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桂沙公의 정열, 발분망식(發憤忘食)
▲계사(諱 성호)公(1927~2013年
1.들어가는 말 | 4. 탐구영역 |
2. 학문연구법 | 1) 씨족사 |
1) 계사정사 | 2) 향토사 |
2) 응취실 | 3) 실용문과 名文분석 |
3) 연역적 사고 | |
3. 문중 내 위상 | 5. 씨족내외 평가 |
1) 역사와 씨족사의 수렴 | 1) 한국보학연구회 |
2) 보의의 대맥 | 2) 도문회와 대종회 |
3) 동기와 좌절 | 3) 송당공과 원산評 |
(1) 덕운옹의 권유 | |
(2) 종보흑사 | 6. 나가는 말 |
「한없이 배움을 좋아하셨고, 옳음과 완벽함을 좇는 자존심 또한 강하신 성품으로 정해진 목표를 향한 의지는 자식의 입장에서 존경과 羨望의 대상이었습니다. 거칠고 때 묻은 나락의 겨를 벗기고 깎아 백옥같이 흰 쌀을 精製하는 열정을 소유하셨습니다. 최고의 씨족사가 되도록 철저히 고증하는 시간들을 외롭고 힘들게 보내셨던 그 書室을 들어 설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不孝子 承復)
1. 들어가는 말
계사公은 발분망식(發憤忘食)의 정열로 노후를 살았다. 공자는 논어(論語) 술이편(述而篇)에서 “자신이 발분하여 끼니마저 잊고 힘쓰며, 즐거워하여 근심을 잊고 장차 늙음이 닥쳐오는 것도 모르고 사는 사람(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으로 후세들로부터 평가받기를 바랐었다. 송사(宋史)소순편에서 소순(蘇洵)은 늦은 나이에 학문에 정진하여 “27세가 돼서야 비로소 발분하여 공부에 힘쓰기 시작했다(年二十七始發憤爲學.).”라고 한다.이처럼 ‘발분’은 학문에 정진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여기에 ‘도강(圖强)’이 더해진 것은 청나라 말의 강유위(康有爲)에 의해서였다. 강유위는 열강의 침략에 맞서기 위하여 변법자강(變法自疆) 운동을 펼쳤는데, 광서제(光緖帝)에게 올리는 상소에서 적극적으로 정치를 개혁하여‘발분도강’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로부터‘발분도강’은 개인이나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하여 노력한다는 뜻으로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계사公은 잘못된 씨족사를 정사(正史)로 바로 잡는데 발분망식했다. 문중 내외의 조직과 사람들이 주는 고난을 이겨내고자 우직한 소걸음은 왕성한 저술활동으로 귀결되었다. 결국 화장(化粧)의 고리를 끊는 마중물을 채웠다. 탁월한 업적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고자 했다. 여기서는 公의 학문에 대한 경계를 세 가지로 분석했고, 문중 내 위치를 두 가지 에피소드를 곁들여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학문에 대한 탐구분야와 씨족내외 평가를 덧붙인다.
2. 학문연구법
일제치하에서 태어나 대동아전쟁 징집을 피하려 고향을 떠나 부산과 함경도를 전전했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배움의 때를 놓쳐버렸으나 약종상 시험에 합격 생업이 되었다. 公은 환갑이 되어서야 덕운옹의 권유로 씨족사에 입문해서 약 20여 년간 진력해 씨족사의 대맥을 형성하게 되었다. 남다른 열정과 최고의 씨족사가 되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경계로 작용했다. 서재에‘桂沙精舍’라고 헌액하여 매일 보고 읊조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응취실, 계사정사
1) 계사정사
계사公 족보연구의 열매는 씨족사의 正史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그 이면에는 알려지지 않은 몇몇 이야기가 있다. 장흥 부산면 효자리에 자리 잡은 자택에서 주로 학문탐구에 매진했는데 1927년생으로는 어울리지 않게 컴퓨터를 사용하는 신세대였다. 매일매일 연구한 엄청난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서는 전산화작업이 선행요건이었다. 자유로운 컴퓨터 사용법이 커다란 장점으로 작용했다. 서재인 계사정사의 다른 이름으로 응취실이라 부르기도 했다.
앞의 계사정사는 금방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계사(桂沙)란 아호와 쌀을 찧듯이 열정적으로 학문에 매진하는 장소라는 정사(精舍)를 조합해 만든 합성어이다. 여기서 핵심키워드는 결국 정이다. 마치 방앗간에서 나락이 쌀로 변하는 그 작업을 연상하여 정(精)자를 차용했다. 학문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의 경지가 아니라 있는 것이라도 열정을 가미하면 나락이 쌀로 탄생하는 방앗간, 즉 정미소의 역할인 무한 열정과 에너지에 가치를 부여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덕운옹은 계사公의 열정에 대해 ‘강한 탐구심, 끈질긴 집념, 투철한 판단력으로 결론을 내리는데 논고는 반드시 육하원칙에 의하여 결론지으려 하며 그 근원을 밝힐 수 있는 한 시간가는 것에 구애 없이 명확한 답을 얻어야 펜을 멈춘 끈질긴 근성의 소유자이다. 그가 활용한 각종 사전이나 책들은 장장마다 참고의 문증(스크랩), 부전 등으로 빠진 면이 없으니 그의 학문하는 태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항시 책을 상대로 책상머리를 비울 때가 없다.’고 회고했다.
