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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李花 원문보기 글쓴이: 이강석
(첫 배위 공혜왕후 청주 한씨 소생 ___없음 )
(성종대왕 계비 정현왕후 파평 윤씨 소생)
진성대군 이 역__조선 제 11 대왕 중종대왕이다
신숙공주___11 세 때 죽었다
(폐비 함안 윤씨 소생)
연산군 이 융___성종의 친자로 조선 제 10 대왕이 되었으나
중종 반정으로 12 년만에 폐위 되었다 성종대왕의 장남이다
(숙의 하씨 소생)
계성군 이 순___후사 없어서
인종의 외숙 윤 임의 조카 계림군 이 류가 후사를 이었는데
계림군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계성군파는 무관을 많이 배출 하였다
계림군은 성종대왕 형 월산대군의 손자이다
부친은 덕풍군으로 월산대군의 서자이다
계림군은 덕풍군의 2 자로 왕족중 문필에 마음을 두고
유흥과 여색을 멀리 해 명성이 자자 했다
귀인 정씨 소생____정씨는 갑자년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안양군 이 항___세종왕자 영응대군의 외동사위며
연산조 간신으로 알려진 구수영의 여식과 혼인 하였다
연산군이 봉안군과 함께 유배보냈다 사사 되었다
구수영의 한 딸은 임 희재 부인으로
연산이 가장 총애한 권신 임사홍 며느리가 되었다
연산조에서 대과에 급제한 임 희재는
김 종직의 제자로 무오사화때 귀양갔다 참형 당했다
임 희재는 연산조 최고 간신으로 알려 진 부친 임 사홍이나
예종과 성종의 부마가 된 두 형제와 달랐다
그는 진시황을 빗대어 연산군을 비방 하는 시를 지었다가
대노한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임 사홍의 집에 걸려 있던 아들 임 희재가 지은 시 한수가
그 집에 놀러 온 연산군의 비위를 거슬렸다
순임금과 요임금을 본 받는다면 저절로 태평세상 이룰터인데
진시황은 어찌하여 백성을 괴롭혔던가
화가 자기 집안에서 일어 나는 줄 모르고
공연히 쓸모없는
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 쌓았구나
봉안군 이 봉____연산군에 사사 되었다
정혜옹주___청평위 한 기에게 시집 갔다 어머니로 인해 연산군에 의해 폐서인 되었다
숙의 홍씨 소생 ( 7 남 3 녀 )
완원군 이 수
회산군 이 염
견성군 이 돈
익양군 이 회
경명군 이 침
운천군 이 인
양원군 이 희
혜숙옹주___고령 신씨 신 항에게 시집 갔다 신 항의 증조부가 신 숙주다
부친은 신 종호 모친은 세종의 손녀다 즉 세종왕자 신빈 김씨소생
차남 의창군 이 공의 여식이다 신 항도 연산군에게 아부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정순옹주___봉성위 정 원준에게 시집 갔다
정숙옹주___영평위 윤 섭에게 시집 갔다 윤 섭은 세종 부마며 세조일등공신으로 당대 4 대 갑부 소리 듣던 윤 사로의 손자다
성종후궁 숙의 홍씨는 역대 후궁중 가장 많은 왕자를 낳았다
참고로 세종후궁 신빈 김씨가 왕자 6 명을 낳았다
숙용 심씨 소생
이성군 이 관
영산군 이 전__연산군이 진성대군 ( 훗날 중종 )을 제거 하려고
별 계책을 다 썼다 어느 날 함께 사냥 나갔다 돌아 오면서 나는 흥인문으로
들어가고 진성 너는 숭례문으로 들어 오너라 만일 나 보다 뒤에 오면
마땅히 군법에 처할테니 그리 알아라 하니 겉보면 말타기 내기 같지만 속으로는
