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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413. [역경의 열매] 최상민 <1-12> 가난한 미싱사 아들이 아이티 최대 발전운영사 일궈
미션스쿨 진학하며 처음으로 복음 접해… 교육의 힘 믿기에 아이티직업학교 세워
최근 한국을 방문한 최상민 ESD 사장이 서울 송파구의 한 호텔에서 아이티직업학교의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아이티 북부 카라콜에 있는 아이티직업학교를 갈 때마다 가슴이 뛴다. 300여명이 재학 중인 이 학교는 컴퓨터 등을 가르치는 데, 첫 졸업생 15명 중 2명이 한국계 의류제조사인 세아상역에 취업했다.
2010년 대지진으로 국토 대부분이 초토화됐던 이땅에 나는 희망의 씨앗을 심고 있다. 아이티가 최빈국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교육밖에 없다. 내가 크리스천이 된 것도, 아이티 전력의 35%를 책임지는 ESD(Enterprise Specialized in Development)를 세울 수 있었던 것도 결국 교육의 힘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1976년 11월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붉은 밭이라 불리던 동네에서 태어났는데, 4살까지 거기에서 살았다. 2년 뒤 남동생이 태어났다. 동네에서 뛰어다니고 산에 올라가 놀던 기억이 훤하다. 한번은 산에 올라갔다가 버려진 짚신을 집에 들고 왔다. “아버지, 산에서 짚신을 주웠어요.” “산에 웬 짚신이 있었을까. 아니, 이건 죽은 사람 장사지낸 짚신이잖아. 아이고 재수 없어라. 빨리 버리지 못해!” 죽은 사람의 짚신을 들고 갔으니 집안에선 난리가 났다.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10번 이상 이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봉제회사 미싱기사였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일했던 봉제회사 생산직원으로 잠깐 근무했다. 파주에 있던 아버지는 남양주에 있던 어머니를 찾아가 구애했다고 한다.
1945년 ‘해방둥이’인 아버지는 5형제 중 장남이었는데, 무교였다. 54년생인 어머니는 불교쪽에 가까웠는데 고생을 많이 한 분이 아니었지만 아버지를 만나 많은 고생을 했다. 아버지는 집안일을 등한시 했다. 약간 과시욕이 있었는데, 그 시절 가부장적인 가장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였던가 싶다. “아들아, 못살더라도 겉옷은 좋은 것을 입어야 한다. 싸구려 옷은 얼마 못 간다.” 옆에 있던 어머니가 거들었다. “아이고, 옷 살 돈이나 주면서 그런 이야기 하세요. 아빠 말 그만 듣고 어서 들어가 공부나 해라.”
아버지는 경제형편이 나아지지 않자 1987년 도미니카공화국의 봉제공장을 찾아 훌쩍 떠났다. 국내에서 활황이었던 봉제산업이 점점 해외로 진출하던 시기다.
아버지는 어찌된 영문인지 3개월 만에 현지에서 직장을 잃으셨다. 그리고 소식이 끊겼다. 어머니는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생활이 팍팍했는지 예전과 달리 많이 예민해지셨다. 아버지는 3년 뒤 연락이 됐고, 그때부턴 매달 1000달러씩 보내주셨다. 어머니가 서울 중랑교 근처 외환은행에서 환전을 했던 기억이 있다.
어렸을 때 이사를 많이 했기 때문에 초등학교 때만 해도 4번 전학을 했다. 처음에는 경기도 남양주 양정초등학교를 다니다가 1년 뒤 미금초등학교로 옮겼다. 서울 우이동에 있던 초등학교로 갔다가 다시 미금초로 돌아왔다.
내가 복음을 접한 것은 남양주 동화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다. 미션스쿨이었는데, 월요일 첫시간 과목이 성경이었다. 학교에선 교회 주보를 꼭 가져오라고 했다. 미금교회라는 곳에 가서 주보를 가져왔다.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생업에 찌든 어머니는 내 성적표를 받을 때마다 매우 흡족해 하셨다.
교회생활에 재미를 붙인 것은 남양주 사릉에 있는 진건교회에 다니면서부터다. 지하 1층에 있는 교회였는데, 내가 살던 도농에서 사릉의 교회로 가려면 165-3번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 [역경의 열매] 최상민 <1> 가난한 미싱사 아들이 아이티 최대 발전운영사 일궈
* [역경의 열매] 최상민 <2> 아버지 따라 이민… 말 안 통해 왕따 신세
* [역경의 열매] 최상민 <3> 美 고교 유학 중 축구선수… "영어 안 되니 부주장 해라"
* [역경의 열매] 최상민 <4> 동양인으로 美 주류사회 벽 느껴 대학 자퇴
* [역경의 열매] 최상민 <5> "무역 좀 가르쳐 주세요" 코트라 찾아가 무보수로 일해
* [역경의 열매] 최상민 <6> 현대重 발전기 판매영업 맡으며 사업 첫발
* [역경의 열매] 최상민 <7> 헌신 시험한 하나님… 세 번의 테스트에 모두 순종
* [역경의 열매] 최상민 <8> 발전용 엔진 폭발… "왜 이런 시련을" 눈물의 기도
* [역경의 열매] 최상민 <9> 오랜 기도 끝 투자 결정한 사업서 큰 성공
* [역경의 열매] 최상민 <10> 발전설비 토목공사 제자리… 뜻밖에 도움의 손길이
* [역경의 열매] 최상민 <11> 호사다마… 영향력 커지자 근거 없는 음해 시달려
* [역경의 열매] 최상민 <12·끝> 고난은 변장된 축복… 학교·교회 설립 꿈 위해 매진
약력=△1976년 경기도 파주 출생 △1993년 도미니카공화국 이민 △미국 뉴욕시립대 회계학과 중퇴 △도미니카공화국 ESD 사장 △한국교회봉사단 아이티직업학교 이사장
***[역경의 열매] 최상민 <2> 아버지 따라 이민… 말 안 통해 왕따 신세
도미니카공화국서 5년 만에 가족 모여… 공부 흥미 잃고 어머니 식당서 일 도와
최상민 ESD 사장이 1993년 도미니카공화국 푸카마이마대 병설고 1학년 재학시절 산토도밍고 집 근처에서 사진을 촬영했다.경기도 남양주시 동화고등학교에 진학해 전교에서 10등 안에 들 정도로 공부에 제법 흥미를 느꼈다. 동화고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92년의 일이다. 도미니카공화국에 있던 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왔다. “상민아, 도미니카공화국으로 한번 건너오거라.” “예? 저 혼자 어떻게 그 먼 곳을 갑니까.” “마침 아빠 회사 직원이 데려다 준다고 한다. 그분과 함께 미국에서 하룻밤을 묵고 넘어오렴.”
