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줄기 껍질 벗기기
평창강이 흐르는 금당계곡에서 펜션 ‘별이 빛나는 밤에’를 운영하는 김영식(金永植) 권사는 ‘별밤지기’ 외에도 양봉농장을 경영하는 ‘벌통지기’요, 넓은 밭을 가꾸는 ‘텃밭지기’다. 그의 농사는 수익창출의 목적보다 지인들과 나누는 기쁨이 더 큰 사업이다. 수확한 옥수수를 주일 점심에 전교인과 나누며 즐거웠다. 양파와 감자를 캐고 또 나누는 기쁨으로 뙤약볕에서 흘린 땀의 보람을 느낀다. 그 덕에 담임목사는 그의 사랑의 혜택을 고스란히 입고 있어 미안함 속에 행복이 담긴다. 어느 날(2024.8.26)인가 한 끼 정도 밥상에 올릴 만큼의 고구마줄기를 주면서 적은 양이라고 멋쩍어하며 머리를 긁는다. 고구마줄기는 탄수화물, 비타민, 칼슘, 철분, 나트륨, 인, 칼륨, 식이섬유, 나이아신 등의 영양분이 담겨 있는 건강식품이다. 특히 섬유질이 풍부하여 변비예방에 도움이 되며 콜레스테롤을 저하시켜 주어 성인병 예방에 좋다. 약간 통통하며 아삭한 식감 때문에 씹는 맛도 일품이다. 그날 저녁 아내는 이 건강 보약을 맛있게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고구마줄기는 껍질을 벗겨야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소금물에 담가 두었다가 줄기의 윗부분부터 벗겨야 쉽다. 그리고는 소금물에 살짝 삶아서 찬물에 헹구고 물기를 짜서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말리면 보관하기도 좋다. 요리할 때 물에 불렸다가 먹으면 그만이다. 보통 고구마줄기는 양념과 함께 볶아서 먹는다. 대부분 맵지 않고 간간하게 양념을 활용하지만 취향에 따라서 매콤하게 조리하면 색다른 맛의 별미가 된다. 아내는 친정어머니에게 전수받은 방법대로 우선 끓는 물에 고구마줄기를 삶는다. 그래야 껍질 까기가 수월하다. 껍질은 질겨서 아삭한 고구마줄기를 씹는 식감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번거롭더라도 꼭 벗겨야 하는 게 그의 지론이다. 지금까지 아내는 이런 방법으로 조리된 고구마줄기를 상에 올렸다.
그날 늦은 시간인데 고구마줄기의 껍질을 벗기느라고 수고하는 아내를 돕고 싶어서 같이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하면서 껍질을 벗겨나갔다. 서로에게 할당된 양을 무릎 앞에 두고 열심히 벗기는데 아내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껍질 까는 아내의 손놀림을 보면서 매우 쉬운 작업인 줄 알았다. 무식이 용감하다는 말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달려들었지만 내게 맡겨진 분량은 줄지를 않는다. 줄기 윗부분의 껍질을 찾아서 한 번에 벗겨내야 하는데 그 일이 만만치 않았다. 쭉쭉 벗겨내는 아내의 손놀림을 보니 시원한 느낌까지 더해주는데 비해 내 작업에는 답답함에 짜증이 아지랑이처럼 모락모락 피어났다. 그냥 줄기를 통째로 먹다가 껍질만 뱉어내면 될 것이 아니냐고 따졌더니 아내는 식감이 떨어져서 그 고유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면서 굳이 이 작업을 고집했다. 결국 나는 돕는다는 명분만 세웠고 아내는 처음으로 껍질 벗기기에 동참해 준 마음만 받고 작업이 종료되었다.
“아니, 지금까지 상에 올라온 고구마줄기가 이런 작업을 거쳐서 만들어진 거야?”
내 질문에 아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어머니도 이런 과정을 거치고 찬을 마련했던 것이다. 식구 중 누구 하나 껍질 벗긴 수고를 모른 채 먹기 바빴고 대신 ‘간이 맞네 안 맞네’ 하며 투덜거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머니보다 더 긴 세월을 살아온 아내 역시 늘 그렇게 준비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자 모든 밥상에는 말하고 먹는 입만 가진 남정네들은 전혀 모를 수고가 담겨 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무엇이 소중한 것일까? 물질 세상에 사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고가의 물건일 게다. 어떤 조건이 잘 갖추어지거나 여건이 형성됐을 때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소중한 것은 그렇게 손을 벋어도 닿지 않는데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의 사소한 일상에 너무 많다. 일상이기에 당연했고 작은 것이기에 사소했고 누구나 가지고 있어서 평범했기에 몰랐을 뿐이다. 30여 년 동안 아내가 차려준 밥상은 매끼마다 당연한 일상이었다. 그냥 먹어주기만 해도 내 할 일을 다한 사람처럼 고개를 뻣뻣하게 쳐들었던 무지가 담긴 오만의 밥통이 깨져야 그 밥상의 소중함이 수면 위에 떠오른다. 여든 중반에 홀로 된 노신사 조동식(趙東植) 권사가 무심코 흘린 말이 생각났다.
“목사님, 나 혼자 밥 차려 먹으려니 힘들어요. 아내가 차려준 밥이 그리워.”
그는 아내가 차려주는 밥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의 빈자리에서 터득했다. 사실 밥상이 아니라 아내의 존재가 그리웠던 것이다. 노년의 고독 속에서 그의 존재만으로도 가슴 절절히 느끼는 소중함이었다. 아무도 눈길조차 주지 않아도 활짝 핀 꽃, 길 따라 흐르는 강물, 늦가을을 물들이는 단풍,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만남이 반가워 입가에 번지는 미소, 소리 높여 외치는 ‘파이팅’(fighting) 구호, 작은 일에도 잊지 않는 감사, 문자 받고 보내온 짧은 댓글, 상대가 먼저 끊기를 기다리는 전화예절, 비타민 챙겨주는 마음, 그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기, 남을 존중하는 배려 등. 눈을 크게 떠야만 볼 수 있는 우리의 일상에서의 소중함이다. 또한 설교 때마다 듣는 예수님 보혈의 공로 역시 신앙의 이력만큼 이제는 내 귀를 채운 일상이 되었지만 그 가치의 소중함을 망각할 때 그리스도인은 타락의 길에 섰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주신 사랑이 늘 듣는 평범한 일상에 묻힌다면 구원의 소중함은 희미해지고 결국 신불신(信不信)의 경계가 무너질 게 뻔하다.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일상의 평범함에서 큰 소중함을 깨닫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고구마줄기 껍질을 벗기면서 스치는 자성이다.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잠언 21:20).
고구마가 영글고 있는 텃밭을 풍성히 채운 고구마 이파리
고구마줄기 껍질 벗기기
온갖 수고 끝에 맛있게 변신한 고구마줄기
조동식 원로 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