부에 전례와 같이 자문을 보냈다. 숙종 37년 신묘년(1711) 통신사 조태억(趙泰億)ㆍ임수간(任守幹)ㆍ이방언(李邦彥)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기축년(1709)에 관백 강길(綱吉)이 죽고 신임 관백 원가선(源家宣)이 대를 이었다. 경인년(1710) 여름에 대마도 차사 평진련(平眞連)이 와서 경하사를 요청하므로, 조태억 등을 차출하여 통신사로 삼아 가서 빙문하게 한 것이다. 신묘년 6월에 출발하였다가 이듬해 3월에 돌아왔다. 중국 예부에 전례와 같이 자문을 보냈다. 숙종 45년 기해년(1719)에 통신사 홍치중(洪致中)ㆍ황선(黃璿)ㆍ이명언(李明彥)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임진년(1712) 겨울에 관백 가선이 죽고, 신임 관백 가계(家繼)가 대를 이었으나 계사년(1713) 봄에 대마도주가 글을 부쳐 부음(訃音)을 전해왔다. 미처 통신사를 요청하기도 전에 병신년(1716) 4월에 가계가 또 죽으니, 아들이 없었다. 초기에 전임 관백 강길의 사위 모(某)를 기이주 태수(紀伊州太守)로 삼았는데, 그가 죽자, 그 아우 중납언(中納言) 원길종(源吉宗)이 이를 대신하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길종이 민망(民望)에 따라 대를 이어 관백이 되더니, 정유년(1717) 10월에 대마도 차사 평윤지(平倫之)를 보내어 와서 경하사를 요청하므로, 홍치중 등을 통신사로 차정한 것이다. 기해년(1719) 6월에 출발하였다가 이듬해 정월에 돌아왔다. 중국 예부에 전례와 같이 자문을 보냈더니, 회자(回咨)하기를,
“자문은 잘 받았다. 조선국에서 일본국에 차정하여 보냈던 사인(使人)이 돌아왔을 때에, 그중에 사세를 명백히 아는 자가 있으면 한 사람을 간선(揀選)하여 진년공사(進年貢使)와 함께 오게 하라. 짐(朕)이 지방 정형(地方情形)을 물을 것이다. 해부(該部)는 이와 같은 내용으로 조선국에 행문(行文)토록 하라.”
하므로, 이때에 사역원 정(司譯院正) 신지순(申之淳)과 통신사와 같이 돌아온 왜학 당상(倭學堂上) 김도남(金圖南)을 전적으로 차출하여 보냈다.
증정교린지 제5권
신행각년례(信行各年例)
광해군 9년 정사(1617) 관백 원수충(源秀忠)이 대마도주를 시켜서 옛 우호관계를 다시 맺기를 청하자 이에 오윤겸(吳允謙), 박재(朴梓), 이경직(李景稷)을 보내어 통신하였다.
인조 2년 갑자(1624) 관백 수충(秀忠)이 그의 아들 가광(家光)에게 양위하고 통신사를 요청하자 정립(鄭岦), 강홍중(姜弘重), 신계영(辛啓榮)을 보내어 통신하였다. - 이상의 신행절목(信行節目) 등의 일은 문적(文蹟)이 없으므로 고찰할 수 없다. -
청음집 제29권 / 비명(碑銘) 6수(六首)
증(贈) 좌의정 행 형조 참판(行刑曹參判) 임공 광(任公絖)의 신도비명 병서
세자빈객(世子賓客) 임공 자정(子瀞)이 세자를 따라갔다가 연산(燕山)에서 졸하였는데, 나이가 66세였다. 부음을 아뢰자 상께서 불쌍하게 여기면서 의정부 좌의정을 추증하고 부의 물품을 더 내려주라고 하교하였으며, 연도(沿道)의 고을로 하여금 상구(喪柩)를 호송하게 하였다. 둘째 아들 윤석(允錫)이 이에 앞서 상소를 올려 달려가 구료하겠다고 진달하였는데, 끝내는 상구를 받들고서 돌아와 장단진(長湍津) 동면(東面)에 있는 선영의 곁 정향(丁向)의 산등성이에 장사 지냈다. 그다음 해에 소사도(小司徒) 신계영(辛啓榮)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 나에게 명(銘)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광(絖)이며, 자정(子瀞)은 그의 자이다. 나와는 같은 동네에서 자라 서로 60여 년을 종유하였다. 공의 큰형인 경(䋁)이 나보다 나이가 조금 적고 공은 나에게 있어서 동생뻘이었으니, 정의 도타움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으며, 다른 사람들 역시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심양(瀋陽)에 잡혀가 억류되어 있을 적에 공은 궁료(宮僚)로서 따라와 있었는데, 비록 드러나게 영광스러움과 위태롭게 곤욕을 당함이 서로 현격히 다르기는 하였으나, 드러난 자는 영광으로 여기지 않고 위태로운 자는 곤욕으로 여기지 않은 점은 처음부터 같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공이 세자를 따라 갈 적에는 참으로 병들어 있었는데, 한 번 가서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으니, 이제 모두 끝난 것이다. 아, 슬프고도 슬프다.
공은 사람됨이 고결하고 꿋꿋하며 우뚝하고 곧았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거처함에 있어서 엄하게 여겨 꺼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일을 당하여 조처함에 있어서는 파죽지세로 처리하였는데, 먼저 이치에 순한 곳으로 들어가 시작하였기에 사람들이 공의 뜻을 빼앗을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마음이 맞는 사람이 적었다. 그러나 그가 사귄 벗들은 모두 기절(氣節)을 숭상할 만하다고 칭하였다.-이하생략
택당선생 별집 제3권 / 소(疏) 하
갑신년 이월에 심양(瀋陽)의 빈객(賓客)으로 떠나게 해 주기를 청한 소
삼가 아룁니다. 세자 빈객(世子賓客)으로 말하면 청관(淸官)인 데다가 임무 또한 중하기만 한데, 신이 외람되게 차지하게 된 것은 참으로 요행이었다고도 하겠습니다. 하지만 신이 이미 오래 전부터 경악(經幄)에서 모셔 왔고 보면, 정사(政事)의 체례(體例)로 보나 전조(銓曹)의 법규로 보나 그다지 외람되다는 생각은 들지 않기에, 신이 감히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나아갔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임광(任絖)은 잉임(仍任)된 반면, 신은 면직의 명을 받고 말았는데, 이와 관련하여 전조가 입계(入啓)한 내용을 보건대, 정2품을 부빈객(副賓客)으로 있게 하는 것은 근래의 규정에 위배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신이 의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대저 부빈객이 정2품이나 종2품에 해당되지 않게끔 한 것은 옛날 법규이고, 소위 근래의 규정이라고 하면 이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심양(瀋陽)에 들어가는 관원을 차출하여 보낼 때 처음부터 청망(淸望)이 미흡한 이들을 뽑았기 때문에, 나라에 말들이 자자하게 퍼지면서 대론(臺論)이 잇따라 일어났는데, 이를 두고 어떤 이는 벌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도 하였고, 또 어떤 이는 힘이 없는 사람만 당한다고 하였으며, 심지어 청 나라 사람들까지도 이를 듣고서 비난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준수해야만 할 규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기묘년 겨울에 상기(喪期)를 마치고 조정에 들어왔을 때, 즉시 전조에 가서 신이 직접 그 일을 담당하고 싶다고 말했었는데, 이것은 신이 ‘당인불양(當仁不讓)’의 뜻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의 청망(淸望)이 이미 극에 달했던 만큼, 감히 자기 편할 대로 피혐할 수만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인데, 신하의 분의(分義)로 볼 때 이는 또한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대신이 신의 재주가 모자란다는 이유로 억누른 나머지 첫 번째로 의망(擬望)이 되지 않았고, 신의 입장에서도 또 부끄럽고 두려운 심정이 들었기 때문에 다시는 자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나 알다시피 그 직임을 외람되게 맡아 순월(旬月) 간이나 공무를 집행하고 있는데, 정작 심양에 들어가는 그 고초를 타인에게 담당하게 한다면, 그것이 옳은 일이겠습니까. 