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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
정병재
“이런 자리에서 말씀드리기에는 좀 그렇습니다만, 숙제를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11월말까지 모든 회원님들은 수필 3편씩 내어주시기 바랍니다. 상록수필 5호 발간에 필요하니까 꼭 부탁드립니다.”
공무원연금공단 대구연금센터 수필창작교실의 2학기 초 신입 회원들과의 상견례를 겸한 회식자리에서 상록수필 편집장께서 겸손했지만 꽤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참 오랜만에 듣는 숙제라는 말이 꽤나 낯설었다. 그러면서도 내게 숙제가 주어졌다는 사실에 잠시였지만 왠지 모를 설렘을 넘어 가벼운 흥분까지 느꼈다. 그런데 참 난감하다.
그동안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 몇 번 결석은 했지만 꽤 열심히 다녔고 입학한지도 벌써 한 학기가 지났다. 그렇지만 나는 단 한편의 수필도 쓰지 않았다. 아니 쓰지 못했다.
처음부터 난 수필을 써봐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세상사는 이야기를 편하게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수필창작교실에 들어왔는데 ‘이를 어쩌나!’ 매주 주어진 주제에 따라 수필을 써서 회원들 간에 공유하고 댓글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한다. 나는 그게 부담스러워 수필창작반 수강을 그만 두는 것을 매번 고민하면서 결국은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이제는 수필 3편을 꼭 써야하는 숙제까지 받은 것이다. 편집장께서 수필집 발간의 어려움을 얘기하면서 개별적으로 부탁도 하셨다. 이참에 슬그머니 수필창작반에서 빠질까하는 생각도 했지만 어쨌든 한 학기를 공부하고는 지금 와서 숙제 때문에 그만두기는 참 부끄럽다. 밤잠을 설칠 걱정거리가 생겼다.
그런데 ‘수필숙제’ 그것 내가 할 수는 있을까?
예전에 학교 관리자로서 학부모로부터 숙제에 대해서 여러 번 항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담임 선생님께서 숙제를 너무 어렵게 내어 자녀가 스스로 해결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숙제는 부모가 함께해도 해결이 어려운 것도 있다면서 따지는 학부모도 있었다. 그래서 그때 선생님들과 함께 앞으로 숙제는 이렇게 내어야한다면서 숙제의 개념을 정리했었다.
‘숙제가 어려운 퀴즈 문제여서는 안 된다. 관심을 갖고 시간만 투자하면 모든 학생이 해결할 수 있어야한다.’
그럼 나도 지도교수님께 항의라도 한번 해볼까? 숙제가 너무 어렵다고 말이다.
그리고 얼마 전 평생교육 인문학 강의 수강 중에 받은 숙제도 있다.
“우리 삶에는 꼭 해야 할 두 가지 숙제가 있다. 그 하나는 부모님께서 천수를 다하시고 편안하게 가실 때까지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낳은 자식들이 새로운 가정을 이룰 때까지 키우고 책임지는 부모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삶의 숙제를 다 하기 위해서는 더 큰 숙제가 있다. 건강을 지키고 주변과 자기 관리에 철저해야하는 것이다.” 아주 평범하고 이해하기 쉬운 내용이었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또 내게 스스로 낸 숙제도 있다. 퇴직할 무렵 재미삼아 적어본 ‘버킷 리스트’가 그것이다. 앞으로 해결해야할 과제이니 숙제임에는 틀림없는데 어쩌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 달성하고 싶은 목표이고 내 삶의 의미일 수도 있겠다.
이런 저런 숙제를 받고 보니 문득 훈화시간에 학생들에게 ‘긍정의 힘’을 얘기하면서 예를 들었던 숙제와 관련된 일화가 생각난다.