제주도도 가본 경험이 없던 나였다. 도미니카공화국까지 1만3500㎞의 여행은 적잖은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비록 환승을 위해 하루 머물렀지만 미국도 신세계였다. ‘이야. 이런 세상이 다 있구나. 그래, 굳이 좁은 한국땅에 있을 필요는 없다.’ 당시는 공부를 열심히 해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고 멋진 군인이 되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도미니카공화국을 다녀온 뒤 어머니를 설득했다. “엄마, 아빠가 계신 도미니카공화국에 가요.” “됐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고생하는 데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 가서 뭐하려고.”
93년 아버지는 한국에 남은 어머니에게 나와 남동생을 데리고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넘어오라고 제안하셨다. “여보, 이곳에 와보니 한국식당이 하나도 없더라고. 한국사람이 세운 봉제공장도 있고 한국인이 1000명이나 되지만 식당이 없어서 된장찌개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무척 많다고.” “아이고. 그 못사는 나라에 가서 뭘 하려고요. 고생은 여기서 한 걸로 족해요.” “여긴 우리 가족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의 땅이야. 도미니카공화국은 미국과 무관세 협정을 맺었기 때문에 봉제 산업의 미래가 있어. 한국은 인건비가 안 맞아 이제 사양 산업이 될 거야. 여보, 당신과 떨어져 산 게 벌써 5년째야. 이젠 가족과 함께 있고 싶어.”
아버지의 간곡한 설득에 어머니는 도미니카공화국행을 결정하셨다. 그해 5월22일 미국행 대한항공에 몸을 실었다. 한번 방문해보긴 했지만 미지의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생각에 두려운 마음과 설레는 감정이 교차했다. 마음이 착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88년 이곳에 건너온 아버지는 유대인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어찌된 일인지 3개월 만에 일을 그만두게 됐다. 한동안 실업상태에 있던 아버지는 미국 한인사업가 밑에서 일하다가 나중엔 공장장까지 지냈다. 하지만 변변한 기반이 없었기에 삶은 팍팍했다.
어머니가 도미니카공화국에 발을 내딛고 처음 하신 일은 수도 산토도밍고에서 식당을 차린 것이었다. 아리랑이라는 간판을 달고 삼겹살과 불고기, 칼국수, 비빔밥 등을 팔았다. 손님이 한국사람으로 제한된 데다 빚을 얻어 식당을 열었기 때문에 돈을 모으는 건 쉽지 않았다.
나는 집에서 가까운 푸카마이마대 병설고등학교 1학년으로 들어갔다. 한반에 30명이 참가한 수업은 오전 7시부터 오후 2시까지 진행됐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2개월간 말없이 지냈다. 거의 왕따였다.
아리랑 식당은 정오에 손님이 붐볐다. 일손이 모자라 집안일을 돕는다는 핑계로 그냥 집으로 왔다. 실은 학교가 재미없어서였다.
어느 날 교복을 입고 음식을 나르는데 한국 손님 한 분이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아니, 젊은 놈이 공부도 안 하고 도대체 뭐하는 거냐!” “사실은 말이 잘 안 통해서요.” “그럴 거면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해라. 인생 허비하지 말고.”
***[역경의 열매] 최상민 <3> 美 고교 유학 중 축구선수… “영어 안 되니 부주장 해라”
토요일엔 한인 교회 청년부와 어울려… 영주권 빨리 받으려 회계학 선택
1995년 미국 수잔웨그너고등학교 재학시절 축구부 코치와 함께 한 최상민 사장.‘그래, 내가 음식 서빙하려고 한국을 떠나 이곳까지 온 게 아니지.’ 지금은 공부에 집중할 때라는 손님의 지적처럼 어머니를 도와준다고 해서 도와드리는 건 아니었다. 도미니카공화국에 머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비자를 받아오면 미국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1994년 비자를 받기 위해 미국대사관에 갔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포기하고 다음날 밤에 찾아갔다. 2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밝는대로 다시 대사관을 찾아가 B1/B2 비자서류를 부스에 내밀었다.
“아리랑 식당에서 서빙하던 친구 아니야?” 미국 영사가 반갑게 맞이했다. 몇 개월 전 미국인 아내와 함께 식당을 찾아 된장찌개를 시켰던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입양된 한국인이 미국 영사가 된 것에 감동을 받고 영어를 배우고 싶은 마음에 친절하게 대했던 기억이 났다.
“아, 맞습니다. 미국 유학을 가려고 비자를 신청하러 왔습니다.” “미국 유학을 간다면서 관광 비자를 신청하면 어떻게 해. 통장의 잔고증명도 있어야 하는데….” “B1/B2 비자로 유학을 못 가나요?” “오케이, 알았으니 1주일 뒤에 오라고.”
미국 영사의 도움으로 1년짜리 비자를 받았다. 이제는 생활공간이 필요했다. 미국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번에도 아리랑 식당의 손님이 도왔다. 뉴욕에서 도미니카공화국으로 골프를 치러 왔던 한인신사가 식당을 찾았는데, 알고보니 아버지의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최 사장,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응, 사실은 아들이 미국 비자를 받아왔는데 미국에서 지낼 공간이 없다네.” “그래? 그럼 내가 도와줄게. 우리 집에 남는 방이 하나 있으니 매달 500달러만 내고 상민이한테 거기서 머물라고 해.”
그해 9월 아버지와 초등학교 동창인 아저씨가 법정에서 보호자가 되겠다고 선서를 해줬다. 아저씨의 동생은 뉴욕초대교회 김승희 목사님이었다. 뉴욕초대교회는 뉴욕주 스태튼 아일랜드 집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을 간 다음 선착장에서 배를 갈아탄 뒤 1시간을 이동하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1시간30분을 가야 도착할 수 있었다.
토요일 교회에 가면 청년부 형들이 잘해줬다.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어 좋았고 말씀 배우는 게 재미있었다. 그렇게 주일을 보내고 저녁에 다시 지하철과 배,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는 매달 1000달러씩 보내주셨다. 500달러는 방값을 내고 나머지는 교통비와 용돈으로 썼다.
