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익사忠翼祠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켰던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1552~1617) 장군과 그 휘하 열일곱 장수 및 무명 의병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곽재우 장군은 명종 7년인 1552년 8월 28일 외가인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서 출생했다. 1585년(선조 18년) 별시 문과에 급제했으나 답안의 내용이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가 있다 하여 파방罷榜됐다. 장군은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하며 자연과 더불어 시를 지으며 초야에서 지냈다.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왜군이 침입해 국토를 유린하자 ‘나라 지키는 일을 관군에게만 맡길 수 없다’며 4월 22일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왜군의 침략을 막았다. 장군은 항상 붉은 옷에 백마를 타고 신출귀몰하여 홍의장군이라 불리었으며, 휘하 17명의 장수와 수천의 의병과 힘을 합쳐 낙동강과 남강의 주요 거점을 오르내리며 적을 물리쳤다.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기강을 비롯한 의령의 관문인 정암진, 현풍, 창녕, 영산, 화왕산성 등의 전투에서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왜군의 보급 물자를 차단하고 전라도 진격을 저지함으로써 왜군의 전쟁 수행에 막대한 차질을 안겨주었다.
왜란 이듬해에 성주목사를 거쳐 진주목사와 경상우도방어사를 지내고 왜란 후에는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비롯해 한성부우윤,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사후에 ‘충익忠翼’이란 시호와 함께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됐다.
1972년 이래로 매년 의병 창의일인 4월 22일 의병제전 행사와 더불어 추모 행사를 거행해 오고 있으며, 음력 8월 28일에는 장군의 탄신 다례를 올리고 있다. 한편 충익사는 1978년 12월 22일 준공됐다. 정부에서는 2010년에 의령군민의 청원을 받아들여 6월 1일을 국가기념일인 ‘의병의 날’로 지정해 의병 정신을 기리고 있다.
경남 의령군 의령읍 충익로 1번지 소재.
충의각
충의각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곽재우 장군과 그의 아래에서 활약한 장군 17명의 이름, 본관, 호, 벼슬 등을 기록한 명판이 보관된 건물이다. 원래 이 건물은 1910년에 합천 이씨 문중에서 의령읍 동동리의 관찰사를 지낸 이중하를 기리는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1972년에 재부산향우회에서 이를 매입하여 충익사 인근으로 옮겨 왔고, 1978년에 충익사 정화 사업을 하면서 이곳에 자리 잡았다.
건물은 앞면 2칸, 옆면 1칸의 규모로, 옆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자 모양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붕 아래에 달린 목재 구조물의 높이가 매우 높고, 지붕의 면적도 넓다. 극락세계에 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상여 모양을 본떠 지은 건물로, 장식성과 예술성 그리고 기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자료로 평가된다.
충익사 모과나무
모과나무는 원래 중국에서 자라던 나무로,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전역에서 관상 또는 열매 수확을 위해 심어 왔다. 봄에는 선홍색의 꽃이 피며, 가을에는 노란색의 둥근 열매가 열린다. 열매에서는 특이한 향기가 나는데 이 때문에 과실주로 담그거나 차로 만들어 마시기도 한다. 또한 말린 것은 한방에서 ‘목과’라 하여 약재로도 쓰인다. 모과는 생김새는 못생겼지만 다른 어떤 과일보다 쓰임새가 많고 향이 좋아 생김새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에게 깊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의령 충익사 모과나무의 나이는 약 500살로 지금까지 조사된 모과나무 중 가장 나이가 많다.
나무의 높이는 약 12m, 사람 가슴 높이 부분의 둘레는 약 4m 정도이다. 나무의 줄기에 근육 모양으로 울퉁불퉁한 골이 있는데 오래된 모과나무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이 모과나무는 원래 가례면 수성마을에 있었는데,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당산나무로 마을 주민들에게 민간 신앙의 대상이었으나 1978년 충익사 정화 사업 때 이곳으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