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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근본에 대한 성찰-안식일 – 예배 너머의 그 무엇/ 김상래목사
https://youtu.be/WvBi901p-c8?si=HwF6ENJHQ_VJPU0N
저는 말씀에 초청을 받고 언제부터인가 아니 정확히는 작년 정년 퇴임을 한 이후로 저의 신앙에 대해 자꾸 생각해 보면서 근본에 대해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보니까 우리는 관찰에 익숙한 공동체인 것 같습니다.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관찰하고 더 나아가 때로는 대총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연합회에서 합회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좀 더 좁히면 우리 교회 목사님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장로님은 어떻게 지내는지, 박 집사는 김 집사는 홍 집사는 어떻게 살아가는지 관찰하는데 익숙한 공동체 같습니다.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 자리에 계셔서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조금 송구스럽습니다만 저도 60대 중반을 넘어 이제 70 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보니 앞만 보고 달려오던 저의 신앙생애를 이제는 저도 모르게 돌아보고 또 저를 살펴보고 뭔가를 하려고 하기보다는 자꾸 생각해 보게 되고, 그래서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내 생활에 반복되는 것이 뭔가 뭔가를 행동하기보다는 생각하게 되고 뭔가를 성취하려고 하기보다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얼마 전 우리는 이런 대법원 확정 판결 소식을 듣고 다 기뻐했죠.
안식일이기 때문에 면접을 보지 못해 의학전문대학원의 불합격 처분을 받은 우리 재림 성도가 법적 소송을 제기해서 마침내 3년이 넘는 세월이 걸려서 단지 안식일에 면접을 신앙 양심 때문에 거부했다는 이유로 불합격 처분을 내리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하는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았지.
예.
금년 4월 4일 대한민국 헌법 사법 사상 최초로 대법원에서 안식일 면접을 변경 요구할 법적 권리가 확정되었습니다.
우리 재림 성도 임희진 집사가 제기한 종교적 신념에 따른 로스쿨 안식일 면접 거부와 시험 일정 변경 청구권이 승소하게 된 것이죠.
이제 안식일을 지키겠다는 이유로 면접을 보지 못하는 그런 처분에 대해 우리는 정당하게 요구할 법적 권리가 확정된 거죠.
기뻤습니다. 저도 한 사람의 재림 성도로서 박수치고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소식을 들으면서 지금부터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세상 사람들로부터 안식교인이라 불려지는 우리가 안식일을 어떻게 사회 앞에 설명해야 하는지는 오히려 지금부터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큰 음성으로 이루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새 천사의 기별 중 첫째 천사의 기별은 그냥 하나님을 경배하라 이렇게 표현 안 합니다.
그냥 여호와를 경배하라고도 표현하지 않습니다.
아니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라 이렇게도 표현하지 않습니다.
세천사의 기별의 첫째 천사의 기별은 분명히 뭐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러분 성경 전권에서 하늘과 땅과 바다라고 하는 이 세 단어가 이 순서대로 나타나는 것이 그리 흔치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익숙히 이 세 단어가 이 순서대로 나열된 경우가 안식일 계명이 있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7일에 쉬었으니라.
세천사의 기별 중 첫째 천사의 기별이 그냥 하나님을 경배하라 이렇게 표현하지 않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우리를 경배하라.
그것을 경배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에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재치에 쉬었음이라.
그래서 우리 재림교회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든 신을 경배하는 구체적인 우리의 삶의 모습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이해하죠.
문자적으로 틀림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상 복음이라는 단어가 마지막으로 사용된 것이 요한계시록 14장 7절이죠.
뿐만이 아닙니다. 성경 천권에서 딱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 표현이 있습니다.
복음이란 단어 앞에 영원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영원한 복음이라는 이 표현은 성경 전군에서 여기 한 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유튜브 시대에 여러분 들어가셔서 유튜브 방송에서 한번 검색해 보세요.
세천사의 기별 o 혹은 영원한 복음이라는 표현으로 요한계시록 14장 6절부터 13절을 설명하는 어떤 개신교의 설교가 있는지 없어요.
성경에서 마지막으로 복음이라는 단어가 언급되고 성경에서 유일하게 영원한 복음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이 기별을 설명해 주는 어떤 다른 설교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도대체 왜 이 유튜브 시대에도 영원한 복음을 설명하는 개신교 설교가 하나도 없냐고요.
이상하죠 저도 이상해요.
우리는 이 요한계시록 14장 7절에 이 기별에 의미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것이 선포되는 시대적 배경을 이해해야 되죠.
질문 요한계시록 14장 바로 앞장은 요한계시록 몇 장인가요?
어려우세요? 대답 좀 해보세요. 요한계시록 14장 바로 앞장은 몇 장인가요?
여러분 요한계시록 14장 7절에 이 복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하려면 그 바로 앞장이 13장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14 14장에서 선포되는 그 기별이 어떤 배경 속에서 선포되는지 나와 있죠 바다 짐승이 나옵니다.
다니엘 7장에 네 짐승이 다 모아졌죠. 그런데 또 다른 짐승이 올라옵니다.
양 같은 짐승이 올라옵니다. 13장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13장 4절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줌으로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줌으로 그다음 용에게 경배하며 그다음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려 하더라. 그다음 7절이 중요합니다.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그다음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여러분 여기 네 단어가 나왔습니다.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 이 네 단어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리고 8절입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용이 권세를 준 그 짐승에게 짐승을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아까 14장 7절에서 뭐라고 말했어요?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근데 13장을 보니깐 뭐라고 말하죠?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정신 똑바로 차려야 된다는 말입니다.
