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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숭배는 실제로 뱀숭배,
동북아, 모스코우(墨西哥), 에티오피아(埃塞俄比亞), 희랍(希腊), 남아프리카(南非), 미주(美洲)
에 있는 씨족의 뱀숭배 & “영사(迎蛇)” 일의 “뱀맞이 굿모임(迎蛇賽會)”
도등(토템:맹호부대, 백골부대 등과 같이 웅족, 호복, 용족, 사족 등 씨족,부족 등을 대표하는 부대 깃발 상징)
에 대해서는 한민족 단군신화의 대상인 곰과 호랑이 그리고 태호복희 용과 뱀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고
넘어가기로 한다.
뱀에 대해서, 용숭배는 실제로 뱀숭배다.
상고 선주민은 뱀을 숭배했는데, 이는 뱀이 흉맹(凶猛)하고, 영활(靈活)하며, 행동이 신속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수(雨水)를 피하지 아니하고, 생명력이 아주 강하고, 오랫동안 동면을 하고도 소생하기 때문
이다. 원시인은 뱀에 대해 두려운 감정과 신비감을 가지고 있어서 신과 같이 존경의 대상으로 여겼다.
동북아, 모스코우(墨西哥), 에티오피아(埃塞俄比亞), 희랍(希腊), 남아프리카(南非), 미주(美洲)에 있는 씨족
은 뱀을 숭배했다.
대륙으로 볼 것 같으면 노족(怒族), 백족(白族), 태족(傣族), 와족(佤族), 고산족(高山族), 단인(旦人:廣東),
한족(漢族) 모두 일찍이 뱀(蛇)씨족이 있었다.
동이족의 한 갈래인 어원크족(卾溫克:Ewenki)은 뱀이 샤만(薩滿)의 영혼으로 보고 있다.
샤만의 신간(神杆:당간지주, 솟대) 위에는 뱀 도형이 있다. 그 신이 입은 옷 전면에는 6족사(六足蛇), 사족사
(四足蛇), 단미사(短尾蛇) 등이 그려있고, 후면에는 사족사(四足蛇), 단미사(短尾蛇)가 그려 있으며,
두 손 위에는 물고기를 수놓고 네 발에는 뱀을 도안해 넣었다.
신고(神鼓)의 북 면에 사족사(四足蛇)를 그려 넣었고,
신고(神鼓)의 북 배면(背面) 둥근 동(銅環)에도 뱀도안이 그려져 있다.
샤만(薩滿)은 뱀에 신력이 있어서 능히 요귀를 항복시키고 마귀를 제거할 수 있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져다
준다고 여긴다. 그가 불러 청하는 신의 하나는 망신(蟒神:이무기,왕뱀)으로, 무도하여 춤을 출 때 뱀이 기어가는
소리를 낸다.
<소화사(小花蛇)>
에는 이러한 일개 신화 전설의 모습이 기재되어 있다.
화사(花蛇)는 변해 청년이 되어 만소(滿蘇) 꾸냥(姑娘:처녀)의 부모를 치병해 주고, 다시 천문(天門)에 올라
다른 사람들을 치병해 준다. 뒤에 그와 만소(滿蘇) 꾸냥(姑娘)은 감정이 심히 돈독해져 마침내 은은애애(恩恩
愛愛)의 부부관계로 맺어진다. 그러나 흑호(黑虎)가 만소(滿蘇) 꾸냥(姑娘:처녀)을 독차지하고자 했으므로,
화사(花蛇)는 성모(聖母) 불고륜돈(佛庫倫敦)의 힘을 빌어 법술로 흑호(黑虎)를 무찌른다.
이에 화사와 만소 사이에 자손이 번창 해 하나의 지파를 이루니 곧 사씨족(蛇氏族)이다.
이는 노(老) 살만(薩滿)이 강(講)한 신화고사이다.
<빙등(冰燈)의 내력(來歷)>
에도 이러한 고사가 기재되어 있다. 소(小) 살만(薩滿)이 백성을 구하기 위해 구두조(九頭鳥)를 죽여 바로잡
아야 했다. 이무기(蟒)가 등 나뭇가지(藤條)로 변해 살만의 등에 올라타, 그로 하여금 상해(傷害)를 당하지
않게 했다.
이무기(蟒)가 다시 꾸냥(姑娘:처녀)으로 변해 소 살만(薩滿)이 죽이려는 구두조(九頭鳥)의 비밀을 말해준다.
그는 또 등 나뭇가지(藤條)로 변해 소살만의 산에 있는 보물을 취해, 마침내 구두조(九頭鳥)를 죽인다.
이로 보면 가히 뱀은 살만(薩滿)의 보호신이다.
장호인(樟湖人)은 뱀을 숭배하여, 매년 7월 7일 “영사회(迎蛇會)”를 거행한다. 장호(樟湖)가 있는 곳은 민강
(閩江)이다. 민강은 복건성(福建省)으로 과거 민(閩)족이 살던 지방이다.
주례(周禮)에 8만(蠻)7민(閩)이라 했고 과거 5대 10국의 하나로 연균(延鈞)이 제(帝)를 칭해 국호를 “대민국
(大閩國)”이라 했으니 지금의 절강성과 복건성이 이 곳에 속한다.
장호(樟湖)의 풍광산수는 미려해서 사람을 감동시킨다. 호반을 따라 차례로 위로 올라가면, 한 그루 천년 용수
(榕樹:열대 뱅골 보리수)가 있어, 둥글게 휘장을 덮은 모습이 흡사 가는 초록의 모시 베로 짠 우산 같은데,
나무 뒤에는 “사왕묘(蛇王廟)”라 불리는 옛 사당이 있다.
사당 제사를 지내는 칠석날(廟時七夕)에 대한 전설에 의하면, 군사(群蛇) 혹 취반수(聚盤樹)아래 혹 지두(枝頭)
를 걸어놓으니 일군군(一群群) 일곶곶(一串串)이 실로 깃발 형상(罕象)이라, 옛 사람이 이를 신(神)으로 삼아
분향소지(焚香燒紙)하여 경건과 정성으로 예배했다. 제사일 전날 저녁은 가가호호 뱀을 잡기 바빴다.
뱀을 맞아들이는 “영사(迎蛇)”일이 되면, 어른 아이 모두 잡은 뱀을 거리에 내놓고 “뱀맞이 굿모임(迎蛇賽會)”
에 참가한다. 대소의 뱀이 백종(百種)을 이루고, 죽엽청(竹葉靑), 오연사(烏烟蛇), 오어화사(烏魚花蛇), 은환사
(銀環蛇), 흑반룡(黑斑龍)....등이 총동원된 것은 실로 “천하의 기이하지 않음이 없고, 없는 것이 없는 천연 뱀
전시회”이다.
종류를 묻지 않고 크기로 상을 주는데 사람들 모두 만두 하나씩의 상을 받을 만한 작품을 내어놓는데, 만두는
찰벼(糯米)와 녹두(綠豆) 및 홍당(紅糖)을 가공한 것이다. 빼어난 것은 큰 것으로 하는데, 상 받는 이는 만두가
많을 뿐 아니라, 뱀 잡은 사람의 이름이 빛나도록 내다 건다.
수 십 근이 나가는 큰 뱀은 “향정(香亭)”이라는 박스에 넣고 색색의 꽃을 장식해 많은 대중이 볼 수 있도록 4
사람으로 하여금 어깨에 짊어지게 하고 돌아다닌다. 기타 작은 뱀은 사람 손에 한 마리씩 쥐게 하여 사람에게
보인다. 그들은 축축한 손수건을 사용해 뱀의 목을 얽어매 손으로 목을 누르고, 뱀의 머리를 당겨, 가히 뱀의
신체로 하여금 뱀을 구경하는 사람의 몸, 손, 어깨 등을 휘감게 한다.
찌는 듯이 더운 염하교양(炎夏驕陽)의 여름날에, 많은 사람들은 맨 살덩이를 드러낸 채 뱀맞이 행사를 하니
다시 한번 그들의 용감과 신기가 드러나 보인다. 뱀맞이 대오는 호호탕탕하여 가두에 깃발을 내세우고 바라와
북이 일제히 울린다. 대오 앞에서는 “뱀부대(蛇隊)”가 서고 후면에는 “사왕예(蛇王爷)”가 따르는데, 현악기, 퉁소
등의 큰 소리가 서서히 진행된다.
양쪽가도는 인산인해며, 화약연기를 터뜨리는 냄새가 하늘에 가득하다. 이 때, 가도에는 20-30미터마다 샘물을
가득 담은 “물항아리(水缸)”가 대기하고 있어 뱀을 두르고 있는 뱀맞이 군중들로 하여금 두르고 있는 뱀머리의
젖은 수건에 물을 적셔주도록 한다. 뱀은 물이 적셔지면 곧 머리를 쳐들고 꼬리를 흔들어 춤을 추며, 입을 열어
혀를 낼름거리니 움직이는 것이 마치 용과 같다.
뱀맞이 회(迎蛇賽會)가 끝나면, 그들은 뱀을 강으로 데려가 방생한다. 뱀은 물 속으로 들어가 즐겁게 놀며 유영
하면서 사라진다. 때로는 해안가에 환송하는 군중을 향해 머리를 쳐들고는 다시 사라지는 일도 있다.
큰 뱀은 세 번이나 머리를 쳐들어 연연(戀戀)한 감정을 표시하며 바라보다 사라진다.
