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형제들 (4)
제3장 열린 세상을 상상하고 이룩하기
인간 존재는 다른 이들과의 만남이 없다면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인식하지 못합니다. 다른 이들과 관계가 없다면, 사랑할 구체적인 얼굴들이 없다면 아무도 삶의 참다운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참다운 인간 존재의 신비입니다. 반면에 자족하며 섬처럼 살아가려는 곳에는 삶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태도들 안에서는 죽음이 지배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위하여 만들어졌고,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가 다른 사람 안에서 존재의 성장을 찾는 일종의 ‘탈아’의 법칙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루는 건강하고 참다운 관계는 우리를 성장시키고 풍요롭게 하는 다른 이들을 향하여 우리를 열어 줍니다. 오늘날에는 사회 인식이 겉보기에는 깊은 관계처럼 보이는 자기중심적 친분에 밀려 쉽게 그 효력을 잃습니다. 그와 반대로 가장 고귀한 형태의 우정은 완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는 마음에만 뿌리내릴 수 있습니다. 환대는 자기 무리를 뛰어넘는 인류와 만남인 이러한 도전 과제와 은총을 저버리지 않는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수도자들은, 그들이 기르고자 하던 모든 가치가 자신을 뛰어넘어 다른 이들에게 마음을 여는 능력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윤리적 가치로 제시되는 몇 가지 태도를 계발할 수 있습니다. 용기, 절제, 근면과 다른 미덕입니다. 그런데 그 행동들이 다른 이들을 향한 개방과 일치의 활력을 어느 정도까지 성취해야 하는지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활력은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마도 우리는 겉으로만 덕을 쌓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은 “한 인간의 삶이 가치 있는 것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그러나 더러는 자신의 이념을 강요하거나, 진리를 격렬히 옹호하고, 또는 힘을 과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으뜸인 사랑이 위험에 놓여서는 안 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사랑의 체험이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 밝히고자 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과 함께하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여기고” 그에게 관심을 쏟는 움직임으로 설명합니다. 이 모든 것은 존중과 인정에서 시작합니다. 결정적으로 ‘사랑’이라는 말 뒤에는 ‘존중’과 ‘인정’에 있습니다. 사랑받는 존재는 나에게 ‘귀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그 사람이 커다란 가치를 지닌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더욱더 그를 향하게 되는 일치에서 비롯됩니다. 있는 그대로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은 우리가 그의 삶을 위한 최선을 추구해 나가게 합니다. 아무도 배척하지 않는 사회적 우애와 모든 이에게 열린 형제애를 가능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 누구도 고립을 통하여 성숙되거나 충만함에 이를 수 없습니다. 사랑은 그 역동성 때문에 점점 더 마음을 열고 다른 이들을 환대하는 더 큰 능력을 요구합니다. 역사의 흐름안에서 그리고 다양한 민족 집단과 사회와 문화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받아들이고 돌보는 형제자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형성해야 할 소명의 씨앗을 발견합니다.
우리 가까이에, 도시 한복판이나 가정 안에도 변방들이 있습니다. 같은 나라에서 태어났음에도 내가 속한 사회에서 버려졌거나 무시당하는 모든 고통받는 형제자매는 실존적 외국인입니다. 인종차별은 보이지 않게 언제나 잠복해 있는 바이러스입니다. 많은 장애인들이 “소속도 참여도 없는 존재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그들을 돌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시민 공동체와 교회 공동체에 적극 참여할”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는 까다롭고 고된 여정입니다. 그러나 이 여정은 모든 이가 유일하고 고유한 사람임을 인식할 수 있는 양심의 형성에 점점 더 이바지하게 될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이 이상처럼 제시한 추상적인 보편주의를 제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는 ‘단색’이 아닙니다.” 각자가 할 수 있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기여 안에서 우리 인류 가족은 모두 똑같이 될 의무 없이 조화와 평화를 누리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 다친 사람 곁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가까이 다가가라는 내면의 부르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은 하나의 방해물일 따름이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이러한 편협한 구분을 뛰어넘었습니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그 사람을 위하여 계획을 수정하고 도움을 주었습니다.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는 정체성을 고수하는 사회 집단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성장하는 오늘날 세상에서, 이 이야기는 어떠한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이웃’이라는 단어는 모든 의미를 상실하고, 특정 이익을 추구하고자 동업자 ‘패거리들’만이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저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거나 평등이 보장된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해서, 형제애가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형제애는 반드시 더 큰 무엇인가를 요구하며, 그 결과 자유와 평등이 증진됩니다. 자유는 자기 뜻대로 사는 삶, 곧 순전히 마음대로 자신의 정체성과 소속을 선택하고 그저 소유하거나 착취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평등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라는 추상적인 선포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의식적으로 그리고 신중하게 형제애를 함양한 결과입니다. 개인주의는 우리를 더욱 자유롭게 더욱 평등하게 더욱 형제답게 만들지 않습니다. 철저한 개인주의는 박멸하기 너무나 어려운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우리를 기만하고 고삐 풀린 자신의 욕말을 따는 것이 전부라고 믿게 만듭니다.
사회적 우애와 보편적 형제애는 반드시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인간이 지닌 가치를 인식하도록 요청합니다. 모든 인간은 품위 있는 삶과 온전한 발전에 대한 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존엄의 기초는 환경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타고난 가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일부 사회는 이러한 원칙을 부분적으로만 수용합니다. 기회는 모든 이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모든 것은 개인에게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왜곡된 시각에서는 “뒤쳐진 이들이나 힘없는 이들, 능력이 모자란 이들을 돕고자 투자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보일 것입니다.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인과 공동선을 먼저 생각하는 적극적이고 참여하는 국가와 신민 사회 기관입니다.