알고 모르고 알게 모르게 성경 예언에 의하면 마지막 때에는 결국 둘 중에 하나를 경배하게 되는데, 하나는 짐승을 경배하게 되든지, 아니면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경배하게 되든지 둘 중에 하나하나 하나를 결국 결정하게 된다는 거지요.
용이 얼마나 기가 막힌가 하면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다 짐승에게 경배하게 되니, 이 어린 양을 섬기는 자들로 하여금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기 위해 어린 양을 내세웁니다.
보세요. 여기 11절에 내가 봄에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
어린 양을 섬기는 자들을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기 위해 어린 양을 등장시켜요.
근데 성경 표현대로 하면 어린 양이 아니고 어린 양 비슷한 어린 양 같은 존재를 내세우지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어린 양 같은 존재로 하여금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기 위해 우상을 만들죠.
아까 살펴본 대로 여기 계시록 13장 6절에 보면 그 어린 양 같은 세력이 만든 우상을 통해 모든 자들이 다 짐승을 용이 권세를 준 짐승을 경배하게 하는데, 그 대상이 누군가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입니다.
그리고 14장 6절에서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영원한 복음이 선포됩.
여러분 여기 14장 6절에 사용된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이라는 내 단어는 13장 6절에서 사용된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라는 단어와 똑같습니다.
순서만 다르지. 그러므로 14장 6절에서 영원한 복음이 선포되는 그 대상은 바로 앞장인 13장에서 어린 양의 영향으로 짐승을 경배하게 된 바로 그들에게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는 기별을 외친다는 거지요.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평생을 통해 반복해서 학습한 우리의 근본을 밝혀주는 내용이죠.
이렇게 전해지는 이유는 성경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반복되는 중요한 신학적 배경이 있죠.
왜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시니 단지 하나님을 경배하라 하지 않고 이렇게 표현되어 있을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대로 세상에 자기들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섬기는 많은 신들이 있지만은 하나님께서 내가 참 신이라고 스스로 자기 증명 선언하시는 근거가 천지를 지었다는 사실 때문이지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오 영원한 왕이시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다시 바울도 말하지. 비록 하늘이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어요.
여러분 심지어 파리를 신으로 섬깁니다. 파리를 신으로 섬길 때 그 이름이 뭐예요?
바울 새불, 바울 새불 파리 대왕 아닙니까? 동남아에 가면 모기도 신으로 섬겨요.
우리는 웃죠.
이 모기 신을 섬기는 예배 의식은 모기가 나타나는 시즌이 됐을 때 우통 벗고 숲속에 들어가서 신이 오셔서 내 피를 잘 드세요 하고 움직이지 않아야 합니다.
신이 와서 이렇게 드실 때 내가 움직이면 그 신에 대한 불경이에요.
많은 신과 많은 신이 있습니다. 비누스, 박카스, 제우스 흐르네스 얼마나 많은 신들이 있습니까?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여러분 그러므로 창조주 신앙은 그리고 그 창조주 신앙을 고백하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7일에 쉬었음이라라고 하는 이유로 지키게 되는 안식일은 안식일은 예배일의 선택이 아니에요.
단지 어떤 사람들은 일요일에 예배드리고 어떤 사람들은 토요일에 예배드리는 예배일의 선택만이 아니고, 안식일 신앙은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그것도 참 하나님이신 것을 확증하고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선언한 창조주 신앙, 창조 신앙을 고백 하는 신앙의 표예요.
안식일을 예배일로만 생각하면 그들은 일요일 교인이고 우리는 토요일 교인이 됩니다.
무슨 차이가 있어요? 여러분 성찰해 보는 거지요.
장로교인, 감리교인, 순결교인 우리보다 더 신실하고 더 아름답게 거룩한 모습으로 신앙생활하고 헌신하는 모습들이 있잖아요.
우리는 어떤 안식일 교인입니까? 안식일 오전 9시 반부터 12시까지 예배드리기만 하는 사람들인지요 아니면 그것도 좀 줄여서 11시에 예배드리고 안식일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안식 교인들인지요?
반성해 보는 거지요. 성찰해 보는 거죠.
바나바와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바나바가 워낙 잘 생겼고, 바울이 워낙 말씀을 잘 증거하니깐 사람들이 바나바를 제우스 신으로, 바울을 웅변신 헐의 신으로 섬기려고 하자.
두 사람이 여러분 어떻게 이런 일을 합니까? 우리도 똑같은 여러분과 같은 사람인데 우리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복음이라고 말하죠.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그다음 뭐라고 말해요?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 함이라 어떤 하나님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 함이라 다시 아텐에 가서 복음을 전하지요.
아텐에 가보면 지금도 가보면 거기 수많은 그 신당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모든 신을 다 한꺼번에 한 자리에 모셔놓은 만신전, 판세온이라고 하는 만신전도 있죠.
아레오바고라고 하는 그 바위 광장에 가보면 넓직한 바위가 있습니다.
바울이 그 아래 군데 아레오바고에 갔죠. 가서 이렇게 말하죠.
아테네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쭉 살펴봤더니 참 종교심이 많아 그래서 신을 섬기려고 하지.
