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의 품격
박경선
2023년 11월 14일 화요일
“안녕하세요, 영남수필 모임인데요?”
총회 날이라 ‘산’ 한정식 식당에 들어서서 물으니 왼쪽 방문을 가리킨다. 방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우선 눈에 띄는 분들에게 목례하며 자리를 찾았다. 김경숙 선생님과 신미경 선생님 앞자리가 비어 있어 앉았다. 앉아서 보니 식탁 위에 ‘영남수필 잡기장’이라는 A4 용지 크기의 하늘색 노트 같은 것이 놓여있다. ‘이 자리에 주인 있었나.’ 싶어 둘러보니 다른 식탁에도 그런 잡기장이 몇 권씩 놓여있다.
“이게 뭐지요?”
했더니, 신 선생님 왈
“한 권씩 가지라고 올려둔 것 같은데요?”
했다. 그래서 두터운 잡기장을 펼쳐 들며 말했다.
“옛날에 양면 괘지 편지지가 있었잖아요. 여기에 편지를 써야 할 것 같은데요?”
했더니 연습장으로, 글을 쓰라고 준 것 같다고 했다.
박현기 회장님이 인사말 끝에 잡기장 이야기를 했다.
“식탁 위에 놓인 ‘영남수필 잡기장’은 공진영 선생님이 회원들에게 한 권씩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 말에 모두 박수하며 공진영 선생님을 돌아보았다.
선생님은 영남수필의 고문이요, 노장이시다. 저번 10월 문학기행의 날, 승합차가 반월당에 주차해서 여행 떠날 회원들을 기다렸다. 나는 임원도 아니지만 사람들을 빨리 보고 싶어 차에 타지 않고 오시는 분들을 맞으려고 차 밖에서 서성거렸다. 그때 공 선생님이 다가오셨다. 늘 웃음을 머금은 얼굴이었다. 달려가 와락 팔짱을 끼며 ‘함께 가게 되어서 좋아요.’ 인사했더니 강의 일정이 있어 회원들을 전송해 주려고 일부러 나오셨다고 누가 귀뜸을 했다. 속내를 알고 보니 찬조금을 얹어주시려고 나오신 것이었다.
‘아, 저렇게 살아야 했는데….’
기행을 떠나는 회원들에게 손 흔들어 주는 선생님을 남기고 떠나면서, 나는 내 나이 마흔 즈음 때 내 모습과 비교해 보았다.
대명초등학교에 근무할 때 학교가 우리 개나리 아파트 건너편에 있을 때였다. 친목회 버스가 우리 집 앞에서 출발할 때 나는 서울에 ‘현장연구 논문 심사’를 받으러 출장 가는 날이라 함께 못 가는 대신 커피를 끓여 직원 수만큼 포토에 담고, 밤새 삶은 땅콩을 봉지마다 담아 나눠 드린 기억이 났다. ‘아, 그때 나도 친목회에 찬조금을 드렸어야 했는데!’ 그때는 전혀 깨치지 못했던 일이, 내 나이 칠십이 되어 공진영 선생님을 뵈면서 처음 깨친 베풂의 미덕이었다. (그래서 나도 찬조를 하고 싶었지만, 아무 것도 아닌 내가 함부로 날뛰면 나를 어떻게 볼까 염려가 되어 모 임원님께 찬조 대신 광한루 추어탕 집에서 창란젓갈을 한통씩 사서 선물해주고 싶어 물어봤더니 비도 오고, 들고 다니기 번거롭다기에 마음을 접어버렸다.)
선생님을 멀리서 뵐 때마다 그렇게 하나씩 배워가는 중인데, 이번에 또 ‘잡기장’을 만들어 와서 나눠주시다니…. 그런 분이 고등학교 장학사로 계실 때 장학 지도 나가서 만난 후배 교사가 우리 모임에 있다. 안연미 선생님 역시 재능도 빼어나고, 늘 웃음을 머금은 얼굴에 선배 선생님처럼 베풀기를 즐기며 사는 분이다. 그런 스승과 제자 사이의 모습도 부러움의 대상이다. 힐끔힐끔 훔쳐보며 부러워하고 있는데, 왼쪽 구석에 앉아 있던 분이 건네 보며 물었다.
“박 선생님, 혹시 대성초에 계시지 않았어요?”
낯이 익었다. 대성초에 근무할 때 학교 운영위원장을 하셨던 남인수 선생님이셨는데 이때껏 몰라보고 있었다니 내가 참 한심했다. 벌떡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아침마다 교문 앞에서 등교하는 아이들을 맞으며 하이파이브로 4년을 살아놓고도 운영위원장님 얼굴을 진작에 몰라봤으니.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그런데 신입회원으로 처음 오신 박승숙 선생님도 다가오며 말을 건네었다.
“선생님, 우리 딸이 교대대학원에서 선생님께 배웠어요.”
한다. ‘이슬기’라고 이름이 예뻐서 기억하는 선생님이었다.
집에 돌아와 이슬기 선생님과 수업할 때의 내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가 보았다. <동화창작 공부방>에 올려진 글들을 찾아보다가 2017년 2학기 야간제 이슬기 선생님이 과제로 올려둔 글들 269, 277, 283, 284번과 내가 답해준 270, 278, 289, 290번을 찾아보았다. 원고에 암호를 넣어 올려둔 글이라 이제는 암호를 잊어버려 읽을 수 없지만, 어머니, 박승숙 선생님을 닮아 판타지 동화 창작에 재능이 뛰어나고 착실한 선생님이셨다. 십 년 동안 교대 대학원에서 계절제 강의를 맡았을 때, 일주일에 한 번씩 점심시간에 현직 교사인 선생님들을 만나 점심을 대접하고 강의를 시작했고, 야간제 강의를 맡았을 때는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수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강의료로 밥 나누며 살아왔기에 한 학기에 한 번씩 종강식을 할 때마다 선생님들은 내게 손 편지를 써주었다. 십 년 동안 모아놓은 감사의 손 편지가 지금의 내게 남은 추억의 재산이다.
‘그래, 우리 교사들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증명하는 산 증인들이 도처에 널려있으니 정말 잘 살아야겠구나!’
생각을 다지며 공진영 선생님이 주신 영남수필 잡기장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선생님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손 편지를 썼다.
“선생님, 55집에 쓰신 선생님의 글 ‘고의적삼’을 보면 선생님의 인품이 그대로 품격으로 담겨 보입니다. 하루아침에 쫓아 흉내 낼 수 없는 베풂의 삶이 담긴 품격을 오늘도 저희는 배우며 익어갑니다. 늘 감사드리며 건강하시길 소망합니다. 오래도록 저희에게 빛과 소금이 되어주소서! 아멘!” (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