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국민학교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고 배우기 쉬운 문자가 한글이니 복잡하고 어려운 한자를 공부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집에 오면 한자를 공부해야 깊이 있는 사람이 되는데 유익이 크다고 하신다.
우리의 역사를 공부하고 동양의 역사를 연구하려면 과거의 기록들이 모두 한자인데 한글만 갖고 어떻게 해나갈 수 있을 것인지 아버지는 걱정하셨다.
우리의 이름과 조상의 이름이 모두가 한자이고 우리의 존립과 형성이 한자의 출발에서 시작 됐는데 한자를 빼고 밀어내고 지워버리면 조상의 이름조차도 읽을 수 없는 불행에 빠진다. 한자를 모르면 이곳에 왜 그런 지명이 유래되었는지 그 까닭을 규명할 수가 없고 조상의 묘소에 가서도 묘비석에 쓰인 글이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 하셨다. 답답한 인생이 된다 하셨다.
중국이 억지 주장을 펼칠 때에 과거에 왜 그런 조약을 맺었는지 그 문서를 읽을 줄 알아야 하는데 그 글을 읽을 줄 모르면 따질 수가 없다. 일본이 떼를 쓰면 옛 문헌을 찾아 부당하다 할 수 있는데 모두가 한글만 알고 한자를 읽을 실력이 없으면 큰 손해를 보고 무시를 당할 수밖에 없지 않으냐?
실력있ㄴ 사람이 많아야 되는데 소수이면 방책도 적고 추진동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우려가 되는 점을 요약하여 말씀하셨다.
정치적 계산으로 선택한 한글전용화의 바람은 충분한 사후 대책도 구비치 못한 채로 정치적 바람몰이 계산과 당장의 미운 한자 제거 작업에만 기세를 올렸다.
이렇게 몰아간 한글시국은 국민의 눈과 정신을 불신정국으로부터 온통 한글 우선주의 방향으로 돌릴 수가 있었다.
그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거짓말의 달인 박정희는 일본에 충성을 맹서하고 독립군을 수 없이 죽인 약점을 감추고 위장하려면 애국자인양 한글 전용화에 편승하여 강하게 밀어붙일 필요를 느꼈다.
친일을 행한 자들은 개인 영달을 위해 공통적으로 비굴하고 거짓말 잘하는 속성을 내보였다. 남자답지 못했다. 안중근 선생님처럼 대조되게 " 그래 내가 했다 ! 죽여라 ! " 라는 당당함과 남자다움이 없었다.
친일파벌 같이 권력에 줄서거나 빌붙어 출세해 보려는 인간들에게는 비굴과 거짓말은 처신의 비법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전국민의 대표자라는 인간들이 남자답지 못하고 비굴하고 거짓말을 잘해야 출세하는 것으로 학습되었다.
이름도 다까끼 마사오 일본명으로 과감히 바꾸던 대일본제국의 황국 군인으로서 자부심과 천왕충성이 머리에 박힌 박정희는 일본군가를 자랑스럽게 불렀다. 승진에 신바람이 나서 만주 벌판을 달리며 부르고 또 평소에도 습관처럼 저절로 입에 붙어 맴돌았다.
일본을 자신의 성공 출구로 선택한 민족반역자 박정희가 청와대 안에서도 술에 취해 고성으로 일본군가를 불렀다해도 알 수 없는 자신의 팔자에 대한 인간적 고뇌의 순간으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다. 일본 글을 최고로 알던 그런 그가 뜬금없이 한글사랑, 한글 전용화 바람을 탄 것이다.
이 바람에 시인 노산 이은상 선생을 청와대로 자주 불러들였다. 아마, 박정희를 위해서 여러 글들을 썼을 걸로 추리된다.