‘어느 대학 수학과 1학년 교실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한 학생이 수업 시간에 지각을 해서 강의실에 들어가니 수업은 끝이 나서 아무도 없고 칠판에 수학 세 문제가 제시되어 있었다. 지각을 한 잘못도 있으니 숙제는 꼭 해야겠다싶어 일주일 내내 고생해서 그 문제를 풀었는데 너무 어려워 한 문제만 겨우 답을 찾고 두 문제는 끝내 풀지 못했다. 그래서 서둘러 교수에게 숙제를 다 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더니 교수님께서 깜짝 놀라셨다. 그건 숙제가 아니고 참고로 제시해둔 문제였다고 한다. 4학년 졸업반 학생도 풀기가 쉽지 않은 고난이도의 문제인데 1학년 학생이 어떻게 풀었냐면서 신통해 하셨다. 그런데 그 학생은 그 문제가 숙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자기 반의 철수도 풀 수 있고, 영희도 풀 수 있는 그저 평범한 숙제라고 생각했기에 그런 놀라운 일이 가능했었다고한다.’
수필 숙제를 받은 그날 회식 자리에서 옆자리에 앉은 몇 년차 선배격인 회원께서 예전에 있었던 한 에피소드를 얘기했다. 직설적인 표현을 잘하는 한 회원이 다른 사람의 수필을 읽고 “이런 글도 수필이라고 할 수 있나?”라고 댓글을 써서 두 사람이 크게 다툰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더 걱정이다. 그렇지만 수업 첫 시간에 교수님께서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산문으로 표현한 글이다.’라고 하시지 않던가? 그래서 ‘숙제는 관심을 갖고 시간만 투자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긍정의 힘은 기적도 낳는다.’ 이런 말들을 믿고 편한 마음으로 나는 수필 숙제를 한다. 어쨌든 숙제인 ‘수필 3편 쓰기’의 1/3을 한 셈인데 영 마음이 편하질 않다.
지키지 못한 어머니와의 약속
정병재
“고향집에 갈래?”
저녁을 먹고 편하게 앉아 연속극을 보고 있는 아내에게 느닷없이 던진 말이다.
“지금이 몇 신데 고향집에 가자고 해요. 저는 안갈테니 가고 싶으면 당신 혼자 가소.”
당연히 아내가 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내가 문득 고향을 가고 싶은 것이다.
“그럼 나 혼자 간다.” 억지지만 아내의 동의를 구한 셈이다. 고향집에서 자고 내일 아침 식사하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입고 있던 운동복 차림으로 아파트를 나선다. 그것도 밤 9시가 넘은 시각에 말이다. 내 고향은 ‘100대 피아노 콘서트’로 유명한 낙동강 사문진 나루터를 사이에 두고 대구와 이웃해있어 행정 구역은 경북이지만 대구 생활권이다. 캄캄한 고향집 큰방에 불을 켠다. 벽면의 책꽂이 맨 위쪽에 있는 사진 속 어머니께서 환하게 웃으며 맞아주신다. 생전의 모습 그대로 참 잘 찍은 사진이다.
“엄마. 별일 없었지요? 좀 늦었지만 그냥 오고 싶어서 왔어요.”
그러고 보니 어머니께서 돌아 가신지도 벌써 3년이나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여든여섯에 갑자기 뇌경색으로 쓰러지셔서 3년을 요양병원에 계시다 여든아홉에 돌아가셨다. 그 3년 동안 나는 2, 3일에 한번 꼴로 퇴근 후 병원을 들러 어머니를 뵈었다. 어머니께서는 오른쪽 수족을 쓸 수가 없어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지 않으면 앉을 수도 없을 만큼 거동이 불편하셨다. 그렇게 힘든 투병에도 병원에 있으니 아들을 더 자주 볼 수 있어 오히려 좋다고 하시며 내가 병실 문을 들어서면 늘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셨다.
