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을 오해하는 사람들은 칼빈이 대단한 권력을 장악하고 종교재판으로 억울한 자들을 처형한 사형집행인으로 왜곡된 편견을 갖습니다. 칼빈에게 지도력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 지도력은 신앙과 성경적인 교회 갱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는 장황한 형식주의자가 아니어서 칼빈이 인도하고 설교한 예배는 한 시간을 조금 넘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구분선 아래에서 그런 역사적 내용들을 살펴보면 한 인물과 교회사에 대한 이해가 증진될 것 같아서 올려드립니다.
교회법령과 지도력
칼빈에게서 우리가 가장 핵심적으로 배워야 할 것은 역사를 창조하는 지도력이다. 그것은 그의 정치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교회 갱신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어떤 정당이나 어떤 그룹과 영합하지 않았고, 오직 원칙대로 교회의 영적인 권위 수호에 적극 나섰다. 수천 1명의 사람들이 한 사람의 강력한 호소에 따라서 교회의 규칙에 순응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이루지 못 한 놀라운 업적으로 기억되어야 마땅하다. 수없이 칼빈을 제거하려고 시도했지만, 결국에는 그의 제안을 따르게 되고 만다. 칼빈은 그저 한 종류의 신학이나 사상의 제안자로 그쳐버린 것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바꾸는 영향력을 통해서, '유토피아'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상을 따라서 도시 전체를 교회의 제도와 정치적인 규칙으로 변화시켰다. 제네바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요, 모든 사람들은 이 점을 경이롭게 생각하는 것이다.
칼빈이 제네바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요청에 따라서 시의회는 6인 특별소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목사로는 칼빈과 비레, 시의원으로는 네 명의 소위원들, 끌로드 뻬르땅(Claude Pertemps), 아미 뻬렝(Ami Perrin), 끌로드 로제(Claude Roset), 장 랑베르(Jean Lambert)와 200인 의회에서 두 사람 아미 뽀랄(Ami Porral), 장 굴라(Jean Goula), 이 마지막 사람은 곧 장 발라(Jean Balard)로 교체되었는데, 이들이 함께 참가하여 칼빈이 꿈꾸어 왔던 대로 교회 조직과 권징의 시행을 결의하였다.
이 위원회는 3주 만에 “제네바 교회의 법령”(Ordonnances Eccléiastiques de l'Eglise De Genée)을 작성하여, 9월 29일까지 소위원회에서 수정을 마쳤다. 11월 7일에는 200인 의회가 수정·통과했고, 시 총회에는 11월 20일 제출되었다. 이 교회 법령에서 칼빈이 주장한 두 가지 새로운 면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첫째는 교회의 제도 자체를 신약 성경의 초대 교회처럼 완전한 자유권을 가진 별도의 기관으로 인정한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친히 제정하신 기관이기에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면 되는 기관이다.
둘째로, 권징의 시행을 교회가 완전히 넘겨받도록 한다는 조항이다. 시 행정 당국은 이에 대해서 아무런 관여를 할 수 없도록 했다. 영적인 권위에 의해서 주어진 결정에 따라서 시의 형벌로 보충해 주도록 요청하게 되었다. 다른 개혁자들은 이런 양보를 얻어내고자 노력했으나 헛수고였다. 외클람파디우스가 바젤에서 그토록 교회의 권징은 자체적으로 자유롭게 시행되어야 함을 역설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부써 역시 목사회가 약간의 부차적인 일들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허용받았으나, 시의회가 이를 수용하기를 거부하여서 결국에는 그들의 결정을 받도록 제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터나 쯔빙글리는 이런 제도 자체를 아예 목표로 삼지도 않았다. 이 두 사람은 이미 가톨릭 국가에서 성장하였으므로, 이교도적인 국가 체제하에서 발전한 초대교회의 모습을 엄밀히 구분해 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칼빈은 세속 권세들이 교회를 다스릴 수 없으며,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서 교회는 처음부터 자율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신했다. 어느 정도까지 교회가 이런 자율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규정은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런 원리만큼은 인식되도록 칼빈은 남은 생애를 바쳐서 투쟁적으로 싸워서 교회의 존엄성을 인정받고자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던 것이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 국가에서 목사의 안수와 성직 임명은 교회 자체의 결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국왕이나 교황이 성직 임명권을 가지고 있던 시대에, 오직 지역 교회가 자체 목사의 임명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놀라운 개혁이었다. 제네바 시의회에서도 새로운 목사 후보를 먼저 제출하고 심사를 받도록 요청했다. 칼빈의 주장은 목사회에서 이를 주관하는 것이지, 시의회가 관장할 사항이 아니라고 맞섰다. 결원이 발생하면 목사회가 먼저 성경 해석에 대해서 심사하고, 이 자리에 네 명의 시장 중에서 한 사람이 참석하도록 하고, 이것이 끝나면 시장은 곧바로 퇴장하고 목사들에 의해서 다수가 찬성하면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목사 안수에 일반 시민들의 결정 권한이 없도록 했으며, 1561년 교회 법령에서는 시민들이 팔일 안에 항의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새로 안수받은 목사는 시의회에서 맹세함으로 완전히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시의회는 목사회가 결정한 사람을 거부할 권한이 없었다.
