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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古稀)
일흔 살까지 산다는 것은 옛날에는 드문 일이다는 뜻으로, 70세를 일컫는 말이다.
古 : 예 고(口/2)
稀 : 드물 희(禾/7)
(유의어)
종심(從心)
칠순(七旬)
희수(稀壽)
출전 : 두보(杜甫)의 곡강시(曲江詩)
고희(古稀)란 70세(歲) 나이를 일컫는 한자용어(漢字用語)이다. 일흔 살까지 산다는 것은 옛날에는 드문 일이다는 뜻이다.
중국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곡강시(曲江詩)에 나오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에서 유래한 말이다.
옛날에는 평균 수명이 짧아 60세의 환갑(還甲)에는 큰 잔치를 열어 장수(長壽)를 축하했는데, 70세의 고희연(古稀宴)도 80세, 90세, 100세의 축하연(祝賀宴), 77세의 희수연(喜壽宴), 88세의 미수연(米壽宴)과 더불어 크게 열고, 시문(詩文), 서화(書畵) 등의 작품을 남겨 기념하기도 하였다.
요즘 70을 노인이라고 하면 섭섭해 한다. 마을 경로당에서도 젊은층에 든다고 하니 그럴 만하다. 실제로 나이를 무색케 하는 노인들이 많다.
80을 훌쩍 넘겼는데도 60대 초반의 자태를 뽐내는 할머니들이 있다. 여성의 경우 평균수명은 이미 여든을 넘었다. 머지않아 세계 최장수국이 된다는 통계 보고서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옛날에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했다. 줄여서 고희(古稀), 즉 예로부터 드물다는 뜻이다.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배운 것 중에 비유법이라는 것이 있다. 자기가 받아들인 느낌을 어떻게 말이나 글로 나타내느냐 하는 것인데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가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직유법(直喩法)이다. ‘마치 ~같다’ , ‘마치 ~처럼’ 등과 같이 맞대놓고 비교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은근히 빗대어 표현하는 은유법(隱喩法)이다. ‘A는 B이다.’ 처럼 느낌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고 빗대어 표현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전자(前者)가 명시적(明示的)이라면 후자(後者)는 암시적(暗示的)이다. 양자간에 장단점은 있다.
전자는 보다 명확하고 간단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무리 없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반면 후자는 이해하기에 약간의 수고가 필요하며 심한 경우, 새겨들을 줄 아는 소양(素養)도 있어야 하지만 음미할수록 깊은 맛을 느끼게 해 주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나 중국에서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극단을 싫어하고 중용(中庸)을 중시했던 탓에 불쑥 내지르는 표현보다는 그래도 뭔가 한 바퀴 빙 둘러서 말하는 것을 선호했다. 불을 지피기가 무섭게 끓는 냄비보다는 천천히 달아오르는 가마솥을 더 좋아했던 것이다.
중국은 더 하여 말의 성찬(聖餐)이 어느 나라보다 성행하였으며 그들만큼 고사성어나 전고(典故)가 풍부한 나라도 없다.
그들은 나이를 말하는 데에도 즐겨 은유법(隱喩法)을 사용했는데 그 중 70세를 고희(古稀)라고 했다. 고(古)는 옛날이고 희(稀)는 드물다의 뜻이다. 희귀동물이나 희소가치라는 말이 있다. 따라서 고희(古稀)라면 예로부터 드물었다는 뜻이다.
지금은 의학이 발달하고 영양 섭취도 좋아져서 남녀 평균연령이 70세가 넘지만, 불과 몇 10년 전만 해도 회갑(回甲) 잔치를 성대하게 치렀다. 그러니 70세가 극히 드물었을 수밖에….
고희(古稀)가 70세를 뜻하게 된 것은 두보(杜甫)의 시(詩) 곡강(曲江)에서 연유한다.
당(唐)나라의 수도 장안(長安), 그 동남쪽 끝에 곡강(曲江)이란 연못이 있었다. 연못 남쪽에는 부용원(芙蓉苑)이란 궁원(宮苑)도 있어 경치가 아름다워 봄에는 꽃을 관상하는 장안 시민들로 붐비었다.
이 곡강(曲江) 변에서 두보가 몇 수의 시(詩)를 남기고 있다. 그것은 전원 원년(元年) 두보 67세때의 일이다. 두보는 이 무렵 좌습유(左拾遺)의 벼슬을 얻어서 궁중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1년도 못 되는 세월이 그가 중앙에서 일을 본 최초이고 또 최후의 나날이었다. 두보는 연소(年少)한 때부터 각지를 방랑하다가 20이 훨씬 지나 장안으로 돌아가 관직을 구했다. 허나 희망은 달성되지 못했다.
이어서 당조(唐朝)를 뒤흔드는 안록산(安祿山)의 난(亂)이 일어났다. 두보는 영무(靈武)의 행재소(行在所)에 있는 숙종(肅宗)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난군에게 잡혀 9개월 동안 유폐되었다가, 그 공에 의해 좌습유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지난해 겨울 숙종을 따라 수도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지만 숙종을 둘러싼 소용돌이 정치는 그의 마음에 의분을 불러 일으키게 하였음인지 두보는 참내도 하지 않고 곡강 근처에 머물고 있었다. 근처에서 꽃을 상완(賞玩)하는 두보의 뇌리에 오가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시(詩) 한수에서 말한다.
朝回日日典春衣(조회일일전춘의)
조정에서 퇴근하면 매일 봄옷을 저당 잡히고,
每日江頭盡醉歸(매일강두진취귀)
매일 나루에서 잔뜩 취해 귀가하네.
