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6월 호국의 달을 기념하여 대전 현충원에 하늘로 가는 우체통을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연이 우체통에 쌓였다고 합니다.
20여 년 전 먼저 떠난 남편에게 쓴 어느 부인의 편지입니다. “가슴 시리도록 보고 싶은 당신께, 당신이 우리 곁을 떠난지 벌써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현충원에 하늘로 가는 우체통이 개설되어 이제 편지로 소식을 올립니다. 우리는 당신이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봐 주시는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중략) 먼 훗날 당신 곁에 가거든 늙었다고 몰라보지 마세요. ...오늘도 당신만을 그리는 당신 부인이...
어느 누나가 먼저 간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선우야, 누나는 네가 너무 보고 싶다. 꿈에라도 나타나지 어떻게 한 번도 꿈에 나타내질 않니? 생전에 이야기도 못해 보았는데 한번이라도 꿈에 나타나 그곳 이야기를 해 주렴아. 네가 그렇게 되기 전에 ·1년 동안 못 본 게 너무 속상해. 너무 보고 싶다. 기다리고 있어 우리 가족 다 같이 만날 그 때까지” 사랑한다. 누나가”
먼저가 간 아들에게 쓴 어느 아버지의 편지입니다. “네가 떠난 지 벌써 20년이 되었구나. 네가 떠난 후 아빠와 엄마는 너를 하루도 멀리 한 적이 없이 가슴에 묻어 두고 살아가고 있구나. 이 땅에서처럼 고통스럽게 살지 말고 저 하늘나라에서 평화롭게 지내라 훗날 아빠와 같이 하늘나라에서 다정하게 살자...아빠가”
어느 편지 하나 가슴 저리고 눈물어리지 않는 편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편지에는 공통적인 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종교에 관계없이 먼저 떠난 가족이 영원히 사라졌다든지 없어졌다고 믿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죽은 가족들은 하늘나라 어느 곳에서든 그곳에 살고 있다고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죽어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돌아갈 곳이 있고 그곳에 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살아도 그곳을 그리워하고 그곳에 간 사람을 보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육신은 이 땅에 태어나 살지만 우리의 영적 고향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우리의 고향을 생각하면 코가 찡하고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또 그곳을 그리워하며 그곳으로 동라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귀소본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세상에 있는 고향보다 더 본질적인 고향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우리를 영적으로 태어나게 해 주신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계신 곳, 아버지의 집, 천국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땅에 살면서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태어난 육신의 고향보다 더 귀한 본향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9-10)
여기에는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영원한 본향인 천국은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영적 귀향을 이루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멋대로 육신의 정욕대로 살다 죽으면 천국을 찾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영적으로 복된 귀향을 할 수 있는 길은 예수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 받아 아버지와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본문은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받아 세상으로 나가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다 죽게 되어 아버지께 돌아와 영원한 만족과 안식의 삶, 복된 귀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된 귀향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모든 인생의 실패는 아버지를 떠남으로 시작됩니다.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눅 15:11-12) 어떤 부잣집 둘째 아들이 유산을 미리 받아 아버지 집을 떠나 독립하여 살기로 합니다. 모든 것이 잘되고 성공할 것을 자부했지만 실제는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다 탕진하고 나중에는 먹을 것이 없어 다 죽게 됩니다. 그래서 남의 집 돼지를 치며 쥐엄 열매를 얻어먹고 살았는데 나중에 흉년이 되어 그것도 먹기 힘들게 된 것입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눅 15:13-16)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스스로 독립하여 살면 자기 뜻대로 될 줄 알았지만 결국 다 끊어지고 말라지고 망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인생의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게 됨으로 모든 복된 원동력이 차단되니 어려운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시계라도 건전지가 들어 있어야 시간이 돌아가고 시간이 맞는 것인데, 하나님을 멀리하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미국의 세계적인 문호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 ‘전쟁과 평화’, ‘무기여 잘있거라’등 유명한 명작을 남겼습니다. 그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노벨 문학상까지 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인생 후반부터 심한 허무주의에 빠져 자살을 합니다. 전해 오늘 말로 그는 죽으면서 “내 머리가 필라멘트가 끊어진 것 같다”고 했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인생의 전원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께 돌아 와야 합니다. 복된 귀향을 이루어야 합니다.
