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이제(*1) 청정하고 순수한(*2) 알음알이만이 남았다.(*3)
이 알음알이로 무엇을 아는가?
그는 '즐겁다.'라고 안다.(*4)
'괴롭다.'라고 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라고 안다.
비구여, 즐거움을 느낄 감각접촉을 반연하여(*5) 즐거운 느낌이 일어난다.
그는 즐거움을 느끼면서 '나는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라고 꿰뚫어 안다.
'즐거움을 느낄 그 감각접촉의 소멸과 더불어
즐거움을 느낄 감각접촉을 연하여 생긴 즐거운 느낌도 소멸하고 가라앉는다.'라고 꿰뚫어 안다.
(*1) “앞에서는 물질의 명상주제(rūpa-kamma-ṭṭhāna)를 설하셨고,
지금부터는 정신의 명상주제(arūpa-kamma-ṭṭhāna)를 느낌(vedanā)을 통해 일으켜서 보이시기 위해
이 가르침을 시작하셨다.”(MA.ⅴ.53)
(*2) “‘청정하고 순수한(parisuddha pariyodāta)’이라고 하셨다.
오염원이 없기 때문에(nirupakkilesa ‘청정하고(parisuddha)’,
빛나기 때문에(pabhassa) ‘순수하다(pariyodāta).’”(MA.ⅴ.53)
“즉 반대되는 법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의 마음이 청정하다.
그리하여 오염원이 없다고 했고, 오염원들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순수하다고 설명했다.”(MAT.ⅱ.399)
(*3) “‘남았다(avasissati).’는 것은
부처님께서 [요약(uddesa)만 설하셨고 분석(niddesa)은 설하셔야 하기 때문에 –MAT.ⅱ.399]
설명하실 것이 아직 남았고, 선남자가 통찰할 것이 아직 남았다는 뜻이다.”(MA.ⅴ.53)
(*4)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고 꿰뚫어 안다는 말씀이다.”(MA.ⅴ.53)
(*5) “조건(paccaya)을 통해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이기 위해 설하셨다.”(MA.ⅴ.53)
비구여, 괴로움을 느낄 감각접촉을 반연하여 괴로운 느낌이 일어난다.
그는 괴로움을 느끼면서 '나는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라고 꿰뚫어 안다.
'괴로움을 느낄 그 감각접촉의 소멸과 더불어
괴로움을 느낄 감각접촉을 연하여 생긴
괴로운 느낌도 소멸하고 가라앉는다.'라고 꿰뚫어 안다.
비구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느낄 감각접촉을 반연하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난다.
그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라고 꿰뚫어 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느낄 그 감각접촉의 소멸과 더불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느낄 감각접촉을 반연하여 생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소멸하고 가라앉는다.'라고 꿰뚫어 안다.
비구여, 예를 들면 두 개의 막대기를 맞대어 비비면 열이 생겨 불꽃이 일어나고,
그 막대기를 떼어 분리시키면 그것에서 생긴 열기도 소멸하고 가라앉는 것과 같다.
비구여, 그와 같이 즐거움을 느낄 감각접촉을 반연하여 즐거운 느낌이 일어난다.
그는 즐거움을 느끼면서 '나는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라고 꿰뚫어 안다.
'즐거움을 느낄 그 감각접촉의 소멸과 더불어 즐거움을 느낄 감각접촉을 반연하여 생긴
즐거운 느낌도 소멸하고 가라앉는다.'라고 꿰뚫어 안다.
비구여, 괴로움을 느낄 감각접촉을 반연하여 괴로운 느낌이 일어난다.
그는 괴로움을 느끼면서 '나는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라고 꿰뚫어 안다.
'괴로움을 느낄 그 감각접촉의 소멸과 더불어 괴로움을 느낄 감각접촉을 반연하여 생긴
괴로운 느낌도 소멸하고 가라앉는다.'라고 꿰뚫어 안다.
비구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느낄 감각접촉을 반연하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난다.