인도인도 뱀을 숭배한다. 매년 7월 중순에 “제사절(祭蛇節)”을 거행한다. 사당행사가 있을때면, 그 곳 거주민은
뱀이 사는 동혈을 발굴해 안경사(眼鏡蛇)를 잡아 놀다가 절일(節日) 제사에 참가한다.
그 날 절일(節日)에 각처의 선남신녀(善男信女)들이 모두 뱀을 잡아 몸에 두르고 신묘(神廟)로 모여든다.
일단 사당에 당도하면 안경사(眼鏡蛇)를 방출 접수해 기도한다.
부녀, 아동은 쌀을 신전의 문에 뿌리고, 분향송사(焚香誦詞)한다. 사당 안에는 뱀이 많은데, 독이빨을 그대로
지니고 있지만 사람을 공격할 의도는 없다. 단지 기회가 있어 모든 뱀이 방울져 물을 뿌리면 대길하다.
그 곳의 태미이인(泰米爾人)은 안경사(眼鏡蛇)를 착한 뱀을 의미하는 “나랍반포(努拉盤布)”로 여기는데,
안경사는 풍년과 부요(富饒)의 상징으로 여긴다.
인도 신화에 있어 뱀은 항상 신성한 동물로 여겨진다. 믿음에 의거하면, 사람 인체 속에는 반권력(盤卷力) 혹
사력(蛇力)이라 부르는 것이 칩거 잠복해 있다가 수습유가(修習瑜伽)시 에 밖으로 나온다 한다.
제 신(神) 이면에 있어, 습바(濕婆)는 보통 온통 뱀으로 에워싸여둘러매고 있거나 생식기 주위에 둘러싸여 있는
것으로 등장한다. 이때 뱀은 생식능력을 상징한다.
오래전의 전설에 의하면, 습바(濕婆)는 일찍이 거리의 이름 없는 사람으로 분장해 설납납(雪拉拉)에 출현했다.
촌리 사람들은 그를 손님으로 열정적으로 맞이해 모사(茅舍)로 초치해 검박한 식반으로 대접했으니, 그에
대해 비상우호의 마음으로 대해 아주 존경도 했다. 하여 습바는 최후에 촌민들에게 원래의 모습을 드러내어
그들에게 예물을 주었다.
족장은 논이 안경사(眼鏡蛇)의 침해를 받고 매년 허다한 사람이 독사에 물려죽음을 상기하고, 습바(濕婆)가
법력을 베풀어주기를 청하니, 그들로 하여금 세세대대 뱀의 피해를 면하게 해 주었다. 습바(濕婆)는 또 그들의
청에 답응해 그 뒤로는 그러한 피해가 없도록 했다.
그 이후 설납납(雪拉拉)인들은 논밭의 뱀과 더불어 쭈욱 서로 화목하게 지냈다. 그리하여 이들 뱀들은 일년에
한 차례씩 촌민들로 하여금 뱀을 잡아 공양하여 돌려보내졌니, 뱀들은 싱싱한 꽃, 쌀과 우유를 공양받고 또 자유
자재로 노닐며 사라졌다.
니박이인(尼泊爾人)은 불교를 믿는데, 그들이 숭배하는 것은 꼬리가 없는 뱀이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통일
되기 전 니박이인(尼泊爾人)은 아주 오랫동안 가물어서, 3개 지구의 국왕이 결정하기를, 가덕만도(加德滿都)의
국왕, 파달포(巴達浦)의 법사(法師), 파탄(帕坦)의 도부(挑夫) 3인으로 말미암아 인도에 가서 왕자를 청해
기우제를 지내기로 했다.
3인이 인도의 일개 소 마을(鎭)을 지날 때 무뢰한이 있어 그들이 가는 길을 방해했음에도 관여치 않았으나,
무뢰한은 시정하지 않았다. 국왕은 분노하여 그의 다리 한 쪽을 찼다. 누가 무뢰한이 몸을 크게 한 번 번드칠
(飜身) 줄 알았으랴. 마침내 그 본신을 드러내니, 그는 원래 한 마리의 천년 묵은 요사한 뱀이었다. 요사(妖蛇)는
그들의 진술을 들은 후 크게 감동하여, 니박이인(尼泊爾人)을 위해 좋은 일을 하기로 작정하여, 곧 그들과 동행
하기로 결정하니, 일비지력(一臂之力)으로 도왔다.
하루는 4인이 항하(恒河)의 호반(湖畔)에 도착하니, 항하의 수면은 광활무변한데, 다리도 없는 차에 이미 배도
끊겼다. 뱀은 다시 몸을 일으켜 긴 다리로 변하여, 항하(恒河)의 양쪽 해안으로 횡단해 타고 넘어갔다. 국왕과
그들 3인은 안전하게 호수를 건너매, 뱀이 장차 몸을 줄여 변신하려 할 즈음, 거대한 돌 하나가 쏜살같이 굴러
오더니, 뱀의 꼬리를 여지없이 잘랐다.
이 이후로, 니박이인(尼泊爾人)의 신묘(神廟)에 모신 뱀의 소상(塑像) 혹 화상(畵像)은 뱀의 머리와 몸은 있지만
꼬리는 없게 되었다.
황제헌원과 용의 미스터리-동이(東夷), 서하(西夏)적 용봉 2원 연맹
섬서성 역사 백가지 미스터리 가운데 황제헌원에 대한 얘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즉, 중화민족을 용의 자손(龍的傳人)으로 칭하고 두 가지 전해오는 설화가 있어,
하나는 복희(宓羲), 여와(女媧)의 전설에 의한 것이다.
고증에 의하면, 복희는 지금의 감숙성 천수(天水) 일대에서 탄생하여 천수를 희황고리(羲皇故里:복희 황제
고향)라 칭하고, 그는 인간의 시조로, 어망을 만들어 고기를 잡고 수렵을 했으며, 문자를 창조하고, 8괘를 긋고,
처음으로 책력을 만들고, 4계(季)를 정하고 금슬(琴瑟)을 만들었으며, 음악을 부흥하고, 관리를 봉(封)하는 등
인류의 생활을 진보하는데 아주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전해오는 말에 복희는 또 혼취(婚娶) 제도를 처음 창조하여, 인류로 하여 번성케 했다. 고대에 처음 홍수가
나서 사람을 모두 삼키려 함에, 복희, 여와는 요행(僥倖)히 위험을 벗어나 서로 부부가 되어 인류는 가까스로
멸절은 면하게 되었다.
뒤에 사람들은 복희와 여와를 인류의 시조로 칭했다 한다. 전설에 복희는 용신인수(龍身人首), 여와(女媧)는
사신인면(蛇身人面)이어서 중화민족을 용의 자손이라 한다. 또한 사람들은 황제 헌원이 용을 타고 섬서성 황링
(黃陵:연안 아래 황허상류)에 도착했다고 믿는다.
<사기(史記).동제본기(東帝本紀)>에 기재하기를, “황제는 소전(少典)의 아들로 성(姓)은 공손(公孫) 이름은
헌원(軒轅)이다“고 하였고, 전설에, 그는 지금의 하남성인 중원(中原)을 거쳐 큰 용(龍)을 타고 하늘로부터
섬서성 황링(黃陵)현 교산(橋山)에 도착하여 중화민족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섬서성의 향토사료에 보이는 바로 이 부분이다.
*「桓檀古記」『太白逸史』에 의하면 소전(少典)은 소호(少 )와 함께 고시(高矢)씨의 방계자손이라 했으니
곧 태호 복희의 후손이다. 복희의 후손들인 풍(風)씨들이 세운 나라가 바로 「춘추」에 보이고 있는 임(壬)국,
숙(宿)국, 수구(須句)국, 전유( 臾)국이다.
이 나라들의 위치를 보여주는 기록은 「산해경(山海經)」 <해내동경>에 인두용신(人頭龍神)의 뇌신(雷神)인
이들이 오(吳) 땅의 서쪽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사천성에서 호북성,호남성 그리고 그 외곽인 귀주성에 이르는 양자강 유역임을 알 수 있다)
순이 살던 부하는 곡부에서 30리 떨어진 연주에 있는데 수구는 바로 연주에 있다고 하니 이 곳은 바로 황제의
탄생지(수구)이면서도 바로 치우천왕의 세력근거지(연주)다.
중국사서는 황제를 지나족의 시조로 삼다보니 근원을 숨기려 했지만
(곡부위 태안시의 태산이 세력 근거지라 주장하여 가급적 치우천왕의 세력근거지인 연주를 벗어나게 기술하려
했다) 산동성 자체가 바로 동이족의 근거지임과 동시에 맹자 왈 순은 동이족이라 못박은 것같이 황제헌원이
부처님 손바닥 위를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소호계는 전설중의 5제 가운데 하나로 성은 기(己), 이름은 지(摯), 호는 금천(金天)씨이다.
사마천이 지나족의 황별의 시조로 내세운 황제의 아들이라 말했지만 황제의 뿌리가 본래 동이족 무대의 중심
거점인 산동성 곡부 아래 수구에서 태어났고 그의 부친이 동이족 조상 염제 신농씨이고 어머니 또한 동이족의
딸이므로 핏줄은 동이족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륙의 사서는 황제의 아들이라 한 소호가(그것도 동이족 태호복희(6대 다의발환웅) 성인을
본따 소호라 했지만) 고대 동이족의 수령이라 말한다(古代東夷族首領 因修太昊之法 故稱少昊)
재위 84년에 100세를 살았고 "백성은 음란함이 없었고 천하가 크게 다스려졌으며 만물이 화려한 복스런 문명
의 꽃을 피웠다"고 한다. 서호릉은 곡부성 40리 구 현촌의 동북에 있다.