세상의 어느 자식이 어머니와 애틋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냐만 나도 특히 그랬다. 시어머니께서 많이 편찮으셔서 맏아들 장가라도 보내야한다고 해서 열여섯 나이에 시집온 색시가 우리 어머니시다. 엄하셨지만 인정이 많은 시아버지로부터 어린 며느리는 끔찍한 사랑을 받으셨다. 그런데 며느리가 거푸 딸을 셋이나 낳고부터는 시아버지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셨다. 사랑은 고사하고 아예 구박을 하신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네 번째 자식인 나를 낳고는 또 딸일까 도무지 겁이 나서 성별을 확인할 자신이 없어 차라리 눈을 감았다고 하셨다. 자라면서 그런 얘기를 들은 이후로 나는 늘 어머니께 “나는 아들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효도를 다했으니 더 이상 내게 바라지 마시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그 무례함조차도 어머니에게는 행복인 듯 했다. 이후 아들을 셋이나 또 거푸 낳으셨지만 동생들이 “엄마는 늘 큰형만 위한다.”고 불평을 할 만큼 맏이인 내게 대해서는 내내 각별하셨다.
내가 정년퇴직을 앞두고 어머니께서 사셨던 고향집을 여러 고민 끝에 리모델링을 했다. 외벽에 단열재를 넣고, 목재 창문을 알루미늄 샷시로 고쳐달고, 벽과 바닥재도 새로 바꾸었다. 그렇게 하고보니 도시의 아파트에 비해 크게 불편하지 않은 것 같아 아내에게 아예 고향집으로 이사를 하자고 했다. 그랬더니 여러 구실을 대면서 영 내키어하지 않았다. 이후 몇 번 이사 얘기를 하다 문득 나도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 좀 사치스러울 수 있지만 세컨드하우스 하나 가져보자. 그냥 식구들이 많이 모이는 제사 때나 명절에 사용하고 평소에는 별장으로 쓰지 뭐’ 아니 더 솔직하게는 내가 꼭 고향집으로 이사해야 할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향집을 리모델링하면서 돌이켜보니 집을 지은 지 벌써 18년이나 되었다. 원래 고향 옛집은 지금의 집으로부터 500M쯤 떨어진 동네 한 가운데 있었는데 새마을 사업으로 초가지붕을 개량한 오래된 슬레이트집이었다. 게다가 마당은 꽤 넓었지만 아래채는 6.25 전쟁으로 불에 탄 뒤 대충 얽어매어 지었기에 어릴 때 혹 낯선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오면 어지러운 집 때문에 늘 부끄러웠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평소 새로 집을 지어야한다는 걱정은하셨지만 팍팍한 살림 탓에 결국 새집을 짓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래서 내가 당시 옛집을 팔고 더 보태 외상으로 동네 앞에 있는 밭에 2층집을 지었다. 그렇게 무리를 해서 집을 크게 지은 데는 1년에 여덟 번이나 되는 제사를 지내야하는 맏집이란 구실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아마도 어릴 때부터 가졌던 번듯한 집에 대한 욕구의 보상심리가 더 컸을 것이다.
무리를 해서 필요 이상으로 집을 크게 짓는 것에 대해 어머니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우려하시는 어머니께 “제가 다음에 정년퇴직을 하고 고향으로 와서 어머니 모시고 살 집이니 이 정도는 돼야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로 어머니의 걱정을 재웠다. 물론 속마음도 그랬다. 맏아들로서의 당연한 도리이니 꼭 그렇게 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18년이 지난 지금 정년퇴직을 하여 고향에 오니 어머니께서 계시지 않는다. 쓰러지셔서 병원에 가시기 전까지 따져보니 13년을 이 휑하게 넓은 집에 어머니는 외롭게 혼자 사셨다. 그래도 그때는 1주일에 한번 정도 어머니를 찾는 걸로 나는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만날 때마다 적지만 용돈까지 드리니 나는 꽤 효자인줄 알았다. 하긴 용돈이라고 하기는 부끄러운 액수다. 3천원이나 5천원, 아니 천원을 드린 때도 꽤 많았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원하셨다. 가끔은 경로당에서 화투칠 때 쓰게 차안 동전 통에 있는 동전만 조금 달라고 하셔서 그런 적도 있었다. 그 이상은 어머니께서 받지 않으셨다. 그래서 나는 그때 어머니께서 어디 쓸 돈을 좀 갖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 어리석게도 한참 뒤에야 그 까닭을 알았다. 어머니 당신께 쥐어주는 용돈이 혹 부담이 되어 아들이 자주 찾아오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모자간의 정을 나누는 징표정도로만 용돈을 받으셨던 것이다.