그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라고 꿰뚫어 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느낄 그 감각접촉의 소멸과 더불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느낄 감각접촉을 반연하여 생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소멸하고 가라앉는다.'라고 꿰뚫어 안다.”
20. "비구여, 이제 청정하고 순수하고 부드럽고 다루기 쉽고 빛나는 평온만이 남았다.(*6)
비구여, 예를 들면 숙달된 금세공인이나 금세공인의 제자가 용광로를 준비하여
도가니를 가열하고 도가니 집게로 금을 집어서 도가니에 넣을 것이다.
그는 때때로 바람을 불어 가열하고, 때대로 물을 축여 식혀주고, 때대로 관찰하면
그 금은 제련되고 잘 제련되고 완전하게 제련되어 흠이 없고 부드럽고 다루기 쉽고 빛날 것이다.
그는 띠든 귀걸이든 목걸이든 금 화환이든 그 어떤 장식구든 그가 원하는 대로 자기의 목적을 성취한다.
비구여, 그와 같이 이제 청정하고 순수하고 부드럽고 다루기 쉽고 빛나는 평온만이 남았다."
(*6) “그런데 ‘평온만이 남았다(upehhkā yeva avasissati).’는 것에는 무슨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가?
스승께서 설명해주실 것이 남아있다는 말씀이다.
선남자가 통찰할 것(paṭivijjhana)도 남아있다는 것은 해당되지 않는다.
선남자는 친구로부터 교법을 듣고 왕궁(pāsāda-tala)에 머물 때에도 들숨날숨의 제 4선을 일으켰다.
또한 그만큼의 먼 거리를 걸어서 올 때 여행의 의무를 성취했다.
그러므로 스승께서 설명해주실 것만 남았다.”(MA.ⅴ.53~54)
21.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안다.
'내가 만일 이와 같이 순수한 평온을 공무변처로 기울여서 적절하게(*7) 마음을 닦는다면
이런 나의 평온은 그것을 의지하고 그것을 취착하여(*8) 아주 오랜 세월을 머물게 될 것이다.(*9)
내가 만일 이와 같이 순수한 평온을 식무변처로 …
무소유처로 …
비상비비상처로 기울여서 적절하게 마음을 닦는다면
이런 나의 평온은 그것을 의지하고 그것을 취착하여 아주 오랜 세월을 머물게 될 것이다."
(*7) ‘적절하게’는 tad-anudhamma를 옮긴 것인데
이것은 그(tad)법을 따라(anudhamma)로 직역할 수 있다.
그래서 ‘적절하게’로 의역을 하였다.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무색계禪(arūpa-avacara-jjhāna)이 법(dhamma)이고,
그것을 따르기 때문에 색계선이 그것을 따름이다.”(MA.ⅴ.55)
복주서는 “이것은 무색계의 유익함을 뒤따르는 법인데,
그 도닦음으로써 무색계선을 얻는 예비단계의 도닦음이다.”(MAT.ⅱ.400)라고 설명하고 있다.
(*8) “‘그것을 취착하여(tad-upādānā)’라고 하셨다.
여기서 취착하다는 것은 그 도닦음으로 그것을 닦아서 라는 뜻이다.”(MAT.ⅱ.400)
(*9) “‘아주 오랜 세월 머물게 될 것이다(ciraṃ dīgamaddhānaṃ tiṭṭheyya).’라는 것은
2만 겁(kappa)을 머물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MA.ⅴ.55)
22.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안다.(*1) '내가 만일 이와 같이 순수한 평온을
공무변처로 기울여서 적절하게 마음을 닦더라도 이것은 형성된 것이다.(*2)
내가 만일 이와 같이 순수한 평온을 식무변처로 … 무소유처로 …
비상비비상처로 기울여서 적절하게 마음을 닦더라도 이것은 형성된 것이다.'
그는 존재나 비존재(*3)를 형성하지도 않고 의도하지도 않는다.(*4)
그는 존재나 비존재를 형성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을 때
그는 세상의 어느 것에도 취착하지 않는다.(*5)
그가 세상의 어느 것에도 취착하지 않을 때 그는 동요하지 않는다.