*전욱고양은 말할 것도 없이 동이족이지만 사마천이 화하의 시조로 내세운 황제마저 산동성의 수구에서 백의
민족(백민)으로 태어났음을 밝히고 있는 바다. 수세기에 걸친 부권에서 모권사회의 대립을 통해 지나족의 시조
로 일컬어지고 있는 동방족의 후예 황제헌원이 서방족의 모권사회 속에 데릴사위의 형태로 흡수되어 들어간다.
이를 증명하는 기록이 「사기 5제 본기」의 '황제는 소전의 아들(黃帝者 少典之子)이라는 대목과 동기록
'황보익이 말하되 황제는 수구에서 태어나서 희수(姬水)에서 성장하였으며 헌원에서 거주했다'라는 대목,
그리고 「제계사기」의 '황제는 백민(白民)으로 태어나서 스스로 동이에 속했다(自屬東夷)'는 대목,
황제는 백민 출신으로 동이에 속한다는(黃帝生於白民...自屬東夷:『楚史』) 대목이다.
사마천의 「사기」『5제본기』에 3 황 5 제시대가 5 백 년인데, 황제는 100여 년 재위했으며 황제는 유웅국
(有熊國) 소전(少田)의 아들로 소전은 인명이 아니라 (환웅국의) "제후국 이름"이라 하였다.
*신비화 한 흔적이 보이는 고사;
황제는 곤륜을 거쳐 적수(赤水) 노상에 이르러 흑진주 하나를 잃어버렸다. 황제는 애지중지한 현주를 잃어버려
애통해 하여 조급한 나머지 사람을 보내 찾게 했다. 황제는 뭇 신 가운데 가장 총명한 신을 보내어 잃버린 현주
를 찾게 했다. 며칠 후, 시름에 잠겨 얼굴을 펴지 못하고 어디인지 알아내지 못한 그가 돌아와 황제에게 설명
하기를,
"곤륜산으로부터 적수노상에 이르러 저는 명상에 잠겨 현주가 어디에 있는지 힘써 생각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서 역시 저는 아직 가까스로 현주를 찾으려 명상에 잠겼습니다만 며칠이 지나도 현주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황제는 또 현주를 찾으려 천신 이주(離朱)를 파견했다.
이주는 세 개의 뇌 주머니와 6개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며칠 후, 머리를 늘어뜨리고 상심한 이주가 돌아와서
황제를 향해 품고하기를, "내가 목을 늘여세우고 큰 눈동자를 더 크게 뜨고 현주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것은 흙먼지밖에 없었습니다.
나의 목은 빳빳해지고, 눈동자는 빨개졌음에도 아직 현주를 찾지 못했습니다."
황제는 재차 천신 흘후(吃,言+后)를 보냈다.
흘후의 말주변은 제 신중에서 가장 좋았다. 며칠 뒤, 기운이 빠져 무력해진 位캅� 돌아와 황제에게 말하기를,
"한 길 위에서 나와 백 개 노상의 사람과 담론을 하는데, 그들은 모두 내게 반박해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
습니다. 최후에 내가 입술을 떼자 내 목소리가 모두를 귀머거리로 만들어 아무도 내게 현주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황제는 한탄하듯이 숨을 내쉬더니 천신 상망(象網)을 불렀다.
중신(衆神)이 상망을 한 번 보고 모두 "하하"하는 가벼운 웃음으로 대꾸했다.
누가 상망의 조심대의(粗心大意)가 제 신 중에서 가장 뛰어날 줄 알았겠는가. 그가 산에 자리잡고 바라보니
현주는 보이지 않았다. 며칠후 상망이 돌아와서 황제를 향해 잃어버린 현주를 헌상했다.
"너는 현주를 어떻게 찾았는가?" 황제와 제 신은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저는 적수(赤水)가에 한 물건의 줄이 드리워진 것을 기어가 발견했으니, 이는 현주가 내게 줄을 준 것입니다."
상망은 조리가 서지않는 말로 대답했다.
황제는 특별히 기분이 좋아 현주를 상망에게 주어 보관토록 했다. 상망은 현주를 받아들고 큰소매 속에 간직
하고 입이 쭉 찢어진 채 나갔다. 상망이 현주를 보관하고 있는 사실은 곧 한 낭자에게 알려졌다.
그녀는 급히 상망을 희롱하기로 결정했다.
하루는 이 낭자가 들에서 상망을 막아서고 말하기를, "너의 소매 위에 냄새나는 큰 곤충이 붙어있으니, 쾌히
소매를 떨어내시오." 상망은 황망중에 큰소매를 힘차게 떨어내니, 현주가 소매에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낭자가 황급히 말하기를,"너의 소매를 털었으니 내가 내 너를 도와 제대로 되었는지 검사하고 오마."
낭자는 현주를 들고 마음속으로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가서 곧 냄새나는 곤충을 상망에게 주었다.
상망은 보아도 보지 못했는데, 가까이 있는 냄새나는 흑색 곤충이 소매 속으로 들어가자, 소매를 흔들어
떨어버리고 갔다.
황제가 이 일을 알고 천신을 보내어 이 낭자를 잡으려 했다. 황당하게도 낭자는 현주를 배 속에 삼키고 문수
(汶水) 속으로 뛰어들어가, 마두용신(馬頭龍身)의 괴물로 변했다. 황제는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무상(務相)"이;란 이름을 지어주고, 아울러 그녀를 문수(汶水) 의 수신(水神)으로 봉했다.

「제계사기」의 '황제는 백민(白民)으로 태어나서 스스로 동이에 속했다(自屬東夷)'는 대목, 황제는 백민 출신
으로 동이에 속한다는(黃帝生於白民...自屬東夷:『楚史』) 대목으로 보면 황제 헌원은 분명히 섬서성 강수의
감병(監兵) 소전(少典)의 아들로 이에 대한 기록은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자세히 부연되고 있다.
다음 보도에서 보듯이 허베이(하북),샨똥(산동) 등지에서 동이묘족의 수장으로 일컬어지는(사실은 14대 자오
지환웅) 치우천황과의 싸움에서 패한 황제는 세력의 근거지 산동성에서 패퇴하여 양자강 유역을 떠돌다가
돌연히 섬서성 내륙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발자취가 바로 다음의 기사이며 하남성의 중원에서 뜬금없이 돌연 용을 타고 황토고원의 불모지 섬서성
황릉현 교산에 내려왔다고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대륙의 내륙은 지금도 길이 닦여있지 않으며 특히 섬서성은 책상 궤 자 형태의 황허로 둘러싸여있는 한반도의
두세배 크기의 거대한 황토토괴다.
황허는 사실상 섬서성에서 붉은 황톳물로 변모한다. 대륙의 샤츤빠오(황사)는 사실상 섬서성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붉게 만들어진 황톳물로 인해 백년하청이라는 말도 만들어졌으니 수 천년이 지나도 황허의 물이 언제
맑아질 수 있느냐는 이 말 속에 섬서성의 황토고파(민둥산)의 스케일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의 대륙오지인 이곳이 황제시대에 달랐으리 없다. 예나 지금이나 대륙에 있어 문명의 중심지는 황허와
양쯔강(장강) 중 하류인 평야지대이다. 동이족으로부터 바로 이 곳 황금지대에서 내몰린 황제헌원은 양자강
유역을 떠돌다 섬서성 오지로 쫓겨들어가 죽은 것이 분명하다.
黃帝文化遠及南方(황제문화 멀리 남방에까지 미치다)<인민일보>
-新華社杭州2 月19日電(記者愼海雄)我國的歷史敎科書中,一提起5000年前的黃帝文化,指的都是北方黃河
流域文化 其實,黃帝的活動與黃帝文化的范圍決不囿于北方 我國歷史文化博셩碇쯩뵤琬┮譎댈補퇸忽神�, 黃帝
文化的范圍應該包括中國南方一些地區
(아국역사 교과서중 5천년전의 황제문화는 모두 북방황하유역 문화를 가리키는데 기실, 황제의 활동과 황제
문화의 범위는 북방황하 유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국 역사 문화연구자들이 수년간 연구고증해 인정하고
있듯이, 마땅히 중국 남방 일부까지 포함하고 있다)
黃帝被公認爲中華民族的祖先 据史料記載,黃帝號軒轅氏,是我國原始社會部落聯盟的領袖,曾打敗炎帝和蚩
尤,統一了中原, 浙江師范大學敎授洪波等傳家認爲,從史料硏究和實地考證看,南方長江流域也有黃帝活動的
足迹,幷積淀着深層次
(중국민족의 선조로 공인받은 황제(호는 헌원)는 원시사회 부락연맹의 영수로 염제와 치우를 쳐부수고 중원
을 통일했는데, 절강 사범대학 교수 홍파 등 전문가는 사료연구와 실지고증을 통해 남방 양자강 유역이 황제
가 활동한 발자취라 보고 있다)
傳家認爲,根据史料 傳說和實地考察的情況分析,5000年前黃帝曾經在浙江永康的石城山生活過,幷且以石城
山爲中心,足迹遍及浙江的金華山, 仙華山, 仙都山,安徽黃山, 江西廬山 廣東鼎湖山等地,在南中國撒播了華夏
文明的種子
(전문가는 근거사료를 통해 전설과 실지고증의 정황분석을 통해 5천년전의 황제가 일찍이 절강 영강의 석성산
에서 생활했으며 석성산을 중심으로 절강의 금화산, 선화산, 선도산, 안휘 황산, 강서 여산, 광동 정호산 등지
등 남중국에 화하문명의 종자를 두루 뿌리고 족적을 고루 미쳤다고 인정한다)
据民間傳說, 黃帝在與蚩尤的戰爭中, 曾一度失利,原因是蚩尤部落較早掌握了靑銅器,而黃帝使用的仍然是石
器 爲了改變這一不利局面,黃帝派部落成員四處尋覓可以冶煉兵器的礦源,終于在永康發現了寶藏,從此黃帝的
一支在這里扎根
(민간전설에 근거하면, 황제는 치우와의 전쟁중에 일찍이 전술적 잇점를 결정적으로 빼앗겼으니 그 원인은
바로 치우부락은 비교적 일찍이 청동기 문명을 장악했으나 황제는 석기만을 사용한 데 있었다.