미국 수산웨그너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영어가 통하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운동밖에 없었다. ‘그래, 운동은 말이 필요 없잖아. 스포츠로 친구들한테 인정을 받자.’ 마침 경기도 남양주 미금초등학교를 다닐 때 선수로 잠깐 뛰었던 경험이 있어서 축구를 선택했다.
축구팀에는 콜롬비아와 멕시코에서 온 아이들이 있었다. 팀워크를 맞춰 그라운드를 뛰었다. 지역 경기에서 준우승까지 했다. 실력을 인정받아 팀 주장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코치가 부르더니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를 했다. “너는 영어가 안 되니 리더십을 가질 수 없다. 부주장이나 해라.” ‘그래, 미국사회에서 인정받으려면 실력을 키워야 하는구나.’ 슬펐지만 열심히 공을 찼다. 축구팀 성적이 좋아 콜롬비아 대학 축구 특기생으로 진학할 기회가 열렸다. 하지만 한국인 신분으로 진학을 하려니 한학기 학비가 2만5000달러였다. 결국 한 학기 학비가 3200달러로 제일 싼 뉴욕시립대로 학교를 정하고 96년 9월 회계학과에 입학했다.
회계학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미국 영주권을 빨리 받으려면 미국공인회계사가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인 교수님이 객원교수로 오셨는데 나에게 이런 제안을 하셨다. “상민아, 한국 사람은 한국과 꼭 연줄이 있어야 한다. 한국이 그립지 않니?”
***[역경의 열매] 최상민 <4> 동양인으로 美 주류사회 벽 느껴 대학 자퇴
공인회계사 꿈 포기 불안정한 삶 시작… 도미니카 집 도착하자 어머니가 “철썩”
1992년 동화고 1학년 수학여행 때 아내 이재숙씨와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함께 한 최상민 ESD 사장.1996년 9월 나는 뉴욕시립대에 입학하고 아르바이트 자리부터 찾았다. 도미니카공화국에서 고된 식당일을 하시는 부모님 짐을 덜어드리기 위해서라도 일을 해야 했다. 매주 450달러를 받아 저축했다. 98년 6월 한국인 교수님의 제안에 따라 한국행을 결정했다. 그리고 연세대 국제학과에 교환학생으로 갔다. 도미니카공화국으로 이민을 떠나고 미국 유학생활까지 하게 된 내가 6년 만에 한국행을 결정했던 것은 여자친구 때문이기도 했다. 환율이 높다 보니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았던 돈은 한국에선 제법 큰돈이 됐다.
‘여친’을 처음 만난 건 90년이었다. 경기도 남양주 동화중 수요찬양서클에 들어갔는데, 이재숙이라는 같은 학년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피아노 치는 모습이 천사 같았다. 위로 오빠가 둘이었던 재숙이는 집안 사랑을 독차지해서 그런지 애교가 넘쳤다. 공부도 잘했다. ‘아, 저런 애가 내 여자친구면 소원이 없겠다.’ 그녀는 나의 로망이었다. 매일 장문의 편지를 썼다. 하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너 왜 자꾸 나 따라다니는데. 편지 그만 보내면 안 될까.” 짝사랑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그래, 재숙이를 꼬시려면 부모님부터 공략해야겠다.’ 마침 재숙이네 집에 놀러갈 기회가 왔다. “안녕하십니까. 재숙이 친구 최상민이라고 합니다.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는 게 제 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 네가 상민이구나. 듬직하게 생겼다.” 재숙이 어머니는 나를 좋게 봐주셨다.
재숙이에 대한 사랑은 내가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떠날 때도 한결같았다. “재숙아, 나 도미니카공화국으로 이민가기로 했어.” “그런데?” “응, 네가 많이 그리워질 것 같아서.” “잘 가라.” 재숙이는 여전히 내 마음을 몰라줬다.
도미니카공화국에 도착하고도 국제우편으로 내 마음을 전했다. 6개월 만에 국제전화로 재숙이네 집에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상민이입니다.” “아이구, 이게 누구냐. 상민이 아니니. 재숙아, 상민이한테 전화 왔다.” “어머, 상민이니?” 1만3500㎞의 거리는 분명 우리를 가깝게 했다.
내가 연세대에 왔을 때 재숙이는 춘천교대 졸업반이었다. 매주 청량리에서 춘천행 열차를 타고 재숙이를 만나러 갔다. 미국회계사가 꿈이었던 나는 열차 안에서 한국이 왜 IMF 구제금융을 맞게 됐는지 분석하는 책들을 읽었다. 재숙이는 98년 12월 임용고시에 합격해 강원도 홍천 삼포초등학교로 발령받았다.
1년 만에 다시 뉴욕시립대로 돌아왔다. 백인 학생들이 수업발표를 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나한테만 발표 기회가 오지 않았다. “너는 영어도 못하는 아시아 사람이잖아.” 다들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 같았지만 웃음 뒤에 보이지 않는 미국 주류사회의 벽이 느껴졌다. 취직을 했던 한국 출신 선배들이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경쟁에서 밀려난다는 이야기도 숱하게 들었다. ‘그래, 미국 사회에선 아무리 공부를 잘하더라도 동양인으로선 한계가 있다. 미래가 정말 뻔하다.’ 미국공인회계사가 되겠다는 꿈도 점점 사라졌다.
99년 10월 학교 행정실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미스터 최,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무래도 저는 공부보다는 장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1년만 더 공부하면 졸업할 수 있는데 꼭 자퇴를 해야 하겠습니까.” “예.”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또다시 불안정한 삶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대학 중퇴자. 아리랑 식당에 들어서니 어머니가 성큼 다가오셨다. 손바닥이 얼굴로 날아왔다. “철썩.”
***[역경의 열매] 최상민 <5> “무역 좀 가르쳐 주세요” 코트라 찾아가 무보수로 일해
중학교 여자 동창이 청혼… “주님이 가정 지켜 주실 거야”
2001년 4월 경기도 남양주 한 예식장에서 중학교 동기동창인 이재숙씨와 결혼식을 올리는 최상민 ESD 사장.1999년 어머니는 내가 뉴욕시립대 졸업을 1년 앞두고 자퇴를 했다는 말에 크게 실망을 하셨다. 어머니는 늘 “우리는 못살아도 너희는 잘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당부했던 어머니께 졸업장은 고사하고 대학 중퇴라는 안 좋은 소식을 전해드렸으니 매우 속상하셨을 것이다.