“현실은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경제적 자유를 얻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으며 고용 기회가 계속 축소되고 있는데, 단지 경제적 자유만을 요구하는 것은 …… 모순된 주장입니다.”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지닌 인간은 본디 관계에 열려 있습니다. 다른 이들과 만남을 통하여 자신을 초월하라는 부르심이 우리 안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각 개인의 권리가 더욱 커다란 선과 조화롭게 질서를 이루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분쟁과 폭력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다른 이들과 인류 가족 전체의 선을 바라고 추구한다는 것은 개인과 사회가 도덕적 가치의 측면에서 성숙하도록 도와준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약 성경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를 그리스어 ‘아가토쉬네’로 묘사합니다. 선에 대한 애착, 선의 추구를 나타냅니다. 그저 물질적 행복만이 아닌 가치들의 함양을 위한 노력을 의미합니다. 다른 이들의 ‘행복을 바라는’ 태도입니다. 선에 대한 열망, 훌륭하고 좋은 모든 것에 대한 끌림, 다른 이들의 삶이 아름답고, 숭고하며, 유익한 것으로 가득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이미 너무 오랫동안 윤리, 선, 신앙, 정직을 비웃으며 도덕적 타락의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쾌락적 피상성이 우리에게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회생활의 기초가 무너지면, 인간이 개인적 이익을 지키려고 서로 다투게 됩니다.” 결국 개인의 이익 추구에만 고착된 삶을 물려줄 뿐입니다.
저는 특별히 연대를 언급하고자 합니다. “도덕적 선이며 사회적 태도인 연대는 개인적 회개의 열매로 교육과 양성을 책임지는 많은 사람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가정은 첫째 자리입니다. 모든 것이 와해되고 일관성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에 ‘연대’에 호소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연대는 봉사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봉사는 다른 이들을 돌보고자 하는 노력 안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대부분 봉사는 “힘없는 이들, 우리 가저오가 사회와 민족 가운데 힘없는 구성원들에 대한 돌봄”을 의미합니다. 봉사는 자신의 바람과 열망과 권력 추구를 내려놓는 법을 배우며, 얼굴을 마주하고, 직접 접촉하며, 친밀함을 느끼고 때로는 이 친밀함으로 ‘고통을 겪기도’ 하며, 그들을 도우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봉사는 결코 이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봉사하기 때문입니다.
연대는 언제나 잘 받아들여지는 단어가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 연대는 더러운 말, 감히 입에 담기 힘든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는 공동체와 관련하여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연대는 역사를 만드는 길이며, 대중 운동이 실천하는 것이 바로 연대입니다. 공동의 집인 지구를 돌보는 필요성에 대하여 말할 때, 보편적 양심과 상호 관심이라는 사람들 마음 속 불꽃에 호소합니다.
풍족하게 물을 사용할 수 있지만 인류 가족을 위하여 물을 아끼는 사람들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단체 너머로 바라볼 수 있는 도덕적 수준에 도달해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훌륭하게도 인간적인지요! 우리 울타리 밖의 사람들에게도 모든 사람의 권리를 이와 같은 태도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초기에 여러 사상가들은 품위 있는 삶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이 어떤 사람에게 부족하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이 그것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온 인류에게 땅을 주시어 아무도 제외되거나 특권을 누리지 않고 그 모든 성원의 생계를 유지하게 하셨습니다.” 모든 이를 위하여 창출된 재화의 공동 사용 원칙은 “윤리적 사회적 질서 전체의 제1원칙”입니다. 이는 다른 것에 우선하는 자연권이자 타고난 권리입니다. 따라서 커다란 기회의 땅에서 특권은 물론, 어느 누구도 소외된 채 남겨져서는 안됩니다. 발전의 목적이 소수를 위한 부의 축적이 될 수 없습니다.
발전은 “인권을, 개인적 사회적 권리, 경제적 정치적 권리, 그리고 국가들과 민족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떤 것을 사유화해도 모든 이의 이익을 위하여 관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업가들의 활동은 근본적으로 “부를 창출하고 모든 이를 위하여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할 고귀한 소명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인 기업가들의 능력은 언제나 분명히 다른 이들의 발전과 특히 다양한 일자리 기회 창출을 통한 빈곤 탈출을 지향해야 합니다.
오늘날 지상 재화의 공동 목적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따라, 이 원칙은 국가와 국가의 영토와 자원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이 양도할 수 없는 존엄을 지닌다면, 모든 사람이 나의 형제자매라면, 나의 조국도 그의 발전에 대한 공동 책임을 지고 있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그 책임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국가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각 나라의 여러 지역에도 적용됩니다. 지역 간에도 대개 커다란 불평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평등한 인간 존엄을 인식하지 못하면, 일부 나라의 좀 더 발전된 지역들은 더 가난한 지역들의 ‘무거운 짐’을 폐기함으로써 자신의 소비 수준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불평등은 개인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평등은 우리가 국제 관계의 윤리도 생각해 보게 합니다. 실제로 정의는 개인의 권리뿐만 아니라 사회적 권리와 민족들의 권리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요구합니다.” 분명히 이 모든 것을 위해서는 대안적 사고방식이 필요합니다. 양도할 수 없는 인간 존엄을 지닌다는 사실에서 파생된 권리들의 대원칙을 받아들인다면, 외부의 위협 앞에서 두려움과 불신의 씨앗을 뿌리는 무분별하고 근시안적인 전략이 아니라 참평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