이때 반란 기득권 세력들은 자파들의 영달을 위해 더 좋은 자리, 더 많은 이권을 취하기 위해 박정희를 옹호하고 체제를 연장해야 할 논리개발의 필요가 생겼다. 이에 밀려 박정희는 군으로 복귀하겠다는 말을 뒤집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한번만 하고 민정이양으로 정권을 넘기겠다는 말도 뒤집고 재선에 성공한다. 또 다시 헌법을 고쳐 삼선개헌에 또 성공ㄹ 하였는데 또 헌법을 뒤집어 종신제 대통령 유신헌법으로 또 성공을 거둔다. 박정희는 역사의 절제의 의미를 친히 몸으로 가르친 위대한 교육자였다. 끝없는 욕심의 끝장이라는 것이 어떤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자신이 모델이 되어 리얼하게 가르쳐주고 현대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5000만명 중에 나보다 나은 자는 없다, 자기 밖에 없다 자기가 최고라는 교만으로 박정희는 망했다. 환호와 영광 속에 박수받으며 물러날 좋은 타이밍이 많이 있었는데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의 인간은 200여인을 망가뜨리고 추하게 부하의 총알로 갔다. 피흘리며 비참하게 역사를 더럽히고 결코 모범이 될 수 없는 길로 들어셨다. 어쩌면 나라를 되찾으려는 독립군의 핏값이었는지 모른다.
독립군을 없애는 것은 상해임시정부의 전복을 꾀한 것이었다. 즉 일본군 신분으로 돌아선 것은 조선과 민족에 대한 첫 번째 반역이었고, 이 독립군 토벌은 상해임정의 붕괴를 시도한 두 번째 반역이었다. 박정희가 일으킨 5.16은 한국을 뒤집은 세 번째 반역이었다. 불법 삼선개헌은 네 번째 반역, 종신제 유신헌법으로 나라 헌법을 수 차례 뜯어고쳐 누더기를 만들은 것은 다섯 번째 반역이었다. 과연 반역의 귀재요, 반역의 피가 흐르는 반역의 천재요, 아주 반역의 화신이었다.
이런 자가 세종임금이 만드신 한글의 전용화 바람에 펀승하여 지난 과거 반역자의 신분을 감추고 가리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국민들은 박정희가 그런 자라는 걸 거의가 몰랐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려던 자들은 허다하게 죽고 나라를 되찾지 못하게 형제를 죽이며 방해하던 자들은 독재권력을 잡고 흔들어댔다. 사람을 볼 줄 모르는 귀 엷은 인생들의 표행사가 이런 결과를 내었다. 정의가 없는 세상의 도래였다.
내가 종로2가 돈화문 통에 있는 노산 이은상 선생을 찾아 인사하려면 여직원이 청와대에 들어가셨다는 말을 여러 번 하는 걸 듣고는 발길 돌렸다. 노산 이은상 선생은 에스페란토 학회의 고문으로도 힘을 보태셨다.
어쨌든 그렇구 저런 영향으로 원동국민학교의 한자로 된 교명패는 한글판으로 제작되어 교문설주에 붙는다.
5학년 여름방학 때에 어머니께서 보은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태워주셨다. 아버지께서 보은에다가 약방을 개업하셨기 때문이다.
저녁이 되자 약방이 야학당으로 바뀌었다. 젊은 사람, 나이 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버지는 순천자(順天者)는 흥(兴)이요 역(逆)천자는 망으로 시작하는 명심보감을 강독(講讀)하셨다. 사람들은 보리쌀과 감자를 놓고 갔다.
자다 눈을 떴다. 불빛이 환했다. 벽에 달라붙어 1.5V 건전지로 가는 똑딱 시계가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방바닥에는 여러 종류의 의서(醫書) 책들이 펼쳐져 있었고 아버지는 인체경혈도(人體經穴圖)를 들여다보셨다.
나는 일어나 앉으며 말씀드렸다.
" 아버지 뭐 하세요?"
" 날이 밝으면 환자가 오는 데 그 사람에게 딱 맞는 처방을 찾아주고 싶구나. 새로 산 비방집(秘方集) 책들도 다 뒤져보고 있단다."
인체 경혈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시며
" 침(針) 자리도 여기 요기 이 자리도 놓이줘야겠구나. "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리지만 감동하였다. 환자의 병을 고쳐주고자 이 새벽녘까지 온갖 의료 서적을 찾아보고 인체 경혈도를 펼쳐놓고 침 자리의 순서를 궁구 하는 모습은 지극한 정성으로 비쳤다.
