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드브루흐의 법철학
제1장 현실과 가치
소여(gegebenheit), 즉 경험의 무형식적 소재 속에는 사실과 가치가 무질서하게 섞여있다. 이러한 현실을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세계가 창조된다.
가치맹목적 태도(wertblindes Verhalten)는 자연과학적 사고의 본질을 이루며 자연의 왕국(Reich der Natur)을 창조한다(존재). 그 반대편의 가치평가적 태도(bewertendes Verhalten)는 가치철학(논리학, 윤리학, 미학)의 본질을 이루며 가치의 왕국(Reich der Werte)를 창조한다(가치).
이 양자의 태도 사이에서 서로를 연결해주는 또 다른 두 가지 태도가 있다. 가치관계적 태도(wertbeziehende Haltung)와 가치초월적 태도(wertüberwindende Haltung)가 그것이다. 가치관계적 태도는 그 자체가 완전한 가치의 실현은 되지 못하지만 가치를 실현하려고 하는 노력이 담겨있는 태도로서, 이러한 의의를 가진 소여는 문화이다(의미). 가치초월적 태도는 종교적 태도로서, 종교는 모든 존재에 대한 궁극적 긍정이며 지양을 통해 가치와 반가치의 대립을 극복한다(본질).
즉, 소여는 존재, 가치, 의미, 본질로 구성되며, 이들의 관계는 ‘자연과 이상의 심연 위에 그들을 결합하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문화라는 다리와, 순간마다 목표에 도달하는 종교라고 하는 날개가 있다’는 문장으로 표현될 수 있다.
법은 인간의 작품이므로 작품의 목적을 무시한 채 가치맹목적으로 고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법에 대한 세 가지의 가능한 고찰이 얻어지는데, 가치관계적 고찰(법을 문화사실로서 고찰하는 것)은 법과학(Rechtswissenschaft)의 본질을, 가치평가적 고찰(법을 문화가치로서, 가치척도로서 고찰하는 것)은 법철학의 본질을, 가치초월적 고찰(법의 본질 또는 무본질성을 고찰하는 것)은 법의 종교철학의 본질을 이룬다.
제2장 법의 가치고찰로서의 법철학
법철학은 ‘바른 법의 이론’(Lehre vom richtigen Recht; 슈탐러), 즉 법에 대한 가치평가적 고찰이다. 법의 가치고찰 방법은 1) 방법이원주의(Methodendualismus)와 2) 상대주의(Relativismus) 라는 두 가지 본질적 특성을 지닌다.
1) 방법이원주의
칸트는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가치있는 것, 바른 것, 있어야 할 것을 연역할 수 없다는 점을 가르쳐 주었다. 당위명제, 가치판단, 평가는 같은 종류의 다른 명제들을 기초로 연역적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가치고찰과 존재고찰은 서로에 대하여 폐쇄적으로 독립되어 있다. 이것이 방법이원론의 본질이다.
이에 대하여, 이념은 소재에 의하여 규정된다는 이념의 소재규정성(die Stoffbestimmtheit der Idee)에 근거하여 소재로부터 이념을, 즉 사물의 본성(die Natur der Sache)으로부터 가치를 끌어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직관의 우연이지 인식 방법은 아니다.
방법이원론은 가치평가가 존재사실에서 유래(verursachen)한다거나, 존재사실에 의해 영향받는다는 점을 인정한다. 방법이원론의 관심은 이러한 존재와 가치의 ‘인과적 관계’가 아닌 ‘논리적 관계’에 있다. 즉, 논리적으로 가치평가는 존재사실 위에 정초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장하는 것이다.
2) 상대주의
당위명제는 다른 당위명제에 의해서만 성립, 증명될 수 있다. 따라서 최후의 당위명제는 입증할 수 없으며 다만 고백할 수 있을 뿐이다. 서로 대립하는 가치관들이나 세계관들을 과학적 일의성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상대주의적 법철학은 궁극적 가치판단에 관해서는 하나의 무지를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으며, 각 개인에게 태도 결정의 가능성 전부를 제시하는데 자기 임무를 한정시키고, 여러 법률관(法律觀)들 사이에서의 선택을 각 개인에게서 빼앗지 못한다. 이러한 상대주의(문제설정주의 Problematizismus, 원근주의 Perspektivismus, 관점주의?)는 궁극적 결정에 대한 과학적 기초의 단념을 의미하며, 태도결정 그 자체의 단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상대주의는 다양한 세계관적 기초를 놓을 수 있으며, 이론이성의 침묵이 곧 실천이성의 가장 강한 호소인 렛싱(Lessing)의 나탄(Nathan)에 가깝게 느껴진다.
라드브루흐, 법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