두 번째, 아버지를 떠나면 자기 상실을 막지 못합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
둘째 아들은 자기 힘으로 잘 될 줄 알았는데 그것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자기 전체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가 쓴 “상실 시대”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습니다. 그는 소설을 통해 오늘의 세태를 이 시대는 상실의 시대라고 정의하면서 이 시대는 모든 것이 흔들리고 제어장치가 없는 멀미나는 세대라고 합니다. 아버지를 떠나면 브레이크 없는 인생으로 다 부서지고 상실하게 됩니다.
1) 자기 인생이 허랑방탕한 낭비의 인생이 됩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눅 15:13)
인간은 다 정해진 시간을 삽니다. 여기서 ‘허랑방탕’ 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소티아’ 무절제한, 떠들썩한, 실속이 없는 방종과 낭비의 쓰레기 같은 인생을 말합니다. 영적으로는 아무것도 계산이 안 되는 값어치가 없는 삶입니다. 마이너스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지옥으로 가는 삶입니다. 지옥은 ‘게헨나’로 이스라엘에서 우상을 태우는 쓰레기 소각장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지옥을 쓰레기장으로 비유하십니다.
2) 하나님을 등지면 절대 빈곤에 빠지게 됩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눅 15:13-14)
그 많던 재산을 날려버리고 굶어 죽게 된 것입니다. 돼지 쥐엄 열매도 먹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습니다. 굶어 죽게 되는 절대 빈곤에 빠지게 됩니다. 포도나무가지가 줄기에서 떨어지면 말라비틀어지는 것 같이 하나님을 등지면 이런 빈곤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등지면 인간성을 상실하여 짐승 같은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눅 15:15-16)
이스라엘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둘째아들은 돼지 쥐엄 열매를 먹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나면 본능에 따라 사는 짐승수준으로 인간성이 상실됩니다.
얼마 전 일류대학을 나온 대학교수가 자기 부인과 자식을 죽이고 조교와 바람이나 일본으로 도망을 하여 10년 간 숨어 살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우리나라로 이송되었는데 전혀 뉘우침도 없이 뻔뻔하게 기자 회견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 사람 속에도 인간의 영이 있을 까? 하는 의심이 생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인간은 다 짐승의 모습만 남게 됩니다.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세 번째, 아버지께 돌아오는 귀향이 이루어지면 복된 인생으로 회복됩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눅 15:20-23)
오늘 죄 많은 탕자가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복된 귀향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상실된 아이들의 인생은 완전히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놀라운 것은 아버지는 집나간 죄 많은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지가 다 되어 돌아온 아들을 먼저 알아보시고, 안아 주시고 입을 맞추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날의 모든 죄와 잘못을 묻지도 않습니다. 무조건 돌아온 것만으로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 아들은 죽었다 다시 살아났다”고 말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4)
그리고 상실된 아들의 인생을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최고의 잔치를 열어주고, 좋은 옷을 입혀 주시고, 부요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신발을 신겨주시고(당시 노예는 신발이 없음), 가락지를 끼워주십니다. 그리고 아들의 권세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다시 상속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죄가 많고 부족할지라도 하나님께 돌아가는 귀향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과거의 삶이 회복되고 영원의 삶이 열리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여름 궁전에는 17세기 최고의 화가 럼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이 본문을 읽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의 내용은 돈이 많았던 아들이 창기와 방탕한 삶을 살다 다 탕진하고 탕자가 되어 진정으로 회개하고 아버지 품에 안기는 모습을 실감있게 그렸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귀향하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탕자입니다. 이제라도 아버지께 돌아가는 복된 귀향을 이룹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과거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고, 상실된 우리의 인생으로 복되게 회복을 시켜 주십니다. 이것이 복된 귀향입니다.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이루어야 영원한 본향, 천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복된 귀향을 여기에서 이루지 못하면 이 땅에서 실패하고, 영원한 본향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복된 귀향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