제네바는 인구 1만 명이 거주하던 도시라서, 한 사람의 영향력이 충분히 미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 도시는 비록 크지 않았지만, 그 구성원들은 각 나라에서 몰려온 사람들이요 각계각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귀족들과 중간 계층과 천하고 가난한 사람들 세 가지 계층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다양한 직업에 따라서 이해관계가 달랐고, 범죄와 타락과 매춘 등 어느 곳에나 있는 인간의 죄악도 여전히 깊이 침투해 있었다. 따라서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서 칼빈의 노력은 결단하고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고, 투쟁하면서 싸워나가야만 했다.
칼빈이 지도력을 발휘한 가장 좋은 수단은 그의 설교였다. 그가 제네바에 돌아온 바로 첫 주일날, 사람들은 그의 설교에 큰 기대를 걸고 참석했다. 칼빈은 지난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간단히 설명하고, 앞으로 추진할 목표를 조금 표명했다. 교회의 회복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이 추방될 때 멈췄던 본문으로 돌아가서 성경을 강해하기 시작하였다.
기도와 시편 찬송과 함께 그의 설교가 마치면, 예배는 한 시간을 조금 넘는 정도였다. 제네바 는 크게 세교구로 나누어져서, 성 삐에르 대성당과 성 제베, 막달렌 교회 중 한 곳의 예배에 참석하도록 되었다. 주일 아침에는 먼동이 터올 시간에 삐에르 교회와 제베 교회에서 예배가 드려졌고, 아침 아홉 시에 모든 교회에서 예배가 있었다. 낮 12시에는 요리 문답 공부가 있었다. 칼빈이 돌아온 후 몇 달 안에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필요한 문답이 만들어져서 모든 자녀들은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교리 반에서 공부하도록 되었다. 다시 말하면, 열여섯 살이 되어야 성인으로 자신의 신앙 고백을 드리고 입교하였다. 오후 세시에 모든 교회에서 다시 예배가 드려졌다. 주중에는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 예배가 있었고, 칼빈이 죽을 무렵에는 모든 교회에서 날마다 예배를 드렸고, 설교를 통해서 말씀이 선포되었다.
김재성, 『나의 심장을 드리나이다』(킹덤북스), pp.412~416.
첫댓글 칼빈은 장로직을 중요시했습니다. 한국에 가장 흔한 교단명도 장로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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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공동체의 멤버십으로서의 장로직
미래 사회를 지식 정보화 시대, 인공 지능로봇, 세계화, 전문화, 블록화 시대 등으로 정의하고 전망할 때에 미래교회의 장로 직분은 많은 변화를 요구받을 것이다. 소수의 성직자 중심에서 평신도 사역으로의 전환이 필수적이며 극대화될 것이다. 목사가 교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사역하듯이, 장로 역시 교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사역을 기쁨으로 감당해야 할 것이다. 장로는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충성을 다하도록 독려하고 중보하며 솔선수범하여야 한다. 장로는 평신도 가운데 선출된 영광스럽고 거룩한 직분이다. 그러므로 교회 회중들과 한마음 한뜻이 돼야 하며 평신도의 대표성과 책임감을 느끼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직무를 넉넉한 마음으로 감당해야 할 것이다.
https://v.daum.net/v/20240818170809382
잘 읽어 보았습니다. 장로직에 대해 잘 알게 하네요.
Cor meum tibi offero Domine, prompte et sincere!
(주님께 나의 심장을 드리나이다. 바로, 그리고 신실하게!, I offer up my heart to the Lord!)
이 말은 칼빈이 파렐(Farel)에게 보내는 편지 가운데 나오는 글귀입니다. 어렵고 힘들던 때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일생을 주님께 헌신하고자 했던 한 신앙인의 의지와 헌신을 읽게 됩니다.
출처: https://thetruthlighthouse.org/%EB%82%98%EC%9D%98-%EC%8B%AC%EC%9E%A5%EC%9D%84-%EB%93%9C%EB%A6%AC%EB%82%98%EC%9D%B4%EB%8B%A4/
짧지만 좋은 글입니다.
@천이다 공감합니다!
[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2편>] “제 심장을 주님께 바칩니다” 개혁에 목숨 건 칼뱅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599860&code=23111638&cp=nv
좋은 내용의 기사입니다.
공감합니다! 저런 칼빈 같은 성경적 리더십은 없고 회사 사장을 흉내내는 그런 지도력은 교회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매우 공감합니다 😁 😎
매우 좋은 내용입니다. 시간 있을 때 더 자세히 읽어봐야겠어요.
칼빈이 제네바 시의회와 시민들까지 납득이 되도록 개혁을 성공시켜 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설교에 있었군요. 본인이 철저하게 하나님을 위해 심장을 드릴 정도의 충성과 헌신을 하니 그 정도의 괄목상대할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다. 청소년 교육이 유대인들의 자녀 학습법과도 유사한 것 같네요. 매우 철저하게 하니 세기를 달리해서까지 영향력이 커졌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