酒債尋常行處有(주채심상행처유)
술값은 가는 곳마다 널려 있지만,
人生七十古來稀(인생칠십고래희)
에라! 인생 칠십이 예로부터 드물었거늘.
나날이 조정에서 돌아오면 봄옷을 전당 잡혀 곡강 근처에서 취해갖고 돌아온다. 술집에 술빚은 으레 있는것, 어치피 가는 곳마다 있는 것이지만 인생은 그리 길지 않아, 옛부터 70까지 사는 사람은 드문일이다.
이 시(詩)에서 나중의 두 줄에는 옛날부터 여러 가지 해석이 있고, 또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란 전해져 내려 오는 속언(俗言)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허나 어쨌든 이 말은 두보에 의해 훌륭히 정착되어 어느 때는 애감(哀感)을 자아내게 하지만 보기 드문 나이에 달한 것을 축하하는 뜻으로 되쓰이게 되었다.
70세를 고희(古稀)라고 하는 것도 여기서 나왔다. 그리고 두보는 그에게도 70은 드문 나이였다. 중앙에서 근무하기 일년이 못 되어 지방관으로 좌천되어 그 관직도 그만 두고, 다시 각지로 방황했다.
감숙성(甘肅省) 변경에 있는 고을에서 골짜기의 고을로, 그리하여 원숭이가 먹다 남은 도토리로 주림을 면하기도 했다. 나중에 사천의 성도(成都)에서 거의 3년 동안 비교적 행복한 나날을 보내나, 그것도 파란(波瀾)되어 다시 유랑생활이 시작된다.
대력 3년 봄, 두보는 멀리 장안을 향해 배를 양자강에 띄우고 최후의 나그네 길에 올랐다. 허나 길은 막혀 배는 물위를 방황할 뿐, 대력 5년 봄에 그는 배 안에서 읊었다.
나이 든 눈에 비치는 꽃은 안개낀듯 흐리다. 아리따운 나비는 서로 어울려서 고요한 뱃전을 스치고 이곳 저곳의 갈매기는 몸도 가볍게 여울을 내려간다. 구름 희고, 산이 푸른 만여리의 저쪽, 그 정 북쪽에 장안이 있다고 하나 나는 향수에 젖어 바라본다.
이 겨울 상강에 띄운 뱃 속에서 두보는 죽었다. 59세. 하지만 오랜 유랑의 고난을 통해 그의 시(詩)는 그저 비통하지만은 않다. 이상한 아름다움으로 연마되어 이미 세상의 흐름을 넘어선 것 같다.
고희(古稀)
70세, 또는 70세에 이른 것을 축하하는 의례이다. 희수(稀壽)라고도 한다. 사람이 70세가 되면 고래로 드문 나이라며 고희(古稀)라 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오늘날에는 90세, 100세의 건강 노인도 흔하고, 노인 기준을 75세부터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지만, 평균수명이 길지 않았던 옛날에는 70 인생도 드물었을 것이다.
그래서 태어난 해의 갑(甲)으로 되돌아 온다는 60세의 환갑(還甲)만 돼도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나이에 대한 이칭은 숱하다. 일반적으로 공자(孔子)가 논어(論語) 위정(爲政)편에서 언급한 지학(志學, 15세), 이립(而立, 30세), 불혹(不惑, 40세), 지천명(知天命, 50세), 이순(耳順, 60세) 등이 많이 인용된다.
공자는 70이 되어서야 뜻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從心所欲 不踰矩)고 하여 70세를 종심(從心)으로 지칭했는데, 더 많이 쓰이는 고희(古稀)는 시성(詩聖)으로 불린 당(唐)나라 두보(杜甫)의 시(詩)에서 유래했다.
그가 정정불안으로 관직엔 운이 없고 답답한 마음으로 시작에 심취한 것이 시선(詩仙)인 이백(李白)과 함께 이두(李杜)로 불리는 영예로 남게 됐다.
두보가 수도 장안(長安)의 아름다운 연못 곡강(曲江) 가까이서 지내며 남긴 시 중에서 고희란 말이 나온다. 47세 때 쓴 ‘곡강 2’란 시의 앞부분이다.
朝回日日典春衣(조회일일전춘의)
每日江頭盡醉歸(매일강두진취귀)
酒債尋常行處有(주채심상항처유)
人生七十古來稀(인생칠십고래희)
조회에서 돌아오면 날마다 봄옷을 잡혀, 하릴없이 강가에서 만취하여 돌아오네, 몇 푼 안 되는 술빚은 가는 곳마다 있기 마련이지만, 인생살이 칠십년은 예부터 드물었네.
길지 않은 인생 즐거움을 한껏 누리자는 달관한 듯한 두보도 물론 고희는 맞지 못하고 59세 때 생애를 마쳤다.
고희(古稀)
오래되고 드물다 (칠십을 맞이하다)
古(옛 고, 오래되다)
稀(드물 희, 드물다, 적다)
고희(古稀)의 글자 그대로의 뜻은 오래되고 드물다는 뜻이다. 그 뜻이 전하여 사람의 나이 일흔 살이 되었음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두보의 시 곡강(曲江)에 나오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에서 유래되었다. 옛날에는 나이 육십 즉 환갑을 넘기는 사람이 많지 않아 환갑잔치를 성대하게 치렀으며 나이 칠십이 된 사람은 장수한 인물로 여겼다. 그래서 희귀한 사람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70 청춘이란 말이 나돌 정도로 사람의 명이 길어졌다.