신이 비록 재주는 없지만 그래도 문자를 약간은 알고, 강설하면서 유익하게 보좌하는 점에 있어서는 조금 능하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여 년 간 조정에 몸담고 있는 과정에서 뚜렷이 드러난 위망(位望)이나 중하게 받은 은례(恩禮)로 볼 때, 어찌 임광(任絖)이나 신계영(辛啓榮)과 비교가 된다 하겠습니까. 게다가 두 신하는 신보다도 나이가 많아 몸이 쇠한 상태입니다. 신이 비록 병을 앓고 있다고는 하지만, 2년 간이나 추위를 무릅쓰고 북쪽 변방을 치달렸고 무더위를 뚫고서 남쪽 지방을 두루 다녔습니다. 이 모두가 공무로 인해 급박하게 돌아다닌 것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러져 죽는 일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유독 이번의 행차에 대해서만 싫어하고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조가 계청을 하면서 결코 옳다고 할 수 없는 근래의 규정이라고 하는 것을 끌어다가 신의 입장을 곡진하게 봐 주는 것처럼 하였으니, 신이 평소 구구하게 느끼던 소회를 스스로 밝힐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면 남을 탓하면서 정작 자기가 그 본을 따르는 결과가 더더욱 빚어진다고 할 것이니, 신이 무슨 면목으로 다시 청현(淸顯)의 반열에 설 수가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정사의 체례와 일의 도리를 굽어살피시어 다시 고쳐 차출하지 못하게 해 주소서. 그리하여 신으로 하여금 배종(陪從)하고 심양에 들어가 견마(犬馬)의 수고를 다할 수 있게 해 주신다면 더 이상의 다행이 없겠습니다. 신은 격앙되는 심정으로 간절히 기원하면서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해사록
병자년(1636, 인조 14) / 8월
11일(임오)
맑음. 새벽에 대궐로 나아가서 종사관(從事官)과 더불어 의막(依幕)에 들어가 있었고, 상사(上使)는 통화문(通化門) 안에 있는 부장청(部將廳)에 있었다. 장령 김휼(金霱)ㆍ참판 박로(朴𥶇)ㆍ동지의금부사 김대덕(金大德)ㆍ수찬 오달제(吳達濟)ㆍ참판 민형남(閔馨男)ㆍ참지 이상급(李尙伋)ㆍ필선 유수회(兪守會)ㆍ수찬 이도(李禂)ㆍ사서 남노성(南老星)이 찾아 왔고, 영의정 승평(昇平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ㆍ영돈녕부사 해창(海昌 해창부원군(海昌府院君) 윤방(尹昉))이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해가 솟을 무렵에 숙배(肅拜)하니, 임금이 사옹원(司饔院)에서 선온(宣醞)을 내리라고 명하고, 이어 각각 호피(虎皮) 1장[令], 유석(油席) 2자리[事], 활과 살 각 1벌[部]씩, 후추 5되[升], 부채 1쌈[㘽], 납약(臘藥) 9가지[種]를 내렸다. 물러나와 상사는 부장청으로 갔다. 군관은 절월(節鉞)을 받고, 서리는 마패(馬牌)를 받았다.
대궐을 나와 남관왕묘(南關王廟)에 갔는데, 내승(內乘) 신종술(辛宗述)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참판박로(朴𥶇)ㆍ오 전주 단(吳全州端)ㆍ문학(文學) 황일호(黃一皓)가 뒤따라 이르고, 조금 뒤에 상사가 이르렀다. 정랑 조석윤(趙錫胤)ㆍ수찬 이도(李禂)ㆍ안변 부사(安邊府使) 이기조(李基祚)ㆍ경기 감사 윤이지(尹履之)ㆍ도승지 김경징(金慶徵)ㆍ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 구굉(具宏)ㆍ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와서 모였다. 기백(畿伯 경기 감사의 별칭)이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동양위가 말하기를,
“이번에 만 리 먼 곳으로 사신을 가는데, 어찌하여 배웅하는 손님들이 드문가?”
하였다. 오후에 한강에 도착하니, 준비된 배가 12척이었다. 이 수찬(李修撰)도 뒤쫓아 이르고, 도사 김인룡(金仁龍)은 먼저 와서 기다렸다가 배에 들어와서 작별하였다.
유정(柳亭)에 오르니, 당숙인 생원 허부(許𡧰) 및 생원 허윤(許崙)ㆍ이 과천 건(李果川健)과 유정의 주인(主人) 첨정 유일(柳𦨙) 등이 함께 와서 전별연을 베풀었다.
저녁에 이 수찬은 돌아가고, 당숙과 함께 배를 타고 동호(東湖)의 독서당(讀書堂)으로 갔는데, 하인들이 강촌(江村)에 의막(依幕)을 설치하였다. 이것은 서당(書堂)의 고사(故事)에, ‘선생(先生)이 아니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였으므로, 찾아오는 손님에게 방해가 될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양릉군(陽陵君) 허적(許𥛚)ㆍ생원 이희립(李希立)ㆍ좌랑 최문식(崔文湜)ㆍ생원 이종길(李宗吉)이 먼저 와서 있었다.
밤이 되니 상사가 과천(果川)에서 돌아왔고 참의 나만갑(羅萬甲)도 이르렀는데, 승지 신계영(辛啓榮)ㆍ이 청산 원준(李靑山元俊)이 보러 왔다.
이보다 앞서, 왕세자가 능(陵)에 참배할 때에 황 감군(黃監軍 명(明)의 황손무(黃孫茂))이 또 이르니, 경기 감사가 여러 번 인부와 말이 모자라는 상황을 아뢰었는데, 승정원(承政院)이 계청(啓請)하기를, ‘통신사(通信使) 일행을 모두 수로(水路)를 거쳐 가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조정의 의논이 모두 온당하지 못하다고 하였고 각 고을의 폐해도 인마가 모자라는 어려움보다 심하다고 하였다.
종사관이 상소하여 근친(覲親)을 빌어, 곧바로 청주(淸州)로 향하였다.
광주 목사(廣州牧使) 허휘(許徽)는 지응차사원(支應差使員)으로, 경안 찰방(慶安察訪) 한정(韓珽)은 부마차사원(夫馬差使員)으로 먼저 와서 기다렸다.
이날 동풍이 크게 불었다.
해사일기(海槎日記) 1 / 계미년(1763, 영조 39) 8월
3일(정해)
인조 갑자년(1624)에 수충이 그의 아들 가광(家光)에게 전위(傳位)하고서 대대로 내려오는 우호(友好)를 닦자고 요청하므로, 정입(鄭岦)ㆍ강홍중(姜弘重)ㆍ신계영(辛啓榮)을 세 사신으로 삼았다.
동주집 전집 제3권 / 시(詩)○영남록(嶺南錄)
서장관 신계영을 전송하다〔送辛書狀啓榮〕
예악은 오나라 계찰처럼 훌륭하고 / 禮樂吳公子
시서는 한나라 육가처럼 뛰어나네 / 詩書陸大夫
배와 수레 타고 먼 나라로 가니 / 舟車重譯遠
풍토 다른 오랑캐 땅이라네 / 風壤百蠻殊
밤 저자에선 교주를 자랑하고 / 夜市鮫珠薦
가을 돛배에선 월나라 베를 나르겠지 / 秋帆越布輸
서리 내려 귤과 유자 익고 / 天霜深橘柚
사람들은 갈대숲으로 나가겠지 / 人物出菰蘆
글자는 왕희지의 획을 파괴하였고 / 字破羲之畫
집에는 부처 그림을 간직한다네 / 家藏釋氏圖
이기려는 마음은 시퍼런 칼날도 가볍게 여기고 / 勝心輕白刃
이익을 노려서 붉은 차조기 쫓는다네 / 射利逐丹蘇
거북이가 때때로 궤를 열고 나오고 / 龜寶時開柙
가마우지는 저물녘 호수로 들어오네 / 魚鷹晩入湖
줄지어 춤추는 이들에게 금전 던져 주고 / 金錢飛舞佾
은 부채로 노래에 가락 맞추네 / 銀箑節歌呼
색다른 풍속이 눈을 놀라게 하겠지만 / 異俗曾驚眼
이별하는 자리에 탄식을 일으키네 / 離筵更起吁
구름 물결 사이 이별하는 길에 / 雲波間別路
술 따르는 이 마음 외로워라 / 斟酌此情孤
용주유고 제14권 / 지(誌)
인조 헌문열무명숙순효 대왕 장릉지〔仁祖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長陵誌〕
아, 삼가 생각건대, 우리 인조 헌문열무명숙순효 대왕(仁祖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의 성은 이씨(李氏), 휘는 모(某 종(倧)), 자는 모(某 화백(和伯))이니 원종 공량대왕(元宗恭良大王)의 장자이시며 선조 소경대왕(宣祖昭敬大王)의 손자이시다. 모친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는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 구사맹(具思孟)의 따님으로, 만력(萬曆) 을미년(1595, 선조28) 11월 7일에 황해도(黃海道) 해주부(海州府)에서 왕을 낳으셨으니, 바로 원종께서 제왕자(諸王子)로서 호종하던 행재소(行在所)였다.