근데 신을 모르니까 심지어 뭐라고 표현했어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있어.
참 섬기곤 싶은데 신을 모르니까 모르는 신 이러고 섬겨 잘한다.
그래서 너희가 모르고 섬기는 그 하나님 내가 알게 할게.
그런 다음 뭐라고 말하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창조주 신앙을 전하는 것.
이것은 예배일의 차이뿐만이 아니고 신앙의 대상인 우리가 섬기는 그분, 우리가 경배해야 할 그분이 참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확정하는 신관의 결정입니다.
예배 일의 차이만이 아니에요. 이 차이 속에는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는 거죠.
이 마지막 시대가 되면 알고 모르고 모두가 다 그 참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참 하나님을 안 섬기고 짐승이 자기를 섬기게 용이 자기를 섬기게 하기 위해 짐승과 짐승 보고는 다 놀라니까 어린 양하고 비슷한 전에 한글 개혁 성경은 똑같은 헬라어 단어를 그 13장에 고 양을 새끼 양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똑같은 헬라어를 어린 양이라고 번역하고 새끼 양 저는 그 번역이 참 좋았는데 같이 어린 양으로 바꿔놓았어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는 거지요.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너무 분명해요.
우리가 이 땅 위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너무 확실해요.
근데 이 지점에서 저는 관찰하기보다 성찰해 보는 겁니다.
이 기별을 큰 음성으로 외치라고 했는데 그래서 우리는 그 기별을 큰 음성으로 세상에 외치려고 하는데 큰 음성이 때때로 사람들을 힘들게 하거든요.
듣기 싫은 소리가 크게 들리면 이게 복음이 아니라 잡음이 되고 소음이 되거든요.
듣기 싫은 소리가 자꾸 들리면 층 간에서도 소음이 발생돼서 심지어 살인 사건도 일어나거든요.
큰 음성으로 전해야 하는 이 기별을 복음이 아니라 잡음이나 소음으로 전하지는 않았는지 내가 그렇게 살지는 않았는지 살펴보는 거거든요.
사람에게 전해지는 큰 음성이 소음이나 잡음이 아니라 복음이 되게 하려면 소리가 크지 않고 울림이 커야 합니다.
소리는 귀에 가닿는 음파에 불과하지만 울림은 가슴을 흔드는 감동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지 50년 신앙생활을 은퇴와 동시에 되돌아보는 겁니다.
새로운 사역을 영남화폐에서 시작하게 되면서 반성해 보는 겁니다.
제가 2013년 8월 31일 자로 삼육대학교 30년 사역을 마치고 8월 31일 오후 7시쯤에 화회장님과 총무부장님, 재무부장님, 선교부장님 만나서 영남화폐를 초청한다는 말씀을 듣고 이게 뭔 일인가 이런 게 하나님 부르심인가?
제가 이후에 이곳저곳에 가서 집회하면 해외에 가서 말씀을 전할 때는 어디 가 집회를 하든 제가 늘 첫 인사를 그렇게 합니다.
30년 36대학의 봉사를 마치고 영남 화폐,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두음리 두 교회를 섬기는 은퇴 목사 김상래입니다.
그렇게 인사를 합니다. 생각해 보는 거지요.
나는 한 사람의 크리스티안으로서 한 사람의 재림 성도로서 세상 사람들이 저를 불러주는 호칭 다 내려놓고 총장 내려놓고 박사 내려놓고 교수 내려놓고 목사 내려놓고 한 사람의 전임 성도로서 저를 성찰해 보는 거지요.
나는 안식일을 어떻게 전했나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는 이 기별을 울림이 있는 감동으로 전해왔나 생각해 보는 거죠.
미국 하버드대학 신학대학원에 하비 콕스라고 하는 유명한 교수가 2009년에 은퇴했습니다.
이 하비 콕스는 2008년에 뉴욕타임즈에 의해서 21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선정이 됐고, 그가 은퇴 기념 책을 냈습니다.
그 책이 더 퓨처 오브 페이스 우리말로 번역이 됐는데 종교의 미래라고 번역이 됐어요.
제가 볼 때 저 번역은 조금 틀렸습니다. 또 퓨처 오브 페이 신앙의 미래 그가 더 페이스라고 하는 용어를 썼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하비 콕스 교수는 2천년 기독교 역사를 세 단계로 구분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던 그 시대는 신앙 시대 페이스라고 했고, 예수님을 믿다가 그다음에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끼리 내가 믿는 게 옳아 너가 믿는 게 틀려 하고 나는 이렇게 믿어라고 하는 신조를 만들기 시작한 빌리프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거죠.
이때부터 페이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믿는 신앙 시대가 아니라 내가 믿는 게 옳다라고 하는 사상과 이념과 더 나아가 이데올로기 같은 신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역사 번역자가 이것을 앞에 건 신앙 뒤에 거는 믿음이라고 번역했는데 제가 볼 때는 좀 오역이에요.
빌리프는 우리말로 신념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20세기 들어오면서 오순절 운동이 시작되면서 성령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거죠.
하비 콕스 교수는 기독교가 미래가 있으려면 앞으로 예수를 믿는 이 신앙이 정말 공동체가 살아남으려면 내가 믿는 게 옳다는 빌리 신념을 넘어서서 맨 처음 예수께서 살아나셨다고 하는 사실, 그분을 섬기고 그분을 사랑했던 그 페이스의 시대로 돌아갈 때 그때 기독교는 미래가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격적 대상에 대한 신뢰와 헌신, 다시 말해 인격 관계인 거죠.