1. 장수의 시대를 맞이하여
당나라의 현실주의 시인으로 알려진 두보(杜甫 712~770)는 그의 시 《곡강 2》에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하였다. 인생에서 나이 칠십은 매우 많이 산 나이이고 그때까지 사는 사람은 드문 일이라 하였다. 그러나 요즈음 칠십을 사는 사람은 참으로 많다. 가히 장수의 시대가 된 것이다. 칠십 이상의 노인이 많다 보니 희소가치는 떨어지고 노인 우대의 문제는 개인과 가정의 차원을 넘어 사회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노인 우대 문제는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개인이나 가정의 문제를 넘어 국가 사회 전체의 문제였으며 풍속을 교화하고 정비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아름다운 사회, 풍속이 바로 선 사회는 항상 노인을 공경하였으며 노인을 세상의 어른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살기가 어렵고 풍속이 사나워지면 노인을 학대하고 심지어는 내다 버리는 풍속까지 생겨나기도 했다.
노인은 수동적인 측면에서 보면 세상살이의 중심에서 밀려난 세대이지만 능동적인 측면에서 보면 세상살이의 주체적인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한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사회적 질서와 윤리 의식이 전제되어 있다. 하나는 노인은 능동적인 힘이 떨어지니 이제는 세상살이의 주체적인 활동을 젊은이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순리라는 천명의 이치를 따르는 삶의 순환 질서와 윤리의 존중이 전제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노인은 오래 살았고 힘이 떨어져 그 활동의 자리를 젊은이들에게 물려주니 젊은이들은 열심히 일하면서 노인을 돌보아야 한다는 묵시적 공경의 윤리가 전제되어 있다. 어쨌든 사람이 요절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노인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다.
노인의 시내버스와 도시철도 무료 승차가 사회적 화두가 되었었다. 노인 무료 승차가 이들의 적자를 초래하였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맞는 말인 듯하지만 맞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도시철도와 도시 버스는 노인이 타든, 타지 않든 그 시간에 운행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노인 무료 승차가 적자 운영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잘못된 견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어쨌든 노인 승하차에 시간이 소요되고 사용자의 원칙에 따라 요금을 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재정의 문제를 따지기 전에 사회윤리와 철학의 문제인 것 같다.
노인들은 한 때 사회를 일구고 발전시켜 온 주체들이었다. 그들은 나이 들어 산업 일선에서 은퇴하였으니 이제 후손들이 우대하고 공경해야 한다는 윤리적 주장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인간 윤리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인식이 변화되면서 세상은 윤리보다는 현실적인 경제적 합리주의 사고가 팽배해졌다. 이에 따라 이러한 윤리적 주장은 후퇴하고 경제적 책임의 공유인식이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사회를 일구고 발전시켜 온 주체들이 힘이 떨어지고 능동적인 활동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만으로 돌봄의 대상에서 논란이 많은 것은 어쩌면 사회 풍속이 사나워지고 있다고 보여지기도 한다. 이제 돌봄의 문제는 어린아이뿐 아니라 노인 나아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의 새로운 윤리적 책임의 지평을 열어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노인의 문제는 옛날과 다르다. 옛날의 노인은 그 숫자가 아주 적어 그야말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였지만 지금은 노인이 흔하다. 옛날에는 환갑까지 사는 사람이 많지 않아 환갑을 맞이하는 사람은 장수한 인물로 경사스럽게 여겼지만, 지금은 환갑을 맞이한 사람은 청춘 취급을 받는다. 옛날에는 나이 칠십 즉 고희(古稀)를 맞이하는 사람은 너무나 적어 그야말로 오래되고 드문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칠십 청춘이란 말이 나돌 정도로 장수의 시대가 되었다.
통계(통계청, 국민연금공단, 건강보험공단 공동 조사, 2023년 3월 말 기준)에 의하면 우리나라 노인들의 연령별 생존확률은 70세는 86%, 75세는 54%, 80세는 30%, 85세는 15%, 90세는 5%였다. 이 통계를 보면 이제 70세는 고희가 절대 아니다. 적어도 고희라고 하려면 90세는 되어야 한다. 86%가 생존하는 사람들을 오래고 희귀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확률적으로 평균 나이는 76세~78세라는 말이 된다. 70세는 희귀한 존재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그래서 70세에 고희를 맞이했다고 말하는 것은 맞지 않는 말이다. 따라서 나이 70을 고희라고 하는 옛말은 말은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 어쩌면 칠십 청춘이란 말이 맞는 말이기도 한 것 같다. 이만큼 우린 지금 장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나이 칠십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확실한 것은 신체적 정신적 역동성은 떨어지고 있음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이 들면서 중요한 것은 세상살이나 세상 문제에 너무 깊이 아귀다툼하지 말고 서로 배려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데 나이 든 사람 즉 60대들이 욕망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저지르는 범죄가 날로 늘어만 간다. 장수의 시대라서 그런지 정치인들의 나이도 갈수록 늘어나 나이 칠십을 넘기는 사람이 정치의 중심에 서서 활동하는 경우도 많다. 미국의 바이든이나 트럼프의 나이는 70이 넘었다. 그야말로 노인 정치인의 시대가 된 것이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상식에 의하면 나이 들면 은퇴하는 것이 순리인데 말이다. 그리고 나이가 든 사람들도 은퇴하려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정말 은퇴하기 싫은 분야는 정치의 세계인 듯하다. 나이 들면서도 자신을 내려놓지 못하는 욕망과 아집의 끈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어쨌든 아무리 정수의 시대가 되었다지만 나이 70대는 고희로 가는 길목이다. 70세에는 86%가 생존한다지만 75세는 54%로 뚝 떨어진다. 그리고 80세는 30%로 더 떨어진다. 급속도로 생존율이 하락하는 문턱에 섰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70대를 맞이하여서는 사회. 정치적 활동도 중요하지만 자기 관리에 더 매진하여야 할 시기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사회적 돌봄의 대상으로 본인의 고통은 물론 더 큰 사회적 비용을 투입해야 할지 모른다. 따라서 인생 70은 본격적인 자기 관리의 출발을 알리는 해로 여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장수하는 사회는 분명 복지 사회이며 살기 좋은 사회의 지표이다. 그러나 그 장수가 능동적이고 자주적인 삶이 아닌 돌봄에 의한 수동적인 삶일 경우 복지의 차원을 넘어 미래 세대에게 엄청난 짐을 안겨주는 사회적 우환(憂患)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보가 곡강(曲江)에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한 것의 의미는 인생의 유한함과 덧없음을 깨닫고 겸허함을 배우라는 의미로 전해지는 것 같다.