이 불리한 국면을 바꾸기 위해 황제부락 구성원은 사방으로 흩어져 병장기를 야련할 광산 자원을 찾았으며,
마침내 영강에 숨겨진 보물들을 발견하여 황제의 한 지파는 이 곳에서 혈연의 뿌리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 구절을 보면 역설적으로 황제헌원이 치우를 잡아죽였다는 기록은 엉터리며 오히려 청동기 무기를 쓴 철기
마병의 치우에게 돌도끼 등으로 무장한 황제의 무리가 대륙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갔음을 여과없이 전하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 안원전 (원문인용:「북경청년보」2002년 2.20 (책임편집)-
용이 조각된 동이옥&가장 오래되고 가장 정교한 동이족 벽옥룡
황제는 양잠(복희를 이어), 배, 수레, 산학(算學) 의술 등을 발명하고, 현존하는 <내경(內徑)> 곧 <황제내경
(黃帝內徑)>은 황제(黃帝)와 기백(崎伯), 뇌공(雷公)이 의학을 토론한 저작이다.
이렇게 이해해 보면 전설 가운데의 복희, 황제는 모두 용의 신화와 함께 연관되어 있으며 염황(炎帝,黃帝)
자손은 한결같이 용의 자손임을 알 수 있다.
(용봉일치) 서량지는 화하의 용과 동이의 봉황이 그 근본은 하나임을 말하고 있다. 뿌리는 동이족의 문명이라
는 것이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신시본기 제3’에 판천 전쟁에서 장수 치우비(蚩尤飛)가 조급하게 공을 세우려다가
불행하게도 전쟁터에서 전사했다고 했다. 서량지는 이 뒤로 염제족과 황제족 사이에 소강상태가 이루어져
황제는 소위 동서방족 융합정책의 부족연맹에 의해 지나족의 정형화 과정인 서이(西夷)에서 서하(西夏), 서하
(西夏)에서 화하(華夏), 화하(華夏)에서 다시 한(漢)족으로 가는 기초를 닦은 것에 대해 ‘중국 신석기 말기에
동서연맹이 성립된 것은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한 바탕은 동이(東夷), 서하(西夏)적 용봉 2원 연맹이었으니 이것이 곧 후일 이하(夷夏)일가의 중국민족
구성과 전통문화 탄생의 원시적 기초다’라고 말하여 동방족의 봉 도등(깃발로고)족과 서방족의 용 도등 족이
용봉도등을 만들어 동서방 공동의 부락맹을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상고문화예술 유산으로부터 용, 봉을 토템휘명으로 삼은 상고 문화족단이 창조한 문화체계 곧, 인류의 본진
(本眞)을 터득했다고 자칭하는 왕대유(王大有)는 「용봉문화원류」에서 이러한 동서방 용봉도등 연맹집단의
종주영수를 전욱이라 말하고 1987년 5월 하남성 복양 서수파 앙소문화 유적지에서 6천년전의 <용호묘>의
주인이 바로 전욱이라 말한다.
서량지는 남근석이 은허의 출토물로 발견된 것을 증거로 해 전욱 때에 이미 남근 숭배사상의 흔적을 볼 수
있으며, 동이족이 전욱 이후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가는 전환기였다고 말한다.
참고로 서량지는 이러한 남근석 신앙은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발상지이자 원시
동이족의 발상지인 패가리호(바이칼호)에서 곧바로 동몽고를 거쳐 은허(殷墟)의 안양(安陽)에 이르러 두루 퍼져
있었다고 보고, 이들 석제 남근석들이 바이칼호 서안의 안가납하(安加拉河:Angara River) 유역의 신석기 시대
장묘에 순장되어 발굴되었다고 말한다.
關於伏羲氏後人姓氏問題,我們只能從圖騰上予以推猜,伏羲氏是以龍為圖騰的,伏羲之後仍有以龍為圖騰的,
炎帝、黃帝、顓頊、帝嚳、堯、舜和蚩尤、共工、祝融、鯀、大禹均以龍身存在,如:
炎帝族以蟜蟲、羊、牛、龍、蛇、龜、鳥為圖騰,而其首領炎帝據《帝王世紀》曰:“有 氏女登,為少典妃,遊華
陽,有神龍首,感女生炎帝”;
黃帝族的圖騰是蟜蟲、電、星、風、雲、熊、羆、貔、貅、貙、虎、狼、豹、雕、鶡、鷹、鳶、鳥、鴻、狗、馬、牛、
羊、豕、龍等、《竹書紀年》曰:黃帝“龍顏”;
顓頊族的圖騰是星、龜、魚、龍、蛇、豕、鳥等,《山海經·大荒西經》說:“顓頊生老童,老童生祝融。”祝融八姓
中有董姓的豢龍氏,巳姓也是龍族,姓中有夔,也是龍族;
帝嚳族的圖騰是蟜蟲、熊、羊、馬、玄鳥、虎、豹、熊、狸、羆、日、月、龍等,其後人堯是龍圖騰;
堯族是龍圖騰,《竹書紀年》曰:“帝堯陶唐氏,母曰慶都,生於維之野,常有黃雲覆其上。及長,觀於山河,
常有龍隨之,一旦龍負圖而至,其文要曰:亦受天佑”,眉八採,鬚髮長七尺二寸,面銳上豐下,足履翼宿,即而
陰風四台,赤龍感之,孕十四月而生堯於丹陵,其狀如圖。”由此觀之,堯為龍圖騰。
舜族是龍圖騰,《竹書紀年》曰:“帝舜有虞氏,母曰握登,見大虹意感而生舜於姚墟。目重瞳子,故名重華,龍顏
大口,黑色身長六尺一寸,舜父母憎舜,使其涂廩,自下焚之,舜服鳥工衣服飛去;又使浚井,自上填之以石,
舜服龍工衣,自旁而出。”說明舜族內有鳥、龍圖騰。
禹的圖騰,母族圖騰是星和薏苡、鯀是玄龜(鱉),夏的祖族中有龍圖騰。
共工的圖騰是蛇,《山海經·大荒西經》說:“共工人面蛇身”。
從圖騰崇拜中,我們可以知道,伏羲是三皇、五帝的共祖,都是龍的傳人。
姓氏是標誌家族系統的稱呼。先秦時期有姓有氏,男的稱氏,女的稱姓,戰國晚期以後,原來的“姓”逐漸泯滅,
漢代的姓,實際是先秦的氏。中國的姓大部分起源古遠,其姓之源也不同,以地為姓,以國為姓,以官名為姓,
以職業為姓,賜姓等等。究其源,均起自伏羲氏,所以,伏羲氏是中華民族的共祖,萬姓之源頭。
http://www.hawh.cn:82/gate/big5/www.hawh.cn/Template/article/display37.jsp?mid=20041231333210
상고 대륙사에 있어 동이 한겨레의 봉황(鳳凰) 토템(圖騰)에 대해 말한다
상고 대륙사에 있어 동이 한겨레의 봉황(鳳凰) 토템(圖騰)에 대해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봉황신앙이 상고시대 동이 제 족의 웅거지인 양자강가에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은 실로 적지 않은 민족사적
가치를 가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서 6경이(사서삼경은 그중에서도 간추려 번역한 것) 동이족의 영적문서였던 것을 공자가 개칠했다는 것은
앞서 말한대로니 다음 글귀의 의미를 이제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卷阿> 편을
보면 “봉황우비(鳳凰于飛), 홰홰기우(翽翽其羽:날개칠 홰)-봉황이 날라 날개를 친다”라는 글귀가 있다.
<대대례(大戴禮) 역본명(易本命)>에 의하면 “날개 짓하는 360 짐승 중에 봉황의 날개가 가장 길다(有羽之虫三
百六十而鳳凰爲之長)” 대륙에 웅거한 동이 제족의 조상은 새(鳥)를 토템 도등(圖騰)으로 정하고 그 중에 봉황
을 숭배하여 봉황을 길조(吉鳥)로 보았다. 이에 대한 글은 서량지의 고증으로 이미 앞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으
므로 생략한다.