사상이나 신조에 대해 지적으로 옳다고 동의하는 사상 체계가 아니라 신념 체계가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신앙 체계인 거죠.
안식일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나 일요일이 틀렸고 토요일이 오라라고 하는 신념만 가지고 있나 살펴보는 거죠.
예수님이 계시던 그 시대에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키되 철저한 신념으로 지켰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라봤죠?
뭐라고 했죠?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얼마나 안식일을 잘 지키고 싶은 신념에 가득 차 있었으면 다른 사람들이 안식일에 옳은 일을 하나하나하나 그것 살피고 관찰하는 데 모든 관심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여러분 기독교는 동기의 종교입니다.
무슨 동기로 그 일을 했는지가 참으로 중요한데 본문은 뭐라고 말하죠?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안식일이 옳다는 것이 가득 차 있는 신념의 사람들입니까?
여러분 잘 아시죠? 그런데 이런 그들에 의해 안식일은 복음이 아니라 철저하게 소음이 되었고 잡음이 되었습니다.
예수그그들을 깨우치기 위해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여러분 이 당연한 대답에 대해 답을 보세요. 이어지는 말씀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 밀에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이걸 보고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이고 의논하기를 안식일 안식일이 너무나 분명하고 너무나 옳다고 하는 확고한 신념 때문에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는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그 예수님을 죽이겠다고 계획하기 시작합니다.
신념으로서의 안식일이죠. 신앙으로서의 안식일이 아니라 신념으로서의 안식일입니다.
이들은 그 신념을 잘 구현해내기 위해 물라코트라고 하는 안식일을 잘 지키기 39가지 법도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에 안내해야 하는 일 39가지 소위 율법주의의 상징이 되었죠.
우리들의 안식일은 어떻습니까?
토요일 11시에 참여하여 겨우 1시간 예배만 드리는 지루한 안식일은 아닙니까?
우리들의 안식일은 어떻습니까? 토요일 오후 해 넘어가기까지 뚜렷하게 재미도 없고 할 일도 없는 부담스러운 종교일은 아닙니까?
만일 혹시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나요?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안식일 노래가 있죠.
우리들은 안식일을 손을 꼽아 기다려요. 멀리 가신 부모님을 두 손 모아 기다리듯 노래 참 좋아요.
우리 드러난 시를 손을 꼽아 기다려요. 멀리 가신 부모님을 두 손 모아 기다리듯 멜로디도 좋고 가사도 좋죠.
그런데 그다음 가사가 뭔가 여새 동안 지은 죄를 모두 용서받으려고 여러분 아이들 중에 안식일을 엿새 동안 지은 죄를 모두 용서받으려고 기다리는 아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데리고 와 보세요.
그리고 왜 매일매일은 뭐 하고 살다가 왜 그걸 다 모아가지고 안식일에 용서를 받습니까?
그렇죠 철저하게 어른들이 잘못된 안식일 개념을 아이들에게 자기들 생각대로 만든 노래예요.
우리들은 안식일을 손을 꼽아 기다려 뭐 하고 살다가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 어른들이 안식에 오셔가지고 안식일 아침 첫 시간에 기도하라 그러면 뭐라고 기도해요?
첫 기도하시면서 우세요 또 자기 서름에 겨워가지고 그리고 꼭 뭐라고 표현해요?
오늘만이라도 하나님과 함께 오늘도 아니요. 오늘만이라도 이해는 해요.
왜 그렇게 하는지 그러니까 평상시에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다가 오늘 만이라도 이러면서 울어요.
또 우울해지죠. 여러분 제가 이 재림교회 목사로서 안식일이 좋은 날이라고 하는 걸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겠습니까?
제가 강원도 횡성에 이사를 갔더니 어느 날 우리 아랫집에 어떤 사람이 서 있어요?
어떻게 오셨어요? 인사하니까 저 반장입니다. 그래요.
반장님 이장입니다. 이장님이세요. 반갑습니다.
교수님이시라 다르시네요. 저 아세요?
다 알죠 소문났어요. 그러더니 묻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설명해줘요.
뭐라 그러시는가 하면 저기 이웃 사람 두 사람 이상 초청해 주면 서울 살다 오신 분들 이웃하고 친하게 지내시라고 50만 원 지원해 주니까 잔치하세요.
그래요. 우리나라 좋은 나라예요. 그래서 알았습니다.
그러고 막 이렇게 해가지고 막 여러 사람한테 소문내가지고 다 초대하고 이장님한테 전화했죠.
저는 시골 이장님이 그렇게 권력이 높은 줄 몰랐어요.
마당까지 깔아주고 수돗 끌어오고 이거 다 이장님이 결정하세요.
그래서 준비하고 전화했더니 예예예예. 그리고 대답을 안 해요.
며칠 있다 전화 또 했습니다. 이장님 접니다. 준비됐는데 어떻게 지원해 주신다고 말씀하셨던 게 제가 지금 좀 바빠서 끊어요.
두세 번 그러고 나니까 이상하다. 이 사람 왜 이러지 나중에 알았어요.
이분이 그 마을에서 가장 큰 교회 장로님이세요. 그리고 그쪽 강원도는 어느 특정 개신교 교단의 아주 선교 지역입니다.