변덕 스런 연산군은 신의가 없는 사람으로 무엇이든 멋대로 해석하여
사람을 죽이기를 밥 먹듯이 하던 말년이라
진성대군이 크게 걱정하니
영산군이 자신의 명마에 하인복으로 갈아 입은 진성대군을 태워
연산군보다 먼저 도착하여 목숨을 건졌다
국무총리 지낸 이 홍구가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경순옹주___의성위 남 치원에게 시집 갔다
숙혜옹주___한천위 조 무강에게 시집 갔다 양주 조씨다
개국공신 조 말생 후손이다
조 무강 후손이 인조대왕 계비 인렬왕후 조씨다
귀인 권씨 소생
전성군 이 변
경휘옹주___영원위 윤 정에게 시집 갔다
명빈 김씨 소생
무산군이 종
숙의 김씨 소생
휘숙옹주____풍천 임씨 풍원위 임 숭재에게 시집 갔다
연산조 간신으로 알려진 임 사홍이 시아버지다
연산군이 대궐과 이 집 사이 민가를 모두 헐고 통로를 내 수시로 드나들었다
연산군이 자주 임사홍의 집에 거둥 하였고 임씨가 연산군 생모 윤씨의
폐비 사건전말을 말하여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임 숭재의 행실은 장록수와 간통하는등 연산군에 못지않게 타락하여 비난 받았고
휘숙옹주는 자주 연산군과 어울려 사람들이 둘 사이를 의심 했다
연산군은 21 세에 알성급제하고 재주가 뛰어 난 임 사홍을 총애 하였다
그는 두 아들이 성종과 예종의 부마 되자 권력자가 되어
연산군을 조종하여 무오 갑자 양 사화를 일으켰다 중국어와 글씨에 뛰어났다
이 풍천 임씨가는 대대로 글 잘 하는 인물이 많이 배출 되었다
임 숭재는 성병으로 일찍 죽어 중종반정에 참화는 면했다
경숙옹주___여천위 민 자방에게 시집 갔다
휘정옹주___의천위 남 섭원에게 시집 갔다 연산군에 아부 했다
귀인 엄씨 소생____귀인 엄씨는 갑자년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를 모함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죄로 귀인 정씨와 함께 맞아 죽었다
공신옹주____청녕위 한 경침에게 시집 갔다 모친 일로 폐서인 되었다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며느리이다
선릉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산 135 _ 1 번지 소재
조선 제 9 대왕 성종 대왕과 정현왕후 윤씨의 묘역이다
성종대왕 이 혈은
세조 2 년 1457 년 정축년 7 월 30 일에 의경세자의 차남으로
대궐 세자궁에서 태어났다
태어난지 한달 조금 지난 그 해 9 월에 부친인 의경세자가
죽어서 삼촌 해양대군이 대신 왕세자로 책봉 되었고
그는 대궐 법도에 따라 대궐을 나와 사저로 이사 갔다
그러나 조부 세조가 아껴 형 월산대군과 함께 대궐에서 살다시피 하며
대궐 사부에게 수업 받고 자랐다
12 세 때 1468 년 9월에 조부 세조가 승하하고
11 월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4 녀 청주 한씨와 혼인 하였다
이듬 해 1469 년11 월 삼촌인 예종이 20 세로 갑자기 승하하여
조모인 세조비 정희왕후와 원상들에 의해 조선 제 9 대왕으로 추대 되었다
20 세가 될 때 까지 조모 정희왕후 파평 윤씨의 수렴첨정을 받았다
임금은 천품이 뛰어나 어질고 밝고 총명하고 영걸 스럽고
너그럽고 인자하고 공손하고 검소하였다
하루에 3 번 경연 하고 제사가 있는 날은 끝난 뒤에 경연하고 미루는 법이 없고
