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선비 서재에 들다] 입암정사[立巖精舍]
맑은 산수와 수백 권의 책과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초가 서재
입암정사는 천만 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서 있는 바위처럼 세상의 번잡함과 화려함을 뒤로 하고 오로지 책을 읽고 사색에 몰두하겠다는 뜻을 담았다.
서재주인 장현광1)
산수의 맑고 깨끗한 기운이 모여 있는 공간
뜻을 같이 하는 영양(永陽)의 친구 네 명이 강 북쪽 가장 깊고 외진 곳에서 조그만 길을 하나 발견했다. 길 입구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시냇가에는 큰 바위가 하나 우뚝 솟아 있었다. 그 바위가 곧 입암(立巖)이다. 입암의 북쪽으로 열 걸음 정도 되는 곳에 길이 뚝 끊긴 벼랑이 있는데, 형세가 넓고 평평해 어린아이 10여 명이 있을 만하다. 또한 고송(古松) 몇 그루가 푸른 그늘을 짙게 드리워 매우 시원하다. 이곳이 바로 계구대(戒懼臺)라고 불리는 곳이다.
계구대에서 다시 북쪽으로 가다가 약간 동쪽으로 가면, 다소 높은 조그만 석봉(石峯)이 하나 나타나는데 기이하게 솟고 우뚝 버티고 선 모습이 은연중 공동산(崆峒山)의 분위기와 정취가 있다. 이 석봉의 이름은 기여암(起予巖)이라고 한다. 기여암의 남쪽 아래에는 옛터가 있는데, 계단은 무너지고 돌은 어지럽게 널브러져서 어느 시대 누가 쌓았는지 알 수 없다.
여러 친구들이 놀고 감상하며 여가를 즐긴 다음 서로 바라보았다. 천 년을 산 거북이가 고요하고 잔잔한 물가에 형체를 드러내 머리를 내밀고 숨을 내쉬려고 버티고 선 채 바람과 햇빛을 피하지 않는 듯한 모습은 뒤쪽 산봉우리가 현무(玄武)가 된 것이고, 산 속에서 제왕 노릇을 하다가 늙어서 위엄을 거두고 우렁찬 소리도 닫고 또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까지 갈무리한 채 오래도록 꿇어앉아 떠나가지 않는 듯한 모습은 오른편 대(臺) 바위가 백호(白虎)가 된 것이다. 잠겼던 물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숨어 있던 곳을 떠나 처음에는 구불구불하다가 마지막에는 똬리를 튼 것처럼 둥그렇게 감아 엎드린 듯 또는 일어선 듯하고, 구름을 헤집고 여의주를 품은 듯한 모습은 토월봉이 동쪽에서 청룡(靑龍)이 된 것이다. 그리고 대붕(大鵬)이 날개를 퍼덕이며 9만 리를 훨훨 날다가 지쳐 아래로 내려오는데 머리를 치켜들고 창공을 우러러보는 듯한 모습은 구인봉이 주작(朱雀)이 된 것이다.
또한 산지봉, 함휘봉, 정운봉, 격진봉 등 여러 산봉우리가 눈앞에 병풍처럼 늘어서서 담처럼 가리고 있고, 시냇물 한줄기가 굽이쳐 흘러오는 모습이 허리띠가 감아 돌고 옷깃이 싸고 있는 듯해 들어가는 것은 보이지만 나가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위아래 수십 리 계곡물과 산의 맑고 깨끗한 기운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다.
수백 권의 책과 꽃과 나무로 장식한 초가 서재
여러 친구들이 이곳을 좋아한 까닭에 이내 터를 닦고 초가 서재를 짓고 머무르며 쉬는 장소로 삼았다. 오른쪽과 왼쪽으로는 방을 마련하고 중앙에는 마루를 두었다. 그것이 각각 한 칸씩이고, 좌우의 두 방 북쪽에는 감실(龕室)을 두어 수백 권의 책을 소장할 만했다. 초가 서재의 앞쪽과 뒤쪽을 약간 다듬어서 꽃과 나무를 심었는데 볼 만한 풍경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여러 친구들이 거들어 주는 바람에 서투르고 보잘것없는 나는 이곳을 오가며 함께 어울릴 수 있었다. 그래서 감히 여러 친구들에게 이렇게 청했다.
"작은 서재나마 이렇게 완성되었네. 우리들이 이곳에 거처하면서 무엇을 닦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세상에 경치 좋은 장소에 정자나 집을 세우는 사람들은 그 목적이 동일하지 않네. 술과 여색을 밝히는 자는 주색을 즐기고, 활쏘기를 즐기는 자는 시끄럽게 떠들며 다투고, 장기나 바둑을 좋아하는 자는 노름을 즐기네. 이러한 것은 말할 것도 못 되니, 우리는 하지 않을 것이네. 또한 속세를 등지고, 세상사와 단절하고, 인륜을 버리고, 공론을 일삼고, 미묘하고 기이한 이치를 살피고, 은둔할 곳을 찾고, 괴상한 행동을 하며, 아침 안개와 저녁 노을을 고향으로 삼고 산 속 바위와 계곡에 거처하면서 사슴이나 멧돼지와 벗하고 도깨비와 어울리는 자들은 더러 이런 장소에서 몸을 숨기고 감추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행동으로 학문하는 선비가 좇아야 할 길이 아니네."
