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의 후신인 노론 [양광도 서인]이 나라를 팔아먹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노론세력은 순조때 풍양조씨, 안동김씨의 후신인 서울 장동김씨[양광도 동인]가 주도하면서
세력이 교체된다.
그리고 구한말에 와서는 다시 세력이 상당수 교체된다.
서인은 송익필, 정철, 윤두수, 김장생, 윤근수, 김집, 김류, 정엽, 윤선거, 송준길, 송시열 등
양광도(경기동부 ,충청북부, 충북, 강원 영월, 경북서북부) 노론학파로 이어지는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가 있고,
주기학파는 서경덕을 이어 광주의 기대승, 강릉의 이이(파주 활동), 정읍 태인의 이항, 광주의 성혼(파주 활동),
박순, 장성의 김인후 등 40여 명을 기반으로 형성되어 서인정권의 학문적 스승으로 유학의 토대가 된 정권이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분열하여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게 된다.
노론의 거두 송시열이 주자학으로 대를 이어갔고,
소론의 거두 윤증이 양명학으로 신진사조를 가지고 신진세력을 중심으로 이어간다.
중국에서는 주자학을 버리고 양명학으로 대체하였기 때문에,
신진사류들인 소론은 그에따라 양명학을 선택하였다.
양명학은 명나라의 왕양명이 주장한 유교학설로 "지식수양과 실천철학의 일치"를 강조하는 유학이다.
송시열은 충북 옥천 출신이고 대대로 서인정권의 후예였으나,
그의 선조 송여해가 안동도호부 도호부사로 있으면서 서인으로 활동하였다.
5대조인 송세충과 그의 손자 송응개, 송응형 등은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송시열은 송갑조의 아들로 어머니는 경북 선산곽씨였다.
송갑조는 선산 곽씨가 죽자 지씨부인을 계모로 맞이하였고, 이후 경남 고성 이씨를 서모로 맞이한다.
고성이씨는 이괄의 친척이었다.
이괄의 난으로 화를 입자 외가를 대전으로 피신시켜 살아남게 된다.
윤증은 한성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본가가 충남 논산 노성에 있어 노성 출신으로 분류되었다.
아버지는 윤선거, 할아버지는 윤황이었다.
윤증의 어머니는 공주이씨로 이장백의 딸이었다.
윤증의 할머니가 성리학의 대가 성혼(成渾)의 딸이다.
노론정권의 학문적 토대는 서인을 이어받아 갔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권력독점을 하기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다.
순조때 풍양조씨, 장동김씨의 세도정치 60년을 거치며, 다시 전국세력이 들어오게 되면서
원래의 서인과는 지역세력이 완전 교체되어, 구한말과 일제시대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서인은 조선 전기 여주(이서군/여주, 이천 이방원의 원경왕후/문관중심), 전주세력(무인중심)이 기반이다.
명종 원년 1545년 을사사화 이후 윤원형이 전국 유림으로부터 축출된 이후부터
선조시기 임진왜란 1년전까지는 광주가 기반이다.
이 시기가 노자, 장자의 도교철학(제천단에 도교 제사권을 주관하는 소격서 혁파)을 개혁하려 하다가
몰락한 조광조의 기호사림파에 이어 호남을 중심으로 하는 주기학파가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1592년 4월13일 1년전 영의정 박순, 성혼, 이이, 이항, 김인후 등 40여명의 주기학파와
송익필, 정철, 윤두수(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등의 서인정권이 몰락하고
이산해, 류성룡 등의 동인 주리학파 정권이 들어서기까지, 주리철학을 철폐시키고
주기철학을 전국민에 전파하고 근대 이성철학을 가르쳐 조선을 개화하여 근대국가로 진입시키려는
르네상스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조선후기 서인정권은 양광도 서인정권 [노론학파]이다.
남인은 나주~남강, 경호강, 낙동강이남, 부산정권이다.
동인은 양광도 동인[경기동부, 충청북부, 충북, 강원 영월, 경북서북부]정권과 대가야 지방정권이 있다.
양광도 동인정권은 동인 주리학파 정권(안동)이다.
대북은 대가야지역 낙동강 서안정권이다. [도교학파, 노장철학, 제자백가 철학/조식학파]
소북은 대가야지역 낙동강 동안정권이다. [주리철학 원리주의 학파/허적학파]
노론은 충북, 한성정권이다.(송시열)-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
소론은 충남, 한성정권이다.(윤증)- 주자학 중도파 성혼을 이은 양명학파.
이때도 노론, 소론 분열 초기에는 파주, 여주, 광주, 전주기반 세력을 끼고 서울에서 권력을 행사하다가
점차적으로 인조반정 이후 조선후기 전주, 광주세력은 정치무대에서 완전 사라진다.
순조이후 풍양조씨, 장동김씨(안동김씨의 서울화)가 정권을 잡고
세도정치 60년을 차지하면서 권력의 사유화로 구한말에 들어서서
평남, 평양세력의 한성진출로 더욱더 나라는 쇠약해지고 기울어진다.
서재필(보성), 이완용(경기 광주 낙생면/현 성남 분당구/동인)등이 권력을 잡으면서 나라는 일제에 넘어간다.
그리고 평양 출신 이승만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일제는 이완용과 서재필을 경쟁시켰으며, 다시 송진우와 경쟁을시키며 권력독점을 주려하였다.
이 과정에서 충성경쟁을 벌이게 만들어 자연스럽게 일제에 협력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완용은 서인세력도 아니고 노론세력도 아니다.
그는 반역자로 낙인 찍혀있던 동인세력인 대북, 소북세력과, 남인세력의 족쇄를
마지막으로 풀어준 인물이다.
서인도 아닌 인물이 마지막으로 묻힌 곳은 전북 익산이었다.
이로 인해 호남은 다시 한번 매국 논란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이것은 성리학 국가에서 흔히 있었던 일로 유교적 질서상 이완용이 죽은 후에 흥선대원군에게
조금이라도 죄업을 씻어 보고자 전북 익산으로 가서 묻힌 것이었다.
-죽어서는 나의 묘를 마음껏 밟으라는 속죄의 의미(그래서 후손들에 대한 보복을 피해가려 한 것임).
[조선왕조 이성계의 본가가 전주 한옥지구 오목대 경기전 기자촌.
너무 죄송스러워서 차마 전주로는 가지못하고 익산으로 가서 곁가지로 순장되듯이 묻힌 것임.
조선초기부터 1592년 임진왜란 발발 1년전까지 전주, 전북, 전남지방은 무관중심으로만 중용하고
문관세력은 자리를 주지않아 권력독점에 소극적이었음].
-오히려 문관자리는 왕실에서 출사하지 못하게 견제했음.
이석준(이호석)의 아들인 이완용은 흥선대원군의 친척인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
흥선대원군의 조카가 되었다. (실제로는 흥선군과 피 한방울도 안섞였음)
역사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패려한혀(稗麗翰舌/패려한설)를 조심하라는 고사성어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정권을 빼앗기면 반란으로 일어서려는 지역과 부패한 지역은
과거 역사에서도 현재 역사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