2. 두보의 시 곡강(曲江)과 고희(古稀)
1) 두보의 생애
문학은 그 사람의 삶과 경험과 성찰의 결과이다. 한 사람의 문학작품이 탄생하기까지 그가 경험한 세계의 성찰은 큰 바탕이 된다. 작가는 그의 사상과 삶의 방식이 삶을 형성하고 사상을 이루기도 하지만 삶의 치열한 현장과 그에 대한 성찰과 깨달음이 또한 사상의 세계를 형성하고 보완해 간다. 두보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두보의 시 ‘곡강(曲江)’을 살펴보기 전에 두보의 생애를 살펴보는 일 또한 중요하다.
두보(杜甫)는 당나라 시대의 이름난 시인이었다. 그는 북방 명문가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진(晉)나라 때 유명했던 두예의 후손이었다. 두보와 같은 유명한 문장가로 두목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두예의 후손으로 먼 집안이었다. 두예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 두탑의 후예가 두보이고 막내인 셋째 아들 두윤의 후손이 두목이다. 이들은 모두 대를 이어 세상에 이름을 알린 문장가들이었고 명문 귀족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보면 두보는 명문가의 후손처럼 그리 평탄하게 살지 못했다.
두보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어린 시절부터 풍족하고 안정된 삶을 살았다. 특히 시에 능하여 일곱 살 때 이미 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의 문학성은 타고난 것 같았다. 19세부터 부친이 산동성 옌저우(兗州-연주)에서 사마의 직을 맡고 있었기에 부친을 방문하는 것을 계기로 제나라와 조(趙)나라 지역을 여행할 수 있었다. 이는 그의 문학성을 키우는 일과 뒷날 방랑 생활에 크게 작용했을 것 같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와 23세때 고향에서 향공(鄕貢-당나라에 있었던 관리 등용 제도의 일종, 지방관)에 응시했고, 24세에 허난성 뤄양으로 가서 진사에 응시했으나 모두 낙방하였다. 그는 과거 운이 없었던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방랑과 시심이 뛰어난 그는 제대로 된 과거 공부를 하지 않았던 것이 낙방의 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제대로 된 과거 시험 공부보다는 방랑 생활을 하면서 시심(詩心)을 키우고 시를 쓰는 것을 더 즐겼다. 33세 되던 해(744년)에 뤄양을 여행하다가 당시 시선(詩仙)으로 알려진 당나라 최고의 시인인 이백(李白 701~762)을 만나게 된다. 이백은 두보보다 열한 살 위였다. 두 사람은 단번에 의기투합하여 양나라 지역(현재 허난성 카이펑)과 송나라 지역(현재 상추 일원)을 여행한다. 이후에도 두보는 다시 제주(齊州-지금의 산동성)로 가서 방랑 여행을 하다가 4년 뒤에 다시 옌저우(兗州-연주)로 가서 이백과 만났다. 이백과 두보는 나이 차이는 나지만 둘도 없는 벗이 되어 함께 술잔을 기울이면서 신선을 찾겠다고 쏘아 다녔고, 시와 문장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두 사람의 의기투합은 세상에 대한 한탄과 인생의 무상함을 공유하였고 시적 삶의 완성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두보의 삶과 세상에 대한 사색과 문장은 날로 깊어졌다. 그는 늘 사색적이었다.
두보는 불혹의 나이인 40을 넘겨 이백과 헤어진 후 방랑 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현실 정치에 눈을 뜨고 관직 생활을 하기 위해 마음을 돌렸다. 매우 늦은 나이였다. 젊은 날의 두보는 명문가 출신으로 자부심이 강했고 포부도 컸으나 불혹이 넘도록 벼슬을 하지 못했으니 시나 쓰는 한갓 촌부에 불과했다. 그의 정치적 포부는 늘 현실 정치와 맞지 않았다. 두보는 힘들게 사는 백성들을 보면서 공자가 예찬한 요순(堯舜)시대의 정치에 대한 이상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의 앞에 펼쳐지는 현실 정치는 추악하고 부패하고 권력 암투만 난무한 곳이었다. 그의 생활은 나이가 들수록 빈곤과 실망에 사로잡혔다.
현종의 조서에 따라 과거가 시행되었다. 두보도 응시했다. 그러나 당시의 권신이었던 이임보의 농간으로 응시생 전원이 낙방했다. 당나라의 정치 상황을 짐작할 만하다. 삶이 곤궁해진 두보는 과거를 포기하고 관직에 나아갈 길을 모색했다. 그래서 권문세족의 집안을 돌아다니며 글을 써주고 생활했으나 곤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차에 《대례부》란 글을 현종에게 올려 황제의 눈에 들어 관직에 나아갈 기회를 얻었으나 역시 이임보의 농간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두보가 44세 되던 해였다. 우여곡절 끝에 말단 관직을 맡았으나 어린아이들까지 굶어 죽어가는 처참한 현실을 묵도한 두보는 큰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 두보의 삶은 더 큰 곤경으로 떨어졌다.
