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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기독교 예술사 고대 기독교 생활예술
hanjy9713
2023.09.07. 16:37조회 0
고대 기독교 생활예술
생활예술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소품으로는 그릇, 촛대, 등잔, 벽에 붙이는 타일, 항아리, 인장, 장신구 등이 있다. 이 분야는 장례 모티브나 교회 예술에 비해 신학적인 깊이나 미학적인 아름다움이 덜하고, 남아 있는 유물도 주목을 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제작 시기 추정이 가장 불확실한 영역에 속한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관심도 덜할 뿐 아니라 체계적인 연구가 가장 부족한 분야에 속한다. 튀니지의 카세리나에서 발굴되어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된 타일은 흙으로 구워 만든 테라코타로 벽이나 천장에 장식용으로 사용하던 타일이다[도판 1-26]. 선이 거친 부조이지만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는 순간을 알아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오른손에 칼을 들고 왼손으로 이삭의 머리를 잡고 내려치려고 한다. 이삭은 무릎을 꿇고 양손을 땅에 짚은 자세로 저항 없이 순종하는 모습이다. 이삭의 아래쪽에는 돌단과 장작이 희미하게 보인다. 오른쪽 윗부분에는 이삭을 대신해서 제물로 바칠 양이 준비되어 있다. 양과 아브라함의 머리 사이에는 몇 개의 손가락이 보인다. 하나님의 손이다. 표현된 주제는 사각형 선으로 테두리가 그어져 있다. 그 위쪽으로 알파가 세 번 씌어 있고 제일 오른쪽에는 작은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알파가 나오면 오메가도 기대하게 되나 오메가가 씌어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이 장식용 타일은 5~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 않다. 이 주제 자체는 3~4세기 초반에 유행하던 구약성경의 일화 가운데 하나이다.
1-26. 아브라함과 이삭
벽이나 천장 장식용 타일, 테라코타, 5-6세기, 튀니지의 카세리나, 파리 루브르 박물관
북아프리카에서는 이런 장식용 타일이 대중적이었던 것 같다. 루브르 박물관에는 예수와 우물가 여인의 대화를 형상화한 또 다른 타일이 있다[도판 1-27]. 튀니지의 하드젭 엘 아이운에서 나온 것으로 테라코타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왼쪽의 여인은 양손으로 우물에서 항아리를 들어 올린다. 오른쪽의 예수는 왼손에 십자가를 들고 오른손으로 손짓을 하며 여인과 대화를 나눈다. 십자가를 들고 있는 예수의 모습은 3~4세기의 예수 상(像)에서 발견할 수 없는 요소이다.
갈라 플라키디아 기념당의 오르페우스적 예수 이미지에서 예수는 왼손에 십자가를 들고 있는데 이는 5세기 초반의 것이다[도판 7-1]. 4세기의 주화에 십자가를 든 황제의 모습이 나오지만, 모자이크나 석관 등 주요 장르에서 십자가는 5세기 이후에만 출현한다. 십자가를 들고 우물가의 여인과 대화하는 예수의 모습은 5세기 혹은 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도판 5-7]. 선은 투박하지만 부드럽고 우아하다. 예수의 머리 뒤에는 후광이 그려져 있으며 옷에 주름을 넣고, 예수와 여인의 머리가 곡선으로 처리되는 등, 보다 섬세하게 묘사되었다.
1-27. 예수와 우물가의 여인
벽이나 천장 장식용 타일, 테라코타, 5-6세기, 하드젭 엘 아이운(튀니지), 파리 루브르 박물관
7-1. 목자 그리스도
5세기 초반, 갈라 플라키디아의 기념당, 라벤나
5-7. 우물가의 여인
막시미아누스의 상아 의자, 546-556년, 라벤나 감독좌 교회 박물관
등잔의 경우 크리스토그램이 새겨진 것들이 다수 발견된다. 도판 1-11의 등잔은 프랑스 남부 가르(Gard) 지방의 제네락(Générac)에 있던 4세기 아틀리에에서 발굴된 것으로 님므의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제네락에서 발견된 이 등잔의 유형은 갈리아 고유의 형태가 아니라 북아프리카 양식을 모방한 것이다.1) 흙을 빚어 상하를 따로 만든 다음 아래위를 붙이고 불에 구워서 만들었다. 제네락의 아틀리에는 기독교적 상징이 들어간 등잔만을 만들지는 않았다. 고객의 수요가 있는 곳에 등잔이 제조되어 공급되었고 4세기에도 아폴론의 모습을 원하는 고객들이 있었으므로 그런 수요를 충족시킬 필요가 있었다. 태양-아폴론의 상반신이 새겨진 등잔도 제네락의 아틀리에에서 발굴된 것이다[도판 1-28]. 생활용품 제작에 있어 종교적인 상징이 걸림돌이 되지는 앉았다.