동요하지 않을 때 그는 스스로 완전한 열반을 얻는다.
그는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6)
(*1) “네 가지 무색계선을 설명하고 나서
지금은 그것의 위험(ādīnava)을 보이시기 위해 이렇게 시작하셨다.”(MA.ⅴ.56)
(*2) “‘이것은 형성된 것이다(saṅkhatam etaṃ).’라고 하셨다.
즉 2만겁을 산다하더라도 그것은 조건 지어진 것이고 형성된 것이고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상하고 견고하지 못하고 영원하지 못하고 그때뿐이고,
그것은 죽고 무너지고 파괴되는 법(dhamma)이다.
태어남을 따르고 늙음을 따르고 죽음을 따라 괴로움에 귀속된다.
그것은 의지처가 되지 못하고 보호처가 되지 못하고
귀의처가 되지 못하고 피난처가 되지 못한다.
식무변처의 설명도 이와 같은 방식이다.”(MA.ⅴ.55)
(*3) “‘존재나 비존재(bhava vā vibhava vā)’라는 것에는
성취(viddhi)나 패배(parihāniyā), 혹은 항상함과 단멸(sassat-uccheda)이 적용되어야 한다.”(MA.ⅴ.57)
(*4) “‘형성하지 않는다(nāyūhati).’는 것은
존재를 받게 하는 의도를 지어 일을 모으지 않고 쌓지 않는다는 뜻이고,
‘의도하지 않는다(na abhisañcetayati)는 것은 의도하는 일이 없음을 말한다.”(MAT.ⅱ.400)
(*5) “‘그는 세상의 어느 것에도 취착하지 않는다(na kiñci loke upādiyati).’는 것은
세상의 물질 등에 대해 어느 하나(eka-dhamma)에 대해서도 갈애를 가지고 취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다는 말씀이다.”(MA.ⅴ.57)
(*6) “세존께서는 스스로 깨달음의 영역(buddha-visaya)에 머물러 아라한과의 절정을 취하셨고,
선남자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 세 가지 사문의 과를 통찰하셨다.
세 가지 과를 얻기 전에 세존께서 무더기[蘊]와 요소[界]와 감각장소[處]에 대한
궁극적인 공(accanta-suññatā)과 세 가지 특상에 관계된 설법을 하실 때에도
세존에 대한 의심이나 회의는 다 끊어졌다.
그러나 불환과를 얻고 나서 이 분이 스승님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존께서 설법을 계속 이어가셔서 그것을 표현할 수 없었다.”(MA.ⅴ.57~58)
23. "만약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7) '그것은 무상하다.'라고 꿰뚫어 알고,
'연연할 것이 못된다.'라고 꿰뚫어 알고, '기뻐할만한 것이 아니다.'(*8)라고 꿰뚫어 안다.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은 무상하다.'라고 꿰뚫어 알고,
'연연할 것이 못된다.'라고 꿰뚫어 알고, '기뻐할만한 것이 아니다.'라고 꿰뚫어 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은 무상하다.'라고 꿰뚫어 알고,
'연연할 것이 못된다.'라고 꿰뚫어 알고, '기뻐할만한 것이 아니다.'라고 꿰뚫어 안다."
(*7) “여기서 ‘그(so)’는 아라한을 말한다.”(MA.ⅴ.58)
(*8) “‘기뻐할만한 것이 아니다(anabhinadita).’라는 것은
갈애와 사견을 가지고 기뻐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꿰뚫어 안다는 말씀이다.”(MA.ⅴ.58)
24.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거기에 매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9)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거기에 매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 그는 거기에 매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그는 몸의 마지막 느낌(*10)을 느낄 때 '나는 지금 몸의 마지막 느낌을 느낀다.'라고 꿰뚫어 안다.