아버지는 돈을 밝히지는 않으셨지만 의료부문에서는 스스로 위로가 되실 정도로 최선의 모습을 보이셨다.
아버지는 녹용의 털을 숯불에 까맣게 그을리고 그 털을 칼로 긁어내는 작업을 내게 시키셨다. 며칠 후 발등이 주먹만치 부어올랐고 겉으로 곪아 고름이 보이는 청년이 찾아왔다.
정확한 사정은 말하지 않지만 돈이 없어 치료 시간이 지연되고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다가 환부가 예상치 않게 악화가 되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 곪은 상처에 기름을 바르고 까맣게 그을린 녹용털 가루를 뿌리시고 천으로 감싸주셨다. 다시 그 청년이 약방에 왔을 때는 놀랍게도 그 환부가 팽이가 돌다가 빠져나온 양 나선형으로 깊게 파였다. 어떻게 그런 모양이 나오는지 참 신기했다. 아버지는 환부에서 고름이 빠져나가고 새살이 돋아나온다고 하셨다.
털이 제거된 녹용 뿔은 소주나 막걸리에 담가 각질표면을 유연하게 하여 협도(鋏刀)에서 얇게 잘 쓸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얇게 잘린 녹용은 그늘지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음건(陰乾)하였다.
나는 어울리지 않게 그리고 예기치 않게 노이로제성 신경쇠약으로 문틀의 윗부분이 이마와 부딪힐 것 같은 고통으로 이마를 두 손으로 가리고도 문들을 통과할 수 없었다. 예리한 모서리를 쳐다보아도 이마에 부딪힐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린 녹용을 넣어 약을 10첩 정도 지어주셨다. 그 약을 복용하고 이윽고 지옥 같던 불편에서 벗어났다. 마침내 심신쇠약 증세에서 정상으로 회복하였고 몸도
활성화되었다.
약방에는 아버지를 도울 조수가 하나 있어야 했다. 큰 형도 어려운 한자를 아니 배우겠다고 했다. 동생도 한글이 최고라는데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겠다고 했다. 나는 먼저 약장의 약명들을 노트에 적어 반복연습하여 익혔다. 아버지가 외로워 보여서였다, 나라도 아버지를 돕자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린 나이에 한글전용화를 밀고 있는 청와대에 편지를 썼다. 한문번역학과를 대학에 만들어 귀중한 사료(史料)가 되는 많은 고서적(古書籍)들을 번역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제안을 하였다.
그 후 수십 년이 흘러도 그런 학과는 개설되지 않았다. 늦었지만 대략 이십여 년 전에 대학들이 경쟁하는 환경이 조성되자 자구책으로 이런 학과가 생겼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는 나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동의보감의 흥미로운 것들을 찾아 보여주셨다. 동의보감에 그려져 있는 인체 장기들 중 심장의 그림이라든가 또, 사람이 영리해지는 처방의 총명탕, 시람의 몸을 감추는 처방 은형법의 처방, 눈을 열리게 하는 희귀 돌 속에서 채취해야 하는 액체약제 등등 을 소개하셨다.
약재를 가공하는 데는 물에 담가 약성을 약화시키는 수침(水寖)으로 천궁에서 기름을 제거하는 데에 쓰였다. 술에 담가 약을 활성화시키는 주침(酒寖)이 있고 소금물에 담그는 염침(塩寖)이 있다.
약재를 창호지에 싸서 물에 적셔 찌는 포증(抱烝) 가공이 있고 술에 담가 불에 볶는 주초(酒㶤)가 있는데 아버지가 지시하시는 대로 나는 이 모두를 순종하여 해내었다.
한글 전용화 바람은 나의 어린 시절을 집안 형제들과의 구도가 갈라지게 하였고 한약방에 새로 편제되어 난 아르바이트생도 아니고 수습생 겸 보조원의 역할을 했다.
아버지께서는 암치료제를 오랫동안 연구하시다 마침내 오자대 규격의 둥근 환약으로 만드시고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여 낫게 해 줄 수 있게 되었다고 환하게 웃으시며 기뻐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