미국 유학도 아리랑 식당의 인맥을 통해서 열렸듯 사업도 아리랑 식당의 손님을 통해 연결됐다. 식당을 자주 찾던 인조목 공장 사장님이 계셨는데,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선생님, 저도 인조목 사업을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어 그래? 계산해보니 저 작업 틀을 한국에 가져가는 게 돈이 더 들더군. 그럼 한국행 비행기 티켓만 끊어주면 넘기지.” 그렇게 식당 뒤뜰에서 인조목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2000년 중반까지 계속됐다. 시멘트 먼지를 뒤집어쓴 머리를 감는데 얼마나 뻣뻣하던지 손이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처럼 시멘트가루 먹고 살다간 일찍 죽겠다. 이건 정말 아니다.’
마침 수요도 별로 없었다. 인조목 사업을 그날로 접었다. 식당을 자주 찾았던 도미니카공화국 주재 코트라(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무역관장을 찾아갔다. “인조목 사업을 하다가 수요가 없어서 접었습니다. 돈을 받지 않고 도울 테니 저 좀 가르쳐 주세요.” “정말 할 수 있겠나.”
영어와 스페인어가 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흔쾌히 받아들여졌다. 8개월간 코트라에서 무보수로 일하며 어깨너머로 무역을 배웠다. 많이 힘들었다. 어느 날 한국에 있는 재숙이한테 연락이 왔다. “상민아, 이제 결단을 해줘. 나랑 결혼할 게 아니면 그만 놔줄래.” “아무런 기반도 없는데 어떻게 결혼을 해.” “주님이 우리 가정을 지켜 주실 거야. 지금 결혼 못하면 영영 못할 것 같아.” “좀 더 기도해보는 건 어떨까.” “아니야, 지금 해야 해.” 재숙이의 설득에 믿음으로 결혼을 결정했다. “재숙아, 지금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꼭 행복하게 해줄게.”
장인어른의 반대가 심했다. 무일푼의 25세 청년이 안정적으로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하고 있는 딸을 달라고 했으니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아무런 비전도 없는 나를 믿어준 분은 신앙심이 깊었던 장모님이었다.
굳은 표정을 한 장인어른께 장모님의 설득작업이 시작됐다. “여보, 다른 친구는 몰라도 나는 상민이를 믿어요. 중학교 때부터 봐온 상민이는 성실하고 믿음이 좋은 아이예요. 우리 딸을 어떻게든 책임질 거예요. 지금 모습만 보지 말고 나중을 봐서 결혼을 시키자고요.”
간곡한 설득 끝에 결혼 승낙이 떨어졌다. “재숙아, 우리 최소 경비로 결혼식을 올려야 하는 거 알지. 내가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신혼집을 준비할 테니 네가 결혼식 준비를 좀 해야겠다. 부모님을 모시고 갈 테니 그때 상견례하고 결혼식을 갖자.” “응.”
재숙이는 혼자서 예식장과 웨딩촬영을 예약하고 드레스를 맞췄다. 결혼식장은 경기도 남양주 금곡 웨딩하우스를 잡았다. 2001년 4월 22일 결혼주례는 아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해주셨다. 그렇게 속전속결로 결혼식을 치르고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날아왔다.
신접살림은 식당 한쪽에 에어컨도 없는 방에 차렸다. 나는 무일푼이었고 아내는 도미니카공화국의 한국 어린이에게 국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아내가 과외로 매달 벌어오는 80만원이 수입의 전부였다. “미안해. 나 때문에 해외에서 이렇게 고생을 해서.” “아니야, 하나님께서 우리 집을 책임져 주실 거야.” 기회는 2001년 후반 찾아왔다.
***[역경의 열매] 최상민 <6> 현대重 발전기 판매영업 맡으며 사업 첫발
한국 아내 둔 현지 실무자 덕에 판로 열려, 2기 판매… 고장나면 직접 수리까지 맡아
최상민 ESD 사장이 2002년 도미니카공화국 최대의 발전회사인 EGE HAINA에 판매한 한국산 발전기.2001년 후반부터 도미니카공화국에 출장 온 현대중공업 엔진기계 영업부장의 통역을 맡았다. 자연스레 발전소용 발전기 판매영업 에이전트 생활이 시작됐다. 설명서를 보니 발전기 1기당 100만 달러였다. 돈 단위가 확실히 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판로를 뚫는 건 쉽지 않았다. 도미니카공화국 내 발전회사를 찾아 무작위로 이메일을 보냈다. 하루는 이메일로 연락이 왔다. “미스터 최, 현대중공업 관계자와 함께 우리 발전소에 한번 오시오.”
도미니카공화국 최대의 발전회사인 ‘EGE HAINA’사였다. 들뜬 마음으로 찾아가 인사하고 보니 실무자는 미국 국적의 베트남전 참전용사였다. 감사하게도 그의 아내는 한국인이었다. “아내가 한국 분이었으니 한국의 산업기술이 얼마나 발전돼 있는지 잘 아시겠어요.” “물론이죠.” 그는 2002년 초 한국에 가서 발전기를 직접 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흔쾌히 이사회에 발전기 구매 건을 올렸다.
감사의 뜻으로 그를 아리랑 식당에 초대했다. 아내가 직접 요리한 양념 통닭을 대접했는데 그의 입맛에 딱 맞는 듯했다. “굿!” 그 후로 그는 일주일에 두 번씩 식당을 찾아왔다.
얼마 후 EGE HAINA에서 연락이 왔다. “발전기 2기를 구매하겠습니다.” “오, 하나님. 한 대도 아니고 두 대씩이나!”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현대중공업에서 만든 국산 발전기는 신제품으로 상용화되지 않아 검증이 필요한 제품이었다. 그런데도 나를 믿고 구매해준 것이다.