인조께서 탄생하시기 전에 점쟁이가 점을 치기를,
“아무 날에 탄생하실 것인데 귀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는데, 탄생하시던 날에 붉은 빛이 밝게 빛나고 방에 기이한 향기가 가득하였다. 외조모 평산부부인(平山府夫人) 신씨(申氏)가 옆에 있었는데, 꿈에 붉은 용이 모후(母后) 옆에 있는 것을 보고 또 어떤 사람이 병풍에 여덟 자를 쓰는 것을 보았는데, 그 말이 매우 신기하였다. 신부인이 기뻐하다가 깨어 보니 왕이 탄생하셨다. 모습이 비범하고 오른쪽 넓적다리에 무수한 사마귀가 있었는데, 선조께서 보시고 기이하게 여기며 이르시기를,
“이것은 한 고조(漢高祖)의 상이니 누설하지 말라.”
라고 하셨다.
겨우 2, 3세의 나이에 궁중에 있게 되었는데, 웃음과 말이 적고 장난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선조께서 더욱 기특하게 여기고 융숭하게 돌보셨으니, 친왕자라도 이보다는 사랑받지 못하였다. 선조께서 소자(小字)와 휘를 지어주셨으니 얼마나 관심을 두셨는지 알 수 있는데, 광해군(光海君)이 듣고서 좋아하지 않았다.
5, 6세가 되자 유달리 총명하여 번거롭게 가르치지 않아도 문리가 단번에 향상되었다. 성동(成童)이 되기 전에 선조께서 바깥의 스승에게 가서 배우도록 명하셨는데, 바로 외숙인 능해군(綾海君) 구성(具宬)의 집이었다. 왕은 친가와 외가의 높고 낮은 사람 모두의 마음에 들었으며 털끝만큼도 모나게 굴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힘쓰셨다.
정미년(1607, 선조40)에 능양도정(綾陽都正)으로 품계가 오르고 곧이어 군(君)에 봉해졌는데, 이는 모두 스스로 이룬 것이지 특별한 은혜를 입어서만은 아니었다.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는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따님인데, 선조께서 또한 친히 간택하여 그 덕용(德容)을 알아보고서 왕으로 하여금 아내로 맞아들이게 하셨다.
원종(元宗)께서는 광해군이 보위에 있을 때에 심한 시기를 받았으며, 왕의 셋째 아우 능창군(綾昌君) 이전(李佺)은 약관(弱冠)의 나이로 법에 걸려 죽임을 당하였다. 원종께서 마침내 근심하고 괴로워하다가 병을 앓으셨는데, 왕이 손가락을 베어 피를 올렸으나 효과가 없었다. 이때 온 집안이 떨면서 모두 왕을 위하여 두려워하였으나, 왕은 곡읍(哭泣)하는 예절을 그치지 않았으며 꽁꽁 언 땅위에 거처하며 여러 날 동안 미음도 입에 대지 않았다. 모든 상제(喪祭)를 반드시 예제(禮制)대로 행하시니, 들은 사람들이 모두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다.
오랜 뒤에 광해군의 무도한 행동은 날이 부족할 정도로 심해졌다. 천한 자를 귀하게 만들고 뇌물을 받는 길을 열어 놓았으며, 산의 나무를 베어내고 돌을 옮겨와 날마다 천여 명을 동원하여 궁실(宮室)을 높이 짓고 조각하니, 백성이 명을 감당하지 못하여 열 집에 아홉 집은 흩어졌다. 흉악한 무리들이 발호하여 안팎에서 들쑤시고 선동한 끝에 모후(母后)를 유폐하여 서궁(西宮)이라 칭하고 골육을 찢어 죽여, 무고한 사람들의 호소가 하늘에 사무쳤으니, 나라가 망하리라는 것은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나 모두 알 수 있었다.
왕이 비록 재능을 감추고 자중하셨으나, 나라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어 때때로 눈물을 흘리면서 이씨의 사직을 왕망(王莽)과 동탁(董卓)같은 자의 손에 넘기지 않겠다고 맹세하셨다. 이때에 신경진(申景禛), 구굉(具宏), 심명세(沈命世), 구인후(具仁后) 등이 왕을 가까이 모시면서 평소 임금의 도량을 지닌 왕에게 감복하였다. 마침내 김류(金瑬), 이귀(李貴), 김자점(金自點), 최명길(崔鳴吉), 이서(李曙), 홍서봉(洪瑞鳳) 등 조정에서 물러난 인망있는 사람들을 소개하여 왕을 찾아뵙게 하니 왕이 한번 보고 서로 뜻이 맞았다. 마침내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왕을 추대하여 목숨을 바치고자 하였다.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조1) 3월 12일 계묘에 왕이 의병을 일으켜 창의문(彰義門)으로 들어가니, 궁궐을 지키던 광해군의 장사(將士)들이 자물쇠를 부수고 문을 열어 왕을 맞이하였다. 왕이 궁궐 안의 악인을 숙청하고 즉시 경운궁(慶運宮)으로 나아가 대비 김씨에게 문안하고 이어 재배하고 엎드려 곡하시니, 신하들이 모두 곡하였다. 대비께서 선조(宣祖)의 허위(虛位)를 설치하도록 명하고, 내관(內官)에게 명하여 왕을 인도하여 들이게 하였다. 왕이 재배하고 곡하니 따라온 신하들도 곡하였다. 대비께서 또 왕에게 국보(國寶)를 전하라고 명하니, 왕이 덕이 없다고 사양하였다. 대비께서 일어나 하교하기를,
“신민(臣民)이 사랑하여 추대하였으니 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찌 나만 유폐에서 벗어날 뿐이겠는가. 종묘사직의 복이로다. 너는 왕위에 올라야 하니 사양해서는 안 된다.”
라고 하셨다. 왕이 절하고 나가 선조의 옛 별당(別堂)에서 즉위하시니, 대비의 명을 따르신 것이다.
대비께서 또 교서(敎書)를 내려 중외에 명백하게 알리기를,
“왕은 총명하고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또 비범한 모습이 있어 선조께서 옥궤(玉几)에 기대어 왕의 손을 잡고 탄식하셨으니, 오늘의 반정(反正)은 실로 선조의 뜻을 이룬 것이다.”
라고 하셨다. 대비께서 또 하교하기를,
“광해군은 천리를 무시하여 나의 부모를 죽이고 나의 형제를 도살하고 나의 여덟 살 된 어린 아들을 빼앗아 잔인하게 죽였다. 내가 지금 다행히 하늘의 해를 보게 되었는데 이 자를 버려두고 형벌하지 않는다면, 원수를 갚는 《춘추(春秋)》의 대의(大義)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셨다. 왕이 간하기를,
“그가 비록 무도하지만 15년 동안 군위(君位)에 있었던 사람이니 형벌할 수는 없습니다.”
라고 하셨으나, 대비께서 그래도 듣지 않으셨다. 왕이 유순한 낯빛으로 세 번 간절히 간하시니 대비의 마음이 풀렸다.
왕이 마침내 광해군의 거처를 바꾸고 상식(尙食)으로 하여금 음식을 공급하게 하고, 승정원에 경계하기를,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전에 광해군을 받들었던 신하이니, 소홀히 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 보호하라.”