너무 글을 읽어 대비가 걱정 하니 좋아서 읽으니 피곤 한 줄 모릅니다 하였다
어려서 부터 스스로 학문에 힘써 경서와 사서에 통달하였고
성리학에 이해가 깊었다
백가의 글과 역법 음악에 이르기 까지 널리
도달하고 활쏘기나 글씨 그림도 정묘한 경지에 달하였다
특히 해서체에 뛰어나
사람들이 안평대군의 글씨와 분간 못하여 중종대왕이
성세창에게 가려내게 하였다
성종은 해서에 능했는데 글씨체가 사랑스럽고 단아하며 무게가 있었다
형 월산대군과 평생 우애가 좋아 감히 이간하는 말이 세상에 없었다
맛난 참외 하나를 얻어도
혼자 먹기 아까워 참외를 보내며 그 심정을 꼭 시로 지어 서로 화답 하였다
새 참외를 처음 맛 보니 수정처럼 차구나
어찌 형제간의 친한 정의로 차마 혼자 먹고 보랴
형제가 각기 살면서 편지로 수창 하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보위에 오르고 호패법을 다시 폐지 하고
경국대전 편찬 사업을 완성하고
변질 왜곡 되어 폐단 많은 불교를 억제하여
사대부 출신 부녀자가 비구니 되는것을 금지 하고
불교식 화장 풍습을 금하고 도성내에 승려의 출입을 제한 하였다
성종은 승려들을 출가로 부모 형제를 버리고 즉 천륜을 저버리고
불사로 백성들을 현혹 시키고 재물을 소모 시키는 나쁜 사람들이라며 싫어했다
그리고 2 품 이상 관원은
도성 밖에 거주를 금지 시켜 신속한 조정정책을 도모하게 하였다
외 6 촌 이내 결혼을 금지 시키고
조부 세조가 실시 했던 왕족의 관직 등용을 다시 전면 금지 시켰다
종전대로 왕의 4대 후손 까지 종친부에서 관리 감독하고
과거나 특별채용에서 제외 시켰다
농업을 육성하고 백성들의 의복걱정을 덜어 주려고
각도에 잠실을 조성하고 이북에 목화밭을 만들었다
20 세가 되고 수렴첨정도 끝나자 그 틈을 타서 원상제도를 폐지 하고
본격적으로 치세를 펼쳤다
조부 세조가 폐지한 집현전을
대신 홍문관으로 이름을 바꾸어 부활시키고
문신중에서 준재를 뽑아 우대하고 육성 하였고
각종 서적 편찬 사업에 힘써 경국대전을 발간하고
또 보완하고 동국통감 동문선 오례의 악학궤범등을 수 많은 책을 내게 하였다
김 종직등 유능한 사림을 등용하여
권신들을 견제하니 훈신과 신진사림의
적절한 균형이 이루어져 정치가 순조롭게 이루어 졌다
임금은 당대 인물들을 이리저리 능수능란하게 다루었다
신하를 접 할 때 한 집안 부자 사이 처럼 따뜻하게 은혜롭게 대하면서도
엄숙하여 저절로 공경심이 일어 그 앞에서 꾸밀 수 없었다
도학정치 기틀을 잡고 성리학을 지속적으로 발전 시켜
유교를 진흥 정착 시켜 민간교화에 성공 하였다
성종 10 년 북쪽 변방 여진족 소굴을 소탕하고
압록강변 야인을 멀리 쫓아내 전쟁의 위협을 없앴다
또 신숙주등의 권고에 따라 왜구등도 외교적으로 잘 다루어 관리 지배 하였다
또 그 해 성종이 총애한 신 숙주가 임종을 앞두고 문병온 성종이
나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말하오 하니
전하 이웃나라와 잘 지내시고 또 왜를 무시 하지 마시고
통신 하심이 나라를 위해 이롭습니다하니 그 말을 명심하여
그 해 곧바로 통신정사 부사 서장관을 일본에 보내고 문사를 더 충원 하였다
( 일본으로 가는 뱃길이 몹시 험난하여 가는데 몇 달 걸렸으므로
성종 이 후 우리나라는 왜로 가는 것을 중지하고 왜에서 오는 사신
을 맞이 하는데 그쳐 임진왜란을 초래 하였다 )
밝은 임금 치세 덕분에 당시 민간 생활의 질이 높았고
임금은 선대왕들이 벌려 놓은 여러 사업을 부지런히 완성 시켰다