결국 계사정사의 의미는 열정을 뜻한다. 나락이 쌀이 되기 위해서 수만 번의 방아질이 필요하듯 公은 서재의 이름을 통해 자신의 게으름과 나태를 경계하고자 했다. 원산도 계사公의 열정을 ‘80세에 PC사용은 적극성과 진취성, 즉 세상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했다. 사전류는 책이 부채모양으로 앞뒤의 표지가 서로 마주쳐 있었다. 너무나 많이 본데다 갈피 속에 내용을 보강하는 쪽지를 삽입해서 생긴 결과이다’라고 열정 맨 계사公의 이미지를 단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더 나아가 아직 인터넷이 상용화되기 이전이라 국내에 있는 책은 물론 해외에서까지 구입해 연구에 활용했다. 서점에서 구하기 어려운 책은 직접 서울의 국회도서관이나 국립도서관을 찾아 상경하기도 했다. 이렇게 한 권 두 권 모은 책이 서실의 네 벽을 모두 채우고 서실 중앙에도 가득 찼었다니 그 열정은 가히 폭발적이었다고 서실방문자를 통해 전해져온다. 방앗간의 끈질긴 방아질처럼 계사公의 열정으로 인해 불세출의 금자탑을 세우는 모선의 주역이 되었다.
2) 응취실
서실입구 벽에는 응취실이라고 적힌 커다란 액자가 걸려 있었다. 응취실(凝翠室)의 뜻은 과연 무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았고 후손에게 전화해서 물어보기도 했다. 응(凝) 字는 엉기다는 의미이니, 물총새취색(翠) 과 엉기다는 뜻이 아닐까? 아쉽게도 계사公께서 이미 2013년 11월 11일 작고하셨으니 아직 의문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여러 서책을 뒤져보고 인터넷을 검색하기도 했다. 유교의 생명관은 이기의 凝聚를 태어남으로 보았으니 엉김은 생명의 탄생으로 보인다.
취색(翠色)이란 남색과 파란색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색이다. 흔히들 고려청자를 비색(秘色)이라 부르는데 실상은 색깔의 의미가 아니라 궁궐과 같은 고위층의 관료사회에서 사용하는 비장품(秘藏品), 즉 비밀스런 물건을 의미한다. 실제로 자세히 살펴보면 그 색은 비취옥과 같은 녹색을 띠는 취색이다. 차운정한산군이영숙(次韻呈韓山君李穎叔)이라는 한시에서도 ‘松山翠色晩晴餘(송산취색만청여)/늦 푸르게 하는 여유로 송산을 비취색으로 만드네!’라고 취색을 읊고 있다.
조선시대 다시(茶詩)에서 가장 좋은 차에 대해 ‘색은 취색(翠色), 맛은 옅은 우유나 치즈 맛, 향은 진향, 난향, 순향, 청향’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취색이란 자연적으로나 인공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색이다. 고려청자와 차의 색을 통해 밝혀진 (翠) 자는 응취실의 (翠) 자와 일맥상통한다. 실(室) 字는 생전 씨족사를 연구하던 서재로 봄이 바람직하다. 숨겨진 선조의 흔적을 찾아 고군분투했다. 결국 「최고의 색을 만들고자 하는 바람」인 것이다.
3) 연역적 사고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문과와 이과는 학문을 탐구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 문과계통은 통상 귀납적 사고를 중시하고, 이과계통은 연역법에 따라 학문연구가 이루어진다. 계사公의 학문연구는 연역(演繹)의 방식에 치중했다. 사전에서 말하는 연역적 사고란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원리에 따라, 혹은 진리 보존적 추리규칙에 따라 주어진 전제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는 방법’이다. 즉 이미 확립된 명제로 합리적으로 진리를 전개를 해나가는 방식을 말한다.
예를 들면, ‘시조공은 신라인이다. 신라의 대아찬은 오로지 김유신 뿐이다. 그러므로 시조공은 대아찬이 아니다’라는 논리이다. 또 다른 예로 ‘판사공의 묘가 진도에 소재한다. 판사공은 장흥에서 타계했고 고향에 묻혔다. 그러므로 진도의 판사공묘는 허구이다.’ 이런 삼단구조의 연역법을 전개하기 위해 엄청난 자료가 필요하다. 더 나아가 전거를 통해 고증하기 위해 상록수 열정과 오랜 탐구시간이 필수적이다. 끈기와 열정의 대명사 계사公에게 적절한 학문법이다.