<안록산의 난>은 거셌다. 현종은 난을 피해 장안을 버리고 도망쳤다. 태자 이형이 간신히 상황을 수습하고 현종의 양위를 받아 황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숙종이다. 두보는 숙종의 즉위 소식을 듣고 혼자 숙종이 거처하는 영무(靈武-지금의 닝시후이족 자치구인 링우시)로 가다가 반란군에게 붙잡혀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왕유 등 다른 관리들은 지위가 높아 감옥에 갇혔으나 두보는 말단 관직이라 감옥에 갇히지는 않았지만 포로 생활은 계속되었다. 그는 포로 생활 중에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시로 썼다.
세월이 흘러 그가 46세 되던 해(757년)에 곽의지가 이끄는 정부군이 장안 북쪽으로 진격하여 반란 세력을 토벌하자 두보는 장안을 빠져나가 숙종을 알현했다. 숙종은 지난날의 의리도 있고 해서 두보에게 좌습유(左拾遺)라는 벼슬을 내렸다. 이는 조정의 말단 관직이었다. 그럼에도 재상 방관의 석방을 건의했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 화주(華州-지금의 산시성 웨이난시 후화현)로 쫓겨나 허드렛일을 했다. 두보의 삶은 여전히 척박했다. 거기서 두보는 고통받는 백성들, 조금의 인정도 찾을 수 없는 서로 죽이고 죽이는 살벌한 세상, 우글거리는 간신배들을 보면서 큰 실의에 빠졌다. 이때의 두보를 일컬어 두습유(杜拾遺)라 일컬었다.
두보의 공식적인 관직 생활은 그것이 끝이었다. 두보는 다시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실의와 비탄에 잠긴 자신을 달래고 살기 위함이었다. 47세 되던 해(758년)였다. 두보는 화주를 떠나 뤄양과 허난성 등지를 떠돌던 중 업성(鄴城-지금의 허베이성 린장현 일대)에서 정부군이 반란군에게 대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두보는 곧장 화주로 돌아왔으나 오는 길에 전란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처참한 광경을 보고 그 아픈 마음을 시로 썼다. 오늘날 전하는 삼리(三吏)와 삼별(三別)이다.[**참고로 삼리(三吏)는 신안리(新安吏), 석호리(石壕吏) 동관리(潼關吏)이고, 삼별(三別)은 신혼별(新婚別), 수노별(垂老別), 무가별(無家別)이다. 이 시들은 제목 그대로 처참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두보가 48세 되던 해(759년)였다 화주와 관중 지방에 큰 가뭄이 들었다. 전란에 시달린 백성들에게 가뭄까지 겹쳐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고통스러웠다. 관직 생활은 두보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는 관직을 내던지고 청두(成都)로 갔다. 여기서 청두절도사 엄무의 도움으로 성 서쪽 완화계 옆에 초당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뒷날 이곳을 사람들은 ‘두보초당 혹은 완화초당’으로 부른다. 거기서 엄무의 배려로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이란 벼슬을 받아 엄무의 참모 역할을 했지만, 두보의 곤궁한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두보는 벼슬을 사직했다.
두보는 자신을 돌보던 엄무가 죽자 청두를 떠나 기주(夔州-지금의 쓰찬성 펑제현)로 가서 그곳 도독 백무림의 배려로 농사를 지으며 안정된 생활을 했다. 이때 두보는 그동안의 마음에 품었던 것들을 시로 녹아내렸다. 그렇게 탄생된 시가 무려 430여 수에 이른다. 57세(758년)가 된 늙어가는 두보는 향수에 젖어 고향으로 가는 마지막 여정인 배를 탔다. 그는 후난성 웨양(岳陽)을 거쳐 담주(潭州-지금의 후난성 상탄시)로 갔다가 다시 형주(衡州-지금의 후난성 형양시 일대)로 갔지만 오래 있지 못하고 담주(潭州)로 돌아왔다.
59세 때인 770년 장안의 담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두보는 외삼촌이 있는 형주로 가서 몸을 의탁하고자 했으나 강물이 불어나 발이 묶여 굶주렸다. 두보는 다시 장안의 담주로 돌아오기 위해 길고 긴 양자강에 배를 띄웠다. 그러나 두보는 굶주림과 쇠약해진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배 안에서 죽었다. 두보의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병사한 것이 정설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한 위대한 시인의 파란만장한 삶은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시는 영원히 빛을 발한다.
2) 두보의 시 곡강(曲江)의 시 세계와 고희(古稀)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말이 나오는 유명한 시 곡강(曲江)은 두보가 46세 때 숙종으로부터 얻은 첫 벼슬 좌습유(左拾遺) 자리에 있을 때 가끔 곡강(曲江)에 나가 답답한 마음을 달래면서 쓴 시였다.
곡강은 당나라 시대 도성인 장안의 동남쪽에 있는 못이었다. 풍경이 아름다워 못 남쪽에는 부용원(芙蓉苑)이라는 궁원(宮苑)이 있었다. 봄이면 그 아름다운 풍광과 꽃을 즐기는 장안의 상춘객들로 붐볐다고 한다. 두보 역시 이 곡강을 자주 찾았다.