하셨다. 광해군을 안치하게 되어서는 왕이 폐비(廢妃)와 후궁을 따라가게 하였으며, 또 그들을 위해 양식을 넉넉히 보내고 의복을 때맞춰 보내어 중사(中使)들이 길에 이어졌으니, 백성이 듣고서 찬탄하였다.
왕은 또 형조에 명하여 광해군 밑에서 죄를 지은 자를 토죄하게 하셨다. 아양 떨면서 권세를 부린 궁첩을 주벌하고, 이이첨(李爾瞻), 한찬남(韓纘男), 정조(鄭造), 윤인(尹訒), 이위경(李偉卿) 등을 저자에서 거열(車裂)하고, 범처럼 흉악한 마음으로 폭정을 도운 박엽(朴燁), 정준(鄭遵)을 그 소재지에서 효시(梟示)하고,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 이후 꾸며 만든 옥사에 관련된 자를 모두 용서하고, 토목 공사와 물자 징발과 외척, 권세가의 전장(田莊)에 대한 면세 등 백성에게 해가 미치는 것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모두 다 혁파하고, 거짓된 공훈을 삭제하고 남의 글로 급제한 자를 죄주고, 제멋대로 행동한 내수사 노복 두 사람을 참형에 처하여 백성에게 보이고, 사방 백성의 미납 조세를 탕척하여 징수하지 않으시니, 서울과 근교 및 먼 지방에 사는 농부와 부녀자들까지도 모두 환호하고 서로 축하하면서 “살아서 성세(聖世)를 보는구나.”라고 하였다.
왕이 친정(親政)하게 되자 은둔했던 이원익(李元翼)을 가장 먼저 기용하여 영의정으로 삼고, 정온(鄭蘊)을 제주(濟州)에서 불러와 사간으로 삼고, 정홍익(鄭弘翼)을 광양(光陽)에서 불러와 대사성으로 삼고, 김덕함(金德諴)을 사천(泗川)에서 불러와 사간으로 삼으셨다. 또 선조 때의 구신(舊臣)으로 성품이 돈후하고 학식이 있는 윤방(尹昉), 신흠(申欽), 오윤겸(吳允謙), 이정귀(李廷龜), 정경세(鄭經世) 등도 모두 등용하고, 또 예를 갖추어 장현광(張顯光), 김장생(金長生) 등을 맞이하여 모두 간쟁(諫爭)하는 벼슬에 제수하고, 그 밖에 효성과 공경이 지극하고 품행과 재능이 있는 선비들에게 모두 거가(車駕)를 보내어 올라오게 하셨다. 이에 식자(識者)들이 “천하의 걸출한 인물들이 조정에 모였다.”라고 하였다.
여름 5월에 배신(陪臣) 이경전(李慶全)과 윤훤(尹暄) 등을 보내어 대비의 주문(奏文)을 가지고 연경(燕京)에 가서 봉전(封典)을 청하게 하였다. 2년 뒤에 희종황제(熹宗皇帝)께서 사례감 태감(司禮監太監) 왕민정(王敏政)과 어마감 태감(御馬監太監) 호양보(胡良輔)를 보내어 왕에게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내리고 칙유(勅諭)하였는데, 그 칙서는 다음과 같다.
“조정에서 번국(藩國)을 세우는 것은 이로써 강역(疆域)을 지키기 위함이니, 일이 많은 이때에 군국(君國)의 주인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에 해당 국가의 소경왕비(昭敬王妃)와 신민들의 주청에 의거하건대, 그대는 서열이 합당하고 인심이 귀속되었으며, 또 공손히 우리를 받들어 군량을 보내 도왔으니, 특별히 그대를 봉해 조선 국왕으로 삼노라. 국사를 통솔하여 우리의 변방을 튼튼히 하고 그대의 영토를 안정시키라.”
즉시 배신 박정현(朴晶賢) 등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어 사례하게 하였다. 겨울 윤10월에 정사 공신(靖社功臣)의 위차(位次)를 정하도록 명하여 김류(金瑬) 등 50인을 녹훈하였다.
갑자년(1624) 정월에 이괄(李适)이 평안 병사(平安兵使)로서 군사를 일으켜 반역하니, 왕께서 대비를 모시고 호서(湖西)로 나가셨는데 장만(張晩)과 이수일(李守一)에게 명하여 토벌하고 2월에 환도하셨다. 여름에 일본 관백(關白) 원수충(源秀忠)이 아들 가광(家光)에게 전위하고 사신을 보내어 조빙(朝聘)하였는데, 왕이 정립(鄭岦) 등을 보내어 회답하고 잡혀갔던 포로 1백 40여 명을 쇄환하였다. 겨울에 대비를 명렬대왕대비(明烈大王大妃)로 높여 진하하고 경덕궁(慶德宮)에서 진풍정(進豐呈)을 베풀고 인헌왕후(仁獻王后)를 함께 모시어 헌수(獻壽)하셨다.
을축년(1625)에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이 죄를 받아 간성(杆城)에 안치되었다. 이보다 앞서, 이공이 혼조(昏朝)에서 수의(收議)할 때 부도한 의견을 낸 것 때문에 반정 뒤 대비께서 크게 노하여 처형하려 했으나 왕이 반복하여 변론하신 덕에 면할 수 있었다. 이괄의 역당을 다스릴 때에 이르러 이공을 끌어댄 역적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담당 관사에서 여러 날 탄핵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왕이 비로소 안치하도록 윤허하신 것이다. 그를 위해 슬피 눈물을 흘리느라 목이 메고, 그 아들을 불러 보시고 강원 감사에게 하유(下諭)하여 특별히 대우하게 하셨으며 얼마 후에 서울로 소환하셨다. 유효립(柳孝立) 등의 반역이 일어났을 때에 역적들이 또 이공을 끌어대고 자전(慈殿)의 밀지를 사칭한 일을 말하자, 대비께서 더욱 크게 노하셨다. 왕께서 마침내 어쩔 수 없어 자결하게 하였는데, 그 후 슬퍼해 마지않아 그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여러 아들에게 벼슬을 내리셨다.
여름 4월에 정사 공신(靖社功臣)과 진무 공신(振武功臣)을 거느리고 친히 회맹제(會盟祭)를 거행하신 다음 연회를 베풀고 수찰(手札)을 내려 하교하기를,
“경들이 아니었다면 윤리가 무너지고 종묘사직이 전복되었을 것이니, 경들의 공이 참으로 크다. 그러나 임금과 신하가 각각 그 도리를 다하여 능히 사욕을 버리고 지극한 다스림을 함께 도모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라고 하셨다. 가을 9월에 재이(災異)가 있었는데, 자책하는 교서를 내리고 직언(直言)을 구하셨다.
병인년(1626) 1월에 인헌왕후께서 승하하셨다. 왕이 묏자리를 택하게 하였는데 김포(金浦)가 길하였다. 원종대왕(元宗大王)의 능도 같은 묘역에 무덤을 달리하여 이장하니, 바로 이곳이 장릉(章陵)이다.
정묘년(1627) 1월에 금(金)나라 사람이 무오년(1618, 광해군10)에 항복한 장수 강홍립(姜弘立)을 길잡이로 삼아 대거 침입하였다. 왕은 강화도로 행행하시고, 원로 이원익(李元翼)에게 명하여 세자를 도와 호남(湖南)을 지키게 하셨다. 왕이 행궁(行宮) 중문에 나아가 섬 안의 부로(父老)들을 면대하여 하유하고, 또 연미정(燕尾亭)에 나아가 장사(將士)를 격려하시니, 백성은 모두 감격하여 울고 선비들은 임금을 친애할 줄 알았다.
금인이 요동 사람 유해(劉海)를 보내어 화친을 청했는데, 글에 남조(南朝 명나라)를 돕지 말라는 말이 있어 왕이 의리에 의거하여 물리치셨다. 금나라 장수가 듣고서, “조선은 예의를 지키는 나라이니 도리에 어긋난 일로 협박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단지 이웃으로 우호를 맺기를 청하니, 조정에서 비로소 그 요청에 응하였다.
