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앞 식탁에 앉은 젊은이의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양말이 짝짝이어서다. 한 쪽은 하얀데 다른 쪽은 검다. 거기에다 하얀 쪽은 목이 짧아서 긴 상대와 대조가 된다. 왜 저렇게 신었을까? 바빠서 눈에 띄는 대로 고른 걸까? 아니면 일부러. 그의 맞은 편에 여자가 앉은 걸로 봐서는 후자가 맞을 것 같다. 아무튼 나로서는 처음 보는 일이라 신기했다. 젊은이의 틀을 벗어난 자유로운 마음이 부럽기도 했다.
그런데 짝이라는 말이 재밌다. 표준국어대사전은 그 뜻을 다음과 같이 풀고 있다.
1. 둘 또는 그 이상이 서로 어울려 한 벌이나 한 쌍을 이루는 것. 또는 그중의 하나.
예문) 짝을 이루다. / 짝을 짓다. / 이 반은 정원이 홀수라서 짝이 맞지 않는다. / 내 짝이 반장으로 뽑혔다.
2. (수량을 나타내는 말 뒤에 쓰여) 둘이 서로 어울려 한 벌이나 한 쌍을 이루는 것의 각각을 세는 단위.
예문) 신발 한 짝. / 젓가락 두 짝.
그러니까 이 말에는 이중의 뜻이 있는 셈이다. 한 쌍이나, 이걸 이루는 구성원 가운데 하나를 가리킬 수 있다. 외국인이 보기에는 구별하기 어려울 듯싶은 짝꿍과 짝사랑이 정반대의 뜻으로 쓰이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영어 사전에서 '짝사랑'을 찾아봤더니 짝(pair)이라는 말이 안 보인다. 영어에서 짝은 한 쌍이라는 뜻으로만 쓰여서 그런 거 같다. 사전 한 번 겨우 찾은 것에 기대서 하는 말이므로 사실이 그런지는 모르겠다.
내 양말 보관함에는 짝을 잃은 양말이 여러 개 있다. 언젠가는 잃어버린 짝이 나타나리라 막연히 기대하지만 경험으로 보건대 그럴 가능성은 아주 낮다. 이제부터는 나도 저 젊은이를 따라 짝짝이 양말을 신어 보겠다고 마음먹는다. 버리는 것 없이 알뜰하게 사는 방법을 찾은 거 같아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짝이 없어 외로웠던 양말로서도 사랑을 되찾았으니 좋은 일이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데 습관과 고정관념이 우리 눈을 가리고 자유로운 움직임을 막아 버린다. 내가 신을 짝짝이 양말을 떠올리자 막힌 가슴이 뚫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