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발
Emergence 涌现
창발(創發)은 새로운 것이 창조적으로 발현하는 것이다. 창발은 무에서 유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유에서 유가 생기는 것이며, 기존의 구성요소에는 없는 특성이 갑자기, 새롭게 생기는 것이다. 새롭게 창발한 것은 하위 구성요소나 하위 체계로 환원되지 않는다. 환원(Reduction, 還元)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인데 철학에서는 근본적인 것 즉, 본질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생명현상과 관련한 환원은 생명체를 구성하는 본질인 물리적인 것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창발된 것이라도 하위 체계와 분리되지는 않는다. 창발, 환원과 함께 논의되는 수반(Supervenience, 隨伴)은 어떤 것에 따라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나 현상이다. 수반의 관점에서 생명과 의식은 (실체이자 본질인) 물리적인 것에서 생겨나는 현상이다. 창조(Creation, 創造)는 이전에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며, 신이 우주 만물을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뜻으로 쓰인다. 생기(Vitality, 生起)는 어떤 것이나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갑자기 생기거나 발현하는 것’인 창발(emergence)의 어원은 라틴어 ‘떠오르다, 생기다, 현상하다’인 emergere의 명사형이다. 접두사 ex는 ‘바깥’이고 ‘잠기다, 가라앉다’인 mergere가 결합한 emergence는 ‘바깥으로 떠오르다, 현상하다’의 의미로 쓰인다. 어원으로 보면 창발(emergence)은 ‘출현, 등장, 생김, 떠오름, 드러남’인데, 단지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생기는 것이므로 창발(創發)이라고 한다. 창발은 여러 영역에서 쓰이지만, 특히 인간 의식에 관한 인식론적 창발과 생명체에 관한 존재론적 창발이 중요하다. 창발과 함께 주목받는 창발성(Emergent properties)은 새로운 것이 창발하는 과정과 성격이고 창발론(Emergentism)은 창발에 대한 이론이다. 창발론은 생명의 탄생을 유에서 유가 생기는 것으로 보기는 하지만, 기계론(Mechanism)과 달리 생명의 창조성을 강조한다. 그렇다고 해서 창발론이 생기론(Vitalism)처럼 영혼이나 정신과 같은 초월적 현상이 창발했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한편 창발은 존재의 층위가 달라지는 것이다. 신체를 구성하는 물리화학의 원자(atom)와 창발된 (인간과 같은) 존재(being)는 다른 층위다. 창발의 근원과 실체를 존재의 차원에서 설명하는 것은 존재론적 창발이고, 창발의 관계와 층위를 인식의 차원에서 설명하는 것은 인식론적 창발이다. 현대 창발론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영국의 알렉산더(S. Alexander, 1859~1938)는 ‘생명은 물질의 부수현상이 아니라 물질로부터 창발하는 것(Life is not an epiphenomenon of matter but an emergent from it)’이라고 규정했다. 이어서 생명의 물리화학적 특징은 신경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렉산더의 이 주장은 기존의 유물론이나 창조론과는 다른 견해였을 뿐 아니라 물질과 생명의 관계를 창발로 규정하여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근대 창발론은 주로 인간의 의식과 생명의 출현에 관한 논제로 전개되었다. 창발론은 일원론(Monism)과 이원론(Dualism)의 문제를 생명과 의식에 연결했기 때문에 중요하기도 하고 논란이기도 하다.
일원론은 마음과 몸, 정신과 물질을 하나의 실체로 간주하는 이론이고 이원론은 마음과 몸, 정신과 물질을 두 개의 실체로 간주하는 이론이다. 그런데 창발론은 일원론이면서 이원론인 동시에, 일원론도 아니고 이원론도 아닌 미묘한 입장이어서 논란이 많다. 이것은 창발의 개념에 잠재되어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창발은 ‘구성요소에는 없는 새로운 특징이 갑자기 발현되었다’라는 것인데, (새로운 특징의 발현을) 이해하는 관점에 따라서 창발론의 해석이 달라진다. 먼저 창발론은 ‘창발된 것’으로서의 전체(全體)는 구성요소의 총합을 넘어서면서, 새로운 특징이 발현하는 것을 중시한다. 만약 창발을 유기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창발된 존재는 구성요소와는 다른 자기완결성과 자기조직화의 특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창발의 자기완결성과 자기조직화는 이전의 요소가 새롭게 조직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질서가 생겨났다는 뜻이다.
일원론인 물리주의에서는, 창발의 복잡성과 예측불가능성은 (물리화화적 과정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사실 물리화학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창발은 물리화학적 과정과 결과라는 뜻이다. 반면 이원론에서는, 창발은 물리화학적인 것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창발은 복잡계 이론으로 설명되기는 하겠지만 결국 생명체 고유의 특징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창발은 물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 사이를 오고 가는 것처럼 보인다. 창발론은 주로 일원론인 물리주의와의 관계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물리주의(Physicalism)는 생명현상을 포함한 모든 것은 물리적인 것이며 모든 것은 물리로 환원한다는 이론이다. 물리주의자들은 창발론을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한다. 창발은 주로 생명과 의식의 창발이지만 공학, 사회학, 경제학, 심리학, 인식론, 존재론 등 여러 분야에서도 중요한 개념이다.★(김승환)
*참고문헌 Samuel Alexander, Space, Time and Deity, (Glasgow: Gifford Lectures, 1918).
*참조 <기계론>, <물리주의>, <복잡계>, <생기론>, <수반>, <실체>, <심리철학>, <의식>, <이원론>, <인공지능>, <인지과학>, <일원론>, <정신>, <정신인과>, <환원주의>, <환원주의의 독단[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