현대중공업에서 판매수수료로 5만 달러를 받았다. 날아갈 듯 기뻤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계약이 성사됐어.” “어머, 정말 잘됐네요. 하나님이 드디어 길을 열어 주시나 봐요.” 첫째 아이를 임신해서 배가 부른 아내는 누구보다 기뻐했다. 우리 부부는 그동안 진 빚을 갚았고, 3만 달러를 주고 아반떼 승용차를 샀다. 수시로 고장 나는 중고차로 영업을 한다는 게 쉽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같은 해 말 도미니카공화국 북동쪽과 서쪽에 현대중공업 발전기가 설치됐다. 한국으로 따지면 하나는 속초, 하나는 목포쯤 되는 곳이었다. 발전기를 돌리자 현지 직원의 운영상 미숙함과 초기 제품의 특성 때문에 고장이 잦았다. 내가 하는 일은 차를 몰고 가 문제가 발생한 발전기 부분을 사진으로 찍고 보고서를 만드는 것이었다. 한국 현대중공업에 문제점이 담긴 보고서를 이메일로 보내고, 회신 내용에 따라 직접 장비를 들고 가 고쳤다. 한국에서도 부품을 적극 지원해줬다. 초도 제품에 하자가 있으면 개발한 투자금이 모두 날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시로 발전소 2곳과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잠도 못 자고 현장으로 뛰어나가기 일쑤였다. 한번은 새벽 1시 서쪽 발전기를 고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미스터 최, 북동쪽 발전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와주셔야겠습니다.” 한숨도 못 자고 운전대를 돌려 북동쪽으로 향했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데다 산악 지형이다 보니 오후 1시쯤 도착했다. 사진을 찍고 보고서를 만들어 한국에 보냈다. 입술이 부르트고 허리통증이 올 정도였다.
그렇다고 현대중공업이나 도미니카공화국 발전소에서 월급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내가 주선해준 제품에 문제가 있다면 고쳐주는 게 도리다.’ 사실 한국과 도미니카공화국 사이에서 소통하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발전기 제품 보증기간이 끝날 무렵 한국에서 전화 한 통이 왔다. “최 선생, 조만간 도미니카공화국 발전소의 제품 보증기간이 만료되거든. 부품 공급업을 한번 해보는 게 어때?”
***[역경의 열매] 최상민 <7> 헌신 시험한 하나님… 세 번의 테스트에 모두 순종
딱 가진 것 전부 헌금할 일 생기게 하셔… 이후 현대중공업 부품공급권 따내 창업
최상민 ESD 사장이 출석하는 도미니카공화국 한사랑교회 성도들이 산토도밍고 베자비스타 지역으로 이전한 교회에서 2004년 기념촬영을 했다.“부품공급업은 또 뭐죠. 제가 도와드려야 하는 건가요?” 그제야 현대중공업이 월급도 안 주면서 수시로 호출했던 이유를 알게 됐다. 현지에서 부품공급권을 주는 것은 일종의 특혜였다. 발전설비는 사실상 독점 공급이었다. 엔진을 한번 설치하면 기계가 돌아갈 때까지 부품을 공급하는 구조였다.
발전소에서 부품을 주문하면 현대중공업에서 물건을 받아 공급했다. 최소 10%의 마진이 생겼다. 2004년 말 ESD(Enterprise Specialized in Development)를 차리고 발전설비 사업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수중에 현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내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여보, 당신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3번의 테스트를 통과했기 때문에 돈을 이렇게 버는 거야. 알지?” “응, 알아.”
아내의 말처럼 하나님은 나에게 3번의 테스트를 허락하셨다. 2001년 결혼을 하고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넘어와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단칸방에서 살 때다. 당시는 수시로 멈추는 중고 용달차를 타고 다녔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오랜만에 도미니카공화국을 찾은 임승칠 선교사님이 잠깐 보자고 했다. “최 집사, 국경지대에 있는 아이티 학교를 짓는데 지붕을 씌우는 일을 좀 도와줄 수 있어? 일단 저 자재를 싣고 거기까지 가야 해.” 교회에서 아이티 학교까지 가려면 기름값으로 최소 720달러는 있어야 했다.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우리 720달러 있어?” “응, 있긴 한데 우리 전 재산이야.” “선교사님이 학교 지붕을 올리려면 자재를 가져가야 한다고 하시네. 용달로 짐을 옮겨 달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할까.” “하나님께 드려야지.” 우리 부부는 첫 번째 그렇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테스트를 통과했다.
두 번째 테스트는 2002년에 있었다. 내가 출석하던 도미니카공화국 한사랑교회는 임차교회였는데 계약 연장이 안 돼 예배처소를 옮겨야 하는 상황이 됐다. 성도들이 이민자가 아닌 단기 파견자들인 데다 교인 수도 적다 보니 재정상태가 열악했다. 교회를 옮기려면 일단 2500달러가 필요했다.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이번에도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교회를 옮기려면 2500달러가 필요하대. 우리 얼마 갖고 있지?” “응, 딱 2500달러 갖고 있는데.” “어떻게 할까.” “하나님께 드려야지.”
세 번째 테스트는 2004년 초반에 있었다. 내가 미국 유학 시절 출석했던 뉴욕초대교회에서 도미니카에 선교센터를 짓기 위해 방문했다. 유학 시절 나를 지도해주셨던 김승희 목사님이 예배 때 선교센터 헌신을 제안했다.
“여보, 선교센터를 지어야 한대. 김 목사님이 선교센터에 설치할 무정전 전원장치를 헌물하라고 하시는데 우리 얼마 갖고 있지?” “응, 1500달러가 전 재산이야.” “그걸 하나님께 드리자고.” “그래, 근데 참 이상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것만큼 달라고 하시네.”
2005년 4월 정식으로 직원을 채용했다. 아파트 1층 상가를 얻었는데 규모는 크지 않았다. 내 사업을 할 수 있다는 게 뿌듯했다. 그해 연말 결산을 해 보니 1년 매출이 50만 달러를 넘었다.
발전기 하자수리를 수시로 하다 보니 발전소의 기계 전기시스템이 점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 도미니카공화국의 전력계통이 매우 불안정해 발전기가 멈추는 돌발 상황이 자주 발생했다. 발전기 하자보수를 하던 나에게 2006년 독특한 제안이 들어왔다.
***[역경의 열매] 최상민 <8> 발전용 엔진 폭발… “왜 이런 시련을” 눈물의 기도
“사재를 다 털어서라도…” 복구 약속, 신뢰 회복하고 4대 설치 제안받아
2016년 가이아나 발전소를 찾은 최상민 ESD 사장(왼쪽). 발전소는 제작 결함으로 2006년 7월 폭발 사고가 났다.“최 사장, 발전기가 멈췄어요.” “알겠습니다. 곧바로 달려가겠습니다.” 내가 달려가면 무슨 일이 있어도 고객과 약속한 시간 안에 발전기를 재가동시켰다. “신기하네. 우리 기술자도 못하는 작업을 어떻게 그렇게 잘해요?” “한국의 기술력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우수합니다.”