생명의 마지막 느낌을 느낄 때 '나는 지금 생명의 마지막 느낌을 느낀다.'라고 꿰뚫어 안다.
그리고 그는 '이 몸 무너져 목숨이 끊어지면, 바로 여기서 이 모든 느낌들은
기뻐할 것이라고는 없게 되고 싸늘하게 식고 말 것이다.'(*11)라고 꿰뚫어 안다.
이는 마치 호롱불이 기름과 심지를 의지 하여 타는데
기름과 심지가 다하고 다른 연료를 공급해주지 않으면 연료부족으로 꺼지고 마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비구여, 비구는 몸의 마지막 느낌을 느낄 때 '나는 지금 몸의 마지막 느낌을 느낀다.'라고 꿰뚫어 안다.
생명의 마지막 느낌을 느낄 때 '나는 지금 생명의 마지막 느낌을 느낀다.'라고 꿰뚫어 안다.
그리고 그는 '이 몸 무너져 목숨이 끊어지면, 바로 여기서 이 모든 느낌들은 기뻐할 것이라고는 없게 되고
싸늘하게 식고 말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9) “‘매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visaṃyutta).’고 하셨다.
즐거운 느낌을 대하여 탐욕의 잠재성향이 일어나거나
괴로운 느낌을 대하여 적의의 잠재성향이 일어나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대하여 무명의 잠재성향이 일어나면,
이것은 거기에 매여(saṃyutta)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매이지 않고 느낀다.’고 하셨다.”(MA.ⅴ.58)
(*10) “‘몸의 마지막 느낌(kāya-pariyantikā vedanā)’이란 몸의 최후의 느낌을 말한다.
몸의 [마지막] 진행이 일어나서 그 다음에는 더 이상 느낌이 일어나지 않음을 뜻한다.
‘생명의 마지막 느낌(jivita-pariyantikā vedanā)’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의 설명이 적용된다.”(MA.ⅴ.58)
(*11) “‘기뻐할 것이라고는 없게 되고 싸늘하게 식고 말 것이다(anabhinanditāni sītībhavissant).’라고 하셨다.
열두 가지 감각장소에 대해 오염원들의 취착이 없기 때문에 기쁘게 여겨지지가 않게 되고
바로 그 열두 가지 감각장소에서 느낌들은 소멸한다.
오염원들이란 것은 참으로 열반을 얻으면 소멸되고
다시 더 존재하지 않도록 그렇게 소멸되기 때문이다.”(MA.ⅴ.58)
25. "그러므로 이와 같이 [통찰지를] 구족한 비구는
이런 최상의 통찰지의 토대를 구족하였다.
비구여, 이것이 최상의 성스러운 통찰지이니
바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12)이다."
(*12) “‘모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는 아라한도의 지혜를 말한다.
그러나 본경에서는 아라한과에 대한 지혜를 말한다.
그러므로 [다음문단]에서 ‘그의 해탈은 진리에 확고하여 흔들림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MA.ⅴ.59)
26. "이런 그의 해탈(*13)은 진리에 확고하여 흔들림이 없다.
비구여, 허황한 법(*14)은 거짓이고, 허황하지 않는 법인 열반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진리를] 구족한 비구는 최상의 진리의 토대를 구족한다.
비구여, 이것이 최상의 성스러운 진리이니 바로 허황하지 않는 법인 열반이다.“
(*13) “여기서 ‘해탈(vimutti)’은 아라한과의 해탈이다.”(MA.ⅴ.59)
(*14) “‘허황한 법(mosa-dhamma)’이란 본성이 파괴되는 것을 말한다.”(MA.ⅴ.59)
27. "전에 그가 어리석었을 때 그에게는 재생의 근거(*15)가 있었고 거기에 빠졌다.
이제 그것을 제거하고 그 뿌리를 자르고 그것을 야자수 줄기처럼 만들고 멸절시켜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했다.(*16)
그러므로 이와 같이 [버림을] 구족한 비구는 이런 최상의 버림의 토대를 구족한다.(*17)
비구여, 이것이 최상의 성스러운 버림이니 바로 모든 집착을 놓아버림이다."