강릉 원주 속초 춘천 이런 지역 그 교회 목사님이 광고를 한 거예요.
여러분 우리 동네에 안식교 귀스가 오셨으니 만난 접촉을 좀 조심하십시오.
여러분 제가 안식교 괴수라고 하는 호칭을 공식적으로 들었어요.
여러분 안식일 괴수인 제가 안식일을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날이라고 가르치기 위해 얼마나 나름 노력했겠어요?
아이들이 어릴 때입니다. 우리 아들이 초등학교 3 4학년 때쯤입니다.
아침에 밥 먹는데 밥 먹다 말고 아이가 문득 저보고 아빠 선생님이 삼행시 지어 오라고 했어요.
그래 뭔데 안식일 가지고 삼행시를 지으래요? 지 언니 왜 지었어요?
아빠가 불러주세요. 기대하는 마음으로 제가 안 했습니다.
아이가 안식일은 즐겁다 그래요. 오 역시 제가 기대하는 마음으로 식했습니다.
아들이 방실방실 이시면서 식사는 더 즐겁다 그래요.
순간 제가 긴장했습니다. 기대 반, 긴장 반 마지막으로 일했습니다.
아이가 일요일은 가장 즐겁다. 제가 빵 터졌습니다.
제가 평생 잊지 못하는 안식일 사행시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가 안식일은 지겹다 안 해준 것만도 감사하게 됐습니다.
왜 이렇게 됐나요?
신앙의 안식일 복음의 안식일,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큰 소리로 외치는 우리의 외침이 영원한 성경에서 단 한 번밖에 표현되지 않은 영원한 복음이 되게 하기 위해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들은 어떤 점이 있나요?
여러분 안식일은 제 며칠입니까? 예. 제 7일이에요.
인간이 몇째 날 창조되었죠? 그러면 인간에게 안식일은 몇째 날입니까?
다시 안식일은 제 며칠 안식일입니까? 네. 제 7일 안식일이에요.
인간은 몇째 날에 창조되었죠? 그러면 인간에게 안식일은 몇째 날인가요?
여러분 창조 질서에 의하면 제 7일은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날입니다.
그날이 제7일이려면 첫날부터 계셨던 분에게만 그날이 제 7일입니다.
본질적 의미에서 범죄 이전의 본질적 의미에서 안식일은 엿새를 살았던 삶의 피곤을 푸는 날이 아니에요.
우리 인간의 역사는 살고 안식일을 지킨 게 아니고 안식일을 지키고 여새를 살았어요.
다시 말해 안식일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선물로 주어진 존재와 생명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날이에요.
집에서 회개할 게 있으면 다 하고, 안식일 오셔서는 찬양과 감사를 고백해야 하는 날이에요.
엿새 동안 뭐 하고 살다가 왜 엿새 동안 지은 죄를 다 모아요.
여러분 안식일이 회복될 때 뭐라고 말했어요? 만일 안식일에 내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우리는 여기까지만 읽었어요.
오락을 행치 마. 내 발을 금해 우리가 대학생 시절 1970년대 후반부만 해도 안식일 오후에 청량리에서만 보여도 쟤는 왜 안식일에 청량리 걸어가지 이런 정서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다음에 뭐라 그러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의를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본질적인 의미가 즐거운 날이에요.
존귀한 날이에요. 코미디 보고 개그 프로그램 보면서 웃찾사 보면서 즐거워하라는 뜻이 아니죠.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안식일이 기쁘고 거룩하고 노임 받는 날이 되도록 그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 한다.
그날을 주일 중 가장 흥미로운 날로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녀를 흥미롭게 하기 위해 시간을 바쳐야 한다.
변화는 자녀들에게 행복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작년 재작년 미국 오늘의 신앙 40주년 기념식을 하는데 잠깐 와서 이런저런 스피치를 좀 해달라는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중에 우리 자녀 세대들이 너무 교회를 안 나오고 신앙을 부모들 따라 하지 않으니 그 젊은 세대들에게 뭔가 해줄 수 있는 메시지를 좀 영상으로 준비해 달라 부탁을 받았습니다.
맞아요. 미국의 부모 세대 다음 세컨 제너레이션 제2세대가 너무 교회를 안 나와요.
한국도 마찬가지잖아요. 왜 그런가요? 아이들이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일요일날 예배드리는 내 친구 부모님의 모습이나 토요일날 예배드리는 우리 부모님의 모습 봤을 때 쏙 와.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이날 예배드리는 게 이날 예배드리는 거고 차이뿐이지 무슨 의미가 있는 무슨 의미 차이가 있는데 그게 아멘이 아니고 그다음이 아멘이 돼야죠.
그렇죠 왜 아이들이 이렇게 느끼게 됐냐 말이죠. 여러분 안식일 신앙이 구현해야 할 두 국면이 있죠.
안식일은 하나님을 향해 분명히 거룩히 구별해야 하는 수직 국면이 있어요.
동시에 안식일에는 반드시 실현되어야 할 수평 국면이 있죠.
여러분 10계명 중에서 내 아들과 내 딸과 내 남정과 내 여정과 내 문화를 하는 개기라도 인간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 언급된 유일한 계명이 넷째 계명이 있죠.
심지어 뭐라고 말하나요? 너는 엿새 동안에 내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라 내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내 여종의 자식과 낙은애가 숨을 돌리리라 그랬습니다.