발전기를 수리해 달라는 요청 앞에 ‘노(NO)’는 없었다. 성실하게 영업하다 보니 도미니카공화국 발전사업자들의 눈도장을 받게 됐다.
2006년 7월의 일이다. 베네수엘라 옆에 있는 중남미 국가인 가이아나 발전소에서 급하게 연락이 왔다. “최 사장, 현대중공업 관계자와 함께 빨리 이쪽으로 오시오.” 비행기를 타고 달려갔다. 외관상 보더라도 엔진 폭발이었다. 부품이 처참하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오, 주님. 어쩌다 이런 일이….”
가이아나 발전소 현지 직원들의 얼굴이 붉게 상기돼 있었다. “최 사장,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발전기 정비 작업을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대형 사고가 발생합니까. 당장 책임지고 복구하시오!” “알겠습니다.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엔진을 복구하겠습니다. 사재를 다 털어서라도 하루속히 전력을 생산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리 봐도 우리 쪽 실수가 분명해 보였다. 발전소 오너를 찾아갔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저희 쪽 실수가 맞습니다. 저희 직원들이 발전기 정비 작업 직후에 발생한 사고이니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제가 당장은 새 발전기를 설치할 만한 여력이 되지 않습니다. 저한테 엔진을 1대 더 사주시면 거기서 나온 이윤을 보태서 엔진을 새로 설치해 드리겠습니다.” 마침 발전기 1대를 증설할 계획이었던 발전소 입장에선 그리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오호, 그래요. 한번 생각해 봅시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듯했다. 벌어들인 돈을 모두 쏟아부어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러다 회사가 망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엔진을 붙잡고 기도를 시작했다. “주님, 저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 주님.”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뜨거운 액체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참 기도를 하는데 희한하게도 파손된 엔진 블럭 내에 ‘빅엔베어링 캡’ 부분을 한번 열어보라는 감동이 있었다. 캡 본체를 열었는데 베어링을 잡아주는 볼트에 홈이 파여 있었다. 엔진 결함이었다. 발전소 관계자들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 달라고 하고 동행한 현대중공업 엔지니어를 조용히 불렀다. “이것 좀 보세요. 홈이 파여 있습니다. 제작 결함입니다.” “어, 정말 그러네요.” “발전소에는 제가 잘못한 것으로 할 테니 현대중공업에서 리콜을 해주세요. 회사의 이미지가 나빠져선 안 됩니다.” “그렇게 합시다.”
만약 그때 엔진 리콜을 하지 않았다면 현대중공업이 전 세계에 판매한 엔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해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시제품과 같았던 엔진의 결함을 조속히 발견한 덕택에 현대중공업도 막대한 피해를 사전에 막을 수 있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업의 큰 위기를 그렇게 넘겼다.
며칠 후 도미니카공화국 푼타카나-마카오 에너지 컨소시엄(CEPM)에서 연락이 왔다. “최 사장, 엔진 4대를 설치하려고 하는데 혹시 가능하겠소?” “저에게 일감을 맡겨 주십시오. 요구하는 금액과 기간 내에 엔진을 설치할 인력이 있습니다. 제가 언제 한 번이라도 약속을 어긴 적이 있습니까.” “오케이, 성실한 당신에게 일감을 주겠소.” 그렇게 덜컥 발전용 엔진 설치 프로젝트를 따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또 다른 시련이 다가오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최상민 <9> 오랜 기도 끝 투자 결정한 사업서 큰 성공
도미니카에 학교 짓고 선교비 보내… 아이티 전력청과도 전력공급 계약
최상민 ESD 사장(왼쪽)이 2009년 한국동서발전 사장, 아이티 투자업체 사장과 공동으로 아이티에 32㎿ 발전소를 건립하기 위한 투자합의서를 교환하고 있다.도미니카공화국 푼타카나-마카오에너지 컨소시엄(CEPM)과 2006년 체결한 공사는 75만 달러짜리였다. 과거엔 발전기 수리, 정비만 했지만 발전소 토목, 설치공사까지 하기는 처음이었다.
한국에서 엔진, 보조기기, 설치 자재를 실은 컨테이너만 35개가 왔다. 외부에서 고객과 미팅을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운전 중 다급한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컨테이너가 넘어져 불이 났습니다.” “뭐라고?”
이번엔 설치하지도 않은 발전기에 화재가 났다니 눈앞이 캄캄했다. 부두에 달려가 보니 배에서 컨테이너 박스를 내리다 엔진장치의 두뇌라 할 수 있는 컨트롤 패널이 들어있는 박스가 떨어져 불이 난 것이다. ‘운송보험을 들어놓지 않았던 것 같은데….’ 비용을 아낀다고 선박까지만 보험을 들어놨던 것 같았다.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직원을 시켜서 보험관계를 확인했다. “보험보장 범위가 컨테이너를 내리는 공사현장까지 돼 있습니다.” “공사현장까지라고?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정은 이랬다. 담당 직원이 보험료를 계산해보니 도미니카공화국 항구와 공사현장까지의 보험료가 3%밖에 차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내 지시를 무시하고 공사현장까지 보험료를 가입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위기를 넘기고 발전소 설치를 마쳤다.
2007년 말이었다. CEPM에서 발전소를 증설해야 하는 데 신형 발전기를 구입할만한 여력이 없다고 했다. 마침 한국의 DECCO라는 회사를 통해 수원 삼성코닝 공장에서 운전 중인 핀란드산 바질라 엔진발전소를 폐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미니카공화국 경제 발전 단계로 볼 때 분명 전기수요가 추가로 생길 것이다.’
그런데 돈 단위가 너무 컸다. 800만 달러짜리 엔진이었다. 도박과 같았다. 기도로 매달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나님 아버지, 폐기되는 엔진을 가져와 재활용을 하는 게 맞을까요, 포기하는 게 맞을까요. 액수가 너무 큽니다.” 오랜 기도 끝에 마음의 평안함이 찾아왔다. 곧바로 흥정에 들어갔다. 폐기하는 엔진이라 4분의 1 가격으로 가져왔다.
내 예상은 적중했다. 아무리 폐기 엔진이라 하더라도 부품을 바꾸면 새것과 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매출은 급상승했다. 그해 100만 달러의 수익을 냈다. 그때부터 도미니카공화국에 학교와 교회를 짓기 시작하고 선교사님께 선교비를 보내기 시작했다.