그리하여 조선 건국 이래 가장 태평성대를 구가 하였다
임금은 신하들에게 부자지간 처럼 정감 있게 대하기로 유명했다
당시 진귀 했던 감자와 귤을 홍문관 정자 성 희안 ( 훗날 중종반정 주역 )이
몰래 몇 개 소매 속에 넣었다가 대취하여
( 성종은 경연이 끝난 뒤 술 자리가 있을 때 항상 술을
넉넉히 내려 임금 신하 모두 대취 하여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고 한다 )
나중에 내시가 들쳐 업고 나가다 소매 속에서 와르르 떨어지니
어버이에게 가져다 주려고 그랬구나 하고
다음 날 홍문관 신하들에게 감자와 귤을 각각 한 쟁반 내렸다
명나라 사신이 돌아가면서
당신네 나라는 임금은 있고 신하는 없구려 ( 임금에 걸 맞는 큰 인물 ) 하였다
당시 대궐에 세조비 정희 대왕대비마마 윤씨
예종비 안순왕대비마마 한씨 덕종비 인수대비마마 한씨가 있어 효도 하려고
자주 연회를 열어 항시 잔치 분위기 였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연산군이 너무 노는 것만 보고 배운것이라고 하였다
성종은 스스로 유흥에 빠졌으나 그로 인하여 정사에 태만한 적은 없었지만
그로 인한 병으로 38 세로 승하 하였다
오랫동안 병석에 있으면서도 결재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죽기 전 날 의관을 갖추고 대신들을 불러 뒷 일을 부탁하고 다음 날 승하 하였다
당시 신하 백성 모두 성종임금을 성군이라 부르는데 이의를 제기 하지 않았다
어진 성종의 아름다운 일화는 다 못 적을 만큼 많으나 폐비사건으로 가려지고 말았다
모든 기초 문물제도를 완성시킨 임금이라하여 성종이란 묘호를 얻었다
선릉
조선제 9 대왕 성종대왕과 비 정현왕후의 묘역이다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성종대왕은 1457 년 정축년 7 월 30 일 신묘일생이다
세자궁에서 태어났다 (소띠 )
1469 년 기축년 13 세로 조선 제 9 대왕으로 등극 하였다
1494 년 성종 25 년 갑인년 12 월 24 일 기묘일에
창덕궁 대조전에세 38 세로 재위 25 년만에 승하 하였다
첫 배위 공혜왕후 청주 한씨는 1 살 연상으로
1456 년 병자년 10 월 11 일 정미일생이다
세조공신 상당부원군 영의정 한 명회의 4 녀이다
차남인 성종 (자을산군 혹은 자산군 )이 16 세인 형 월산대군을 제치고
13 세로 보위에 오르자 원상으로 있던 장인의 입김이 아닌가 했다
대궐에서 어느 날 형제가 사부들과 수업 하는데 갑자기 천둥 번개가 대궐 기둥을 강타해
내시 한명이 죽는 일이 발생 했다
모두 놀라 혼비백산 하며 넘어지고 숨었는데 성종 홀로 태연자약하여
사람들이 그를 믿음직 스럽게 여겼다
몸이 다소 허약한 월산대군 대신 담대하고 도량이 넓고 씩씩한 자산군이
임금에 낙점 되었다
두 형제 모두 시아버지 세조로 부터 폭빈 소리 들으며
모질게 가르친 모친 인수대비 덕분에 학문이 깊고 넓었다
세조대왕은 영리한 두 손주와 며느리 인수대비를 무척 아꼈다
공혜왕후 청주 한씨는 는 효성스럽고 자애로웠으나 자식을 낳지 못하고
19 세로 1474 년 4 월 15 일 기사일에 창덕궁 구현전에서 졸하였다 (쥐띠 )
능은 순릉인데 6 월 7 일 장사 지냈다
친언니인 예종의 첫 배위 장순왕후 한씨의 능인 공릉옆에 있어 공순릉이라 부른다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 15 번지에 있다
한명회의 두딸은 이렇게 왕후가 되었으나 불행히도 모두 요절하였다