오직 책을 읽고 사색하는 것이 급선무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오직 한 가지 할 일이 있네. 세상의 번잡함과 화려함을 뒤로하고 삶의 마지막이 부귀영화로 치달리는 일을 천박하게 여기고, 오직 책을 읽고 이치를 궁리하고 사색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알아서 몸을 닦고 본성(本性)을 기르는 것이라네. 이것이 우리 본업임을 아는 사람이 이곳에 머무르며 독서하고 학문을 닦는다면, 올바름을 길러 성인이 되는 공부가 산 아래 샘물의 형상이고, 옛사람의 말과 행실을 쌓는 공부는 산 가운데 하늘의 본받음이네.
계단 아래로 흐르는 냇물은 밤낮을 쉬지 않으니 그 원천이 있어서 마르지 않네. 앞산의 오솔길은 잠시 동안이라도 발길을 하지 않으면 띠 풀이 우거져 길을 막으니 힘써 실천함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네. 내 책 속의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이 앉아 있을 때나 서 있을 때 항상 모습을 드러내 나를 단속하므로, 스승과 벗들이 엄격하지 않음을 걱정하지 않네.
하물며 저 입암은 아침저녁으로 마주할 때마다 솟아 있어 천만년이 지나도 항상 그 모습 그대로라네. 거센 물결도 어지럽히지 못하고, 미친 듯이 몰아치는 바람도 흔들지 못하고, 장맛비도 썩히지 못하고, 활활 타오르는 불로도 녹이지 못하네. 이는 『주역』에서 '우뚝 서서 방향을 바꾸지 않고, 홀로 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거나, 『논어』에서 '더욱 높고 더욱 굳세게 드높이 서 있다.'는 것과 같네. 또한 『중용』에서 '온화하면서도 휩쓸리지 않고, 중립에 서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다'거나, 『맹자』에서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해서 빈천(貧賤)도 뜻을 옮기지 못하고, 부귀(富貴)도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고, 위엄과 무력으로도 굽힐 수 없다'는 말의 뜻도 여기에서 알 수 있네. 각자 떨쳐 일어나 힘을 쏟아 함께 설 곳을 생각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것은 여러 친구들과 함께 해야 할 일이라네.
입암이 지켜볼 것이네
젊어서는 배움의 때를 놓치고 늙어서는 배움의 소득이 없다네. 이미 지나버린 세월은 다시 돌릴 재간이 없고, 늙고 쇠약해진 정력도 다시 회복할 수 없네. 다만 늙은이의 경험을 수습해 모으고 스스로 노력하니, 다행스럽게도 속세의 풍속에 대한 그리움이 없고 만년(晩年)에 들어서 독서와 아름다운 풍광에 취미가 있네. 만에 하나 해와 계절의 사이에 진전이 있다면 이 또한 어찌 이곳의 도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늙은이들의 일이라네.
산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햇빛과 바람이 골짜기를 가득 메우고, 소나무 그늘에 바람이 불어 와 뜨거운 햇볕이 두렵지 않고, 단풍 숲에 비단 물결이 몰려와 옥빛 시냇물에 붉은 단풍을 비추고, 눈꽃이 휘날려 골짜기의 하늘이 아득하니 모두 아름다운 흥취라네. 또한 앞들에 안개가 걷히고 동쪽 산에 달이 떠오르는 모습은 아침저녁으로 마주치는 아름다운 풍경이라네. 꽃을 찾고 버드나무를 따라 마음 가는 대로 걸음을 옮기며 샘물로 세수하고 돌 위에 앉으니, 어디인들 좋지 않겠는가?
자그마한 그물을 푸른 못에 던져 놓고 은빛 물고기가 쟁반 위에서 뛰고, 가느다란 연기가 바위틈에서 피어오르며, 산 속 막걸리가 잔에 가득하구나. 약간 취기가 올라 시가를 드높이 읊조리면, 우주가 아득한 것이 어느 시절에 있어야 하겠는가? 이것은 책을 읽고 강의를 마친 다음 마음을 쉬고 기운을 펴는 일인데, 여러 친구들과 할 일이라네.
이렇게 한다면, 이곳 서재에 거처하는 우리들은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아도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네. 감히 우리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있다면, 저 입암이 지켜볼 것이네."
장현광, 『여헌집』 '입암정사기(立巖精舍記)'2)
여헌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이 경상도 영양의 입암(지금의 경북 영양군 입암면 입암리)에 지은 초가 서재에 부친 기문(記文)이다. 장현광은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인 1596년 입암에 잠시 은거한 적이 있다. 당시 그의 나이 43세였는데, 그곳에서 권극립, 손우남, 정사상·정사진 형제 그리고 권극중과 교유하며 지냈다. 이 글에서 이야기한 '뜻을 같이하는 영양의 네 친구'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장현광의 입암과의 첫 인연 또한 옛 친구인 정사진으로 인해 맺어졌다. 경상도 청송의 속곡에 있던 장현광을 정사진과 권극립이 청해 입암으로 오게 된 것이다. 당시 권극립은 장현광을 위해 술이며 밥이며 생선, 나물, 과일 등을 내어 푸짐하게 대접했다고 한다. 입암의 자연 풍경에 빠져든 장현광은 그때부터 친구들과 자주 그곳을 찾았다.