연역적 사고에 의한 원리의 정립은 수백 년에 걸쳐 이루어지는 것이 통례이다. 왜냐하면 확립된 명제일지라도 서로 연관성을 지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철저한 검정절차를 거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단기간에 씨족사에 빛나는 성과물을 도출한 계사公의 업적이 남다른 이유이다. 의심나는 씨족사의 타켓을 선택하고 그 목표물에 대한 집요한 탐구력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장점이다. 결국 계사公의 업적은 연역적 사고를 몸에 체득시킨 선택과 집중에 따른 결과물이다.
公은 善한 영향력에 한 가닥 기대를 걸었고, 그 기대는 씨족사회에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희망이란 미래의 시간이라 아무리 현재가 어렵고 힘이 들지라도 인내를 낳게 하는 마법이기도 하다. 이는 마치 다랭이 논 하나에 물이 기득차서 조그만 물길을 터주기라도 하면 먼 이웃의 논들까지 점차 물이 가득 차는 ‘넘침의 원리’이다. 이러한 선한 영향력은 후세들에게까지 이어져 씨족사를 연구하는 풍토를 진작시키고 씨족사를 바라보는 관점의 근본적인 혁신을 가져왔다.
3. 문중 내 위상
우리 씨족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다. 걸출한 선현들이 남다른 예지로 우수한 씨족문화를 창조해왔다. 그중에서도 족보문화는 씨족의 큰 자랑거리이다. 계사公의 연구는 만암공의 계보를 이은 250년 보의의 대맥(大脈)을 형성한 1,400년 씨족사의 금자탑이다. 덕택에 문중의 위상은 향상되었고 타 씨족에 비해 손색없는 족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온갖 형극과 역경 속에서도 묵묵한 걸음으로 씨족의 새 역사를 창조한 영광의 주인공, 바로 계사公이다.
1) 역사와 씨족사의 수렴
연구한 학문은 크게 두 갈래로 기록되어 책으로 엮어졌다. 먼저 개인적으로 관북장흥위씨 월명송과 장흥위씨종보 및 장흥문화지에 꾸준히 기고한 글을 모아 2007년‘계사 소고집(上, 下)’을 발간했다. 또한 문중에서는 ‘250년 족보사 문제점 정리, 장흥위씨 보의논총(2010년)’, ‘보의론연구보고서 수보조항의 세계조 번복 경위와 진상(2013년)’을 펴냈다. 계사공과 대논쟁을 벌여 정현사파(正顯邪破)를 내건 천관공도 연사록(燕私錄, 1992년)을 발행했다.
보의 대논쟁은 638년 시조공 동래 이래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 자명하다. 1759년 영이재공의 기묘초보 편찬으로 시작된 족보사는 시조공, 중시조공, 판사공께서 그 중심에 서있었다. 대논쟁으로 인해 세 선조의 기록을 수정해야하는 진퇴양난의 위치에 서있었다. 결국 계사公과 천관공의 수준 높은 씨족사 대논쟁은 문중전체에 엄청난 파장과 더불어 족보사의 대 국면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슬기롭고 강단있는 선현들의 고증 덕택에 보다 올바른 씨족사를 갖게 되었다.
세 선조는 신라, 고려, 조선 초기 인물이다. 아무래도 조선 초기 이전의 기록을 전거에 의해 고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영이재공께서 기묘초보를 편찬할 때 정확한 사료가 없어 구전이나 가승에 의존하는 경우가 있었다. 250년간 여러 차례 족보가 새로 편찬되면서 씨족사는 시대적 상황에 부응하여 수정되는 경향도 있었다. 전거에 의해 철저한 고증으로 검정절차를 밟아야 하나 이를 강제할 수는 없었다. 대논쟁은 악순환의 반복 고리를 끊는 계기가 되었다.
악순환의 반복 고리는 씨족사와 역사의 충돌을 야기한다. 씨족사는 역사와 달리 고증자료가 극도로 빈한하여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역사에 비추어 과장되거나 오류부분이 많이 드러난다. 크게는 선조미화적업이 도를 넘어 신화나 전설까지 등장하는 경우도 흔하다. 작게는 상훈과 품계, 아호, 관직명, 연대와 같은 객관적인 사실조차도 과장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를 바로 잡고자 혼신의 열정으로 씨족사와 역사의 충돌을 수렴시킨 선구자, 계사公이다.
公의 연구는 세 선조의 역사적, 시대적 배경을 철저히 파고들어 보다 합리적인 관점에서 역사에 씨족사를 비추어 새로운 시각으로 족보의 체계를 바라보고자 했다. 여기서 두 키포인트는 합리와 역사에 대한 이해력이다. 계사公의 연구결과가 대부분 씨족의 정사로 자리매김한 것은 광범위한 역사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 객관적으로나 합리적으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의 흔적을 찾는 과정이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닌 노력의 산물이다.