한식이래 수평수직 국면으로 하나님께 거룩히 구별해야 하는 것과 동시에 실현돼야 할 수평 국면이 있는 거죠.
우리 아이들에게 안식일이 정말 근본적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살펴보는 거죠.
예수께서 어느 안식일 오후에 베데스다라고 하는 곳으로 갔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거기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베데스다 이름이 얼마나 좋아요? 베스 베스 집입니다.
했어야 돼 했어야 돼. 인자 자비 사랑 이에 온갖 좋은 뜻이다.
베데스다 자비의 집, 은혜의 집, 인자의 집, 인혜의 집, 사랑의 집입니다.
거기 병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다 잘 아시는 대로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는다고 하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기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어떤 병에 걸렸든지 제일 먼저 들어가는 자 이 말은 무슨 뜻이에요?
병이 중할수록 못 들어간다는 뜻이죠.
그리고 베데스다 은혜의 집에서 먼저 들어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이 전개된다는 뜻이지 그곳에 아니나 다를까 병이 중하기 때문에 오히려 못 들어가게 되는 역설의 문제를 안고 있는 38년 된 병자를 주님이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그 병자에게 이렇게 말하지요. 니 자리를 두고 가라.
낳으라 그러면 되잖아요. 근데 왜 자리를 들고 가라 그럽니까?
38년 된 병자를 고치는데 그가 깔고 앉아 있던 그 자리가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 자리를 들고 가라고 말씀하셨어요.
여러분 여기서 주님이 낳으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자리를 들고 가라고 했던 그 이유를 분석해 내지 않으면 주님이 이렇게 명령하신 그 진정한 의도를 파악해내지 못합니다.
자리를 들고 가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때 안식일 신념으로 수평적 국면을 잃어버린 다른 사람들을 함께 치유해야 되겠다고 계획하셨습니다.
자리를 들고 갑니다. 물라코트에 보면 안식일 운반 금지 규례가 있었는데 거기 보면 절대로 옷 이외에는 다른 거 들고 가면 안 됩니다.
유대인들이 묻습니다. 안식일에 니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게 옳지 않다.
여러분 안식일 신념이 얼마나 철두철미했는지 38년 앓다가 낳은 사람이 보이지 않고 그 사람이 들고 가는 자리가 먼저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38년 앓다가 사람이 나왔는데 병에서 나은 사람이 보이지 않고 그 사람이 들고 가는 자리가 보이는 그런 종교인들이 있다는 거지요.
안식일에 니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형제가 대답하죠.
나를 낳게 한 그 사람이 자리에 들고 가라 그랬는데요.
그 사람 누구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한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신념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들에 의해 예수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38년 된 병자면 급성 환자가 아닙니다. 얼마든지 다른 날 고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자리 상관없이 그냥 고쳐주셔도 됩니다. 주님은 안식일을 딱 집어가지고 그 오후에 시대의 소망을 보면 오후입니다.
그 오후에 이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와잇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지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축복은커녕 저주가 되게 만든 이 무거운 짐이 되는 요구 사항들로부터 안식일을 자유롭게 하시러 오셨다.
이런 이유로 베데스다에서 치유의 일을 행하시는 날로 안식일을 선택하셨다.
예수께서는 주일 중 다른 날에도 병자를 고치실 수도 있으셨을 것이며, 그 병적의 자리를 가지고 가라고 명하지 않고 단지 그를 고치기만 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큰 역사를 공표하기 위해 그의 자리를 들고 거리를 통하여 가라고 명령하셨다.
의도적이셨다는 거죠. 38년 된 병에서 낳은 사람보다 그가 들고 가는 자리가 먼저 보이는 사람들.
이들을 향해 주님이 뒤집어질 만한 표현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이해한다.
여러분 이게 예수님의 안식일 준수 선언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안식일에 일하니까 나도 안식일에 일하고 싶다.
제가 예수님의 이 표현을 가지고 나도 안식일에 일하고 싶다.
그렇게 글을 써서 발표했더니 누군가가 김상래 목사가 은퇴를 하더니 안식일을 버렸다 그러고 연합회에다 고발했습니다.
우리가 그런 교회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와잇은 이 장면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태양이 안식일에 그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막으시고, 지구를 따뜻하게 하고 초목에게 양분을 공급하지 못하도록 그 온화한 빗줄기를 차단하셔야 하는가 여러분 안식일에 태양이 비추는 것도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이잖아요.
천체들이 성일에는 종일토록 조용히 정지해야 하는가?
별 안식일에 왜 또 하나님께서 시냇물이 들과 숲에 물을 공급하지 못하도록 명령하시고, 물 움직이지 마.
안식일이니까 바다의 물결이 그 쉴 줄을 모르는 조수 간만을 멈추도록 명하셔야 할까?
밀과 곡식은 자라 자라나기를 멈추고, 안식일에 밀 자라지 마.
안식일에 왜 자라? 이건 포도송이는 그 자줏빛 열매를 맺는 것을 연기해야 하는가?
초목들은 안식일에는 꽃봉우리가 맵거나 꽃이 피어서는 안 되는가?
이거 다 누가 일하기 때문이에요. 아버지가 일하시기 때문에 안식일에 꽃 피고 꽃이 피고 꽃봉오리가 맺히잖아요.
다시 와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도 또한 이 나라에 행해야 할 일이 있다.