1-11. 등잔
가르의 제네락(Générac)의 아틀리에, 님므 고고학 박물관
1-28. 아폴론의 모습이 들어간 램프
테라코타, 4세기, 가르의 제네락의 아틀리에, 님므 고고학 박물관
점토로 만든 그릇에도 기독교적 형상이 새겨졌다[도판 1-12]. 이 그릇은 북아프리카의 아틀리에에서 생산된 후 수출되었고 그리스 아티카(Attica) 지방의 아나비소스(Anavyssos)에서 발견되었다. 그리스도는 철학자의 옷인 팔리움(pallium)을 입은 채, 왼손에 십자가를 잡고 오른손을 올린 자세로 말씀을 전한다[도판 1-29]. 위쪽과 좌우에는 꽃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후광이 그리스도의 머리 둘레를 살짝 두르고 있다. 발 아래쪽에 무언가 새겨져 있는데 뱀의 형상이다. 뱀을 밟고 서 있는 그리스도는 복음서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초기 교회의 구약성서 해석의 전형적인 방법이었던 그리스도-유형론적 해석으로 만든 이미지이다. 그리스도-유형론적 해석이란 그리스도를 구약성서 해석의 원리로 삼는 방법을 뜻한다.
다시 말해 구약성서의 본문을 읽으면서 그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맞추어서 해석하는 방법론이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 하나님은 뱀에게 여자의 후손이 그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창세기 3장 15절). 유형론적 해석에 따르면 여자의 후손은 그리스도이고 뱀은 어둠의 세력이다. 뱀이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물지만, 종국에는 그리스도가 뱀의 머리를 밟아 어둠의 세력을 이기고 승리한다. 교부들은 이렇게 창세기 3장 15절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뱀을 밟고 십자가를 들고 서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흑암의 세력에 대해서 승리를 거둔 그리스도의 모습인 것이다. 이 그릇의 주인은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자신의 가정이 악의 세력으로부터 보호받고 승리할 것을 소망했을 것이다.
1-12. 뱀을 밟고 서 있는 그리스도
점토로 만든 접시, 북 아프리카에서 생산되어 아티카의 아나비소스에서 발견됨, 6세기, 아테네 비잔틴 박물관
1-29. 뱀을 밟고 서 있는 그리스도(도판 1-12의 세부)
6세기, 아테네 비잔틴 박물관
머리빗에도 거룩한 이미지가 새겨졌다. 도판 1-30은 알제리의 히포네(Hippone)에서 발견된 것으로 뼈로 만든 빗의 단편이다.2) 보다 대중적인 제품은 나무로 만들어졌고, 가장 고가의 빗은 상아를 재료로 했다. 루브르의 이집트 전시실에는 안티노에(Antinoé)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상아로 된 빗이 있다. 5~6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서커스에서 행해지던 무언극이나 시낭송을 배경으로 한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3) 히포네의 빗은 절반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돋을새김의 주제는 쉽게 판별된다.
사자가 한 마리 누워 있고 그 위에는 천사가 날아오른다. 그 옆에 서 있는 남자는 손을 들고 다가오는 천사를 바라본다. 사자굴 속의 다니엘이다. 사자굴 속에서 기도하는 다니엘은 3~4세기에 큰 성공을 거두었고 본래적으로 장례예술의 전형적인 주제에 속한다. 히포네의 빗은 6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는 이미 장례예술이 결정적으로 쇠퇴하던 때였다. 장례예술은 급속도로 쇠락했지만 그 이미지는 일상생활 속으로 옮겨져서 6세기에도 여전히 존속하였다.
1-30. 머리빗 조각
사자굴 속의 다니엘, 뼈, 6세기, 히포네(알제리), 파리 루브르 박물관
기독교적 이미지로 장식된 생활 속의 물건들은 다양했다. 문 빗장, 주춧돌, 물건함, 항아리, 인장, 거울, 천, 목걸이와 반지 등 장신구, 심지어는 저울추에까지도 십자가 혹은 크리스토그램 등의 이미지가 사용되었다. 도판 1-31은 청동 혹은 납으로 된 저울추이다. 도판 1-32는 테라코타 인장인데 항아리나 그릇 등을 만들면서 표시할 때에 사용되었다. 도판 1-33은 항아리의 아가리 부분인데 크리스토그램 인장이 찍혀 있다. 도판 1-34는 비잔틴식 십자가 모양의 목걸이 장식이다.