(*15) “‘재생의 근거(upadhi)’는 네 가지이다.
그것은 무더기라는 재생의 근거(kkandhūpadhi), 오염원이라는 재생의 근거(kilesūpadhi),
업 형성력이라는 재생의 근거(abhisaṅkhārūpadhi),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라는
재생의 근거(pañcakāmaguṇūpadhi)이다.”(MA.ⅴ.60) 복주서는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설명한다.
“거기에 근거하여 괴로움이 있기 때문에 ‘재생의 근거(upadhi)’라 한다.
이 설명은 네 가지 재생의 근거 가운데 무더기와 감각적 욕망에 해당된다.
괴로움을 모으기 때문에 ‘재생의 근거(upadhi)’라 한다.
이 설명은 오염원과 업 형성력이라는 재생의 근거에 해당된다.”(MAT.ⅱ.403)
(*16) 이 아라한에 대한 비유는 『상윳따니까야』 제2권 「큰 나무 경」1( S12:55) §4에서
어떤 사람이 나무를 잘라서 완전히 없애버리는 비유로 자세히 나타난다.
이 비유에 대한 주석서의 설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큰 나무를 파괴하려는 자는 수행자(yoga-avacara)에,
‘괭이(kuddāla)’는 지혜(ñāṇa)에,
‘바구니는(piṭaka)’는 삼매에 비유된다.
나무의 뿌리를 자르는 것은 수행자가 명상주제에 몰두하여 통찰지(paññā)가 증장하는 것과 같다.
나무를 토막토막 자르는 것은 이 몸을 네 가지 근본물질(mahā-bhūta)로 단순화시켜
마음에 잡도리(manasikāra)하는 것과 같다.
나무를 쪼개는 것은 이 몸을 42가지 측면에서 자세하게 마음에 잡도리하는 (vitthāra-manasi-kāra)것과 같다.
나무를 산산조각 내는 것은 파생된 물질(upādā-rūpa)과
알음알이를 통해서 정신·물질을 파악하는 것(nāmarūpa-pariggaha)과 같다.
뿌리를 자르는 것은 정신·물질의 조건들을 찾는 것(paccaya-pariyesana)과 같다.
불에 태우는 것은 점점 위빳사나를 증장시켜서 [아라한과라는] 수승한 결실을 증득하는 것과 같다.
재로 만드는 것은 아라한이 반열반에 들어 목숨이 다하는 것과 같다.
재를 날려 보내는 것은 아라한이 무여열반을 통해서 반열반에 들어 윤회를 가라앉히는 것과 같다.”(SA.ⅱ.84)
(*17) “처음부터 사마타와 위빳사나로 오염원들을 버리고(kilesa-pariccāga)
예류도 등으로써 오염원들을 버리고 아라한도로써 오염원들을 버렸기 때문에 더 버릴 것이 없다.
그래서 ‘이와 같은 [버림을] 구족한 비구는 이런 최상의 버림의 토대를 구족한다.’라고 하셨다.”(MA.ⅴ.60)
28. "비구여, 전에 그가 어리석었을 때 그는 탐욕과 열망과 욕망이 있었다.
이제 그것을 제거하고 그 뿌리를 자르고 그것을 야자수 줄기처럼 만들고 멸절시켜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했다.
전에 그가 어리석었을 때 그는 분노와 악의와 혐오가 있었다.
이제 그것을 제거하고 그 뿌리를 자르고 그것을 야자수 줄기처럼 만들고 멸절시켜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했다.
전에 그가 어리석었을 때 그는 무명과 어리석음이 있었다.
이제 그것을 제거하고 그 뿌리를 자르고 그것을 야자수 줄기처럼 만들고 멸절시켜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고요함을] 구족한 비구는 이런 최상의 고요함의 토대를 구족한다.
비구여, 이것이 최상의 성스러운 고요함이니 바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고요함이다."