公은 늘 학문에 목말라했다. 갈급한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지식에 대한 목마름으로 늘 가득 차있었다. 또한 호랑이는 배가 고파도 풀을 먹지 않듯 時流에 매몰되지 않는 진실을 향한 외침은 고독으로 이어졌다. 결국 지식에 대한 갈망과 진실에 대한 열망이 융합되어 굽은 길을 곧게 하고 굴곡진 길을 평탄케 하는 선구자가 되었다. 마치 타오르는 활화산처럼 꺼지지 않는 뜨거움으로 分秒조차도 아낀 나날이 장장 이십여 년이나 지속되었으니 그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2) 보의의 대맥(大脈)
보의의 대맥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이재공은 세계. 수관분야에, 존재공은 수관, 구보의 기록내용, 삼세대간 연조와 새대 차에 대해 견해를 피력했다. 만암공은 회주군의 동래시기, 사기에 등장한 위씨들, 개성부 고호적과 구보의 상계, 시중 창주의 관직명, 평장사공 기노 급제시기, 충렬공 계정의 생졸년, 원개 문개와 순과 선의 혼란, 충렬과 원개의 세대와 연대 차, 충의 관직과 휘 명, 생원공 휘 자공 입북연대, 건공장군 돈의 한자에 대한 소론이다.
죽오공은 구보와 세계에 대한 의문, 기묘초보 의문점에 대해 견해를 제시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천관(휘 민환)공은 大覺官, 大角干의 誤傳, 비진골은 선조의 모독, 대각간시중공은 나계인 분명, 정확한 실전연수는 283년, 판사공 충의 사적에 대해 보관을 제시했다. 송당(휘 재형)공은 시조공 입국에 따른 두 가지 견해, 신라 때의 방조, 족보기록과 동경잡기 誤를 제시했다. 계사(휘 성호)공은 봉건국가의 봉군문제, 회주군 사적비문, 5~7세간 연대 차, 진도유배와 묘소진위, 기묘대동보의 평가 등에 대해 그간 연구성과로 보관을 피력했다.
우리나라 족보는 대부분 18세기 후반에 만들어졌다. 족보가 없으면 상놈이라는 세태가 지배적이라서 신라나 고려까지 족보를 소급하여 만드는 일이 허다했다. 일련의 계보로 동일한 선조를 만들기 위해 먼 위대에서 분파된 것으로 선조의 세대를 크게 올렸다. 더 나아가 선조와 항렬이 어긋나서 대수를 대중 맞추려고 몇몇 대는 없는 선조를 허구의 인물로 채우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아무래도 기록이 거의 없어 구전이나 가승에 의존해야 하는 어려움의 방증이기도 하다.
계사公은 세대수에 대해‘5세 계정, 6세 소, 7세 원개 간에는 가히 풀 수 없는 난제가 있다. 즉 계정의 졸년이 1107년이다. 그 손자인 7세 원개의 생년이 1226년이다. 1226년에서 1107년을 빼보니 119년이라는 년차가 나온다. 5세 6세 사이에 두 분의 할아버지가 더 계셔야 상식이 통하는 세대의 연대가 맞아 떨어진다는 계산이 나온다. 기록에 없는 것, 사실이 아닌 것은 어떤 난관이 있어도 일시적 미봉책으로 보첩에 기록하지 않아야 한다’고 자신의 견해를 명확히 밝혔다.
논어 자로편에 이런 글이 있다. ‘군자(君子) 화이부동(和而不同) 소인(小人) 동이불화(同而不和)’‘군자는 서로 다르면서도 다름을 인정하고 화합하지만, 소인은 서로 같은 듯 무리지어 다니면서도 어울리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그 말을 토대로 한 파생어가 구동존이(求同存異)이다. 구동존이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같은 점을 찾는 것’ 즉, 협력해 함께 이익을 얻어야 함을 뜻한다.
여러 보의의 논점 중에서 명확하게 사실로 규명된 팩트에 대해서는 씨족사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명확치 않은 논점에 대해서는 후세에 맡긴다는 의견이다. 조선중후반 역사는 그나마 기록이 많아 고증자료로 활용되지만 신라, 고려시대의 역사는 자료가 부실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를 적용하면 세대수에 대한 公의 견해가 바로 구동존이의 모범이다. 씨족사 연구의 석학 계사公이 내린 결단이다. 결국 세대차에 대한 연구는 후세의 몫으로 맡겨진 셈이다.