병자는 돌봐야 하고 곤핍한 자들의 피로는 공급해 주어야 한다.
안식일에 고통하는 자들을 구하기를 게을리하는 자에게 죄 없다 하지 않을 것이다.
하늘의 사업은 결코 중단되지 않으므로 사람들도 선한 일을 결코 중단해서는 안 된다.
여러분 저는 27살의 소중한 앞에 반포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한 17명 청년들밖에 없는 교회였습니다. 열심히 하다 보니까 한 명, 두 명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별레에서 강남 터미널까지 저 평택에서 강남 터미널까지 와요.
1시간씩 1시간 반씩 버스를 타고 오늘 안식일 아침 한 청년 집사님이 45번 버스를 타고 묵동에서 내려서 117번 버스를 타고 강남 터미널까지 왔습니다.
저를 보더니 반갑게 맞으면서 전도사님 아이고 오늘 꼭 버스가 밀려서 1시간 반 넘게 걸렸네요.
그날 안식일을 지키기 참 힘듭니다. 이렇게 그분이 말하신 순간 제 머릿속에 이분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1시간 반 버스를 타고 오는데 만약에 117번 버스 기사가 운전해주지 않으면 이 사람은 어떻게 안식일에 교회에 오나 저는 그 그때 떠올랐던 제 생각을 30년 동안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우리는 117번 45번 버스와 117번 버스를 타고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교회에 오게 될 때 그들이 운전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안식일 오나 우리는 그때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야 하나?
여러분 우리가 안식일 잘 지키죠. 저 미국의 유대인 도시를 가보세요.
여러분 우리가 지키는 안식일은 안식일도 아닙니다.
그 예수 없이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들보다 우리의 안식일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나요?
우리는 안식일을 구별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이어야 하나요?
선한 일을 해야 한다는 이 모습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나요?
저는 여전히 그 문제에 대해 버스 타지 말아야 한다고 말 못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안식일에 버스 타고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평상시 다른 날보다 운전기사에게든 옆사람에게든 우리의 모습이 달랐으면 좋겠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교회에 오는 우리가 누군가의 사랑을 힘입고 올 때 우리의 표정이 우리의 언어가 달라져서 그들이 우리의 변화된 모습만을 보고도 오늘이 안식일임을 알아챌 수 있는 그런 모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미소를 던져 그들을 따뜻하게 해주고, 악수를 내밀어 작은 선물이라도 사랑을 고백하고 표현함으로써 그들이 우리 때문에 안식일이 왔으면 좋겠다.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는 그런 일들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 일하십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은 안식일에 일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주님도 안식일에 일하십니다.
우리는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기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을 경배하라는 말은 단지 어느 요일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예배드리는 것으로 모든 것이 충족된다는 의미는 아닌 거죠.
엿새 동안 지은 죄를 다 모아가지고 용서받기 위해 기다리는 날도 아닌 거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비하는 것은 창조 세계관으로 우리 삶이 다 바뀌는 거죠.
창조 세계관이 바뀌면 어떻게 되나요? 와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수림의 나뭇잎이나 풀, 잎사귀들도 다 봉사하고 있다.
다 나누어줌으로써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들었다고 하면, 하나님의 창조 세계관으로 보면 세상은 서로 살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세계관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
봉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천연계에서 볼 수 있는 무수한 사물들에는 회복시키는 사랑이 나타나 있다.
하늘과 땅의 모든 사물은 생명의 대법칙이 곧 봉사의 법칙임을 말하고 있다.
저는 안식일이 바른 예배 일분만으로 멈추지 말고 저는 안식일이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향해 예배드리고 우리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그들이 우리의 안식일 지키는 모습 때문에 그들이 어서 안식일이 왔으면 좋겠다.
아니면 적어도 저 사람들을 보니 오늘이 안식일이구나 참 좋은 날이지 안식일은 하고 느끼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안식일에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일을 하신 것처럼 우리도 안식일에 남을 행복하게 하는 일을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해보고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행복한 안식일 공동체의 멤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신앙 하나 붙잡고 겨우 구원받기 위해 아등바등 해넘어가기를 기다렸어.
안식일을 다 지켰다라고 자기 종교적 신념으로 한 나라를 지켰다는 자기만족으로 멈출 게 아니고 예배와 봉사로 우리 자신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안식일을 그렇게 지켰다면 그렇게 지킨다면 우리의 젊은 자녀들이 예배만 일요일날 안 드리고 토요일에 드려라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의 안식일이 사람을 함께 살려내는 날이 되고 회복하는 날이 된다면 정녕 안식일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겠죠.
단지 소음을 일으키는 안식일 신념 공동체가 아니라 창조주 복음을 전하는 신앙 공동체.
제가 참 좋아하는 한글 단어가 있습니다. 살림살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참 아름답습니다. 두 개의 동사를 명사화시켜서 두 개의 명사를 조합한 단어죠.
앞에 살림은 누구누군가를 살리다라는 타동사의 명사형입니다.
뒤에 살리는 살아간다는 자동사의 명사형입니다.
그러므로 살림살이라는 말은 살리면서 살아가기라는 뜻입니다.
엄마들이 살아가는 그 살림살이는 가족들을 살리면서 살아가지.