3월에 환도한 다음 권첩(權怗) 등을 보내어 적의 침략이 위급하여 기미(羈縻)하게 된 사정을 명나라에 아뢰니, 예부가 회자(回咨)하기를,
“성지를 받드니, ‘오랑캐와 통문(通問)하며 왕래하고 임시방편으로 군사를 파한 것은 왕의 본의가 아니다. 군신(君臣)의 대의에 이르러선 해와 별처럼 밝으니, 왕의 충성을 짐이 환히 아는 바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라고 하였다.
8월에 희종황제(熹宗皇帝)가 승하하시니, 왕이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거애(擧哀)하고, 이흘(李忔) 등을 보내어 새 황제의 등극을 축하하셨다.
기사년(1629) 여름에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승려 현방(玄方)을 보내어 공무목(公貿木)을 줄이지 말기를 청하였는데, 왕이 전례가 없는 일이라 하여 물리치고 현방에게만 물건을 더 내리셨다.
무진년(1628) 봄에 날씨가 가물어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왕이 수찰을 내려 하교하기를,
“어공(御供)하는 물건을 거의 다 줄였는데 담비 갖옷만은 아직 줄이지 못했다. 서방의 백성이 얼어 죽는 때에 가벼운 갖옷을 몸에 걸치는 것이 내 마음에 편하겠는가. 올해에는 담비 갖옷을 바치지 말라.”
라고 하였다.
경오년(1630) 4월에 하교하기를,
“노인을 공경하고 어진 이를 존경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니, 옛날 제왕들은 연회에 친히 나와 위로하면서 관작이나 비단을 내리기도 하였다. 지금 내가 덕이 없어 천심(天心)에 합당하지 못한지라 7, 8년 동안 병란과 기근이 잇따랐으니, 기로(耆老)들을 생각하면 절로 얼굴이 붉어지고 마음이 두려워진다. 노인에게 벼슬을 두루 내리고, 환과고독(鰥寡孤獨)과 폐질(廢疾)이 있는 자에게는 귀천의 구분 없이 또한 쌀과 고기를 내리도록 하라.”
라고 하셨다. 홍서봉(洪瑞鳳) 등 재신(宰臣)들이 모여 잔치를 열고 그 노모들에게 헌수할 때에 왕이 각각 풀솜 두 근을 내리게 하셨다.
5월에 가도(椵島)의 비장(裨將) 유흥치(劉興治)가 반란을 일으켜 도독(都督) 진계성(陳繼盛)을 죽였다. 왕이 이서(李曙)와 정충신(鄭忠信)을 보내어 죄를 성토하게 하니, 유흥치가 패주하였다. 중국 장수들이 이 사실을 듣고 의롭게 여겼다. 그 뒤 명나라 관내(關內)가 병화(兵禍)를 입었을 때에 정두원(鄭斗源)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바쳐 위문하고 또 병기를 바쳤으며, 또 고용후(高用厚)를 보내어 수복한 것을 진하하셨다. 후에 경중명(耿仲明)과 공유덕(孔有德) 등이 무리를 데리고 금(金)에 투항하였을 때에는 왕이 수군(水軍)을 보내어 명나라 장수들과 협공하게 하시니, 황제가 칙서를 내려 격려하였다.
임신년(1632)에 부왕(父王)을 원종대왕(元宗大王)으로, 모비(母妃)를 인헌왕후(仁獻王后)로 추존하고 홍보(洪靌)와 이안눌(李安訥) 등을 연경으로 보내어 추봉(追封)을 청하였다. 황제가 칙서를 내려 추봉하고 고명(誥命)을 내리고 공량(恭良)이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그 칙서는 다음과 같다.
“생각건대, 그대는 대대로 동쪽 번방을 지키며 일찍부터 충순(忠順)하다고 일컬어졌다. 그대 아버지 모(某 부(琈))는 작위를 잇지 못하고 일찍 죽었는데, 지금 추봉을 주청해 오니 효성이 가상하다. 특별히 예부(禮部)의 의논을 윤허하여 그대의 아버지 모를 추봉하여 조선국왕으로 삼고, 어머니 구씨(具氏)를 조선국 왕비로 삼아 고명을 내리고 시호를 준다. 그대는 이 영총을 받아 번국(藩國)을 빛내고 부디 더욱 정성과 절의를 굳건히 하여 이전의 미덕을 변치 말라.”
계유년(1633) 여름에 한인급(韓仁及) 등을 보내 장자(長子) 휘(諱) 모(某 왕(𣳫))를 세자로 봉하기를 청하셨다. 이듬해에 황제가 사례감 태감(司禮監太監) 노유령(盧維寧)을 보내어 세자의 고칙(誥勅)과 채단(綵段)을 가져와 칙서를 선포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왕은 대대로 동쪽 번방을 지켜오며 예를 지키고 의를 따랐으니, 공손하게 따르는 전통을 반드시 잘 계승할 것이나 나라에 일이 많으니 속히 대비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이미 세자를 세웠으니, 마땅히 이 가르침을 분명하게 알려주어 세자로 하여금 변함없이 구례(舊禮)를 준수하여 국가를 보전하게 하라.”
3월에 왕이 여러 신하에게 조회 받을 때 영의정 김류(金瑬)가 나아가 아뢰기를,
“근래 백관이 직무를 게을리 하고 기강이 해이해진 것은 참으로 사욕을 따르고 붕당을 감싸는 데서 기인한 것입니다.”
라고 하니, 왕이 이르시기를.
“병화나 홍수, 가뭄의 재앙도 실로 당론(黨論)보다 심하지 않다. 이러한 무리는 심상한 법률로 다스려서는 안 되니, 붕당을 감싸는 일이 발각되면 심한 자는 참형에 처하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셨다.
을해년(1635) 12월에 인열왕후(仁烈王后)께서 승하하셨다. 왕후께선 13년간 곤위(壼位)에 계셨는데, 임사(任姒)의 덕을 지니시어 문덕(文德)의 교화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 왕이 태학사 장유(張維)에게 명하여 묘지(墓誌)를 쓰게 하셨다.
병자년(1636) 봄에는 가뭄이 들고 여름에는 홍수가 있었다. 왕이 크게 경계하고 분발하여 교서를 내려 통렬히 자책하시고, 각도로 하여금 그해에 올릴 물선(物膳)과 공상지(供上紙)를 거두지 말게 하셨다. 또 재해를 입은 곳을 살펴서 진휼하게 하고, 또 이조와 병조에 명하여 수령과 변장(邊將)을 신중히 선발하게 하시며 이르시기를,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는 자는 수령이고, 군사를 어루만지는 자는 변장이니, 적임자가 아니면 군사와 백성이 어디에 의지하겠으며 국가가 누구를 믿겠는가.”
라고 하셨다.
4월에 또 교서를 내려 이르시기를,
“나라의 치란은 임금의 덕에 달려 있으니, 임금의 덕이 공경스러운가 나태한가에 따라 흥망이 판가름 난다. 내가 이 때문에 두려워 감히 태만하거나 안일하게 지내지 못했다. 그러나 원로(元老)가 남아 있지 않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점점 느슨해졌으니, 다스림을 내는 근원이 어찌 올바를 수 있겠는가. 인심이 분열되고 국가가 위태로운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라고 하시고, 또 삼사(三司)와 육조(六曹)에 하교하기를,
“삼사의 직무는 백관의 과실을 바로잡는 것이고, 이조의 직무는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고, 호조의 직무는 비용을 절약하는 것이고, 예조의 직무는 학교를 흥성시키는 것이고, 병조의 직무는 장수의 재목을 선발하는 것이고, 형조의 직무는 형벌을 신중하게 쓰는 것이고, 공조의 직무는 쇠퇴한 것을 일으키는 것이다. 모든 관사는 각각 마음을 다하고 그 직무를 폐기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정해진 형벌이 있으리라.”
라고 하셨다.
5월에 또 하교하기를,
“정치를 하는 요체는 인재를 얻는 데 있고, 다스림을 이루는 길은 어진 이를 급히 구하는 데에 있다. 세상에 인재가 부족하진 않지만 어진 이를 구하는 방도가 넓지 못할까 염려스러울 뿐이다. 몸가짐을 바르게 하여 덕행이 있는 자, 의리에 마음을 쏟아 학술이 있는 자, 지혜와 용맹이 남보다 뛰어나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자, 기개와 절의가 확고하여 직간할 수 있는 자, 강포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굳세고 과감하게 공무를 수행하는 자, 세상일에 통달하여 명민하게 대처하는 자는 모두 크게 쓸 만한 사람들이다. 외방에 있는 문무관으로 하여금 각자 자신이 아는 이를 천거하게 하고, 또 각도의 감사들로 하여금 이런 자들을 찾아 아뢰게 하라.”