29. "'이 사람은 통찰지를 소홀히 여겨서는 안된다.
진리를 보호해야 한다. 버림을 길러야 한다.
고요함을 공부지어야 한다.'라고 한 것은 이것을 반연하여 한 말이다."
30. "'⑥ 여기에 굳게 선 자에게 공상(空想,허황된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며
더 이상 공상이 일어나지 않을 때 고요한 성자라고 불린다.'라고 한 것은
무엇을 반연하여 설한 것인가?
31. "비구여, '나는 있다.'(*18)라는 것은 공상(空想,허황된 생각)(*19)이다.
'이것은 나다.'(*20)라는 것은 공상이다.
'나는 있을 것이다.'(*21)라는 것은 공상이다.
'나는 있지 않을 것이다.'(*22)라는 것은 공상이다.
‘나는 물질을 가진 자가 될 것이다.'라는 것은 공상이다.
'나는 물질을 갖지 않은 자가 될 것이다.'라는 것은 공상이다.
'나는 인식을 가진 자가 될 것이다.'라는 것은 공상이다.
'나는 인식을 갖지 않은 자가 될 것이다.'라는 것은 공상이다.
'나는 인식을 가진 것도 아니요 인식을 갖지 않은 것도 아닌 자가 될 것이다.'라는 것은 공상이다.
비구여, 공상은 병이고 공상은 종기이고 공상은 화살이다.
비구여, 그러나 모든 공상을 극복하여 성자는 고요하다고 말한다.
비구여, 고요한 성자는 태어나지 않고 늙지 않고 죽지 않는다.
그는 흔들리지 않고 갈망하지 않는다.
비구여, 그에게는 태어나야 할 어떤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23)
태어나지 않는데 어떻게 늙을 것이며, 늙지 않는데 어떻게 죽을 것인가?
죽지 않는데 어떻게 흔들릴 것이며, 흔들리지 않는데 어떻게 갈망할 것인가?"
(*18) “‘나는 있다.’라는 것은
하나의 ‘갈애에 기인한 공상(taṇhā-maññita)’이 된다.”(MA.ⅴ.60)
(*19) “‘공상(空想,허황된 생각, maññita)’에는
갈애에 기인한 공상(taṇhā-maññita)과 자만에 기인한 공상(māna-maññita)과
사견에 기인한 공상(diṭṭhi-maññita)의 세 가지가 있다.”(MA.ⅴ.60)
(*20) “‘이것은 나다(ayaṃ ahamasmi).’라는 것은
물질 등에서 어떤 것을 취하여 ‘이것은 나다.’라고 여기면서
자아라는 사견(atta-diṭṭhi)에 의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SA.ⅱ.270)
(*21) “상견(sassata-diṭṭhi)에 의해 이렇게 말한다.”(MA.ⅴ.60)
(*22) “단견(uccheda-diṭṭhi)에 의해 이렇게 말한다.”(MA.ⅴ.60)
(*23) “‘그에게는 태어나야 할 어떤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주석서에 의하면 존재를 받게 하는 갈애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말이다.
그 갈애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의 생사란 없다는 뜻이다.”(MA.ⅴ.60)
32. "'여기에 굳게 선 자에게 공상이 일어나지 못하며
공상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때 고요한 성자라고 한다.'라고 한 것은
이것을 반연하여 설한 것이다.
비구여, 그대는 이 여섯 가지 요소의 간략한 분석을 잘 간직하라.“
33. 그러자 뿍꾸사띠 존자는
"참으로 스승께서 내게 오셨구나. 참으로 선서께서 내게 오셨구나.
참으로 정등각자께서 내게 오셨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어깨로 옷을 입고서
세존의 발아래 머리를 조아려 엎드리고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어리석고 미혹하고 신중하지 못해서 제가 세존을 '도반이여'라고 호칭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미래에 [다시 이와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고] 제 자신을 단속할 수 있도록
제 잘못에 대한 참회를 받아 주소서."
"비구여, 확실히 그대는 잘못을 범하였다.