또 연산군은 죽은 한명회를 부관참시 하였다
폐비 윤씨
함안 윤씨로 문종 때 집현전 교리 지낸 판봉상시사 윤 기견의 여식이다
폐비 윤씨는 생년미상이다
윤 기견은 딸이 대궐에 들어 가기 전에 일찍 죽었다
윤씨는 1473 년 성종 4 년 후궁으로 뽑혀 숙의의 첩지를 받았다
1474 년 성종 5 년 왕비 공혜왕후가 졸하였다
1476 년성종 7 년 병신년 11 월 7 일 숙의 윤씨가 연산군을 낳았고
왕비로 책봉 된것은 8 월이다
1477년성종 8 년 정유년 중궁에서 비상이 발견되어 빈으로
강봉되어 수강궁에 따로 거처 하였다
얼마 후 용서 받은 듯하다 얼마 후 다시
용안에 손톱 자국을 냈다하여 인수대비의 대노를 샀다
결국 1479 년성종 10 년 6월 2 일에 폐비되었고
6 월 12 일에 그녀가 낳은 왕자 한 명이 죽었다고 실록에 적혀 있다
1482 년 성종13 년 임인년 8 월 16 일 친정집에서 사사 되었다
윤씨가 연산군외 여러 아들을 낳은 듯 하다
성종이 윤씨를 폐하는데 하도 엄정하여 신하들이 감히 만류하지 못하였는데
손 순효는 평소 임금에게 바른 소리 잘 하는 충신으로 성종이 무척 아꼈는데
이 때 경상감사로 있으면서 임금에게 폐비불가를 울면서
여러번 간 하였는데 죄 없이 홀로 여러 아들 낳은 왕비를 폐하면 않된다고
하는 대목이 있다
손 순효는 세자의 생모를 하루라도
너무 누추한 곳에서 머무르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아뢰었으나
이미 마음이 떠난 성종은 듣지 않았다
손 순효가 부인를 내칠 때 해당되는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하고 있다
손 순효가 누구인가 임금의 용상을 어루만지며 귓속 말로
성종에게 세자 연산군에게 물려주기 아깝다고 까지 하고도
성종이 문제 삼지 않은 사람이다
그래서 성호 이 익선생이 성종을 조선의 최고 도량 넓은 임금 성군 이라고 했다
( 손 순효와 성종의 아름다운 일화는 96번에 자세히 있으니 참조 )
사람 좋기로 소문난 성종이 폐비에게 그토록 마음 돌리지 않고
강경하고 매몰차게 대한것으로 보아 아마도 정떨어지는 실수를 한 듯하다
그리고 성종 초기에 후궁들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윤씨가 홀로 아들을 내리 낳아 시샘을 받은 듯하다
야사에 시어머니 인수대비가 미워 하여 친정집에서의 행태를 거짓으로 보고
하여 성종이 진노하고 사사 시켰다고 한다
윤씨는 성종의 소생을 많이 낳았으나 살아 남은 사람은 연산군 한 명 이다
폐비 윤씨는 죽을 때 피 묻은 적삼을 잘 간직 했다가
훗날 연산군에게 전하고 자주 행차 할 아들 연산군을 볼 수 있게
태조릉 건원릉 가는 길
옆에 무덤을 만들어 달라고 유언 하였다
훗 날 임사홍의 주선으로 그 피 묻은 적삼을 외조모로 부터 건네 받고
그 유언을 들은 연산군은 하염없이 울었다고 전한다
정현왕후 파평 윤씨는
1462 년 임오년 세조 7 년 6 월 26 일 기축일에
충청도 아산 신창현 관아에서 태어났다 ( 말띠 )
우의정 지낸 영원부원군 윤 호의 여식인데
숙의로 있던 1479 년 기해년 폐비된 윤씨 대신 18세 때 중전으로 책봉 되었다
9 년 뒤에 진성대군을 낳으니 훗날 중종대왕이다
중종 25 년 1530 년 경인년 8 월 22 일 기묘일에 69 세로 졸하였다
그해 10 월 29 일에 성종능 선릉에 장사 지냈다
성종대왕이 명나라에서 받은 시호는 강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