3) 동기와 좌절
씨족사는 마치 골리앗처럼 난공불락의 성(城)으로 우뚝 서 있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우군은 없고 오로지 키에 까불러지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소년 다윗이 가진 것은 물맷돌 다섯 개였는데 계사公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열정과 애족심, 달랑 그 두 가지 뿐이었다. 막상 부딪히려니 겁이 덜컥 났고 자신감도 없었다. 그러나 환경에 무작정 굴복할 순 없었고 시류(時流)에 양심을 저버릴 수도 없었다. 만약 시류에 따른다면 씨족사의 죄인이 될 것이 자명했다.
인생길에는 누구나 애환이 도사리고 있는 법이다. 그 애환은 흔적과 신기루로 有無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하다. 계사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숨은 이야기가 있다. 우리 씨족관련 에피소드 2제를 싣는다. 먼저 씨족사 연구에 몰두하게 된 동기는 知音 덕운옹의 사려 깊은 권유에서였다. 또한 문중 내에서 벌어진 계사公 논문에 대한 종보게재 거부사건이다. 이 기간 3년은 종보의 암흑기로 公에게 최대 좌절을 안긴 슬픈 역사이다. 종보흑사란 부제로 반면교사로 삼고자 한다.
(1) 덕운옹의 권유
계사公과 덕운옹, 두 분은 유독 닮은 점이 많다. 먼저 성씨가 같고 1927년 정묘(丁卯)년 토끼띠 갑장이다. 약업인이라는 직업뿐만 아니라 전남보학회와 장흥문화원 회원으로 함께했다. 무엇보다 장흥에서 태어나 문중활동에 온 힘을 기울여 진력했다는 점이 닮은꼴이다. 두 분의 행록은 ‘보정 장흥위씨요람(2018)’의 Ⅵ. 모선주역편 17호, 18호의 주인공으로 나란히 등재되어 있다. 즉, 족보 오류모순을 밝힌 계사공, 평생 모선사업에 헌신한 덕운옹이다.
두 분 사이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숨은 이야기가 있다. 1980년대 초반 덕운옹은 계사公에게 족보에 대한 연구를 전격 제안했다. 의심나는 부분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반드시 현장을 수차례나 찾는 남다른 열정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간절한 권유에 힘입어 계사公은 1986년과 1987년 자공공 유장비와 시조공 사적비 건립을 계기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어 2000년대 중반까지 약 20년 이상 지속되었다. 결국 씨족사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새로이 거듭나게 되었다.
그러나 두 분의 성품과 상황은 판이했다. 덕운옹은 포용, 후덕한 이미지로 각인된 반면 계사公은 ‘본질을 논한 진실의 자료’를 문중에 관철시키기 위해 성과 질이 매우 강하게 표출되었다’고 그의 저서에 기록하고 있다. 또한 문중 내 상황도 덕운옹은 다수파 장천문중의 일원이요, 계사公은 소수파 사월파였다. 그만큼 계사公의 파란곡절이 컸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이 간다. 결국 문중에 기여하는 방법은 다를 찌라도 끝내 한길임을 두 분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2) 종보 흑사(黑史)
장흥위씨종보는 1995년 창간호를 발간한 후 2021년 현재 27년째 꾸준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계사公도 19편을 기고해 종보를 빛냈다. 그러나 2001~2003년에 발행된 제7~9호에는 公의 글이 없다. 종보의 발행자인 대종회가 公의 글에 대해 게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무려 3년간이나 대종회와 公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지속되었다. 당시 종보 편집장이었던 송당공도 난처한 입장이었다. 그래서 송당공도 계사公의 수난에 동조하여 결국 절필을 선언하고야 말았다.
바로 진도의 판사공 유적에 대한 문제가 발단이었다. 선조현창이라는 명목으로 이미 시행된 문중사업이라 이를 부정하는 公의 정론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3년간 기고문 등재거부라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에 대해 계사公은 ‘올바른 주장이 모든 사람에게서 항상 환영을 받지는 않는다. 수많은 사람의 이익과 관련 될 때는 올바른 주장이 오히려 배척을 당할 때가 적지 않다. 그러므로 여론이 항상 옳지는 않다’라는 옛 성현의 말로 위안을 삼았다.
公의 글에 대한 등재거부사건은 장흥위씨종보사 중 3년 암흑기이다. 먼저 기묘대동보(1999년)에 이미 계사公의 학문적 연구결과를 대부분 반영했다. 더구나 계사公은 족보의 발(拔)을 찬했다. 이는 당시 문중역사의 최고권위자로 객관적으로 인정했다는 방증이다. 거부와 인정, 상호 모순된 결과다. 또한 ‘막연하게 어른들께서 하신 일, 전해오는 일, 없는 사실도 있다고..’라는 고증되지 않는 사사(邪史)의 편에 섰다는 점에서 암흑시대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4. 탐구영역
계사公의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화두는 ‘팩트’였다. 상록수 열정과 더불어 흔적을 찾는 세월의 시간을 퍼즐을 맞추듯 매진했다. 순수와 실용, 내적동기와 외적동기로 굳이 구분한다면 실용과 외적동기에 속한다. 족보미화의 고리를 끊는 마중물로 작용한 씨족사, 장흥의 지명유래와 유적산책에 대해 100여 편의 기록으로 기염을 토한 향토사, 또한 100여 편의 실용문(記, 文, 辭, 書 등)은 장흥산하에 살아 숨 쉬고 있다. 대부분 주변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작성되었다.
