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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강 신앙의 고백
진짜 믿음을 표현하라
이번 장에서는 신앙의 고백이란 무엇이며, 또 어떤 것이 신앙의 고백이 아닌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련하여 믿음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깨달은 후에는 그 믿음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분명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마음이 괴롭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이 주어졌는지 진정으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믿음의 표현이 무엇인지 그 예를 보이려고 합니다. 이것들은 고백적 진술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고백은 여러분이 잘못한 것들을 줄줄이 늘어놓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고백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것들을 증거하는 것이며, 그렇게 해 주신 아버지께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표현은 이미 이루어 주신 사실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표현이란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들이 무엇인지 아는 데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6, 8~10절을 다시 살펴봅시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8~10절).
좋은 소식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의롭다고 선포하심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된 것입니다. 이미 이것들은 우리의 것이며 지금 당장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어떤 문이 열리게 됩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할 때 어떤 기적적이고 역동적인 문이 열립니까? 다시 요한일서 4장 15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물을 믿는 믿음을 고백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안에 그분이 사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 마음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진실된 믿음의 표현과 잘못된 믿음의 표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이 주제를 토론하기에 앞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이미 이루신 사실을 믿는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실히 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에게 믿음을 표현하라고 목이 쉴 정도로 외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다른 생각들이 있어서 순식간에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심으로 그들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나타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런 진술을 나쁜 고백이라고 할 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 모욕적인 언사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만 이것은 믿음의 표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근거를 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늘을 바라보며 실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아침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저를 의로운 사람으로 보시니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고백입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표현입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저를 더 이상 하나님의 원수로 여기지 않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신앙의 고백입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아침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을 통하여 저를 한번도 죄 짓지 않은 사람으로 보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표현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분의 손에서 빼앗아 갈 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증하실 것입니다.
한번은 라트비아Latvia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돌로 된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데, 어떤 여인이 러시아어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거의 25분 동안 자신이 일생 동안 지었던 모든 죄를 낱낱이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통역에게 물었습니다. "저 여자 분은 무엇이라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바닥이 너무 딱딱해서 더 이상 무릎 꿇고 있을 수가 없네요"라고 했습니다.
통역이 말했습니다. "그녀는 일생 동안 지은 죄 중 기억나는 모든 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렇게 해야 한다면 우리는 몇 주 더 여기 머물러야 하겠네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마침내 그녀가 거의 반 시간 만에 기도를 마치고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과거 20년간 마귀에 사로 잡혔으나 결코 자유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무릎을 일으켜 세우더니 갑자기 내 목을 얼싸안고 말했습니다. "오, 감사합니다! 내 일생 처음으로 자유를 느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성령께서 내 마음 속에 그 여인을 꾸짖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뭐라고요?" 나는 하나님께 되물었습니다.
내 곁에는 오십 명의 젊은 목회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학교 수업을 듣는 중이었고 나는 그들을 훈련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그녀를 꾸짖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하나님과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왜 그러십니까? 하나님께서 "그녀의 기도는 믿음의 기도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게로 나올 때는 네가 나에게 무엇인가 주려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제공한 것들을 받으려고 나오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이 문제가 내 마음속에서 명확하게 정리되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들었던 호소, 이를테면 "하나님께 여러분 자신을 드리십시오!"와 같은 호소를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셨는지 믿음으로 그것을 붙잡으라는 호소를 더 많이 해야 하겠습니다.
나는 내가 하나님께 실제로 무엇을 드리고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복도 많으시지. 제가 무엇을 하나님께 드리는지 보십시오. 제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고작 이 몸과 이 마음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때부터 나는 내 사역의 모든 초점을 바꾸었습니다. 그 후 어쩌다가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호소를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것을 붙잡도록 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혹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지를 말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거기에 정신이 팔리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나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신 사실 위에 올바른 기초를 쌓기 위하여 시간을 바칩니다.
이제 라트비아의 그 교회에서 있었던 일로 돌아가 봅시다. 그 이야기를 마쳐야 하겠습니다. 그때는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이백 여명의 목회자들을 훈련시키고 있었고 그 중 오십명이 내 뒤에서 기도하던 여인과 대면하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통역은 그 여자 신경 쓰지 마세요. 위험한 인물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여자가 교회 장의자의 맨 앞줄에 앉아서 내게 손을 흔들고 있는 몹시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마침내 그녀가 일어나더니 내게 말했습니다. "왜 나를 무시하는거죠?"
그녀를 위하여 도움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다가갔더니 그녀는 진심으로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매님에게 주시는 기별이 있습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래요? 참 놀랍군요!"라고 말하더니 그만 자리에 주저앉아 손을 허공에 치켜들었습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너무 서둘지 마십시오. 아직 말씀을 들어보지도 않았잖습니까?"
"네? 무슨 말씀인데요?"라고 그녀가 대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매님을 꾸짖으라고 하십니다."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습니다.
"왜죠? 난 지금 25분 동안이나 내 일생 지은 모든 죄를 전부하나님께 고했는데요.” 그녀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자매님께서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나올 때는 무엇을 바치려고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나 하는 일입니다. 자매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으려고 그분께 나와야 합니다. 25분 동안이나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시간을 가졌지만, 아직 한 번도 손을 뻗어 그분께서 주고자 하시는 것을 받아본 일이 없잖습니까?"