라고 하시고, 또 이르시기를,
“예전부터 뛰어난 인재 중에는 또한 스스로를 천거한 자가 있다. 음식을 만들거나 소를 먹이는 천한 사람이라도 나는 목욕재계하고서 등용할 것이다.”
라고 하셨다.
3월에 금(金)나라가 황제라 칭하며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는 사신을 보내어 알려왔다. 이보다 앞서 금은 폐물(幣物)을 늘리고 군사를 지원하라고 우리를 협박하였으나, 왕이 대의(大義)로 물리치고 맹약을 어겼다고 꾸짖으셨다. 이번에 사신이 나오자 백성이 모두 저들이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에 분개하여 금의 사신을 죽이기를 청하였는데, 사신이 탐지하여 알고서 달아났다. 나라 안이 이때부터 혼란스럽고 흉흉하였으나, 왕은 오히려 의리를 지키고 조금도 뜻이 변치 않으셨다.
12월에 금나라가 노기를 품고서 갑자기 침범하니, 어가가 광주(廣州)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하였다. 적병이 날로 불어나 우리를 여러 겹으로 에워쌌는데, 이때 추운 날씨에 눈마저 내리니 장사(將士)들은 두려워 새파랗게 질렸다. 왕이 한데 서서 향을 피워 하늘에 빌기를,
“하찮은 제가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천하에 큰 의리를 펴려다가 이런 큰 적을 만났으니, 진실로 제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습니다. 다만 이 백관과 만백성은 대체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모두 얼어 죽은 귀신이 된단 말입니까. 바라건대, 하늘은 매서운 추위를 조금 풀어주시어 적의 포악한 짓을 돕지 마소서.”
라고 하셨다. 이어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시자 어의가 모두 젖으니, 삼군(三軍)이 모두 감격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고자 하였다. 왕이 또 입고 있던 갖옷과 취피(毳被)를 벗어 조각조각 갈라 성첩(城堞)을 지키는 군졸에게 나누어 주셨다.
고립된 성에서 40여 일간 포위되어 있었는데, 구원병이 밖에서 패배하고 성 안에선 양식이 떨어졌으나 끝내 뜻을 돌리지 않았다. 적이 누차 화해를 청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정예병을 모두 끌고서 높은 사다리를 수없이 세우고 줄줄이 올라와 수비를 뚫으려 애썼으나, 우리 군사는 잇달아 적을 쳐서 물리치고 더욱 명을 받들었다. 그러나 뜻밖에 갑자기 강화도에서 패전보(敗戰報)가 이르니 사람들이 모두 낙담하여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 영의정 김류와 이조 판서 최명길(崔鳴吉) 등이 나아가 아뢰기를,
“예전에 한 고조(漢高祖)는 홍문(鴻門)에서 몸을 굽혔고, 당 대종(唐代宗)은 마수(馬首)에서 회흘(回紇)에게 친히 절하였으니, 이는 국가의 먼 장래를 생각하는 임금은 제 몸 외에 더 생각하지 않는 필부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였고, 세자도 눈물을 흘리며 청하기를,
“군부(君父)의 화(禍)를 없앨 수만 있다면 죽음도 피하지 않을 것인데, 인질로 나가는 정도야 어찌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라고 하니, 왕이 종묘사직과 백성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따르셨다.
정축년(1637) 1월에 대가가 환도(還都)하였다. 종묘와 궁궐이 예전 그대로였으며, 늙거나 어려서 잡혀가지 않은 도성의 백성이 날마다 끊이지 않고 점차 모여들었다. 3월에 강화도에서 패배한 세 장수를 잡아와 모두 처형하고, 전사한 군졸의 버려진 해골을 묻어주고 근신을 보내어 제단을 만들어 제사 지냈으며, 호조 참판 신계영(辛啓榮)을 보내어 호조의 금 3천 냥을 심양(瀋陽)에 가져가 잡혀간 남녀를 속환(贖還)하게 하시니, 인심이 기뻐하여 패망의 곤경을 잊었다.
무인년(1638) 겨울 12월에 조씨(趙氏)를 계비(繼妃)로 들이시니, 영돈녕부사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따님이다.
갑신년(1644, 인조22) 3월에 흉적 심기원(沈器遠)이 좌의정으로서 모반하였는데, 먼저 임금의 호위군에 심복 장사(壯士)를 심어둔 다음 반란을 일으키려다 일이 발각되었다. 심기원을 잡아 신문하니 반역한 정상이 상세히 드러났으므로 기시(棄市)하고 고발한 자를 상주었다. 왕은 심기원이 정사 공신(靖社功臣)인 점을 생각하여 연좌된 자들을 모두 가볍게 처벌하셨다.
을유년(1645) 봄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연경(燕京)에서 돌아왔다. 얼마 뒤에 병이 위독하여 돌아가셨는데, 장자가 어린데다 병이 많았다. 왕은 나라에 장성한 대군(大君)이 있는 것을 사직의 복이라 생각하시어 대신들과 경대부에게 물어 후사를 정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 휘 모(某 호(淏))를 왕세자로 세우셨다. 이에 온 백성이 흡족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연경과 심양에서 이 소식을 들은 외인들까지도 모두 “조선은 어진 세자를 얻었다.”라고 하였다. 명이 내리던 날, 세자는 눈물을 흘리며 두 차례 글을 올려 굳게 사양하였으며, 왕은 두 차례 손수 쓴 비답을 내려 답하셨다. 처음에는,
“네가 총명하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기 때문에 특별히 ‘형이 죽으면 아우가 이어받는〔兄亡弟及〕’ 예를 썼으니, 너는 사양하지 말고 더욱 효도와 공경의 도리를 닦고 형의 자식을 네 소생처럼 보살피라.”
라고 하시고, 두 번째에는,
“나의 뜻이 먼저 정해졌고 여러 신하들과 상의한 결과 모두 의견이 일치하였으니, 너는 굳이 사양하지 말고 공경하여 도심(道心)을 지키라.”
라고 하셨다.
병술년(1646)에 폐빈(廢嬪) 서인 강씨(姜氏)를 대역죄로 사사하였다. 이전에 강씨가 심양에 있을 때에 분수에 넘는 짓을 많이 하였는데, 돌아와서도 더욱 패악을 부리며 말을 삼가지 않았고 또 저주를 행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폐출하고 사사한 것이다. 하교하기를,
“오늘의 일은 윤리를 밝히고 우환을 막는 데 의도가 있다. 저가 만약 야심이 작고 일이 의심스러웠다면 어찌 차마 단연히 법을 집행하여 아이들로 하여금 날마다 울부짖으며 의지할 곳이 없게 하겠는가. 옛말에 이르기를,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 계획을 어지럽힌다.’고 하였으니, 내가 실로 부득이하여 이리한 것이다. 그러나 은례(恩例)가 전혀 없을 수는 없으니, 담당 관사에 명하여 예장(禮葬)하게 하고 3년 동안의 제수(祭需)도 관가에서 지급하라.”
라고 하셨다.
정해년(1647) 봄에 심한 가뭄이 들고 가을에 큰 홍수가 났다. 호조의 쌀 5만 석을 내어 백성의 공부(貢賦)를 대신하고, 진휼청(賑恤廳)을 설치하여 죽을 쑤어 굶주린 백성을 먹이고, 또 창고를 열어 곡식을 옮겨서 내외의 굶주린 백성들로 하여금 고루 혜택을 입게 하셨다.
기축년(1649) 정월에 왕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원손(元孫) 휘 모(某 연(棩))를 왕세손으로 책봉하셨다. 이때 나이 9세였는데, 기질이 침착하고 신중하며 예모(禮貌)가 온화하고 의젓하니 백관들이 서로 축하하였다.