장현광은 입암 부근의 아름다운 풍광을 아주 좋아해 '입암13영(立巖十三詠)'이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그 중 첫 번째 시 '입암촌(立巖村)'과 다섯 번째 시 '계구대(戒懼臺)'는 다음과 같다.
외로운 마을 바위 아래 있으니 (孤村巖底在)
조그마한 집이지만 본성을 기르기에는 족하네. (小齋性足頣)
늙어서 갈 곳 없으니 (老矣無可往)
이제부터 한결같이 우뚝 서 있는 입암을 배우리라. (從今學不移)
- 입암촌
성인의 가르침은 위태로움과 미묘함을 경계하니 (聖訓戒危微)
누군들 이 마음 없으리오. (何人無此心)
그러나 이 학문 전해지지 않은 지 오래되어 (此學不傳久)
옛 서적 어느 누가 다시 찾을까. (陳篇誰復尋)
- 계구대
장현광뿐만 아니라 그와 어울린 영양의 친구들 역시 입암을 무척 사랑했다. 그래서 가장 좋은 자리를 골라 방 2칸, 마루 1칸에 수백 권을 소장할 수 있는 감실(龕室)을 둔 서재를 마련했다. 그 서재의 앞마당과 뒤뜰에는 화훼(花卉)를 가꾸어 쉬고 즐길 만한 장소로 삼았다. 서재가 완성된 다음 장현광이 이곳에 대한 기문을 지었는데, 이것이 '입암정사기'이다. 장현광이 처음 입암을 찾은 지 11년째 되는 1607년(선조 40년), 겨울이었다.
이곳 서재에서 장현광은 "세상의 번잡함과 화려함을 뒤로하고 삶의 마지막이 부귀영화로 치달리는 일을 천박하게 여기면서, 오로지 책을 읽고 이치를 궁리하고 사색하며 몸을 닦고 본성을 기르려고" 했다.
그러나 장현광의 말년에 일어난 병자호란은 그 소박한 꿈조차 짓밟아 버렸다. 1636년(인조 14년) 12월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에 갇힌 채 청나라 군사에게 공격당하자, 의병을 일으키고 군량(軍糧)을 도왔다. 그러나 다음해 2월 임금이 항복하고 청나라 황제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는 삼전도의 굴욕을 겪자, 세상과의 인연을 모두 끊고 입암에 은둔할 뜻을 품었다.
훗날 미수 허목이 찬(撰)한 '여헌장선생신도비명(旅軒張先生神道碑銘)'에는 당시 장현광의 심정과 행적이 잘 드러나 있다.
"그해(1636년) 12월 남한산성의 변이 일어났다. 선생은 임금의 행차길이 막히고 명령이 시행되지 못할까 염려해 고을 백성들에게 알려 각각 의병을 일으켜 임금을 돕도록 했다. 또한 재물을 내어서 군량을 도왔다. 그러나 다음해(1637년) 2월 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렸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선생은 선대의 묘소를 하직하고 입암산(立巖山)에 들어가 살았다. 입암은 동해(東海)에 위치해 있는데, 선생은 입암의 이름을 입탁암(立卓巖)이라고 고쳤다. 그것은 자신의 뜻을 담아 이름 지은 것이다."
장현광이 입암을 입탁암으로 개명한 까닭은 『사기(史記)』에 나오는 노중련(魯仲連)의 고사를 들어 소신을 밝힌 것이다. 노중련은 춘추전국시대 제(齊)나라 사람인데 진(秦)나라의 세상이 되면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그 나라의 백성이 되지는 않겠다고 한 사람이다. 사마천은 노중련을 일컬어 "기위(奇偉)하고 탁이(卓異)한 일을 꾸미기를 좋아했다."고 했는데, 장현광은 여기에서 '탁(卓)'이라는 글자를 취해 병자호란에 패배해 청나라의 신하가 된 땅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실제 장현광은 입암에 은둔한 지 6개월 만에 만욱재(晩勖齋)에서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각주
1 장현광은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인 1596년 입암에 잠시 은거한 적이 있다. 당시 그의 나이 43세였는데, 그곳에서 권극립, 손우남, 정사상, 정사진 형제 그리고 권극중과 교유하며 지냈다. 이 글에서 이야기한 '뜻을 같이하는 영양의 네 친구'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당시 권극립은 장현광을 위해 술이며 밥이며 생선, 나물, 과일 등을 내어 푸짐하게 대접했다고 한다. 입암의 자연 풍경에 빠져든 장현광은 그때 부터 친구들과 자주 이곳을 찾았다.
2 '입암정사기'는 여헌 장현광이 경상도 영양의 입암에 지은 초가 서재에 부친 기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