이것은 많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삶 속에 성령의 부재를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단계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임이 확실합니다. 아주 심각한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믿음의 표현을 하는 습관을 하루 빨리 기르기 바랍니다.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앞에서 무슨 말씀을 읽었습니까?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한일 서 4장 15절).
우리가 그렇게 하면 성령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고백을 할 때,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들어오십니다. 그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거하시게 됩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유익이 되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많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시험이 올 때,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을 것입니다. "저의 힘을 강하게 해 주셔서 저의 힘으로 유혹을 이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새로운 시각
그러나 그것은 승리로 이끄는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패배로 가는 길입니다. 있는 힘을 다해 부르짖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고백하면 성령을 통해 그분이 여러분의 마음에 들어오시고, 그 즉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을 소유하게 될 때 모든 것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
나에게 그런 일이 처음 일어났던 때를 기억합니다. 어느 젊고 매력적인 여인을 바라보면서도 마음 속에 전혀 욕정이 생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음욕의 생각을 지워달라고 간구하는 대신에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제 마음에 들어오시는 특권을 드립니다."
그러고 나서 이 여인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제까지는 관능적인 눈으로 보았을 그 여인이 창조주의 손으로 만드신 아름다운 걸작품으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성적인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아름다운 주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만드셨으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어디서 왔을까?'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습니다. 이것은 평소에 내가 하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나의 생각이니라. 그것이 바로 내가 내 손으로 만들어 낸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는 시각이니라.”
갑자기 깨달음이 왔습니다. "달구지를 말 앞에 놓았던 셈이로구나."
이전에는 영적이 아닌 육적인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구원해달라고 매달렸습니다. "저를 더 강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나의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랬더라면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승리와 관련하여 이것은 전적으로 성공과 실패를 좌우합니다.
성령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특권은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것을 여러분에게 주셨는지를 깨닫고 감사하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감사합니다. 아버지."라며 믿음의 표현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을 말씀드리렵니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나서, 그밖에 어떤 것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찬송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께 올라가는 기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것을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의롭다고 여김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죄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보시는 시각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저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저 대신 죄가 되셨으므로, 죄 많고 못된 저를 전적으로 의롭게 여겨주심을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고백입니다.
나는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말씀드립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통해 베풀어 주신 특권을 내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겠다고 말씀하신 시각으로 나를 보시도록 전적으로 맡깁니다. 동시에 나는 내 자신이 어떠한지 사실 그대로 인정합니다. "죄 많고 못된 저를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 주심으로 그분께서 저 대신 죄가 되도록 하시다니요."라고 말씀드립니다. "이제 저를 죄없고 의롭고 올바른 사람으로 보시는군요!“
내가 사는 동안에 매일 아침 나는 이런 생각을 하나님께 표현하려고 합니다. 내가 어떻게 느끼든, 하나님께서 나의 생각을 알아주시기를 원합니다.
“저는 못되고 죄가 많은 사람이지만, 이 아침에 십자가를 보면서 감사함이 넘칩니다. 저 대신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지게 하심으로 이제 예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저도 하나님 앞에 온전한 하루를 살 수 있다는 확증을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관된 축복들에 대해서도 이렇게 간증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축복은 어떤 쪽에 해당됩니까? 이것들은 우리 생애에 있어서 성화의 과정에 속한 것들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이 축복들은 이미 이루어 주신 사실 곧 칭의에 속합니다. 이미 축복들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을 때에 이미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지도 않았을 때, 우리가 연약했을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소낙비처럼 부으셨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보입니다.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인들을 일부 포함하여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총애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거나 구원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어떤 이들은 안식일을 좀 더 잘 지켜 보려고 노력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생활 방식으로 말미암는 의'를 실행해 보려고 합니다. 생활 습관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이들은 그들이 먹는 음식, 건강, 의복, 여가 등에 지나치게 집착합니다. 그리고 자주 남이 하는 일까지도 지나치게 간섭을 합니다.
그런 것들에 신경을 쓰지 말고 단순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즐기면 어떨까요?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삶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 은혜를 받기 위하여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값없이 받은 은혜 덕분에 그분을 기꺼이 섬기며 자원하여 순종하는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분의 은혜가 우리안에 있으므로 우리의 생애는 그분의 은혜를 반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기 이미 확립된 사실에 근거하여 의지할 때, 다시 말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성취하신 것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어떻게 해서든 쟁취하려는 모든 노력들을 영원히 내려놓을 수 있게 됩니다.
내용 복습
1.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2. 믿음은 항상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까?
3. 왜 하나님께서는 라트비아의 그 신도를 꾸짖으셨습니까?
4.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소유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또한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처럼 바라볼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5. 이 장에 기록된 믿음의 표현 중 어느 것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습니까?
6.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균형잡힌 생활 습관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묵상을 위한 질문
여러분은 지금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습니까? 좀 더 자주, 좀 더 공개적으로 감사의 표현을 하라는 말이 부담되지는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