5월 8일 병인에 왕이 병으로 창덕궁(昌德宮)의 정침(正寢)에서 여러 신하들을 버리고 세상을 떠나시니, 수(壽)는 55세시고 재위 기간은 27년이었다. 왕의 병은 임신년(1632) 상중에 계실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사모의 정이 깊어 몸이 상하신 데다 한습증(寒濕症)마저 얻어 17년간 점차 깊어졌다. 무자년(1648) 겨울 이후 6, 7개월 동안에는 병이 상당히 호전되어 조정의 신하들을 자주 접견하여 천재(天災)를 근심하고 시사(時事)를 염려하여 얼굴 표정에 나타내시고, 심지어 남쪽 왜적과 서쪽 오랑캐에 대해서도 방책을 강구하지 않음이 없으셨다. 비국 당상으로서 성지(城池)와 병사(兵事)에 대해 진언한 자가 있었는데, 왕이 이르시기를,
“적을 막는 방도는 성과 군사에 있지 않고 오직 장수에게 달려 있다.”
라고 하셨다. 왕의 말씀이 간략하면서도 절실하므로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 기뻐하며, “우리 임금께서 거의 병이 나으셨다.”라고 하였는데, 한 달도 지나기 전에 편찮으시더니 겨우 열흘 만에 위독한 지경에 이르셨다. 그러나 대신이 문안할 때면 몸이 피로하다 하여 관디를 갖추지 않은 때가 없으셨고, 약방이 시약청(侍藥廳) 설치를 청했을 때에는 폐단이 있다 하여 윤허하지 않으셨다. 옥음(玉音)이 사라지기도 전에 갑자기 승하하셨으니, 아, 애통하다.
9월에 여러 신하들이 시호를 올려 ‘헌문열무명숙순효(憲文烈武明肅純孝)’라 하고, 묘호를 ‘인조(仁祖)’라 하였다. 9월 20일 병자에 장릉(長陵) 묘좌유향(卯坐酉向)의 언덕에 장사 지내니, 파주(坡州) 치소(治所) 북쪽 20리에 있다. 인열왕후를 장사 지낼 때에 왕명으로 곡장(曲墻)을 한 쪽은 두르지 않고 정자각(丁字閣)도 중앙에 세웠으며 모든 상설(象設)의 제도를 효릉(孝陵)과 같게 하였으니, 이로써 백성을 거듭 번거롭게 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소박함을 숭상하고 뒷일을 염려하심이 지극하셨으니, 패릉(霸陵)의 와기(瓦器)가 어찌 이보다 더 검소하겠는가.
왕은 체모가 진중하고 엄정하며 도량이 깊고 넓으신 분이셨다.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법도에 맞았으며, 집안사람이나 자제를 대할 적에도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숙연하셨으니, 참으로 이른바 덕이 깊고 원대한 임금이셨다.
학문을 좋아하심은 타고난 천성이셨으니, 잠저(潛邸) 시절부터 하루도 책을 보지 않으신 적이 없으셨다. 즉위하시고선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의 도를 삼대(三代)와 같게 하려는 일념으로 재덕(才德)이 출중한 인재를 초빙하여 등용하고, 미천한 신분의 현인을 초치하여 현양(顯揚)하기를 시간이 부족한 듯이 하셨다. 경연(經筵)에 부지런히 나가 하루에 세 번씩 접견하셨는데, 심오하고 미묘하여 알기 어려운 선기(璇璣)와 옥형(玉衡) 및 끝없이 넓고 큰 주고(周誥)와 은반(殷盤)에 대해 그 핵심을 끌어내고, 《시경》의 풍아비흥(風雅比興)과 복잡하게 얽힌 전주(箋註)에 대해서도 모두 꿰뚫어 환히 아셨으니, 비록 노사숙유(老士宿儒)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도 어렵고 의심스러운 부분을 질문 받으면 입이 벌어지고 혀가 오그라들지 않음이 없었다.
효성을 다하심은 다음과 같았다. 원종대왕과 인헌왕후께서 위독하실 때에 모두 손가락을 베어 피를 올렸으며, 3년 동안 애모(哀慕)하는 정이 느슨하지 않으셨다. 성품이 엄하신 인목대비께서도 더욱 공경하고 더욱 효도하는 왕에게 감동하시어 10여 년간 편안하게 여기셨으니, 참소가 감히 끼어들 수 없었다. 신미년(1631) 1월 인목대비의 병이 위독해지자 왕은 근시(近侍)를 보내어 산천에 기도하고 원통한 옥사를 심리하게 하셨다. 얼마 후 대비께서 병이 나으시어 말씀하시기를,
“왕의 정성과 효성이 아니었다면 내 병은 위태로웠을 것이다.”
라고 하셨다. 임신년(1632)에 대비의 병이 다시 심해지자 왕이 약시중을 들었는데, 허리띠 한 번 풀지 않으시고 반드시 약을 친히 맛보셨다. 그리고 종묘사직과 산천에 이전보다 더 기도를 올렸다. 대비께서 승하하시고 인경궁(仁慶宮)에서 경덕궁(慶德宮)으로 장의(葬儀)를 옮길 때에는 왕이 소여(小輿)를 물리치고 걸어서 따라가셨으니, 이 또한 예전의 임금들이 일찍이 행한 적이 없는 일이었다.
구족(九族)을 친애하심은 다음과 같았다. 능원대군(綾原大君) 이보(李俌)와 우애가 깊어 그가 집이 없는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이현(梨峴)의 별궁을 내려주셨으며, 정축년(1637)에 포로로 잡혀간 부마와 종실의 남녀들을 많은 값을 내어 속환하셨다. 친척의 부고를 받으면 소선(素膳)을 행했는데, 몸이 편찮으실 때에도 그만두지 않으셨다.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은 모친상 기간이었지만 그대로 품록(品祿)을 내려 국가에서 왕자를 대우하는 도리를 각별히 시행하셨고,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의 자손도 거두어 돌보셨다. 광해군과 폐동궁(廢東宮)에게 모두 서녀가 있었는데, 어렸을 때에는 늠료(廩料)를 주어 기르고 자라서 출가시킬 때에 토지와 노비를 많이 주어 편안하고 부유하게 살게 하셨다.
대신을 공경하심은 다음과 같았다. 이원익(李元翼)이 늙고 병들어 잘 걷지 못하자, 궤장(几杖)을 하사하시고 견여(肩輿)를 타고 대궐에 나오도록 명하셨으며 소환(小宦)을 시켜 부축하여 전(殿)에 오르게 하셨다. 그가 치사(致仕)하자 고을 관리에게 명하여 기와집을 지어주게 하시고, 삼베 이불과 삼베 요를 하사하여 그의 뜻에 맞게 하셨다.
직신(直臣)을 용납하심은 다음과 같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정온(鄭蘊)이 곧기는 곧으나, 전하를 지난 폐조(廢朝)에 비유한 것은 신하의 의리가 아닙니다.”
라고 하였는데, 왕이 이르시기를,
“옛사람 중에는 임금을 걸(桀), 주(紂)에 비유한 자도 있는데, 정온의 말이 무엇이 해롭겠는가.”
라고 하셨다. 이명준(李命俊)이 궁인(宮人)의 일을 곧바로 지적하며 상소의 말이 매우 강경하였는데, 왕이 특별히 칭찬하셨다. 유백증(兪伯曾)과 강학년(姜鶴年) 등이 생각 없이 함부로 말하여 뜻이 사리에 맞지 않았지만, 왕은 용납하여 받아들이시고 또한 죄주지 않으셨다.
절의(節義)를 표창하심은 다음과 같았다. 정묘년(1627) 난리 때에 안주(安州)에서 죽은 남이흥(南以興)과 김준(金浚), 의주(義州)에서 죽은 최몽량(崔夢亮)을 각별히 표창하여 증직(贈職)하셨으며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셨다. 병자년(1636)의 난리 때에 잇따라 순절한 상신 김상용(金尙容), 도정 심현(沈誢), 장령 이시직(李時稷) 등을 정려(旌閭)하도록 명하시고 ‘충렬(忠烈)’이라는 묘액(廟額)을 내리셨다. 김응하(金應河)의 충성을 생각하여 그 집에 은 수백 냥을 내리셨다.판서 김상헌(金尙憲)과 참판 정온이 국난에 임하여 의분이 복받치어 스스로 목을 매고 칼로 찔렀는데, 왕이 낯빛이 변하여 의관을 보내어 약을 가져가 구완하게 하셨다.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가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태연하게 죽자, 왕이 지극히 가엾게 생각하여 특별히 그 집들을 돌보셨다.