어리석고 미혹하고 신중하지 못하여 그대는 나를 '도반이여'라고 호칭했다.
비구여, 그러나 그대는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하고 법답게 참회를 했다.
그런 그대를 나는 섭수하노라.
비구여,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한 다음 법답게 참회하고
미래에 [그러한 잘못을] 단속하는 자는 성스러운 율에서 향상하기 때문이다.“
34.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 곁에서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비구여, 그대는 발우와 가사를 구비하였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발우와 가사를 구비하지 못했습니다."
"비구여, 여래는 발우와 가사를 구비하지 않은 자에게 구족계를 주지 않는다."(*24)
(*24) 주석서에 의하면 선남자가 신통으로 발우와 가사를 만들어서라도 구족계를 받지
왜 그렇게 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신통으로 만든 발우와 가사는 그 생이 마지막인 사람들에게만 만들어지는데,
이 선남자는 다시 [정거천에]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세존께서는 스스로 발우와 가사를 찾아서 구족계를 주지 않으셨는가?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남자의 생명이 다하여 마치 도기공의 집에 들어가서 앉아있는 것처럼
정거천에 태어나 불환자가 되었기 때문에 세존께서 스스로 찾으러 나가실 수 없었다.”(MA.ⅴ.61)
35. 그러자 뿍꾸사띠 존자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드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절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돌아 [경의를 표한] 뒤
발우와 가사를 구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뿌꾸사띠 존자가 발우와 가사를 구하러 다닐 때
어떤 떠돌이 소가 그의 생명을 빼앗아 버렸다.(*25)
(*25) “선남자는 발우와 가사를 구하러 다닐 때에도 빔비사라왕이나 딱까실라의 상인들 가까이는 가지 않고
묘지나 쓰레기 더미 같은 곳에서 구하려고 했다. 그렇게 하여 쓰레기 더미에서 천을 찾고 있을 때
그곳을 배회하던 어린 새끼 달린 어미 소가 달려와서 뿔로 들이받아 그의 생명을 앗아갔다.
선남자는 허공에서 생명이 다하여 떨어졌고 쓰레기 더미에 머리를 숙이고 앉았는데 마치 금으로 만든 동상 같았다.
그는 죽자마자 바로 무번천에 태어났고, 거기 태어나자마자 아라한과를 얻었다.
그가 무번천에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일곱 명이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한다.”(MA.ⅴ.62)
계속해서 주석서는,
“일곱 분의 비구들이 해탈하여
무번천(無煩天)에 태어났나니
탐욕과 성냄을 완전히 제거하여
세상에 대한 애착을 건넜습니다.”
라는 『상윳따니까야』 제1권 「가띠까라 경」(S1:50) §2의 게송을 언급하면서
뿍꾸사띠 존자도 이 일곱 분의 비구들 가운데 한 분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MA.ⅴ.63)
무번천(無煩天, Avihā)은 불환자가 태어나는 다섯 가지 정거천(淨居天, Suddhāvāsa) 가운데 제일 낮은 천상이다.
주석서에서는 자신이 성취한 것으로부터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아위하라고 한다.
36. 그러자 많은 비구들이 세존을 뵈러 갔다. 세존을 뵙고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그 비구들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간략하게 훈도해주셨던 뿍꾸사띠라는 선남자가 임종을 했습니다.
그가 태어날 곳[行處]은 어디이고 그는 내세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비구들이여, 뿍꾸사띠 선남자는 현자이다. 그는 법답게 도를 닦았다.
그는 법을 이유로 나를 성가시게 하지 않았다.
비구들이여, 뿍꾸사띠 선남자는 다섯 가지 낮은 족쇄를 완전히 부수고 [정거천에] 화생하였고
그 세계에서 다시 돌아오는 법이 없이 그곳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 것이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그 비구들은 흡족한 마음으로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였다.
요소의 분석 경(M140)이 끝났다.
대림스님 옮김 『맛지마니까야』 제4권 476-5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