제가 제 아내와 40년을 같이 살았습니다. 저 여인은 독감이 걸리고 코로나가 걸려도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합니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날 만큼 감동을 받죠. 왜 연약한 몸으로 50견이 걸려서 왼팔을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지금 여기까지 따라왔어 저렇게 아침마다 일어나서 과일을 깎고 사과를 깎아 밥 먹기 전에 아침 사고 식전 사과는 금사과에 하면서 절 먹이고 그걸 깎아가지고 주고 울컥할 만큼 감사하죠.
살림살이잖아요. 누군가를 살리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엄마들이 하는 살이를 뭐라 그래요? 살림살이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것 살림살이예요.
우리 안식일 왜 지켜요? 살림살이 하면서 안식일을 지켜야 돼요.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안식일을 지키는 거죠. 내가 만약 누군가의 마음의 상처를 막을 수 있다면 내 헛되이 사는 것이 아니리.
내가 만약 한 생명의 고통을 덜어주고 기진맥진하여 떨어지는 울새 한 마리를 다시 둥지에 올려놓을 수 있다면 내 헛되이 사는 것이 아니리.
에밀리티킨스넷입니다. 30년 교역을 마무리하고 은퇴하면서 돌아봅니다.
선생으로 살면서 나는 울새 한 마리 같은 젊은 제자들을 다시 둥지 위에 올려놓았나 성찰해 보는 거지요.
내 한마디 말에 혹시 상처받은 이들은 없었나 살펴보는 거지요.
내 안식일 지키겠다고 누군가를 다시는 교회 쳐다보고 싶지 않게 만든 일은 없었는지 돌아보는 거죠.
사람에게 전해지는 큰 음성, 소음이나 잡음이 아니라 복음이 되게 하려면 소리가 큰 것이 아니라 울림이 커야 합니다.
소금이나 잡음이 아니라 감동의 울림이 있는 복음으로 우리의 창조주 기별이 세상에 전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안식일을 지켜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이 시간에는 하나님 앞에 헌금 드리는 시간입니다.
우리 각 교회마다 우리 헌금 봉사자들은 우리 중앙에 우리 통로 쪽에 계시면 되겠습니다.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경절 우리 말라기 3장 10절에 있는 말씀을 낭독해 드리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11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곳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우리 자미 13장 잔미하면서 언금드리겠습니다.
참미가 13장 함께 부르겠습니다.
성 성자 성령 찬소
기도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오늘 대구 경산 선교 지역 장막회로 모이게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저희로 하여금 은혜받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간 저희에게 주신 것 중에 10분의 1과 각종 선물을 주님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기뻐 받아주시고 하나님의 귀한 사업에 쓰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10분의 1과 각종 선물을 드린 모든 손 위에 축복하시고 은혜 내려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함께 부르시겠습니다.
나도 하고 안식일 다시 맞으니 이 세상 생각 버리고 신령한 복을 누리, 내 기도 한 기 같아서 주 앞에 올라갑니다.
내 주께 만든 한식은 못 받는 자는 모르네. 내 마음을 주관하시니 봄날 거 아 주없도다.
주께서 이 날은 주의 날이니 일하지 말고 지키세 지키면 영원한 심 없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거룩하신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자녀 되어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식일을 증거하고 안식일을 지키며 이 땅에서 나름대로들 이런저런 투쟁 속에 힘들게 살아온 주의 소중한 백성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그 일 때문에 세상에서 주눅들어 살기도 하고 기도하며 눈물 흘리며 안식일을 구별하기를 힘들게 살아오기도 했습니다.
주님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넓혀주옵소서 우리 마음들을 넉넉하게 해주옵소서.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안식일만 되면 누군가를 향해 미소를 나누어 주고 따뜻한 악수를 나누어 주고, 뭔가 그들이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는 좋은 이웃으로 바뀌는 우리의 모습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아버지 그래서 우리도 주님처럼 그런 일을 하는 안식일임을 선언하여 안식일이 얼마나 복된 날인지 세상을 향해 선언하고 우리의 어린 자녀들에게 모본의 모델의 가르침을 나누어 주는 우리들 되도록 감동해 주시옵소서.
아버지 우리 마음들에게 격려, 용기를 주시고 격려를 주셔서 부디 안식일을 지키는 이 거룩한 공동체를 공동체와의 관계가 더 깊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그래도 11시에 나올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그 관계를 좀 더 넓혀주셔서 안식일 예배를 온전히 처음부터 드릴 수 있는 믿음 허락해 주시고, 그것을 좀 더 확대해서 구별된 시간 동안 하나님 앞에 온전히 우리 자신들을 드리는 온전한 안식일 회복의 신앙들 되게 해주시고, 이제 그것을 넘어 하나님께 예배드릴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 이웃들에게 우리의 변화된 모습마저도 함께 보여주는 우리들 되도록 감동해 주시옵소서.
안식일이 옳아서뿐만 아니라 안식일이 좋아서 우리의 가족들이 우리의 자녀들이 엄마처럼 아빠처럼 그렇게 안식일을 지켜야 되겠다고 저절로 결심하게 되는 우리의 미래가 있는 신앙 공동체, 단지 옳기 때문에 머물러 있는 신념 공동체를 넘어서서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 안식일에 일한다고 선언하셨던 우리 주님과 인격적 관계가 있는 신앙 공동체에 우리들 될 수 있도록 감동해 주시옵소서.
정성을 다해 이 야영 집회를 준비했습니다. 참여한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해 주시고 이어지는 오후 모든 행사, 아니 내일 아침까지 모든 행사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해 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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