두보에게 생애 처음 궁중 관직인 좌습유의 자리는 말단으로 그가 꿈꾸던 관직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기다가 ‘안록산의 난’은 평정되지 않았고 시국은 늘 뒤숭숭했다. 백성들의 삶은 도탄(塗炭)에 이르렀다. 이것을 지켜보며 어찌하지 못하는 두보의 마음은 쓸쓸하고 괴롭기 그지없었다. 자기가 믿고 따라온 숙종을 둘러싼 도성 안의 권력 투쟁과 소용돌이는 말할 수 없었다. 두보의 마음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나 말단 관직에 있는 주제에 어찌할 수 없는 노릇, 두보는 틈만 나면 곡강(曲江)으로 가서 곡강(曲江)이라는 연작시에 답답한 마음을 담았다. 두보의 나이 47세 때였다. 두보의 곡강(曲江)은 총 4수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1, 2수만 감상하기로 한다. 제2수에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시구절이 있다.
曲江1(곡강1)
一片花飛減却春(일편화비감각춘)
한 잎의 꽃잎 날려도 봄은 가는데
風飄萬點正愁人(풍표만점정수인)
수만 꽃잎 바람에 흩날리니 사람의 근심 어찌할까?
且看欲盡花經眼(차간욕진화경안)
지는 꽃 보는 눈 어른거림 잠깐 사이려니
莫厭傷多酒入脣(막염상다주입순)
서글픈 상처 많다 말고 술이나 마시자.
江上小堂巢翡翠(강상소당소비취)
강변의 작은 정자 비취가 둥지 틀고
苑邊高塚臥麒麟(원변고총와기린)
궁원 큰 무덤에 기린 석상 누워있네.
細推物理須行樂(세추물리수행낙)
사물의 이치 헤아려 즐겨야 하리니
何用浮名絆此身(하용부명반차신)
어찌 부질없는 이름으로 이 몸을 얽어맬 것인가?
예로부터 사람들은 말했다. 一片花飛減却春(일편화비감각춘) 一葉落天下知秋(일엽락,천하지추) 즉 꽃잎 하나 날려도 봄은 가고, 나뭇잎 하나 떨어져도 가을인 것을 안다. 세월은 덧없이 흐르고 인생은 무상한 것. 그런데도 사람들은 욕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바둥거리며 다툰다. 만약 이러한 세상살이의 이치를 좀 더 깊이 깨닫는다면 삶을 더 겸허하게 받아들일 텐데 아쉽기가 그지없구나. 세상을 한탄하는 시인의 마음이다.
봄은 가고 꽃잎은 흩날리며 세월만 흐르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지는 꽃을 바라보는 것도 잠깐이다. 생각해보니 상처투성이의 인생이다. 체념하고 술이나 마시며 세월의 근심을 잊자. 강변의 정자에 비취가 둥지를 틀었으니 한가롭다. 苑(원)은 한때 화려함을 자랑했던 부용원이다. 화복을 비는 기린 석상은 누워있기만 하고 말이 없다. 모두 부질없는 노릇이다. 삼라만상 사물의 이치는 경이롭다. 그 이치를 즐겨야 하는데 어지러운 세상에 내 이몸 부질없는 이름으로 관직에 얽어매야 하는가? 자신의 위치를 한탄하고 있다.
그렇다. 조정의 정치는 엉망이 되고 나라는 반란이 일어나 반란 세력은 백성들을 수탈하고 핍박한다. 조정에서는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장정들을 징집하고 온갖 세금으로 수탈한다. 백성들의 삶은 갈수록 도탄에 빠진다. 거기에 욕망에만 빠진 간신과 권세가들이 들끓는다. 한 때 부귀영화를 자랑하던 궁원도 외롭다. 그 가운데 말단 관직에 있는 시인은 별로 할 일이 없다. 하고자 하나 역량은 턱없이 부족하다. 살림은 빈약하여 가족들의 삶도 곤궁하다. 세월만 보내고 있다.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 없다. 시인은 곡강으로 간다. 그리고 세상을 개탄하며 한 잔술에 몸을 의탁한다. 세상 참 부질없다. 관리로서의 구민(救民)은 커녕 제 몸 하나 의탁하기도 어렵다. 의미 없다. 깊은 체념이 서려 있다.
曲江2(곡강2)
朝回日日典春衣 (조회일일전춘의)
조정에서 나오면 봄옷을 잡혀 놓고
每日江頭盡醉歸 (매일강두진취귀)
매일 강 언덕에서 만취하여 돌아오네
酒債尋常行處有 (주채심상행처유)
가는 곳마다 외상 술값 있지만
人生七十古來稀 (인생칠십고래희)
인생 칠십 년은 예로부터 드문 일
穿花蛺蝶深深見 (천화협접심심견)
만발한 꽃잎 사이 호랑나비 꽃밭 깊숙히 보이고
點水蜻蜓款款飛 (점수청정관관비)
강물 위에 잠자리 점을 찍듯 한가로이 난다.
傳語風光共流轉 (전어풍광공류전)
풍광이여 말 전하리니, 너나 나나 함께 흘러가는 것
暫時相賞莫相違 (잠시상상막상위)
이 짧은 한때 잠시 서로 소중히 여기며 원망하지 마세
두보(杜甫)는 장안의 궁궐에서 좌습유로 근무하는 동안 곡강(曲江) 가에서 1년간 술을 마시며 시(詩)를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조정(朝廷)에서 퇴근하자마자 곧바로 곡강(曲江)으로 가서 술을 마신다. 매일 가서 만취하여 집에 돌아온다. 박봉이요 살림이 곤궁하니 돈이 없다. 술값은 외상이다. 옷 하나를 벗어 저당 잡힌다. 그렇게 옷을 저당 잡히고 먹은 외상 술집이 곳곳에 있다. 人生七十古來稀 (인생칠십고래희) 어차피 인생 칠십은 극히 드문 일이나 나는 칠십을 살기가 어렵다. 생에 대한 체념이 서려 있다.