남조(南朝)의 송대(宋代)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3마리의 봉황이 남쪽 경성(京城:金陵 지금의 南京으로 손권의
建業.양자강 자락으로 전통적 동이족 터전) 서남각(西南角)에 있는 산 위 한 자리에 당도하니 허다한 새들이
그들을 따라왔다. 훗날 한 사람이 이 곳 산 위 누대에서 수도를 하며 이곳을 “봉황대(鳳凰臺)”라 칭하니 이로
인해 이 산의 이름 또한 “봉황산(鳳凰山)”이 되었다.
당대(唐代) 시인 이백(李白)은 천보(天寶:당현종 연호) 연간에 장안(長安)에서 추방되어 이 곳 남쪽 금릉(金陵)
에서 노닐다가 인구에 회자하는 <登金陵鳳凰臺(등금릉봉황대)>라는 시를 지었다. 다음은 이완근, 이학준의
홈페이지 seelotus.com의 登金陵鳳凰臺(등금릉봉황대) 해석을 인용해 소개한다.
登金陵鳳凰臺(등금릉봉황대)
이백
鳳凰臺上鳳凰遊 봉황대상봉황유
鳳去臺空江自流 봉거대공강자류
吳宮花草埋幽徑 오궁화초매유경
晉代衣冠成古丘 진대의관성고구
三山般落靑天外 삼산반락청천외
二水中分白露州 이수중분백로주
總爲浮雲能蔽日 총위부운능폐일
長安不見使人愁 장안불견사인수
봉황대 위에 봉황이 노닐었다더니,
봉황은 가고 누대도 비고 강물만 흐르네.
오나라 궁궐의 화초는 오솔길을 뒤덮고,
진나라 귀인은 옛언덕의 무덤이 되었구나.
삼산은 청천 밖으로 반쯤 걸렸고,
이수는 백로주로 가운데로 나뉘었네.
이제 모든 것은 뜬구름이 해를 가렸으니,
장안은 보이지 않고 사람을 근심케 한다.
요점 정리
형식 : 칠언율시
주제 : 어지러운 국가의 장래를 근심함
내용 연구
금릉 : 지금 강소성의 남경
봉황대 : 육조의 송대에 남경성 서남쪽 산에 아름다운 새들이 많이 와 깃들여, 그때 사람들이 봉황이라
부르고, 이곳에 높이 대를 쌓아 올려 '봉황대'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삼산 : 남경 서남에 있는 산
부운 : 뜬구름으로 천자의 총명을 어둡게 하는 간신들을 암유한 것으로 해는 천자의 상징이다.
강자류 : 강물이 저절로 흐른다.
매유경 : 그윽한 오솔길을 뒤덮다.
성고구 : 옛언덕의 무덤을 이루다.
부운능폐일 : 뜬 구름(간신)이 해(임금)를 가리다.
사인수 : 사람으로 하여금 근심케 하다.
이해와 감상 :어지러운 국가의 장래를 근심하는 작품으로 작품에 나라를 염려하는 우국의 정신이 담겨 있다.
-다음 이백에 대한 설명은 hanja.net 자료다.
▶ 李白 : (701-762) 盛唐의 詩人. 字는 太白, 號는 靑蓮 또 스스로 酒仙翁이라했다. 中宗 長安 元年(701, 신라
효소왕 10년) 사천성에서 났다. 10살에 벌써 詩書에 통하고 百家書를 탐독했다. 고향에서 소년시대를 보내고, 뒤에
각지로 방랑, 襄州 漢水로부터 洞庭湖로, 다시 長江으로 내려가 金陵을 거쳐 楊州로 가 호방한 생활을 하고, 35살때에는
太原에 놀고, 산동성 任城에서 孔巢文·韓 準·裵 政·張淑明《 沔등과 만나, 이른바 竹溪六逸의 교유를 맺고, 742년 42살
때 翰林院에 들어갔다. 시와 술로 명성이 높았으나, 결국 술이 원인이 되어 744년에 실각, 陳留에 이르러 道士가 되고,
8578년에 江南에서 玄宗의 아들 永王의 모반에 가담한 죄로 옥에 갇혔다가 이듬해 夜郞에 유배되어 가다가 도중에서
풀렸다. 代宗이 즉위하자 拾遺에 배명, 11월에 當塗에서 62살로 죽었다.
李 白은 自然兒였다. 喜悲哀歡을 그대로 노래에 옮겨, 그의 작품은 한껏 자유분방하여 天衣無縫의 神品이라고 하거니와,
당시 그와 아울러 일컬은 杜 甫가 새로운 詩風을 일으킨 것과는 달리, 李 白은 漢魏 六朝이래의 詩風을 集大成했다.
모랄에 민감하고 정치에 관심을 보인 杜 甫와는 달리, 현실을 떠난 감정의 소유자였다. 그는 당나라 문화의 爛熟期에
生을 받아, 그 퇴폐적 기풍에 젖은데다가 불우했기 때문에 술과 여자에 憂愁를 잊으려 했다. 詩文集 <李太白集> 30권이
있다.
▶ 登金陵鳳凰臺 : 금릉의 봉황대에 올라, 金陵은 지금의 南京, 長江 絶景을 끼고 있는 데다 江山이 秀麗하여, 三國時代
의 吳, 六朝時代의 晉·宋·齊·梁·陳 모두가 이곳에 都邑을 두고 '建業'이라 칭하였다. 鳳凰臺는 南京 西南에 있다. 六朝時
代의 宋의 元嘉十六年(439년), 五色의 깃을 가져 孔雀처럼 아름다운 새가 날아와서 群舞를 추었다. 그것을 본 當時의
사람들이 이것은 鳳凰 靈鳥임에 틀림없을 거라 생각하고, 그 자리의 산꼭대기에 記念을 위하여 臺를 쌓고 鳳凰臺라고
이름하였다.
이 시는 宮廷으로부터 追放된지 얼마 안되어 不運의 유랑을 하다가 지은 작품으로 본다. 흔히 崔顥(최호: ?∼754)의
「黃鶴樓」詩體를 模倣하여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臺空 : 봉황대에는 지금 아무 것도 없고 텅비어 적막감만 감돌 뿐이다.
▶ 江 : 揚子江, 一名 長江이라고도 함.
▶ 自流 : 예나 다름없이 自然대로 흐르고 있음.
▶ 吳宮 ; 三國時代 吳의 孫權이 세운 宮殿.
▶ 埋幽徑 : 幽徑은 사람이 다니지않는 호젓한 작은 길, 사람이 찾아오지않아 궁전의 작은 길까지도 花草가 덮고 있다
는 뜻이다.
▶ 晉代衣冠 : 晉은 東晉(동진)으로 金陵에 都邑하였다. 衣冠은 조정에 나갈 때 입던 예복으로 여기서는 그것을 着用
한 官吏 혹은 貴人들을 말한다.
▶ 成古丘 : 화려한 衣冠을 입던 高官들도 지금은 죽어서 옛무덤을 이루었음. 찬란한 과거가 모두 허무하다는 감회를
표현한 것이다.
▶ 三山 ; 金陵의 서남쪽에 솟아 있는 산으로 揚子江을 굽어보고, 세 개의 봉우리가 南北으로 이어져 있다.
▶ 半落 : 반은 구름 속에 잠겨 보이지않고, 반만 하늘 저쪽에 떨어진 듯이 보임. 金陵에서 바라보면 희미하여 윤곽이
똑똑하지 못한데다 흰 구름이 산허리에 감돌아치면 三山이 마치 땅에 우뚝 솟은 산이 아니라 하늘 공중에
둥둥 떠있는 봉우리로 보인다고 했다.
▶ 二水中分白鷺洲 : 금릉을 흐르고 있는 秦水와 淮水(회수), 揚子江이 금릉의 市外에서 두 줄기로 分流되어 城內로
들어오고, 다른 하나는 성밖을 돌아 함께 하나의 섬(白鷺洲)을 끼고 흐른다. 秦淮는 다시 합쳐져 揚子江
으로 들어간다. 본래 한 줄기의 강이 섬에 依하여 分流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中分이라고 한 것이다.
▶ 總爲浮雲能蔽日 : 總은 모두, 어쨌든, 사악한 무리들이 임금(日)의 총명함을 흐리게 하고 있음. 浮雲은 조정의 권신
들인 李林甫(이림보), 楊國忠(양국충), 高力士(고력사), 楊貴妃(양귀비) 등을 가리킨다.
▶ 長安不見使人愁 : 장안이 보이지않아 사람으로 하여금 시름만 솟아나게 한다. 人은 작자 자신을 나타낸다. 長安에
대한 未練의 情을 은근히 나타내고 있다.
參考 : 李林甫는 唐玄宗 때의 宰相으로서 웃음 속에 칼을 품었다는 말로 당시 사람들이 그의 됨됨이를 평가했으니
그야말로 그는 음험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다. 이백은 친구의 추천으로 皇宮에 들어온 후 滿朝百官이 李林甫 앞에서
서리맞은 호박잎처럼 풀이 죽어 꼼짝 못하는 꼴을 보고 한 번 李林甫를 혼내주리라 작정했다.
사실 그 때 이백은 유명무실한 翰林(한림)에 불과했다. 이백이 李林甫와 통성명할 때 자기는 "무지개를 낚싯줄로 삼고
웃음 속에 칼을 품은 자를 미끼로 삼아 바다거북을 잡는 신선"이라고 하자 李林甫가 혼비백산했다는 일화가 있다.