아이티에 발전기를 팔기 위해 들어간 것은 2006년부터다. 그러나 정치·경제 상황이 호전되지 않아 계속 유보됐다. 기회는 2008년 찾아왔다. 아이티 전력공급 사업 낙찰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금융위기로 전체 투자액의 40%를 대기로 했던 도미니카공화국 현지업체가 발을 뺐다. ‘큰일 났다. 응찰 불이행이 되면 발전소 공급이 취소되고 투자자들은 막대한 위약금을 물게 된다.’ 또다시 간절한 기도에 들어갔다. 그리고 한국동서발전을 설득했다. 동서발전은 아무래도 한국과 멀리 떨어진 오지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이다 보니 주저했다.
“아이티는 한국의 1960년대 모습과 같습니다. 경제적 번영을 이룬 대한민국이 후진국을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좋소. 우리가 30%를 투자할테니 최 사장도 10%를 투자하시오.” “좋습니다.” 그렇게 한국동서발전, 아이티 투자자들과 함께 32㎿ 엔진 발전소를 짓기로 했다. 그리고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력을 아이티 전력청에 15년 동안 공급하기로 했다. 그런데 2010년 1월 12일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역경의 열매] 최상민 <10> 발전설비 토목공사 제자리… 뜻밖에 도움의 손길이
“당신 덕에 대지진 피하고 목숨 구해”… 지질학자 지원으로 애태우던 공사 마쳐
ESD 직원들이 2010년 1월 아이티 대지진 후 발전소 부지에서 20m짜리 파일을 박는 작업을 하고 있다.2010년 1월 12일 오후 갑자기 포르토프랭스에서 규모 7.0의 강진이 발생했다. 아이티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지진은 가난한 나라를 뒤엎었다. 50만명의 사상자와 18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그렇게 못사는 나라에 대지진까지 발생했으니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됐다. 긴 한숨부터 나왔다. ‘하나님, 이렇게 불쌍한 사람들에게 왜 이런 고난을 주시나요.’ 당시는 한국에서 발전기 엔진이 오고 있었다. 만약 ESD가 발전기를 조금만 일찍 현지에 설치했어도 큰 피해를 봤을 것이다.
배가 도착했지만 항구는 기울어져 있었다. 배를 댈 곳이 없었다. 미국 공병대가 설치한 임시 항구로 물자를 내리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곧바로 미군 대령을 찾아갔다.
“수고하십니다. 저는 아이티에 전력공급 사업을 하는 최상민 사장이라고 합니다.” “예, 무슨 용건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대지진으로 사회기반시설이 망가진 아이티가 복구되려면 전력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저희가 발전기를 한국에서 이곳으로 가져오고 있습니다.” “오우,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대령님, 미군이 설치한 임시항구를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좋습니다. 다만 저희도 내려야 할 구호물자가 많습니다. 반나절만 사용할 수 있도록 해드릴 테니 신속하게 처리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반나절만 쓰겠다고 하고는 나흘 밤낮으로 1만t의 발전설비와 자재를 하역했다. 미군의 도움으로 설비 자재를 무사히 내렸지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분명히 지질조사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땅이었지만 막상 파보니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알아보니 20m짜리 파일 980개를 박아 넣어야 한다고 했다. 지질상태가 좋지 않아 하루에 1개도 박기 힘들었다. 토목 기초공사는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투자를 했던 사업 파트너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아니, 발전설비가 현장에 도착했는데 아직도 토목 기초공사도 못했다는 게 말이 됩니까. 게다가 물이 터져 나오고 파일도 안 들어 간다면서요. 투자금을 날리면 당신이 모든 책임을 지시오.”
나에겐 허가도 받지 않은 아이티의 땅을 사전에 파볼 방법도, 권리도 없었다. 아이티 전력청에서 보증해준 전문가의 부실한 지질조사 보고서를 믿고 이런 결과가 생겼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방법은 하나였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다.
애타는 마음으로 발전소 부지만 바라봤다. 어느 날 프랑스계 아이티 지질학자가 나를 보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사장님, 토목업체 사장한테 연락이 왔는데, 저명한 아이티 지질학자가 아무런 조건도 없이 저희 부지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지?” “지진 발생한 날 사장님이 꼭 미팅을 하자고 우기는 바람에 토목업체 사장과 지질학자가 목숨을 구했답니다. ESD가 생명의 은인이라며 아무런 조건 없이 돕겠답니다.” “오, 할렐루야.”
얘기를 들어보니 토목업체 사장과 지질학자는 1월 12일 우리 회사의 요구로 원래 갔어야 할 현장방문을 취소했다고 한다. 나머지 현장방문을 했던 사람들은 지진으로 건물이 매몰돼 전원 사망했다. 토목업체 사장과 지질학자는 파일 시공법을 상세하게 알려줬다. 기술지원을 받아 그 방법대로 무사히 토목공사를 마무리했다.
발전소 건립이 아이티의 인프라 복구와 관련된 사업이다 보니 아이티 정부에서 공식제안이 들어왔다. “아이티 복구위원회에 들어와서 자문을 좀 해주십시오.” “좋습니다.”
***[역경의 열매] 최상민 <11> 호사다마… 영향력 커지자 근거 없는 음해 시달려
대지진 후 발전소 복구 이끌며 사업 성장… 상처입고 기도 중 ‘교회 지으라’ 음성 들어
최상민 ESD 사장(왼쪽)이 2012년 10월 아이티 발전소 준공식 현장에서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과 대화하고 있다. 발전소는 국무부 자금을 지원받아 건설했다.2010년 1월 아이티 복구위원회에 들어가니 미국 프랑스 도미니카공화국 관계자들이 모였다. 서로 아이티를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의견이 분분했다. 인도네시아 쓰나미 사태처럼 수혜 대상 국가에서 도움받을 준비가 돼 있지 않으면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우리는 2007년부터 아이티에 발전소 사업 진출을 위한 시장조사를 해 두툼한 보고서를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그걸 조금 응용해 위원회에 내놓았다.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이크를 잡았다. “제가 운영하는 ESD는 발전소 설치와 운영보수에 특화돼 있는 업체입니다. 저희 업체가 지진으로 훼손된 아이티 발전소 한 곳을 15일 내 복구해 먼저 가동시키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기간 동안 송·변전 라인과 배전설비를 복구해 주십시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결과로 증명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내가 그렇게 장담했던 것은 2009년 아이티 발전소 복구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기 공급이 되지 않자 북쪽 지역에선 폭동이 일어날 상황이었다. 쿠바 전력청에서 설치한 발전기로 전기를 공급하고 있었는데, 돈만 받고 발전기를 마구잡이로 돌리는데 문제가 있었다. 일부 엔진 부품만 교체하면 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15일 만에 발전소가 정상 가동되고 25일 만에 복구된 송·변전 및 배전라인을 통해 전력이 공급되기 시작됐다. 대지진 때의 위기관리 능력을 인정받아 발전소 사업에 응찰했고 10개 발전소 중 1개의 소유권과 5개의 운영권을 갖게 됐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아이티에서 영향력이 확대되다 보니 현지 정치인들의 견제가 심했다. 아이티 내에서 가짜뉴스가 만들어지고 발전소 이사회에 소속된 현지 투자자들도 내가 갖고 있는 지분을 차지하기 위해 정치적 함정을 만들었다. “최 사장이 아이티에 전기 장사를 하면서 폭리를 취하고 있다. 사업을 독점하기 위해 일부 정부 관료와 정치인을 상대로 로비를 하고 긴밀하게 결탁돼 있다.”