▲발분을 웅변하는 서재의 모습
1) 씨족사
2,000년 이전 씨족사 탐구는 불과 몇몇 종친들에 한에 간헐적으로 진행되었다. 계사公이 당대 최고의 씨족학자로 자리매김 한데에는 자의적으로라기보다 시대적인 요청에 의해서이다. 1999년 기묘대동보 발을 찬하고, 연구의 결과물이 대부분 족보에 반영된 것은 자신에게는 영광으로 씨족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또한 계사公의 씨족사 연구결과물은 좋은 영향력으로 뻗어나가 후세에게 전해져 씨족사 1,400년 만에 ‘장흥위씨요람’이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었다.
公의 씨족사 연구의 결정체는 2007년 발행한 계사 소고집 상(桂沙 小考集 上)이다, 크기는 A4로 분량은 무려 462쪽에 이른다. 내용은 15편의 씨족사 관련 논문이 대부분으로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격조가 높다는 평이 자자하다. 수필 8편에서는 계사公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다. 발간사는 계사公이, 축간사는 송당공과 덕운옹 및 원산과 김기홍 장흥문화원 원장이 맡았다. 저서 계사소고집은 계사公 개인의 저서라기보다 씨족의 역사서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462쪽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씨족사는 위씨 성의 향조와 그 연원, 보의 관련 족보분석, 시조공 사적비와 판사공 묘비, 상계 5세, 6세, 7세, 보명탑과 야육왕탑 답사기, 고려 충신 합문판사 충조 묘비문, 기묘대동보 기대와 발, 자공공 기념사업, 하산사 입로 표지석건립의 애환, 재각 순례기행, 위대한 선조의 찬가, 지제지 서문과 보관(譜觀)논쟁, 나라 위자를 성위자로 통일하는 길, 세와 대 동일하다 등이다. 특히 기묘대동보 발은 명문으로 후손들에게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외에도 우리 문중의 당면과제, 종친회의 을유경장, 병풍암 보살상은 원감국사인가? 내몽고 대초원 빠오기행, 인간의 장수욕구는 무한한가? 김삿갓의 보림사 과차, 으악새와 억새, 천관산약기가 있다.
2) 향토사
계사소고(下)는 A4 크기로 분량은 454쪽, 2007년 발간했다. 내용은 지명고찰편 2편, 장흥군 里名유래 10편 76개 마을, 유적산책편 7편, 장흥부의 승격년 재정립, 장흥의 지명의 유래, 장흥군 이명(里名)유래, 관산석장승 여원연합 수군, 왜 진서대장군인가 시론(진서대장군의 정체), 지석 소고, 장흥의 솟대마을, 부산면 유양리의 유기, 삼전도비 등이다. 이외에도 상패, 진정, 묘표문을 실었다. 대부분 향토색이 짙은 논문으로 특히 장흥권의 76개 마을에 대한 글이 백미이다.
아무나 쉽게 쓸 수 있는 그런 논제가 아니라 내용에 따라 역사나 지리뿐만 아니라 다양하게 박학다식해야 했다. 장흥문화원 회원으로 장흥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심취했기 때문에 매우 넓고 깊은 향토사에 대한 글을 쓸 수 있었다. 지역에서 역사적으로 숨어 있는 이야기를 발굴해 이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자세를 취했다. 계사公만이 할 수 있는 차별성이 빛나는 명문이다. 장흥의 형토사를 연구하고자 하는 후학들에게 주옥같은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씨족사 연구가 시대적 요청에 의한 것이라면 향토학 연구는 다소 자의적인 내적동기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여 진다. 장흥문화 제13호(1992년)부터 제27호(2007년)까지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논문을 기고했다. 장장 16년간이다. 이렇게 꾸준히 연구한 향토학자가 씨족 내외를 통틀어 장흥권에서 드문 케이스이다. 장흥의 지명유래와 유적산책에 대해 100여 편의 기록을 남기는 기염을 토했다. 기승전결로 구사된 계사공의 책은 아무라도 흥미를 유발하는 마력을 지녔다.
3) 실용문
문장지인(文章之人)이란 무엇인가! 바로 순수와 실용을 넘나드는 언어의 마술사를 일컫는다. 당시 장흥지역에서 계사公을 최고의 문장이라 불러도 결코 지나침이 없다. 장흥위씨 뿐만 아니라 장흥의 다른 씨족에서도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혈족과 비혈족으로 나눈다면 7대 3 정도이다. 공의 흔적은 장흥산하 곳곳에 수없이 산재해 있다. 총 100편의 유문(遺文)이 있는데 기 2편, 묘지문 33편, 묘표 1편, 문 26편, 비문 5편, 사 7편, 서 5편, 음기 6편 등이다.
