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을 차리는 여자 / 서순희
이야기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시작된다. 사람마다 걸어 온 길이 있듯이 고등학교 때 의지가 싹트고 마음이 결정되어 인생의 외롭고 긴 시간이 시작됨을 알 수 있다. 나의 학령기는 초등학교는 고향에서, 중,고,대학교는 광주에서 보냈다. 중학교때 반에서 실태조사를 하면, 광주시내에 사는 대부분 학생과 기타 지역에서 온 학생은 3명이었다. 중, 고를 갈 때 시험을 치렀고, 여고는 전남에서 첫 번째 학교를 다녔다. 1972년 –1975년이 고등학교 시절이다
엄마, 오빠는 이런 여고를 다니는 나를 자랑스럽게 여겼는데 그뿐, 여고 다닐 때 공부를 잘하지도 못했고, 눈에 띄지도 않는 여고생이었다. 여고의 교훈은 ‘건강하고 예의바르며 예지에 찬 일 할 줄 아는 여성’이었다. 교훈이 길다고 여겼고, 교장 선생님께서는 사시사철 훈화를 통하여 머릿속을 깨우쳤다. 학교 전체 분위기는 일류라는 정신 틀로 무장되었다. 사람이 모였을 때 떠들지 않기, 극장을 가더라도 일류극장에 가기, 옷을 단정히 입기,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기, 훈화는 계속 이어졌다. 학교 안에 여선생님도 대부분 선배이시고, 가정 선생님은 복도를 가다가 치마를 잡아보기도 할 때, 치마가 풀어져 발 밑으로 내려가면 굉장히 나무라고 후배가 엉망이라고 핀잔을 주었다. 나는 지금도 치마를 입을 때 긴치마를 입고, 벨트를 한다.
학교는 대단히 컸고 중학교 보다 매우 좋았다. 길게 뻗어 웃어주고 겨울에는 찰랑찰랑 머리 위에서 눈을 쏟아 낼 것 같은 히말리아 시타. 교실을 덮고 올라가는 담쟁이, 학교 문을 들어 올 때 운동장이 바로 보이지 않고 긴 복도를 거쳐서 잔디에 자리잡은 운동장, 소녀에게는 덧없이 좋은 배움터였다. 그리고 항상 선도적인 생각을 갖도록 교장 선생님께서 여러 가지 행사를 주선해 주셨다.전교생 테니스 운동, 교내 사진촬영대회. 음식, 예능 경연대회.사격 선수, 팬싱 선수 육성, “샘가의 소녀여 나날이 새로워라 “ 벽에 붙은 이 표어는 설레임을 주었다. 특히 이에리사, 정현숙 선수가 유고에서 탁구를 세계 제패했을 때, 수업을 중지하고 전교생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교장선생님께서 하셨던 훈화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미국 나사에 근무한 연구원을 초청해서 세계적인 미래 안목과 국내 과학 경시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물리선생님 일본과학시찰에 대한 이야기는 일본 생활 모습을 소개하면서 시민 정신을 갖게 하였고, 한글학자 한갑수 선생님 초청강연은 한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쌓았으며, 전남 예술제를 유치하여 해마다 그림, 무용분야 전남 학생 경연대회가 열려 신나고 즐거웠다. 어떤 꿈을 가진다기 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 윗글을 읽을 때 마다 새롭게 다짐했다.
대학을 갔다. 고등학교보다 대학교는 멋과 낭만이 있다고 들었다. 막상 대학교에는 많은 혼란이 있었다. 여고시절 소박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았던 것이 대학교는 거칠고 낯설게 느껴겼다. 특히 남학생들과 수업을 같이하고 또 남학생 가방을 우연히 보았을 때 가방에는 도시락 과 책 한 권 뿐 이었다. 그러다보니 남학생은 신경질의 대상이었고, 외면하고, 대학교에 정이 들기 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고, 여고 시절 자리 잡은 기억이 세상을 이어갔다.
직장생활을 했다. 주로 시골, 목포에서 학교에 근무했다. 직장에서 바라본 사회인 모습은 쉽게 접근이 안 되었다. 이상과 현실이 충돌구 처럼 내게 다가왔다. 그래서 나름대로 결정한 행동은 ‘1일 1선을 하자’, 학생을 가르칠 때, 학부형과의 대화, 동료간의 관계,에서도 1일 1선을 잊지 않았다. 긴 시간 동안 나와 함께 했던 슬프고 아름답고, 행복하고,역동적인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이제 전개되는 나의 자화상은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힘을 쓰고 반성하고, 새로워지는 것이다. 얼굴이 예쁘지 않았고, 마음이 곱지 않았고, 특별한 재주나 가진 돈은 내 세울 것이 없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고시절에 담았던 소녀 마음을 가꾸고 나이를 먹어갈 때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가로수 길을 나는 좋아한다. 가로수 길을 갈 때 나무 사이는 인생의 한 토막이고, 내 자화상이 연결되는 고리였다 . 엄마는 15년 이상 병으로 고통을 받으셨고, 3년은 누워서 마지막을 보냈다. 엄마가 돌아가기 3개월 전부터 매주 순천 오빠 집에 갔다. 나를 보고 왔냐 하면서 말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말을 할 수 있을 때 물어봤다. 몸이 좋아진다면 하고 싶은 일을 묻자, 내가 너희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서 밥상을 차려주고 싶다고 했다. 깜작 놀랐다. 세상을 원망하는 소리도 없이 밥상을 차린다는 이 말은 지금도 가슴에 숨 쉰다. 나의 자화상이다. 밥상을 차리는 여자로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