‘아니, 아이티 사회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국가 발전보다는 어떻게 이렇게 개인 이익만 앞세운다는 말인가. 나라가 있어야 개인도 있는 것인데 어쩜 국민 생각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 사리사욕만 챙기려고 하는가.’
근거도 없는 비판을 받으니 아이티 복구를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일했던 열정이 점점 식어갔다. 염증이 느껴졌다. ‘그래, 이런 잘못된 국민성은 잘못된 교육에서 나온다. 아이티가 대한민국처럼 가난에서 벗어나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려면 기독교 가치관을 지닌 지도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 그때의 생각은 훗날 2016년 3월 아이티 직업학교로 현실화됐다.
아이티 발전시장의 60% 이상을 독과점해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소유 지분을 모두 매각했다. 그리고 아이티 전력공급의 35%만 책임지기로 했다. 지진의 참상을 보고 나니 인간의 유한성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다. 기도를 하는데 교회를 지으라는 성령의 미세한 음성이 들렸다.
‘그래, 내가 그동안 발전사업으로 사회기반시설 확충에 나섰다면 이제부턴 영적 기반시설을 확충하겠다.’ 당시 도미니카공화국에 한창 사옥을 짓고 있는 상황이었다. 2011년 초 사옥 입주를 앞두고 직원 315명 앞에서 선포했다. “사옥 맨 위층인 4층에 교회를 세우겠습니다.”
***[역경의 열매] 최상민 <12·끝> 고난은 변장된 축복… 학교·교회 설립 꿈 위해 매진
작년 아이티 직업학교 완공 때 눈물… ‘대학까지 100개’ 사업의 최종 목표로
최상민 ESD 사장(오른쪽)이 2016년 3월 아이티 북부 카라콜 지역 직업학교 준공예배 후 김삼환(가운데) 오정현 목사와 기념사진을 촬영했다.“아니, 사장님. 저희 회사가 기독교 회사도 아니고 어떻게 사옥에 교회를 운영한다는 말입니까.”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ESD를 보호해주지 않으셨으면 우리 회사는 벌써 망했을 것입니다.”
물론 사업이 순풍에 돛단 듯 잘나가는 것만은 아니었다. 2013년 엔진 발전기 공급과 관련해 법적 시비에 휘말려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했다. 핀란드와 독일 제품을 사겠다는 현지 업체에 한국 제품을 하나라도 더 소개하려다 자료 유출로 오해를 받고 법정에 섰다.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치아가 들뜨기도 했다. 남몰래 눈물 흘리기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고난은 변장된 축복이라고 했던가. 고통스러운 일을 겪으면서 오히려 한국전력과 삼성물산, SK와 같은 대기업과 사업을 하게 되는 길이 열렸다. 가만히 안주했다면 사업다각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고난 중에 있을 때 한국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김삼환 서울 명성교회 목사님이었다. “최 집사, 월드디아코니아를 통해 아이티에 직업학교를 세우려고 해요. 학교 부지도 없고 예산도 부족한데 최 집사가 주님을 위해서 헌신을 좀 해야겠어요.” 교계 큰 어른의 요청에 기쁜 마음으로 대답했다. “목사님, 영광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선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아이티에 발전소를 지으면서 관계를 맺었던 미국 국무부가 호의적으로 나왔다. “제가 이번엔 교육을 통해 아이티를 돕고 싶습니다.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오우, 당신 뜻이 그렇다면 우리가 토지를 무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미 국무부는 아이티 정부와 공동으로 추진하는 주택사업 부지 중 1만5750㎡의 땅을 우리에게 기증했다. 나도 4억5000만원을 기부했다. 손해를 보더라도 교육사업엔 아낌없이 지원했다. 아이티 교육관료들로부터 ‘외국인이 아이티 사람보다 더 교육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물론 신뢰는 덤으로 얻었다.
2016년 아이티 직업학교를 완공했다. 김 목사님과 오정현 사랑의교회 목사님을 모시고 준공식을 가졌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한국을 떠나 이민을 오고 다시 미국 유학을 가서 고생했던 기억들이 스쳐갔다. 교육의 무한한 힘을 알기에 이곳을 거쳐 갈 아이티 학생들을 생각하니 감격이 벅차올랐다. 테이프를 끊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ESD는 전력설비를 건설하고 운영하며 연간 35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린다. 수익의 70%는 아이티에서, 나머지는 도미니카공화국에서 나온다. 요즘은 도미니카공화국에 한국전력과 배전망 개선사업을 벌이는데 사업 규모만 자그마치 1억2000만 달러다. 한국에서 주요 자재를 들여와 약 1000㎞에 달하는 배전망을 개선할 계획이다. 계량기 설치사업도 하는데, 세계은행에서 자금을 지원해 3만개를 설치했다. 내년 50만개 설치를 목표로 사업을 구상 중에 있다. 2020년까지 도미니카공화국에 전기차 인프라를 구축하고 셰일가스를 도입하는 게 목표다.
나는 젊었을 때 기술력을 팔려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뢰를 팔아야 하며, 요즘에는 가치를 팔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고객이 늘 성공할 수 있도록 돕고 수익을 잘 나누는 게 나의 사업철학이다.
내가 돈을 버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이티와 도미니카공화국에 100개의 학교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다. 나는 은퇴 시점을 2045년으로 잡았다. 초·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를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는 게 꿈이다. 물론 그 길을 가는 여정에 역경과 고난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 고난은 변장된 축복이듯, 그 또한 넉넉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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