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달 전에 광주인권영화제에서 다큐, <그 자식이 대통령 되던 날>을 보았는데, 그 후기..........같은 글입니다.=ㅁ= 기회가 생기면, 보시길 권합니다. 딸이 아버지에게 카메라를 들이밀고, 아버지의 정치적 지향과 그 바탕의 삶을 지그시 보는 것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핫핫.
세상에는 단, 두 종류의 괴물만이 존재한다. 하나는 좌빨이고, 둘은 수꼴이다. 이들 괴물들은 서로 상대를 쳐다보며 들끓는 증오를 숨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이 요 모양 요 꼴인 것은 저 괴물 탓이었기 때문이다. ‘저놈들만 사라지면 이 세상은 틀림없이 좋아진다!’라고 좌빨과 수꼴은 ‘똑같이’ 믿었다. 언어는 같았지만, 대화는 없었다. ‘아니, 저놈들하고, 대화라는 걸,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이더냐!’ 신이 있다면, 자비가 있다면, 정의가 있다면, 저 썩을 놈의 종족은 멸종할 터였다. (그런데 신은 구경만 하고 있고, 자비는 구걸해야 했고, 정의는 무엇인지 물어봐야 했다.)
그러던 차에, 한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그 자식이 대통령 되던 날>이라는 제목을 붙이고서. 대통령! 이 단어만 들어도, 왠지 모르게, 쥐가 떠오르고, BBK 치킨이 먹고 싶고, 꼼수를 부리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아아, 그러나,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거시기’가 아니다. ‘그 자식’은 2007년 대선이 아니라, 1997년 대선 때 당선이 된 대통령을 가리킨다. 다큐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카메라가 들여다보는 한 남자는 1997년 대선 날을 ‘그 자식이 대통령 되던 날’로 부른다. 그렇다! 이 다큐는, 괴물다큐, 수꼴극장이다.
다큐를 보기 전, 침을 꼴-깍, 삼켰다. 나는 좌빨이었고, 좌빨로서 상종이 금지된 수꼴에 대한 영상을 본다는 것이,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방문을 잠그고 남몰래 불온영상을 보는 기분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수꼴에 대해 들었던 거라곤, 어처구니없고, 이해할 수 없고, 공감되지 않는, 망언과 행동들뿐이었다. 나는 두근두근 거렸다. 요번에는 또 어떤 큰 웃음을 던져 주실 것인가? 아니면, 분노를 느끼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코미디나 스릴러. 어느 쪽도 나쁠 것 없었다.
카메라가 들여다 본 것은, 말과 행동이 아니라, 삶이었다. 카메라는 한 남자의 말을 넘어서,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지그시 응시한다. 그러니까, 그는, 시골에서 도시로 떠밀려온 ‘농부’였고, 도시에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도시인’이였으며, 아직 대기업 마트가 도래하지 않은 재래시장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는 식당 ‘자영업자’면서, 가난 속에서도 자식들을 대학교에 보낸 ‘부모’였다. 또한 자영업자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모는 정책을 시행하는 정당의 지지자이면서도, 정작 본인도 언제라도 그 막다른 골목에 내몰릴 수 있는 ‘서민’이었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의 말과 행동은 그 무엇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의 삶은 충분히 공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내게는 익숙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내 부모의 삶,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내 부모님은 빨갱이의 고향이라 부르는 어느 광역시에서 가정을 꾸렸다. 도시가 고향은 아니었고,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온 경우였다. 아버지는 농부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식당 자영업자의 딸이었다. 흔히 도시로 올라온 갓 결혼한 시골 부부가 그렇듯, 그들은 가난했다. 언젠가 아버지에게 현 집권여당으로부터 우편물이 온 적이 있었다. 아마 그때는, ‘그 자식이 대통령이 되어있는 시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머니는 정치보단 신앙에 관심이 많았다. 조지 W. 부시(George Walker Bush)가 미국에서 대통령이 된 날, 어머니는 그가 ‘기독교인’이니 우리나라에게도 좋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정치와 어머니의 신앙으로도 가족의 가난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그러니까, ‘그 자식이 대통령’이 된 것이 문제이거나, ‘신앙심이 부족해서’ 나타난 문제일터였다. 어쨌든 ‘남 탓 하지 말고, 남의 것 빼앗을 생각 말고, 열심히 사는 것’만이 삶의 정답이라고 믿었던 부모님이었다. 가난에 찌들면서도 어떻게든 열심히, 성실하게, 착하게 살아왔던 부모님의 삶, 그 삶은 다큐가 응시한 삶, 그 자체였다.
다큐가 끝나갈 즈음, 다큐의 주인공인 남자는 자신이 꿈꾸는 세상에 대해서 말한다. 그 순간, 나는 뒤통수를 호되게 맞은 기분이 들었다. 나와 전혀 다른 존재라고 믿었던 이가 꿈꾸던 세상은 내가 꿈꾸던 세상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도, 어쩌면 내 부모도 나와 같은 꿈을 꾸었던 것이다. 그때의 그의 표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괴물로 부르거나, 적이라고 부르거나, 나쁜 놈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말하자면, 그건, ‘순박한 사람이 짓는 착한 표정’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세상이 요 모양 요 꼴이 된 것은, ‘그들’이 끔찍하게 악하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아무리 봐도, 수꼴극장에 나오는 그는, 적당히 착하고, 성실하고, 순박한 사람이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우리네 부모님이었다. 수꼴 괴물은 어디에도 없었다.
애초에 괴물이라고 서로를 부르던 이들은, 결국은 같은 삶은 사는 존재들이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괴물에게는(좌빨이든, 수꼴이든) 한 종류의 삶만이 존재했다. 그것은 ‘가난한 서민’의 삶이었다. 어느 한 쪽이 멸종해도, 가난한 삶은 여전히 이어질 것이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가난한 건 마찬가지니까. 첫 문장을 다시 써야겠다. 세상에는 괴물로 살아가는 사람과 인간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괴물들이 서로를 증오할 때, 인간은 괴물들 위에서 군림한다. 괴물들이 서로를 죽여도, 괴물의 삶은, 눈곱만큼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괴물의 삶이 팍팍한 이유는 자신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는 괴물의 탓이 아니라, 그 위에 군림하는 인간의 탓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묻는다. 그렇다면 괴물 위에 군림하는 인간은 누구인가? 구분법이 있다.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괴물과 다른 삶을 사는 자. 그가, 인간이다.
첫댓글 쉽게 이해될 글이 아니군요...
그...그런가요?-_-;;;
믿을사람 한사람도 없다 인것 같은데 맞나요 글 공감합니다 이제서야 보게 되네요 정모 참석언제하시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