덩그러니 필요 이상의 큰 집을 지어놓고 퇴직 후에나 함께 살겠다는 맏아들을 어쩌면 13년 동안 그렇게 기다리셨는지도 모른다. 따져보니 그동안의 내 근무지는 모두가 고향으로부터 지척에 있어 충분히 통근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 왜 굳이 정년퇴직 후를 고집했던가 하는 생각을 하니 지금도 가슴이 아린다. 어머니는 늘 계실 줄 알았다. 내 사정에 맞춰 언제든지 찾으면 어머니는 늘 그렇게 기다려주실 줄 알았다. 고향처럼 어머니도 영원할 줄 알았다.
게다가 부끄럽게도 나는 ‘어버이 살아 실제 섬기기를 다하여라. … … 송강 정철의 훈민가를 가르치는 선생이지 않았던가.
어머니께서 고통 속에 계셨던 요양병원에서의 3년이 차라리 나는 감사하고 행복하게 느껴진다. 여러 핑계로 매일이 아닌 2, 3일에 한번이었지만 그렇게라도 어머니와의 시간을 갖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온전하게 지낼 수 있을까라는 마음이다.
이 밤 횅하게 빈 이 고향집에서 맏아들이한 약속의 그날을 기다리며 쓸쓸했을 어머니의 그 13년을 이제는 내가 반추하고 있다.
참 좋~은 나이
정병재
“부회장은 올해 나이가 얼마인고?”
“네. 집에 나이로 예순 다섯입니다.”
“그래. 참 좋~은 나이다.”
며칠 전 문중 임원회의에서 올해 여든 셋 되신 문중 회장님과 주고받은 얘기다. 지난해 정년퇴직을 하고 난 뒤 처음으로 문중의 행사에 참석했었다가 덜컥 부회장의 감투를 썼다. 고향 입향조(入鄕祖) 할아버지 3형제의 후손들이 모인 소문중(小門中)에서 맏이 집안인 우리 파의 몫으로 부회장을 맡은 것이다. 그동안은 아버지께서 고향을 지키고 살면서 문중의 대소사를 챙기셨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로는 작은아버지께서 그 일을 맡아오셨는데 이제 작은아버지 연세도 올해 여든 일곱이시다. 재작년까지 문중 회장을 하시다 이제 고문으로 계신다. 나는 그동안 여러 차례 묘사나 문중 회의 참석을 강요받았지만 늘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한 번도 참석을 하지 않았다.
문중 일은 대체로 연세가 많은 분들이 맡으니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작년에 처음으로 문중회의에 참석해보니 나는 꽤 젊은 편에 속했다. 방에 앉아서 식사를 기다리기가 왠지 민망해서 밖으로 나가 물주전자도 가져오고 그랬다.
되돌아보니, 퇴직하기 전 수년 동안에는 직장에서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아 오히려 윗사람으로서의 처신이 참 불편했었다. 어쩌다있는 회식 자리에서는 젊은 선생님들 눈치를 보면서 어느 시점에 조용히 사라질까를 고민하곤 했었는데 내가 오히려 젊은이 측에 속하는 문중 모임이 참 낯설다. 특히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일흔이 훨씬 넘은 분들이신 임원 모임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묘하게도 아랫사람으로 있는 그 낯선 분위기가 그렇게 싫지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고 젊어지는 것 같았다.