술취한 눈으로 물끄러미 풍광을 바라본다. 꽃은 만발하였고 그 꽃잎 사이로 호랑나비는 유유히 드나들며 놀고 있다. 그뿐인가? 잠자리는 물 위에 꽁지를 닿을 듯 말 듯 미끄러지듯 날며 즐기고 있다. 계절은 분명 가을이다. (제1수는 봄의 풍경을 읊었다) 조정은 어지럽고 나와 백성은 곤궁하여도 세상 만물과 자연은 평화롭고 유유하기만 하다. 어찌할까? 가을 풍광을 의인화하였다. 가을 풍광이여, 그대에게 말 전한다. 너나 나나 어차피 세월 속에 함께 흘러가는 것. 세월은 짧기만 하다. 서로 다투지 말고 원망하지 말며 평화롭게 사세. 깊은 체념이 도사려 있다.
“酒債尋常行處有 (주채심상행처유) 人生七十古來稀 (인생칠십고래희) 가는 곳마다 외상 술값 있지만, 인생 칠십 년은 예로부터 드문 일”이다. 인생은 유한하고 70도 살기 어렵다. 해결(解決)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외상 술값과 70 인생뿐이랴. 세상 수많은 일들이 다 그렇다. 그런 곤궁하고 번민 가득한 유한한 인생의 자신을 가을 풍광(風光)과 꽃밭 사이를 깊숙이 드나들며 노니는 호랑나비와 연못 위를 자유롭게 나는 잠자리에 접목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체념하며 자연과 더불어 즐겨보자고 한다. 어두운 현실에서의 시인의 낭만적 자기 추구이다.
두보에게 인생칠십(人生七十)은 정말 고래희(古來稀)였다. 그는 60도 되기 전인 59세에 고단한 삶을 이끌고 멀고 먼 장안의 고향 담주로 돌아가기 위해 양자강에 배를 띄웠으나 곪주림과 질병으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자신의 수명(壽命)을 안 것일까? 일찍이 삶을 체념하며 살아온 것일까?
어쨌든 옛날에는 人生七十古來稀 (인생칠십고래희)였다. 그래서 古稀(고희)는 나이 칠십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아마 두보 이전에도 人生七十古來稀 (인생칠십고래희)라는 말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두보가 시 <曲江2(곡강2)>에서 구체화하는 바람에 古稀(고희)는 두보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된 것 같다.
3. 노인은 어떻게 살 것인가?
전통적으로 나이 칠십을 古稀(고희)라 하여 왔지만 지금 우리나라 70세의 생존율이 86%인 나이별 통계를 보면 분명 고희는 아니다. 적어도 고희라 하려면 생존율이 5%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70을 고희라 할 일이 아니라 90을 고희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나도 고희를 맞이히자만 말이다.
농경 사회, 전통사회에서의 70세는 분명 고희였다. 그러나 고도산업사회가 되면서 의학의 발달과 위생 관념의 증진 나아가 건강에 대한 자기 관리가 생활화되면서 인간의 수명은 급속도로 늘어났다. 그리고 핵가족화와 도시화, 주택구조와 사회구조의 급격한 변화는 모든 생활방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따라서 이제 노인들은 스스로 인식의 전환이 필요다. 대접받아야 할 세대에서 무엇인가 역할을 해야 할 세대로의 인식 전환이다. 이 역할을 해야 할 세대라는 의미는 죽는 순간까지 생존을 위한 경제적 활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고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최대한 유지하는 노력이다. 노인은 노인 스스로 개인의 삶을 유지하며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국가 사회는 늘어나는 노인을 위한 돌봄 시스템의 대전환을 고민하여야 할 시점에 온 것 같다. 나 스스로 곧 고희를 맞이하며 노인 문제를 생각해 본다.
[참고]
전통적으로 전해오는 연령을 나타내는 말(한자어)
○ 지학(志學) - 15세 –학문에 뜻을 두었다. 인생의 좌표를 결정하는 나이다.
○ 약관(弱冠) - 남자 나이 20세- ‘약관(弱冠)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다’와 같이 아직 어린 나이지만 어떤 일을 해낸다.
○ 이립(而立) - 30세- 세상살이에서 홀로 서다.
○ 불혹(不惑) - 40세- 어떤 유혹이나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 지천명(知天命) - 50세 – 천명 즉 하늘의 뜻 세상의 이치를 알고 따른다.
○ 이순(耳順) - 60세 – 귀가 열리다. 듣는 것마다 이치를 알고 순응하다.
○ 화갑(華甲)- 61세 - 화(華)는 십(十)이 여섯 개에 일(一)이 하나 있어 61세이다, 회갑(回甲) 또는 환갑(還甲)이라 한다.
○ 진갑(進甲) -62세 – 새로운 60갑의 갑(甲)으로 나아가는 나이이다.
○ 고희(古稀) - 70세 – 오래되고 귀한 나이다
○ 종심(從心) - 70세 –공자의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에서 유래했다. 마음먹은 대로 해도 이치에 어긋남이 없다.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 희수(喜壽) - 77세 –희(喜)자를 칠(七)로도 썼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77세는 즐거운 나이다.
○ 산수(傘壽) - 88세 - 팔(八) + 팔(八)의 나이
○ 미수(米壽) -88세 - 미수 (米壽) ‘米’의 파자(破字)가 ‘八十八’인 데서 온 말
○ 졸수(卒壽) - 90세 – 졸하여도 여한이 없는 나이
○ 백수(白壽) - 99세 – 이제 곧 100세다. 그야말로 백발(白髮)의 나이다. 무엇을 더 원하랴.