수평축 좌우와 수직축 위아래, 그리고 수평과 수직이 교차하는 가운데에 원반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서 8세기 이후의 것이다[도판 1-35]. 다섯 개의 원반이나 그와 유사한 장식의 배치는 9~11세기에 만들어지는 비잔틴 십자가에서 확인된다. 11세기 초에 레오(Leo)라는 이름의 주교가 봉헌한 행렬용 십자가는 수평축의 좌우에 마리아와 세례요한, 수직축의 위아래에 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 가운데에는 그리스도의 상반신을 원반 안에 담아 놓았다.4)
1-31. 저울 추
청동과 납, 6-7세기, 아테네 비잔틴 박물관
1-32. 인장
테라코타, 6-7세기, 아테네 비잔틴 박물관
1-33. 아리의 일부
6-7세기, 아네테 비잔틴 박물관
1-34. 장신구
6-8세기, 아테네 비잔틴 박물관
1-35. 그리스도의 부활
‘부활’의 석관, 4세기 초반, 로마, 로마 피오 크리스티아노 박물관
현재 남아 있는 일상생활 속의 거룩한 이미지들은 주로 고대 기독교 시대의 후반부인 6세기로 추정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런 거룩한 상징은 제네락의 아틀리에에서 출토된 크리스토그램의 등잔이 보여 주듯 이미 4세기부터 광범위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반에 안티오키아 태생으로 콘스탄티노플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미쳤던 요아네스 크리소스토모스(Ioannes Chrysostomos)는 삶의 공간 곳곳에 단순한 기호를 넘어서는 성스러운 상징이 넘쳐흐른다고 설교한 바 있다.
“여러분은 그의 이름뿐 아니라 그의 육적인 생김새도 아주 사랑했습니다. 여러분은 그의 이름을 존중했을 뿐 아니라 그의 모습도 또한 존중했습니다. 실로 많은 사람들이 반지의 표면과 인장과 그릇과 방의 벽과 다른 많은 곳에 그 성스러운 상(像)을 재현했기에, 그들은 그의 거룩한 이름을 들을 뿐 아니라 그의 육체적인 모습을 어디서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위로를 갑절로 받습니다.”5) 여기에서 성화(聖畵)의 대상이 된 것은 360~381년까지 안티오키아(Antiochia)의 감독이었던 멜레티오스(Meletios)이다.
멜레티오스는 경건한 인물로 안티오키아뿐만 아니라 소아시아에서 널리 존경받던 자였다.6) 그가 살던 시대는 교리 논쟁과 교회정치의 혼란으로 동방 교회가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그가 오랜 유배 후에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 이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381년 콘스탄티노플 교회회의를 열었는데, 멜레티오스는 교회회의를 인도하던 중 세상을 떠나게 된다.7) 요아네스의 설교는 멜레티오스가 세상을 떠난 뒤에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추앙했는지 웅변해 준다. 이 설교는 요아네스가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으로 있던 398~404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 한 것이므로 이미 멜레티오스가 세상을 떠난 지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하지만 한 세대 뒤에도 콘스탄티노플의 사람들은 반지, 인장, 그릇, 방의 벽 등 삶의 구석구석에 그의 모습을 그려 놓아 그의 모습을 ‘어디서건’ 볼 수 있었다. 멜레티오스는 문자적인 의미에서 순교자는 아니지만, 정통주의 신앙을 고수하다가 오랜 유배생활을 한 이후에 영광스러운 교회회의의 의장을 맡던 중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이 각별했다. 요아네스의 설교는 4세기 말의 일상생활 속에 거룩한 이미지가 얼마나 깊숙이 들어와 있었는가를 밝혀 준다.
예술을 발생 동기에 따라 분류하는 작업은 등잔에서 무덤을 거쳐 웅장한 교회 모자이크까지 스펙트럼의 폭이 아주 넓어서, 산을 보되 숲을 관찰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약점이 있다. 개별 상징이나 일화, 초상 등 소주제별 연구는 이런 약점을 보완해 준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초상이 어떻게 바뀌어 가며 성부 하나님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크리스토그램은 어떻게 사용되었으며 물고기나 배 등 상징은 언제 나타났는지를 살펴보는 것 등이다.
트리스탕의 연구처럼(Tristan 1996) 고대 문학의 도움을 받아 이미지를 설명해 준다면 각각의 소재에 대해서 보다 깊은 이해를 갖게 될 것이다. 초기 교회에서 중세 때까지 사용되었던 상징과 이미지를 모아서 1885년에 출판했던 트위닝의 저서(Twining 1885)도 여전히 유효하다. 석관(Caillet and Loose 1990), 교회건축(Krautheimer 1986; Mainstone 1997), 카타콤(Nicolai, Bisconti et Mazzoleni 2000) 등 장르별 연구와 프랑스(Atlas 1991)나 로마(Brandenburg 2005), 흑해 주변(Khroushkova 2007) 등에 한정된 지역적 연구 등도 한 주제를 통시적인 관점에서 일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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