형옥(刑獄)을 신중하게 하심은 다음과 같았다. 역옥이 일어날 때마다 왕이 이르시기를,
“백성이 원망하여 반역하는 것은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라고 하시며 그 우두머리만 주벌하고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는 처벌하지 않았으며, 죽일 죄에 해당하더라도 정상이 애매하면 이미 자복한 경우에도 많이 시정하여 바로잡으셨다. 이 때문에 반역이 여러 번 일어났으나 나라에 원망하는 백성이 없었다.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백성의 고통을 돌보심은 다음과 같았다.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돌보셨으니, 재변(災變)이 생기면 반드시 “나의 허물이다.”라고 하시며, 반드시 조정의 신하로 하여금 자신의 과실을 모두 말하게 하고 원옥(冤獄)을 심리하게 하셨다. 일찍이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을 근심하여 거친 베옷을 입고 앉아 여러 신하들을 불러 각자 남김없이 말하게 하고 또한 지극하게 자책하셨는데, 말이 끝나기 전에 큰 비가 쏟아졌다. 왕은 늘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양식은 백성의 하늘이다.”고 말씀하시며 다친 사람 보듯이 백성을 돌보고 때에 맞게 부리셨다. 산릉(山陵)의 일과 칙사(勅使)를 접대하는데 드는 물자라도 전적으로 민간에서 구하지 말고, 각사(各司)에 비축된 것을 비워서 쓰게 하고, 때로는 내부(內府)에 저장된 것으로 돕게 하셨다.
검덕(儉德)을 숭상하고 교화를 중시하심은 다음과 같았다. 모 도독(毛都督 모문룡(毛文龍))이 앵무새를 보내왔는데, 왕이 섬에 놓아주도록 명하셨다. 일찍이 연신(筵臣)에게 이르시기를,
“만약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청렴 검소하고 욕심이 적다면 태평성대가 어찌 멀겠는가.”
라고 하셨다. 몸소 검덕을 실천하심이 시종 한결같았으니, 법복(法服)이 아니면 무늬 있는 비단을 쓰지 않으셨고, 여름에 삼베옷을 입으셨으나 또한 올이 가는 것은 싫어하셨다. 염습(斂襲)할 때에 태서(太胥)가 왕의 의복을 살펴보니 명주로 지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계해년(1623) 즉위 초기에 〈오륜가(五倫歌)〉를 번역하도록 명하시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간행하여 모두 중외에 반포하셨다. 또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소학(小學)》을 간행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셨으며, 또 예조로 하여금 어린아이들을 가르침에 전적으로 《소학》을 숭상하게 하며 이르시기를,
“인재를 기르고 풍속을 교화하는 데에는 이보다 좋은 것이 없다.”
라고 하셨다. 삼경(三經) 및 그 언해(諺解)와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의 서적을 양계(兩界 평안도와 함경도)에 보내어 학생들을 권면하셨으니, 근래에 서북 지방의 문풍(文風)이 성대해진 것은 이 때문이라 한다.
대국(大國)을 섬기는 정성은 한결같이 선조(宣祖)를 모범으로 삼으셨다. 조종(朝宗)에 대한 일념이 창졸간이나 위급한 순간에도 변하지 않으셨으니, 포위된 성 안에서도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셨고, 환도한 뒤에도 대궐 안에서 홀로 행하시고 바깥사람이 모르게 하셨다. 경연에서 《시경》 〈소아(小雅)〉를 강독하다가 “화락한 군자여, 천자의 나라를 안정시키도다.〔樂只君子, 殿天子之邦.〕”라는 대목에 이르자, 왕이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시니,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울면서 감히 우러러 보지 못하였다.
아, 신이 우리 대행대왕(大行大王)을 섬겨 근신의 반열에서 가까이 모신 지 20여 년이 되었으니, 빛나는 문덕(文德)을 보고 일월(日月)의 광휘를 가까이함이 또한 이미 많다. 삼가 천지를 헤아리고 고금을 살펴보건대, 대행대왕의 공덕과 규모는 은(殷)나라와 주(周)나라를 능가하기에 충분하니, 밝게 드러난 여러 행적은 단지 그 여사(餘事)일 뿐이다. 불행히도 병자년과 정축년의 험난한 일을 당하셨으니, 문왕(文王)의 명이(明夷)와 공자(孔子)의 화산(火山)에 비유될 일이다. 저 두 성인도 면하지 못하신 일이니 우리 대행대왕에게 무슨 흠이 되겠는가.
말년에 왕위를 계승함이 쉽지 않음을 더욱 깨달으시어 우리 전하를 얻어 2백 년 종통을 맡기셨다. 그 귀에 대고 말하고 면전에서 명한 것으로는, 가장 먼저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에 관해 요(堯), 순(舜), 우(禹)가 서로 전수한 심법(心法)을 말씀하시고, 또 거울삼아 경계하여야 할 선례가 바로 혼조(昏朝)에 있다는 말씀을 겸하시고, 마지막에는 일본이 죽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세대를 전한 것이 짧다는 말씀으로 끝내셨다. 거듭 간곡하게 경계하시는 말씀으로 성인이 서로 전수하는 사이에 여러 차례 지극한 뜻을 나타내셨으니, 어찌 험난하고 어려운 시대가 성인의 큰 지혜를 도운 것이 아니겠는가. 촉한(蜀漢) 소열제(昭烈帝)의 “선이 작다고 하여 안 하지 말며, 악이 작다고 해서 하지 말라.”는 말 정도는 시시해서 손에 꼽을 것도 못된다.
온 나라의 신민(臣民)이 모두 왕이 인자(仁者)로서 얻어야 할 수명이 성인(聖人)에 미치지 못하고, 설용(泄庸), 문종(文鍾), 범려(范蠡)같은 보좌가 오늘날 태어나지 않은 것을 하늘의 탓으로 돌리고 매우 애통해 하니, 이는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 보위에 계신 27년 동안 보여주신 깊은 사랑과 두터운 은택은 사람들의 피부와 뼈에 스며들어 짙게 배여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어두운 세상에서 드러내신 강상(綱常)은 해와 달처럼 만고에 항상 빛날 것이니, 어찌 나라를 오래 다스리며 왕자(王者)가 되고 패자(覇者)가 되기를 꾀하는 수많은 임금이 여기에 미칠 수 있겠는가. 아, 훌륭하시도다.
왕의 원비(元妃) 한씨(韓氏)는 아들 셋을 낳으셨다. 장남 소현세자 휘 모(某)는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차남은 금상 전하시고, 삼남은 인평대군(麟坪大君) 요(㴭)이다. 귀인(貴人) 조씨(趙氏)는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다. 장남 숭선군(崇善君) 징(澂)은 승지 신익전(申翊全)의 딸에게 장가드셨고, 차남은 낙선군(樂善君) 숙(潚)이다. 장녀 효명옹주(孝明翁主)는 낙성위(洛城尉) 김세룡(金世龍)에게 하가(下嫁)하셨다. 소현세자는 아들 셋과 딸 셋을 두셨는데, 아들 둘은 죽었고 하나는 어리며 세 딸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우리 중전 장씨(張氏)는 우의정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유(維)의 따님으로 아들 셋과 딸 다섯을 낳으셨다. 장남 왕세자 휘 모(某)는 처음에 세손에 봉해졌다가 지금은 저위(儲位)에 오르셨다. 장녀 숙안공주(淑安公主)는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에게 하가하였고, 차녀는 숙명공주(淑明公主)이다. 그 다음 세 공주는 모두 어리시다. 아들 둘은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인평대군은 증 우의정 오단(吳端)의 따님에게 장가드시어 다섯 아들을 낳았다. 장남은 욱(栯)이고, 차남 정(楨)은 의창군(義昌君)에게 후사로 나갔고, 그 아래 세 아들은 모두 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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