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소리에도 각기 다른 표정이 있다는걸 안 아침이다. 베란다 밖 우바 계곡에 구름이 흐르고 있다. 여명에 물든 구름 색깔이 곱디 곱다. 이곳 하푸탈레는 차밭 사이 사이에 집이 있다. 산동네 오솔길을 걸어 내려오는데 탱탱한 유정란 노른자를 닮은 아침해가 구름 사이로 떠오른다. 우바 계곡을 채운 구름은 가히 구름의 바다, 운해란 표현이 이럴때 쓰는 말인가보다.
하푸탈레 버스정류장 뒤쪽 우바 계곡이 시작되는 곳에서 7시에 출발한다는 미니 버스가 보이지 않는다. 굳이 서둘러 숙소에서 나오지 않았어도 됐겠지만, 일출과 운해를 선물하려고 버스 시간을 잘못 알았나보다. 바쁠 것도, 꼭 해야할 일도 없어 한두시간 버스를 기다리며 동네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는 것도 여행이다. 매일 매일 이토록 장엄한 일출과 운해를 가슴 속에 채우고 사니, 이 곳 사람들이 친절하고 따스한 것은 당연하다. 사람은 자연을 그대로 닮는다.
골목 끝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이 호되다. 어젯밤 영하 2도를 기록해 누와라엘리야와 하푸탈레를 패스하고 엘라로 간다던 독일 청년의 뻥이 엄살만은 아니다. 담요를 한장 더 얻어다 덮고 잤는데도 추워서 못살겠다, 오늘은 꼭 떠나자를 다짐하며 나흘째 하푸탈레에 머물고 있다. 너희 나라는 더 춥다면서 이 정도 갖고 뭘 그러냐며 담요 한장도 인색하게 군다. 우바 계곡에서 몰려온 바람에 귀끝이 떨어져 나갈것 같다. 버스를 기다리며 길거리에 서서 딱딱한 빵과 요구르트로 아침을 대신한다.
끝없이 이어진 지그재그의 차밭 사이를 달리는 미니버스가 터질것같다. 버스는 50미터마다 서고 가기를 반복하며 학생들을 태운다. 아이들의 가방이 내 무릎 위에 산더미처럼 쌓이고, 어른들의 배와 엉덩이 사이에서 낀 아이들은 숨 쉬는 것도 힘들어보이는데, 참으로 의젓하다. 컴퓨터와 게임으로 괴물이 되어가는 우리 아이들을 잠시 생각한다.
순박한 이곳 사람들과 달리 토지의 <임이네>처럼 악착스럽게 아이를 내게 밀어붙이던 여인이 목에 거린 카메라를 가르키며 아이 사진을 찍어 달랜다. 어차피 뽑아줄 수도 없는 사진, 화면에 뜬 사진을 잠깐 확인하는 과정임에도 그 부탁이 결연하다. 화면 속의 아이를 확인한 여인은 자꾸자꾸 고맙단다. 조금만 공간의 여유가 있으면 가방에서 프린터를 꺼내 사진을 뽑아주고 싶건만, 모두 짜부가 된 버스 안에서는 팔 하나 제대로 움직일 공간이 없다.
끝없이 이어진 차밭 사이로 마을이 이어지고, 마을 중심에는 요란하게 장식한 힌두 사원이 있다. 사원 담장 밖 분홍색 복사꽃이 손에 잡힐듯 곱게 피어있다. 쉼없이 사람들이 타고, 내리고.. 아이들이 학교 앞에서 내리니 숨이 좀 쉬어진다. 이 버스의 최종 목적지가 우리들이 가는 립톤싯인지 아닌지 걱정할 이유는 전혀 없다. 버스 안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보다 우리가 내릴 곳을 더 잘 안다.
립톤싯 입구에서 내린 사람은 우리 일행과 오렌지색 잠바를 입은 프랑스 청년. 담바테네 티팩토리에서 버스를 탔던것 같은데, 오렌지색 옷과 분위기가 이 곳 스리랑카 스님인줄 알았다. 청년은 차밭 사이 초록빛 안으로 이내 사라졌다.