퇴직을 하고 그동안 가끔씩 가진 현직 후배들과의 만남보다는 동기 친구들이나 선배들과의 모임이 오히려 마음 편하고 즐겁다. 젊은 사람들과 어울려야 젊은 기를 받고 좋다고들 말은 하지만 마음은 영 그렇지 않다. 현직에 있는 동안에도 점차 나이가 들면서 동기들끼리 모여 후배들의 눈에 선배들인 우리들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까에 대한 얘기를 자주 나누었다. 내가 20대 초반의 초년 교사 때 동학년의 부장선생님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저렇게 연세가 많으신데 아이들에게 분수 셈은 바르게 가르치고 계시는가?’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돌이켜보니 그때의 부장선생님께서는 쉰 살도 채 되지 않으셨더라고 하니 다른 친구들도 다들 그런 생각을 했다면서 함께 웃곤 했다. 특히 여자 동기들은 더 그랬다고 한다. 마흔 살이 넘은 선배 여선생님들을 보고는 ‘집안 형편이 어려우신가? 아직도 교직에 계시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자기는 예순이 넘도록 교직에 있다면서 웃었단다. 그러고 보니 나도 얼마 전 교장 승진 발령을 받았다고 안부를 전하는 후배에게 정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물으면서 “그래. 참 좋~은 때다.” 라는 말을 했었다. 예순이 다되어가는 여자 후배에게 말이다.
예전 어느 날 의 일이 생각난다. 마당에서 부엌으로 쌀자루를 옮기시던 어머니께서 힘에 부쳐 주저앉았는데 이를 지켜본 할머니께서 “쯧쯧 그 나이에 그 정도 힘도 못써서 어쩌나”라면서 핀잔을 주셨다. 꼽아보니 그때 어머니는 60대 후반이셨고, 아흔 아홉 연세에 돌아가신 할머니께서는 아흔 쯤 되셨던 것 같다. 그때 아흔의 할머니에게는 60대 후반의 며느리가 한창 젊은이로 보였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이 들었다.’ ‘젊었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주관적인 듯하다. 내가 서있는 곳에서 왼쪽에 있는 사람은 내가 오른쪽에 있다고 할 것이고,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내가 왼쪽에 서있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아니다.
‘그래? 그럼 지금 나는 어떤가? 문중 회장님 말씀대로 진짜로 아직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참 좋은 나이인가?’ 아니면 평생의 업에서 정년퇴직을 했으니 조용히 물러앉아 그저 체면치레를 하고 있어야할 나이인가?
아직도 왕성한 저작과 강연 활동을 통해 현역으로 일하고 계시는 100세를 눈앞에 둔 철학자 김형석 교수께서
“100세를 살아보니 인생의 황금기는 60세에서 75세입디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나이가 너무 많아 무엇을 새롭게 시작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남은 시간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이 노(老) 교수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 ‘참 좋∼은 나이’임에 틀림없다.
그래. 뭐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자. 내가 가진 보잘것없는 작은 힘이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는지도 지금부터 찾아보자. ‘참 좋∼은 나이’가 더 가기 전에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최상순드림
수필 세편을 단숨에 읽고 또 읽었습니다. 누구나 모두가 겪었던 일을 이렇게 수필로 내어 놓으시니 독자가 읽고싶은 훌륭한 작품으로 탄생하셨습니다. 꼭꼭 숨기고 지금까지 글을 왜 쓰지 않으셨는지 궁금스럽습니다. 저도 아직은 좋은 때임을 명심하면서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좋은 글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훌륭한 글을 쓰셨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는 애틋한 마음과 나이에 대한 생각 등을 담담하게 서슬하였습니다. 제 나이가 아직 청년인지라 더욱더 열심히 살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어머니와의 사랑 이야기, 읽기만 해도 눈물이 납니다. 전번 다산 고향집에 놀러 갔을때 이렇게 큰 시골집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고 묻고 싶었는데 거기에서 사랑하는 어머니 모시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다산의 속마음이 이제 읽어 집니다. 그 큰 집에서 아들이 올 날을 기다리던 어머님의 모습도 떠오릅니다. 아~ 고향은 우리의 마음을 너무 아련하게 만드는군요.
이제 다산에서의 만남 자주 갖도록 합시다.
소소한 이야기 실타레를 풀듯 잘 푸셨습니다. 필운이 늘 함께 하시기를!
지난 날의 삶속에 묻어있는 아기자기하고 감동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숙제를 너무 잘 해주셨어 감사를 드립니다. 저도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큰집으로 양자를 가서 딸셋을 낳고 제가 태어나서 집안문제가 풀렸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저는 부모님 모시고 같이 살았으나 효도를 못하고 살았서 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