일전에 이백은 권고에 못 이겨 明經科(명경과)에 참가한 일이 있다. 일필휘지하여 답안지를 제일 먼저 바쳤으나 당시
시험관으로 나왔던 楊國忠과 高力士가 "너따위는 남의 먹이나 갈아주고 신이나 벗겨 줄 심부름 구실이나 하겠다"면서
빌미를 잡아 내쫓는 바람에 복시에 참가할 자격도 없이 낙방되고 말았다. 후에 이백이 입궁하여 翰林供奉이 된 후 현종
을 대신해 國書를 쓸 때 술에 취한 것을 빙자하여 楊國忠에게 먹을 갈게 했다.- (이상hanja.net 자료)
풍도(豊都) 성(城)의 뒤 장강(長江:양자강) 중간에는 작은 도서(島嶼)들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봉미파
(鳳尾巴)” 도(島)라 부른다. 봉미파(鳳尾巴)는 풍도(豊都) 성(城)과 더불어 아득히 서로 바라보고 있어 서로 간에
광채를 발한다. 장강(長江:양자강)의 홍수는 봉미파(鳳尾巴)를 범하지 않는데, 전설에 의하면, 봉미파(鳳尾巴)
가 수면위에 떠 있어서 물이 불어나면 섬도 높아진다고 한다.
장강 유역의 어민과 뱃사공은 특별히 뱀을 숭배하여, 봉황이 상서롭고 길하여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장강 양안(兩岸)에 있는 어민과 뱃사공 사이에는 봉황과 봉미파(鳳尾巴)에 대한 기이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평도산(平都山) 기슭 아래 왕(王)씨 성(姓)을 가진 장가인(庄稼人)의 집이 있었는데,
부모가 돌아가시자 단지 남은 형제 둘이 서로 의지해 살고 있었다. 여름철 어느 날, 둘째 왕소이(王小二)가
나무를 하러 산에 올랐는데 홀연히 와와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 그가 가까이 달려 가 보니 수많은 갈가마귀
들이 아주 작은 봉(鳳)을 쪼아대고 있었다.
그가 갈가마귀 떼에게 달려가 몸 전체 비늘이 상한 어린 봉(鳳)을 세워 일으키니 마음이 심히 아팠다.
그는 약초를 바르고 아랫도리 옷깃을 찢� 잘 감싸준 뒤 숲 속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어린 봉(鳳)은 단지 그를 따라 올 뿐 쫓아내도 가지 않았다. 어찌하는 수 없이 왕소이(王小二)는 어린
봉(鳳)을 데리고 집으로 와 대바구니에 넣어 먹이를 주며 기르려 했다.
눈깜짝 할 새에 일년이 지나자, 어린 봉(鳳)은 엄청나게 커져서 대 바구니에서 자랄 수 없어 그는 보다 큰
대나무 광주리로 바꾸어 주었다. 다시 1년이 깜짝할 새 지나 어린 봉(鳳)은 더욱 엄청나게 자라서 대나무 광주리
에서 자랄 수 없게 되었으므로 왕소이(王小二)는 난처해 하여 봉(鳳)에게 말했다. “나의 친한 친구야, 이제 너는
장대해졌구나. 나의 작은 띠집(茅屋)으로는 너를 살게 하기가 어렵구나. 큰 산이 바야흐로 네가 진정으로 살 곳
이란다.” 소봉(小鳳)은 머리를 끄덕였다. 왕소이(王小二)는 소봉(小鳳)을 숲 속에 풀어 주었다.
또 몇 년이 지났다. 소봉은 더욱 커져서 장중하고 아름다웠으므로 숲 속에서 수많은 새들이 추천해 새들의 왕이
되었다. 산에서 나무하는 나뭇꾼도 그를 아주 공경하고 귀중히 했다. 하루는 풍도현(豊都縣) 관리가 병이 들어
의원을 청해 진료를 받았는데, 허다한 약을 복용해도 모두 효험이 없었다.
의원이 말하기를 “이 병은 봉(鳳)의 쓸개(膽)을 먹어야 가까스로 호전될 수 있다” 하는지라. 현관(縣官)은 ‘누가
능히 봉(鳳)의 쓸개를 얻어오는 자 있으면 은 백냥의 상을 내린다’고 고시문을 붙였다.
현아(懸衙) 심부름꾼인 왕소이(王小二)의 형 왕노대(王老大)는 이 사실을 알고 기뻐서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여
일찍이 소봉(小鳳)을 길렀던 동생에게 달려가면 봉의 쓸개를 가지고 갈 방법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왕소이
의 띠집(茅草房)에 도착하여 동생에게 하릴없이 가련한 말을 했다.
“소봉(小鳳)은 너의 친한 친구다. 내일 너는 그에게 가서 쓸개 덩이 하나를 가지고 오너라.”
왕소이는 한편으로는 형이 무서워 단지 그러마고 대답했다. 이튿날, 그는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산에 올라
소봉(小鳳)을 만났다. 
그는 정에 이끌려 차마 말하기 어려워 머리만 숙인채 말을 하지 못했다.
“ 은인이여, 그대는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나는 항상 당신을 돕겠습니다.”
왕소이(王小二)는 이곳에 온 뜻을 말하니, 소봉(小鳳)은 강개(慷慨)하여 말하기를, “나의 쓸개를 취해 가지십
시오” “네 몸을 베는 것은 내 마음이 아파, 차마 내 손으로는 못하겠다.” “그리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다시 몸을 펼 수 있습니다.” 그는 땅위에 누워 왕소이로 하여금 쾌히 손을 움직이라 재촉했다.
왕소이(王小二)는 담이 떨리고 마음이 슬픈 채 한 움큼의 봉담(鳳膽)을 떼어 형에게 주었다. 현관(縣官)이 봉담
(鳳膽)을 먹자, 과연 병세가 호전되었다. 왕노대(王老大)는 은 백 냥을 상으로 받았다. 며칠이 지나, 현관(縣官)
부인이 또 병이 들었는데, 허다한 약을 모두 들었으나 모두 효험을 보지 못했다. 의원이 말하기를, “이 병은
오직 봉담(鳳膽)을 먹어야만 비로소 나을 수 있다.”
현관(縣官)은 ‘누가 능히 봉(鳳)의 쓸개를 얻어오는 자 있으면 은 천 냥의 상을 내린다’고 고시문을 붙였다.
왕노대(王老大)가 돈벌이를 할까 하여 또 왕소이를 찾아갔다. “동생, 너는 우리 형제 정분을 생각해 내일 다시
소봉(小鳳)에게 가서 봉담 한 덩어리를 얻어와!”
“형, 형은 소봉(小鳳)에게서 얻을 만큼 넉넉히 얻었습니다. 그는 방금 한 덩어리의 담을 도려내어 지금 앓고
있습니다.‘동생, 너는 수족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이번에도 다시금 바삐 나를 도와주게.” 왕노대(王老大)는
길에서 동생의 옷소매를 끌며 말했다. 소봉(小鳳)은 왕소이(王小二)가 온 것을 보고 열정적으로 환영하러
나와서 그 둘의 표정을 보고 추측해 말하기를, “은인, 당신은 나의 담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까?”
왕소이(王小二)는 입을 열지 못하자, 왕노대가 급히 서둘러 말했다. “소봉, 나의 동생이 너를 구해주지 않았나.”
소봉은 머리를 굽신거렸다. “현관(縣官)이 명령을 내려 그로 하여금 봉담을 얻어오라 했는데 만일, 얻어가지
못하면....” 어떻게 된다구요?” “그의 해골을 자를 것이다” 소봉은 자리에 누우며 말했다. “청컨대, 배를 가르십
시오” 왕노대(王老大)가 허리춤에서 날카로운 칼을 꺼내 봉의 배를 자르고 한 개의 큰 봉담을 얻어 현아(縣衙)
로 돌아와, 현관(縣官) 부인의 병을 치료하여 천 냥의 은(銀)을 상으로 받았다.
며칠이 지났다. 현관(縣官)의 딸이 병이 나 약을 먹어도 효험이 없어 의원이 또 말하기를, “이 병은 오직 봉담을
먹어야 가까스로 고칠 수 있다”
현관(縣官)은 ‘누가 능히 봉(鳳)의 쓸개를 얻어오는 자 있으면, 그에게 짝을 맺어 혼인을 시키겠다’고 고시문을
붙였다. 왕노대(王老大)가 고시문을 높이 들고 일심으로 딸과 혼인하고자 했다. 그는 왕소이가 딸을 빼앗아
갈까봐 두려워하여 마침내 혼자 산에 올랐다.
소봉이 왕노대(王老大)가 오는 것을 보고 예를 갖추어 맞이하여 말하기를, “나의 은인은 왜 오지 않았습니까?”
“그는 지금 병이 났다” “무슨 병?” “봉담(鳳膽)을 먹고자 하는 병” “다른 말로 그는 봉담 곧 봉간(鳳肝)을 먹어야
하는데, 봉심(鳳心)은 나도 그에게 제공했다.”고 말하며 소봉은 급망(急忙)하게 하산했다. 왕노대는 그에게
“너는 따로 가라”하므로, “왜?” “너희 둘은 좋은 친구인데, 그가 네 신체의 일부를 어떻게 먹겠는가”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내가 잘라 갖고 가서 먹이면 되지” “좋아”
왕소이(王小二)는 현관(縣官)이 봉담(鳳膽)을 필요로 한다는 고시문을 펼치는 것을 보고 형이 또 소봉(小鳳)
에게 음모의 손을 뻗친다고 생각, 급히 산위로 쫓아 올라갔다. 그가 막 산에 오르자 형이 바로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들고 봉담을 자르려는 순간이었다. 급히 그 앞으로 달려가 그의 손에 있는 칼을 빼앗았다.