記는 저존각과 명성각이며, 文은 묘비문과 비문 및 순수한 문으로 백당위공휘삼환 묘비문, 죽산안씨휘시택 묘비문, 효자학생안공 지룡지비, 장흥위씨삼세효열각 안내판 등이다. 문은 총 65편으로 65프로를 차지한다. 1981년부터 2007년까지 약 30년 동안 활동한 발자취로 대부분 상대편의 요청에 의해 글을 쓰게 되었다. 辭, 書, 記는 장흥위씨 여수종보 창간호 발간사, 부산면 효자리 주민 진정서, 음기 6편 등으로 계사공의 수준 높은 실용학문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 名文분석(저존각記, 남평문씨 열부碑)
계사公은 씨족역사 뿐만 아니라 문중 종친 및 이웃하는 타 성씨들의 요청으로 향토사와 실용문을 남겼다.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중에서 두 작품을 뽑아 특별히 분석해보기로 하자. 먼저 저존각기는 1994년 10월 찬했다. A4기준 2쪽 분량으로 11문장으로 구성되어있다. 백두대간의 줄기 기동리(1단락), 풍수지리상 위치(2단락), 저존각 건립과정과 규모(3단락), 위패와 신위(4단락), 배향의 특징(5단락), 저존각의 가치(6단락), 제례의 기원(7단락)에 대해 찬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제례문화정착(8단락), 합사의 당위성(9단락), 제의의 가치(10단락), 운암종중에 대한 소망(11단락)으로 구분된다. 11단락을 정독하면 마치 망원경을 통해 풍광을 보는 것처럼 멀리서 파노라마가 장황하게 펼쳐진다. 그런데 갑자기 줌의 기능이 작동하여 현미경을 보듯 곳곳에 세밀히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이 역력하다. 망원경이 1, 2, 7, 8, 10단락이라면 현미경은 3, 4, 5, 6, 9단락이다. 대-소-대-소-대의 형태로 시를 쓰듯 운율을 맞춘 격이다.
과거와 현재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려는 의지와 소망이 마지막 11단락에 담고 있다. 큰 틀로 보아 10단락은 11단락을 향해 힘을 모으는 형국이다. 다분히 저자의 의도가 엿보인다. 이런 학문의 태도는 연역적 사고로 철저히 단련된 결과이다. 저존각의 외형적인 형태보다 이면에 존재하는 사상과 가치를 극대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비록 2쪽의 짧은 기록이지만 담을 것은 다 담은 격이다. 내면의 실질을 추구하고자 했던 계사공의 명문으로 각광받고 있다.
남평문씨 열부비문은 1994년 4월 찬했다. 세 단락으로 구성된 깔끔한 비문이다. 기승(1단락), 전(2단락), 결(3단락)으로 기와 승 부분을 과감하게 통합하고 전과 결에 치중했다. 그중에서도 전에 치중한 흔적이 엿보인다. ‘백약이 무효라’,‘참으로 청천벽력(靑天霹靂)에 천붕지통(天崩之痛)이런가.’, ‘몇 차례 自盡을 결심했던가.’에서 단어의 선택이 절묘하다. 독자로 하여금 쏙 빠져들게 하는 언어의 마술사처럼 미꾸라지가 파닥파닥 생동감 넘치는 명문이다.
1단락에서는 문여사 소개, 결혼과 득아를, 2단락에서는 남편喪으로 인한 고통을, 3단락에서는 열부상을 세우게 된 배경과 그 과정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특히 3단락 마지막 부분에서 ‘시대가 변하여 烈婦란 단어의 뜻이 많이도 희석되었다 한들 한 시대의 최고도덕률로 살다간 그때의 열부 문 여사는 오늘에 와서도 더 없이 推仰 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긴 여운을 남기는 기법을 묘사하고 있다. 기승전결의 구성과 과감한 통합 및 집중이 탁월하다.
5. 씨족내외 평가
公의 유작은 후세들의 철저한 검정과정을 거쳐 그 공과를 조명 받게 된다. 여기서 업적에 대해 씨족내외의 평가를 아주 간단명료하게 싣는다. 객관성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한국보학연구회의 평가를 우선했고 씨족 내에서는 단체와 개인의 평가를 구분하여 싣는다. 모두 계사公의 탁월한 업적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걸작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고증과 정치한 분석자’로, ‘모선의 주역’으로 이름을 남긴 계사公의 영전에 머리를 숙인다.