▶️ 古(예 고)는 ❶회의문자로 여러(十) 대에 걸쳐 입(口)으로 전해온다는 뜻이 합(合)하여 옛날을 뜻한다. 十(십)과 口(구)를 합(合)한 모양으로 十代(십대)나 입에서 입으로 전하다, 낡다, 옛날의 뜻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古자는 ‘옛날’이나 ‘예전’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古자는 口(입 구)자와 十(열 십)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古자의 갑골문을 보면 口자 위로 中(가운데 중)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입’과 ‘방패’를 표현한 것이다. 방패는 전쟁에 쓰이는 무기로 古자는 오래전에 있었던 전쟁 이야기를 말한다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전쟁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후세에게 들려준다는 의미인 것이다. 古자에 攵(칠 복)자를 더한 故(옛 고)자가 ‘옛날’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참고로 口자를 ‘세대’로 해석하여 古자는 10세대를 거친 것이니 ‘옛날’이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는 풀이도 있다. 하지만 갑골문에서의 十자는 丨자 형태로 그려졌었기 때문에 같은 시기 古자에 그려졌던 中자와는 모양이 다르다. 그래서 古(고)는 헌 또는 낡은의 뜻으로 ①옛, 예, 예전 ②옛날 ③선조 ④묵다 ⑤오래 되다 ⑥예스럽다 ⑦순박하다 ⑧잠시(暫時) ⑨우선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예 석(昔),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이제 금(今), 새 신(新)이다. 용례로는 옛날과 지금을 고금(古今), 옛 시대를 고대(古代), 옛 일을 고사(古事), 옛 역사를 고사(古史), 옛날 사람을 고인(古人), 옛날부터 현재까지를 고래(古來), 옛적부터 내려오는 관례를 고례(古例), 예로부터 전해 내려옴을 고전(古傳), 옛날의 법식이나 의식 또는 고대의 책을 고전(古典), 오랜 역사를 지니는 옛 절을 고찰(古刹), 오래 전부터 그 일에 종사하던 사람을 고참(古參), 낡은 당집을 고당(古堂), 옛날에 지은 오래된 성을 고성(古城), 옛 궁궐을 고궁(古宮), 고대의 무덤이나 옛 무덤을 고분(古墳), 70세를 일컬음으로 일흔 살까지 산다는 것은 옛날에는 드문 일이다는 뜻의 고희(古稀), 고금을 통하여 홀로 뛰어남을 고금독보(古今獨步),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풍속을 고래지풍(古來之風), 늙은이들의 말로 예로부터 전하여 옴을 고로상전(古老相傳), 오래 되어 옛날의 풍치가 저절로 드러나 보이는 모양을 고색창연(古色蒼然), 옛날부터 지금까지를 고왕금래(古往今來), 가락이 썩 예스러워서 화창하는 이가 없음을 고조독탄(古調獨彈), 대대로 자손이 번성하고 세력 있는 집안을 고족대가(古族大家), 옛 모양 그대로임을 고태의연(古態依然), 옛 곡조라서 연주되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움을 비유하는 고조불탄(古調不彈), 오래 된 우물에는 물결이 일지 않는다는 뜻으로 마음을 굳게 가져 정절을 지키는 여자를 비유하는 고정무파(古井無波) 등에 쓰인다.
▶️ 稀(드물 희)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벼 화(禾; 곡식)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적다의 뜻을 가진 希(희)로 이루어졌다. 벼가 적다의 뜻이 전(轉)하여 드물다의 뜻이 되었다. 그래서 稀(희)는 ①드물다 ②드문드문하다 ③성기다(물건의 사이가 뜨다) ④희소하다 ⑤적다 ⑥묽다 ⑦묽은 것 ⑧묽게 된 것 ⑨멀건 것 ⑩극히 ⑪매우 ⑫아주,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윗 상(上), 밝을 앙(昻), 드물 한(罕), 귀할 귀(貴)이다. 용례로는 일이 그렇게 될 희망이나 가망이 적음을 희박(稀薄), 드물어 매우 귀함을 희귀(稀貴), 세상에 드물어 흔히 없음을 희대(稀代), 또렷하지 못하고 흐릿함을 희미(稀微), 몹시 묽게 섞어 타거나 풂을 희석(稀釋), 일흔 살을 달리 이르는 말을 희년(稀年), 일흔 살이 되는 해의 생일 잔치를 희연(稀宴), 어떤 현상이나 대상이 좀처럼 대하기 어려울 만큼 특이하거나 기묘함을 희한(稀罕), 드물고 썩 적음을 희소(稀少), 흔하지 아니함이나 드물게 있음을 희유(稀有), 소식이 드문드문함을 희활(稀闊), 조금씩 흩어짐을 희산(稀散), 보기 드문 귀한 책을 희서(稀書), 세상에 드묾을 희세(稀世), 드물고 괴이함을 희괴(稀怪), 매우 드문 성을 희성(稀姓), 70세를 일컬음으로 일흔 살까지 산다는 것은 옛날에는 드문 일이다는 뜻을 고희(古稀), 썩 드물어 좀처럼 듣지 못함을 희대미문(稀代未聞), 세상에 드문 재주를 희세지재(稀世之才), 드물기 때문에 인정되는 가치를 희소가치(稀少價値), 달이 밝으면 별빛은 희미해진다는 뜻으로 한 영웅이 나타나면 다른 군웅의 존재가 희미해짐을 비유하는 말을 월명성희(月明星稀)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