왕노대(王老大)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말하기를 : “너는 무얼 하려고 하느냐?” 너의 이러한 만족하지 않는
탐심을 가진 집안가족이여, 나는 소봉(小鳳)에게 음모를 꾸미는 너의 계획를 따르지 않는다.” “당신은 병에
걸리지 않았습니까?” 소봉(小鳳)은 기어와서 왕소이(王小二)에게 물었다. “그의 얼토당토 않는 말은 그가 너의
쓸개를 떼어가 현관(縣官)의 딸과 노파와 바꾸려는 것이다”
소봉(小鳳)은 몇 번 속은 경험이 있으므로 던져 왕노대를 미파(尾巴) 강물 속에 버려 왜왜어(娃娃魚) 먹이로
만들었다. 현관(縣官)은 왕소이(王小二)가 왕노대(王老大)로 하여 봉의 쓸개를 얻지 못하게 저지했음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를 잡아오게 했다. 소봉(小鳳)은 왕소이(王小二)가 중과부적임을 보고 황망히 짐을 싣고 물가에
날아 도착했다.
손을 내저어 강변에 어지러이 화살을 쏘아대며, 겨우 미파(尾巴)를 벗어나 왕소이(王小二)를 미파(尾巴) 위에
안돈(安頓)케 하고는, 해변으로 날아가 거대한 부리로 쪼아대니, 수하들이 황망히 도망갔다. 이로부터 양자강
(長江 중간에는 봉미파도(鳳尾巴島)가 출현하게 되었고, 왕소이(王小二)는 그 위에 안거(安居)하여 편안하고
즐겁게 살았다.
따라서, 장강 유역의 뱃사공과 어민은 배가 봉미파도를 지날 때면, 서로 주목해서 바라보고, 은혜를 알고
반드시 보은한다는 지은필보(知恩必報)의 소봉황(小鳳凰)을 무한히 숭배하는 공경의 뜻이 내심으로부터 용출
한다.
지금도 운남성은 동이족의 후예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그런데 운남성(云南省) 이원현(洱源縣)의 백족(白族:)은
금봉황(金鳳凰)을 숭배하여, 매년 조조산(鳥弔山)에서 백조회(百鳥會)를 거행한다. 그들에게는 금봉황(金鳳凰)
을 숭배한다는 아름다운 일 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아주 오래 전에 이원현(洱源縣) 풍습패(風習壩:방죽패) 대토사(大土司) 하안왕(何顔旺)의
노예 가운데, 춘생(春生)이라 불리는 일개 일개 백족(白族)청년과 계화(桂花)라 하는 동 백족 또래 처녀가 있었
는데, 하(何) 토사(土司) 집안에 함께 오랫동안 살다보니 서로 간에 정이 들었다.
양춘 3월의 맑은 어느 하루, 춘생(春生)은 말을 달리고 계화(桂花)는 양(羊)을 방목하며 천마산(天馬山)에 도착
해, 두 사람은 서로 쉬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노랫가락 소리는 천마산 공중에 쩌릉쩌릉 울려퍼지니 돌연
백조(百鳥)가 운집해 즐겁게 춤을 추니, 마치 작조(雀鳥)의 세계로 변한 것을 방불케 했다.
이로부터, 춘생(春生)과 계화(桂花) 두 사람의 정분이 투합되어 마음과 마음으로 굳게 언약을 했으나, 앞일을
누가 생각했으랴, 그 해 중추가절 늦은 밤, 하(何) 토사(土司)는 술에 대취해 홀로 뒤에 있는 화원(花園)으로
나와 방금 마굿간에 도착해 계화(桂花)를 보고 한 손에 그녀를 잡아 안으려 했으며 계화(桂花)는 크게 비명을
질렀다.
이 때, 말에게 밤참의 풀을 먹이고 있던 춘생(春生)이 계화(桂花)가 구원의 비명 소리를 듣고 뛰쳐나가니 바로
하토사(何土司)임을 일견에 알아보고 주먹으로 때려눕혔다. 하토사(何土司)는 갑자기 허리춤에서 단도를 뽑
더니 춘생(春生)을 향해 휘두름에 춘생(春生)은 전광석화같이 한 쪽 발을 날리니, 하토사는 일순간에 나동
그라지며 꽈당하는 소리만 남겼으며, 칼은 계화의 발밑에 떨어졌다.
계화(桂花)는 아침 달빛을 빌어 후문으로 뛰어가려고 막 후문을 나서는데, 하토사의 관리인(大管家) 흑필마
(黑必摩)가 토사병(土司兵)을 데리고 쫓아왔다. 8월 15일의 밝은 달은 분외로 둥글고 밝았다.
춘생(春生)과 계화(桂花)는 앞에서 뛰어가고, 이를 쫓는 추격병은 뒤에서 분명히 볼 수 있었으니, 눈으로 보면
곧 잡힐 형국이었다.
이 때 홀연히 거대한 작조(雀鳥)들이 나타나 빽빽이 시야를 가리고 달빛을 차단하는지라, 춘생(春生)과 계화
(桂花)는 추격병을 따돌리고 천마산(天馬山)으로 달아났다.
이튿날, 추격병들이 천마산으로 올라옴에, 춘생(春生)과 계화(桂花)는 돌로 싸우고 나무를 잘라 치며 싸웠으나
필경 중과부적이어서 점점 산 정상에서 밀려나 한 조각 송림이 무성한 숲 속으로 쫓겨가게 되었다. 송림 속의
길은 미끄럽고 지름길은 어두웠으며, 기암괴석이 가파르고 깊숙해 음기가 가득했다.
추격병은 대낮까지 지키고 있다가 다시 춘생(春生)과 계화(桂花)를 찾았다. 하토사(何土司)는 불을 질러 산을
태우라고 명령을 내렸다. 불길은 점점 커져 울창한 송림은 급기야 불바다로 변했다. 춘생(春生)과 계화(桂花)
는 불길이 더욱 거세져 불에 타죽을 것을 목도하고, 거칠고 거대하게 자란 높은 소나무 위로 기어 올라 거센
불길을 물리치는 노래를 드높이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홀연히 하늘가에 일대 작조군(雀鳥群)이 나타나 하늘 가득 어지러이 날더니, 마침내 해를 가리고 5가지
색채가 어지러이 빛났다. 그들은 우거진 산(蒼山) 18 계곡의 물을 머금고, 이해(洱海:河南省 발원의 강)의 물을
머금고, 자벽호(茈碧湖:지치,패랭이 자)의 물을 머금고, 천 만 방울의 물을 불타는 송림 숲에 뿌리니, 바야흐로
맹렬한 불길이 박멸(撲滅)되어 춘생(春生)과 계화(桂花)를 구출하려 는 중이었다.
그러나, 불붙은 저 거대한 소나무에는 미치지 못하는데다, 바람은 더욱 더 긴해지면서 바람은 불길을 더욱 부추
기니, 불은 바람의 위세를 이용해 곧 맹렬한 화염이 하늘을 찌르는 소나무를 집어삼킬 듯 하며 나무가 쪼개지고
서로 부딪치는 어지러운 소리가 들렸다.춘생(春生)과 계화(桂花)의 노랫 소리도 사라져 갔다.
이때, 저 한 편의 불바다 가운데, 거대한 소나무 위에서 금(金) 봉황(鳳凰) 한 마리가 화염 속에서 뛰쳐나오더니
하늘로 솟구쳐 올라 천마산(天馬山) 후면에서 멀지 않은 고산(高山) 한 자리에 날개를 펼치고 날아 앉았다.
이로부터, 이 금봉황이 자리 잡고 앉은 고산(高山) 위에 그들은 자유자재로 1,2,3년... 행복하게 살다가 종내에는
어느 해 가을, 고산(高山) 이 자리에서 죽었다. 백조(百鳥)들은 무성한 꽃잎과 녹엽을 채집해 그들의 시체를 덮어
매장했으며, 그들이 편안히 죽은 상공에에서는 수많은 새들이 무리를 지어 슬피 울고, 하늘을 빙빙 선회했다,
백족인(白族人)은 이 고산(高山) 자락을 조조산(鳥弔山)이라 부르고, 백조(百鳥)가 춘생(春生)과 계화(桂花)를
애도한 날을 “백조회(百鳥會)”라 부른다.
임혜상은 양자강 유역의 요족(瑤族)과 묘족(苗族)은 동이족이라 단언하고 이들은 본래 하나이므로 묘요족
(苗瑤族)이라 결론짓는다. 『南齊書 顧歡傳 夷夏論』을 보면 “鳥王獸長 往往是佛, 无究世界 聖人代興-새를
짐승중의 으뜸인 부처로 여겼으니, 동이족의 나라는 이상세계로 성인이 대를 이어 흥성했다 ”고 나온다.
*낙빈기가 추적하는 문화인류학 속에는 항상 태양신이 들어있다. 여영의 글자인 금문 언(방 속에日아래女))은
도랑 언이지만 금문에서는 기러기( ), 큰 새 안(雁)으로 하나라로 가면 제비 연(燕)으로 격하되고 주나라로
가면 동이족의 봉황마저 제비 을( )로 격하되었다고 말한다.