아득한 초록의 세계, 구름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감추었다 꺼내 놓기를 반복한다. 적도 지역의 따뜻한 날씨와 끊임없이 오가는 구름의 입자가 이곳을 천혜의 차밭으로 조성한 이유다. 티없는 파란 하늘이 보이고, 바람에 몸을 맡긴 분홍색 야생화가 흔들거리고, 차밭 사이를 흐르는 물가에서 아낙이 빨래를 하여 차나무 위로 휙하고 던진다. <목욕과 배변을 보지 말라>는 안내문에서 빨래는 예외인가보다.
세상의 풍경을 덮어버린 구름 속 높은 곳, 그곳에 립톤싯이 있다. 립톤싯이 한눈에 보이는 차밭 가장 높은 곳에 타밀 청년의 움막 찻집이 있다. 세상을 집어 삼킬듯 표효하는 바람을 막아주는 작은 움막은 우리들에게 선계이다.
청년이 밝은 웃음으로 우릴 맞는다. 장작을 때서 끓인 홍차에서 장작 냄새가 났다. 바람이 끊임없이 구름을 모았다 흐트린다. 상념도 집착도 머물 틈이 없다. 명랑, 유쾌, 통쾌한 타밀 청년의 장작 냄새 나는 홍차는 감로수 그 자체이다.
우리들을 보자마자 돗자리를 착 펴주는 센스, 적당한 친절과 유쾌함,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 불냄새 나는 홍차 네잔과 따끈한 스프링롤 5개를 가져온다. 네명인데 누가 두갤 먹어? 사람수에 맞게 스프링롤 세 개 더 주문하게 완전 고단수. 구름이 명멸하는 풍경을 바라보며 30R 짜리 홍차를 세잔이나 마셨고 50R짜리 스프링롤을 두개나 먹으며 산정에서 돈을 물쓰듯 펑펑 기분좋게 썼다.
청년은 티타임이 끝나먼 자신의 콜렉션인 세계의 동전과 지폐를 보여주는데 한국의 천원짜리가 없다. 만원도 아닌 천원인데, 여행자의 주머니에서 천원짜리가 나온다. 아홉개가 되면 다른날 다른 한국인에게 만원짜리로 바꾼다. 고단수인데 전혀 불쾌하지 않다. 기꺼이 당해주고, 유쾌하게 속아줘야한다.
청년은 이 곳에서 오래 살거란다. 아침 여섯시 산정으로 와서, 하루종일 머물다 저녁 여섯시 집으로 돌아가는 이 단순한 삶이 아주 좋단다. <simple한 인생을 사랑하는 simple한 취미생활, 고단수(?) anyway Happy Place!!!> 알면서도 천원짜리 지폐 증정식을 끝낸 막내가 방명록에 쓴 소감이다. 고단수라서 누구나 다 당하지만 당하고도 유쾌하다.
자기 차로 우리의 다음 목적지인 티싸마하라마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아랍 남자가 왔다 가고, 오렌지색 잠바의 수도승 같은 불란서 청년이 스위스 처자와 동행이 되어 내려가고, 먹을 것을 잔뜩 싸온 인도 가족이 다녀가는 동안에도 구름은 끝없이 명멸을 계속했다. 까마득한 산 아래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2012.01.14(토) 하푸탈레, 스리랑카
첫댓글 차밭으로 뒤덮인 구릉의 경치가
그윽하면서도 참 운치있네요..
그리고 나무의자 위에 쟁반 위에 올려진
홍차와 스프링롤에서 이국적(?) 향내가
폴폴 나는듯 합니다 ^^
동계훈련을 위해 한라산에 입산한 날 윗세오름에 먼저 자리잡은 산악인들이 끓여줬던 코펠 홍차가 여태까지 최고의 홍차였는데 립톤싯에서 마신 장작불 홍차를 마신 후 순위가 바뀌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