▲덕운옹과 함께 원감국사 보명탑에서(1993년)
▲사전류의 표지가 부채모양으로 앞뒤가 마주친 모습
1) 한국보학연구회
한국보학연구회는 1980년대 말부터 매년‘보학연구’라는 책자를 발간하여 씨족사회를 이끄는 견인차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계사公은 한국보학연구회의 지회격인 전남보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연구논문을 기고해왔다. 장흥위씨 보의 대논쟁에 대해 한국보학연구회는 ‘계사의 논지의 내용이 비록 필자문중에 관한 사항이기는 하나 비교적 객관적이며 논리적으로 잘 전개되어 있으며 또한 광범위한 자료의 고증과 정치(精緻)한 분석으로 결론을 도출했다’고 평가했다.
2) 도문회와 대종회
보의 대논쟁에 대해 도문회 명의로 발간된 ‘보의논총(2010년)’과 ‘보의론 연구보고서(2013년)’가 연달아 선을 보였다. 보의론 연구보고서는 수보조항 5개 중 세계조 번복경위와 진상에 치중된 저서이다. 송당공과 계사公이 감수하고 원산이 저술한 보의논총은 과거와 현재를 기반으로 미래를 향한 방향을 제시했다. 도문회는 公의 씨족에 대한 연구 결과물을 정사로 인정한다고 두 권의 저서를 통해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1999년 기묘대동보를 편찬할 때 기록할 내용 중 이전 족보를 수정하는 절차를 공식적으로 밟았고 계사公이 족보의 跋(발)을 직접 찬하는 영광도 안게 되었다. 이로서 638년 시조공 동래와 영이재공 초보편찬이후 장흥위씨 족보는 커다란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계사公의 논문이 正史로 채택된 이면에는 명망 높은 보의론 연구위원들의 지혜와 노고가 컸다고 전하고 있다. 2010년 발족된 보의론 연구위원회(회장 위증)의 활동으로 문중의 중지를 모으고자 했다.
2000년 5월 대종회장(범곡)은 公에게 공로패를 수상했다. 그간 연구업적을 인정하는 공식적인 문서이다. ‘족보사랑에 일심정진하시더니, 기묘대동보를 엮으매 기묘초보의 정론대로 복원시킴으로서 장흥위씨 240년 보사가 비로소 본연의 위상을 되찾았으니, 사필귀정이 천운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호라 족보를 말할 제 남에 존재가 있고 북에 만암이 있다 했거늘 기묘년에 계사가 있어 표준보를 닦으니 그 공적은 보사와 더불어 무궁할 진저’라고 극찬하고 있다.
3) 송당공과 원산評
송당공은 1924년 함남 함주군 주북면 반송리 출신이다. 함흥사범학교, 흥남공업대학 출신으로 관북파에 속한다. 사람을 보는 눈이 매서웠던 송당공은 네 살 터울인 계사公을 각별히 아끼고 신뢰했다. 씨족 내 최초로 계사公의 학문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계사公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능력에 대해 ‘향유(鄕儒), 무관의 선비, 무관의 제왕(帝王)이라 불렀다. 독서벽으로 불리워 우리 족보사 20세기에 계사가 있다. 보학, 역사, 지리, 인문학에 몰두했다’고 평가했다.
원산은 홈페이지 원고를 작성할 때 대동보, 종보, 월명송을 참조했는데 자연스레 公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연구학문은 원산에게 고스란히 전수된 셈이다. 계사公에 대해‘검은 것은 검다 하고 하얀 것은 희다고 말하는 것이 진리이다. 그리고 수효가 많다고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종교의 이단자로 천관공과 보의논쟁은 진실게임이었다. 보관의 차이가 있어도, 논쟁 당시는 감정이 있었어도 300년 족보사의 대논쟁이다. 족보만 본다면 남유계사다’고 조명했다.
6. 나가는 말
公의 노년은 씨족사를 위한 삶이었다. 우선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강인함에서 그의‘發憤’을 엿볼 수 있다. 학계 등에 종사하는 동년배 중에는 더러 사용할 수 있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농촌에 거주하는 거의 모든 연배들은 컴퓨터와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대단한 학구열이 아니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에너지의 소유자이다. 그의 책상에는 돋보기가 여러 개 있다. 잘 보이지 않은 글씨를 독해하기 위한 물건들이다. 대단한 연구열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저서에서‘본질을 논한 진실한 자료라고 평가된다면 무한 영광일 뿐이다’라며 후손의 평가를 기대했다. 어둠이 밝음을 이길 수 없듯이 그릇됨이 또한 올바름을 이길 수 없다. 어둠과 그릇됨은 잠시일 뿐, 밝음과 올바름으로 귀결되는 것은 바른 이치이기 때문이다. 이 글의 제목을 ‘ 桂沙公의 정열, 발분망식(發憤忘食)’으로 정했다. 「정미소의 나락이 쌀로 변하게 하는 끝없는 열정」을 경계로 삼았고, 「최고의 색을 만들고자 하는 바람」은 씨족의 마중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