*전설 가운데의 복희, 황제는 모두 용의 신화와 함께 연관되어 있으며 염황(炎帝,黃帝) 자손은 한결같이 용의
자손임을 알 수 있다.(용봉일치) 서량지는 화하의 용과 동이의 봉황이 그 근본은 하나임을 말하고 있다.
뿌리는 동이족의 문명이라는 것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에 노(魯)나라 임금인 소공(昭公)이 소호 임금 때의 관직에 대해 물으니 이웃 산동성
남부 해안 담국( 國)의 임금 담자( 子)가 소호는 자신의 조상이므로 잘 알고 있다며 조(鳥) 도등(도등:상징
휘장)으로 이루어진 관직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러한 문답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은
공자는 담자를 찾아보고 옛날 일들에 관해 논한 다음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중국에 옛 법이 없어져도 이(夷)
의 나라에는 그대로 있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 말이 옳다.' 라 했다. 「논어」 공야장(公冶長 章)에서 도불행
(道不行)이라 승부부우해(乘 于海)하리니'라 하여 도가 행해지지 않아 뗏목을 타고 동이족의 나라로 항해
하고 싶다 한 그였고, 「논어」 자한(子罕 章)에서 자욕거구이(子慾居九夷)라 하여 동이족의 나라에서 도를
펴고 싶다했던 그였다.
지나족이 이상세계에만 찾아온다고 말한 봉황이 두렵다고 말한 기록은 역설적이긴 하지만 조 도등의 동방족이
그만큼 무서웠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가령, 「산해경(山海經)」<대황서경(大荒西經)>을 보면, 현단(玄丹)산이 있어 5가지 색깔의 새가 있는데
사람의 얼굴에 머리털이 난 인면유발(人面有髮)이라 하고 이곳에 청문, 황오라는 새가 있어 청조, 황조이며
이것들이 모여드는 그 나라는 망한다(其所集者其國亡)고 했다.
* 담자가 말하기를 '우리 선조니까 내가 알고 있다. 옛적에 황제는 구름(雲)으로 관명을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백관(百官)과 사장(師長)을 모두 구름으로 이름지었고 염제씨는 불로 본을 삼았다.
그러므로 백관을 화(火)로 이름지었고, 공공(共工)씨는 물(水)로 기본을 삼았으므로 백관을 수(水) 자로 이름
지었고, 태호씨는 용(龍)으로 기틀을 잡았으므로 백관을 용자로 이름하였다. 우리 고조 소호지(少 摯)는 즉위
할 때 마침 봉조(鳳鳥)가 날아왔으므로 새(鳥)에 기틀을 두어 새로써 백관 사장의 이름을 붙였다....봉조(鳳鳥)
씨는 봉황이 천시를 알므로 역정(歷正)의 관명을 삼은 것이고, 현조씨(玄鳥) 씨는 제비가 춘분에 왔다가 추분에
감으로 이분(二分)을 관장하는 관명으로 삼은 것이다.
* 「역림(易林)」에 말하기를 "황제가 용을 부리고 봉에 올라타니 동쪽으로 태산에 올라 남쪽으로 제와 노에
순유하니 나라 전체가 함께 기뻐했다(駕龍乘鳳 東上太山 南遊齊魯 邦國咸喜)"고 했다.
서량지는 이 말은 용봉 이원적 연맹인 동이, 서하 연맹이 상서로움을 가져다 주어(龍鳳呈祥) 나라전체(邦國)가
함께 즐거워했으며 후일 이하일가가 일체화되어 중국민족 구성에 있어 정통문화 탄생의 원시기초라 말하고
있다.(後來東西一體 夷夏一家 中國民族構成 正統文化誕生的原始基礎)
이러한 중국인의 역사관으로 보면 평화를 선사한 동이족 봉황이 상서롭다 한 것과 봉황이 태평성대에만 등장
한다 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또한 동이 족에서 가지치고 나아간 당시의 서하(西夏) 족과 지금의 지나족의 방계
역사를 알 수 있다.
*지나족의 뿌리가 동이 한민족에 있다 함은 수없이 말 한 바 있거니와 「시경」<상송(商頌)> 현조(玄鳥)편을
보면 보다 더 극명하게 나타난다. '하늘이 제비에게 명하시어 내려가 은의 조상 낳게 하시와(天命玄鳥 降而生
商) 넓은 은 땅에 살게 하시다.
탕왕에 이르니 옛 임검(단제)께서는 사방 넓은 곳 영유케 하사 모든 임금에 내리신 분부 9주의 주인으로 받들
라시다(宅殷土芒芒 古帝命武湯 正域彼四方 方命厥后 奄有九州)'
고신은 은(상)나라를 연 탕 임금의 14대조 시조 설(契)의 아버지이다. 설(契)의 모친 간적(簡狄)은 동이족의
난생신화의 첫 출발점인데, 그녀는 바로 고신씨의 차비로 현조(玄鳥)가 떨어뜨린 알을 먹고 설을 낳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앞서 서량지가 고주몽의 난생설화와 축출 그리고 고신씨의 후예를 칭한 것이 바로 동이족
의 정치 사회적 난생설화의 분위기를 설명해 준다 했듯이 막상 현조씨는 조(鳥) 도등(봉황, 용같은 깃발상징)
의 동방족 임금 소호의 사관이었음을 이해한다면 난생신화로 얽혀진 진시황의 진나라도 우리 동방족이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소호금천씨의 후예 휴도(休屠)왕의 아들로 한무제 때 표기장군을 지낸 김 일제의 원손(遠孫)
김 알지로부터 시작되는 신라 김씨의 유래와 또한 한(漢)을 멸망시키고 신(新) 제국을 세운 김 일제의 증손
왕망(王莽)이 후한 광무제에게 망한(AD25) 17년 뒤 김해 6가야를 접수한 알 사건을 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조 도등(圖騰:깃발등 휘장 상징)인 봉 도등을 가야왕관과 신라왕관의 상징휘장으로 삼은 것은 바로 소호금천씨
가 봉으로 도등을 삼았기 때문이다.
서량지는 소호가 왕위에 오르니 봉황이 와 춤을 추어 새를 상징으로 하게 되었다는 담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88년 경남합천에서 발굴된 금동제 환두대도에 새겨진 용봉무늬는 동서방족의 용봉도등적 부락맹의 영향이
한반도 남쪽까지 미친 것이라 해서 한국의 상고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고고학계의 주장이 제기된 바 있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김수로의 난생설화는 대륙 내에 있었던 조(鳥) 도등의 동방족이 새로이 유입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 요순의 도는 황제 헌원의 도가 그 연원이고 황제헌원의 도는 배달국의 도를 전해 받은 것이다.
「서전」에 등장하는 홍범 9주 자체가 창수 사자인 2대 부루 단군이 단군왕검의 명으로 도산의 구려 회의에서
전수한 5행 치수의 법인 금간옥첩이었고, 북면이조(北面而朝)하고 사근동후(肆覲東后)했다는 말로 미루어
사마천이 이상세계로 설정해 놓은 요순시절의 초기 지나족은 사실상 동이 제국의 변두리 소국-제후국에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서전」에 소위 황기천리(皇畿千里)라 표현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천자의 땅은 사방 천리에 불과한
소국인데 「회남자(淮南子)」<본경훈(本經訓)>을 볼 것 같으면 왕자(천자)는 사방 천리인 일기(一畿), 제후는
사방 백리인 일동(一同)에 있으면서 각기 그 근본을 지켜 서로 침범치 아니했다는 구절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회남자(淮南子)」<남명훈(覽冥訓)>을 보면 황제가 스승인 역목(力牧)과 태산계(太山稽)의 도움으로
일월의 운행을 다스리고, 음양의 기운을 헤아리고, 사시의 도를 조절하고, 율력의 수를 바로잡으며, 봉황이 물에
와서 놀고, 기린이 교외에 와서 놀고, 청룡이 멍에를 메고, 천년을 산다는 비황(飛黃)이 우리에 와 엎드릴 정도의
이상세계를 건설했으나 복희씨의 도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하면서 여와씨의 덕을 칭송하는 것을 보면 비록
사마천에 와서 황제가 지나족의 시조로 떠받들어지고 공자의 뒤를 이어 요순의 덕을 칭송했지만 실제로는
동이족의 배달국과 단군조선의 이상적 치세만은 못했던 것이다.
인두사신으로 전해지는 복희, 여와의 신앙형태가 동이 제 족 속에 얼마나 뿌리깊은지 잠시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산해경(山海經)」<해내경>에 "묘민(苗民:동이족)이라는 백성이 있어 이 곳에 인수사신(人首蛇身)의 신이
있는데 키가 수레의 바퀴 통만 하고 좌우에 머리가 있으며 자주색 옷을 입고 털로 된 관을 쓰고 있다.
이를 연유(延維:곽박은 위이(委蛇)라 함)라 하며 임금이 이 신을 잘 접대해 먹이면 천하를 제패하게 된다."고
했다.
그 주석에 곽박이 말하기를 제환공이 큰 늪에 사냥을 나갔다가 이것을 보고 마침내 제후들의 우두머리가 되었
다고 했으며 이 기록은 「장자」에도 보인다."고 했다
(안원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