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배병삼
공부를 한자로는 工夫라고 쓴다. 이것을 중국어로는 ‘쿵후’라고 읽는다. 우리가 공부라고 읽을 때의 ‘工夫’는 책이나 시험지를 눈으로 읽고 머리로 외우고 손으로 정답을 찾는 활동이지만, 쿵후로 읽는 순간 ‘工夫’는 내 몸을 규범대로 닦아서 신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운동이 된다.
공부가 죽음을 연상케 한다면, 쿵후는 건강한 삶을 떠올리게 한다.
인쇄된 책은 그 자체로 이미 과거다. 활자란 말의 찌꺼기요, 또 책은 그 찌꺼기들을 모아 묶은 것이기 때문이다. 공부가 ‘책을 읽는 것’인 한, 그것은 고작 옛사람들이 남긴 그림자를 밟는 것일 뿐, 변화무쌍하고 생생한 오늘의 삶과는 틈이 벌어져 있기 마련이다.
『장자』에 나오는 고사가 오늘날의 공부를 경고한다.
옛날 춘추시대에 윤편(輪扁)이라는 장인이 있었다. 그가 마당에서 수레바퀴를 만들고 있을 때 마루 위에서는 제경공이 책을 읽고 있었다. 감히 “무엇을 읽고 있으시냐”고 윤편이 물었다. 뻐기듯이 제경공이 답했다.
“옛 성인들의 말씀을 읽고 있노라”고. 윤편이 다시 물었다.
“그 성인들이 살아있느냐”, “이미 죽고 없는 성인들 말씀이라면 그건 결국 찌꺼기에 불과한 것 아니냐”며 폄하한다.
화가 난 제경공은 “그 까닭을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지 못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명한다.
이에 윤편은 답한다.
제가 하는 일의 경험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많이 깎으면 굴대가 헐거워서 먹히지 않고 덜 깎으면 빡빡해 굴대가 끼어지지 않습니다. 더도 덜도 아니게 정확하게 깎는 것은 손짐작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을 뿐, 말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더 깎고 덜 깎는 그 어간에 정확한 치수가 있을 것입니다만 저의 자식에게도 깨우쳐 줄 수 없고 제 자식 역시 저로부터 전수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노인이 된 지금에도 손수 수레바퀴를 깎고 있는 것입니다.
옛 성인도 마찬가지로 가장 핵심적인 깨달음은 책에 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니 대왕께서 읽고 계신 것이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이라 말씀드린 것입니다. (『장자』, ‘천하’편)
말로 표현하지 못할 자리에 수레바퀴의 진리(정확한 치수)가 위치한다면, 글로 된 책 속에 진리가 들어있을리 만무하다.
물론 말과 글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톱을 써서 나무를 켜고 자와 컴퍼스를 써서 모양을 다듬는 것은 규정이 있고 규칙이 있으니 말로 가르치고 글로써 배울 수 있다.
그러나 그 궁극처는 손의 감촉과 마음의 느낌으로나 헤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최상의 궁극은 말과 글로 전수될 수 없는 것이기에 늙은 몸으로 몸소 수레를 만들고 있다는 것.
이 우화가 가리키는 지점은 어디인가?
고작 공부가 돼 말이나 글을 배우는데 멈춘다면 과거의 모방일 따름이요, 쿵후가 돼 내 몸의 감각을 살릴 수 있다면 창조가 된다는 것이리라.
요컨대 책과 글을 눈으로 읽고 머리로 헤아리며 정답을 찾는 것은 과거로 퇴행할 뿐, 미래는커녕 현재조차 제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는 경고다.
그러니 공부의 끝은 죽음이요, 쿵후의 끝은 삶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