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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강 과학 생명, 논어 (2)
1. 주역의 64괘와 DNA
과거 2천년전 동양인들은 왜 이 세계를 64괘의 표상으로 규정하려고 했을까? 그런데 왜 20세기 과학의 첨단 혁명인 핵산의 구조는 왜 64개인가? 여러분들이 알아보기 바란다. 재미난 문제다.
물론 64개의 베리에이션은 AAA부터 시작한다.
A, T, C, G 4개의 기호가 세 자리수 모이면 하나의 아미노산을 지정한다.
예) AAA -> 페닐알라닌(Phenylalanine)
AGA -> 세린(Serine)
DNA의 구조가 왜 64개이고, 주역의 괘상은 64개일까? 이것에 대해서 신비한 이야기를 하면, 그건 과학이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김용옥이 이걸 처음 발견한 거 같다. 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전부 내 이야기를 도둑질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걸 놓고 신비로운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자칭 도사들의 무수한 구라가 쏟아져 나올지도 모르겠다.
우연한 숫자적 일치에 대하여 신비한 해석을 내리는 것은 미신에 불과하다.
주역에 나오는 전체 6자리를 괘라고 하고, 각각의 자리를 효라고 한다.
괘(卦) : 6자리의 전체 도상(Hexagram)
효(爻) : 괘를 구성하는 각 라인(Line)
그러니는 1괘는 6효로 구성되어 있다. 6효 중에는 음효(陰爻)와 양효(陽爻)가 들어간다. 그러니깐 양효(陽爻)로만 구성되면, 이게 건괘(乾卦)다. 음효(陰爻)로만 구성되면, 곤괘(坤卦)가 된다.
그러나 건괘와 곤괘는 그냥 심볼일 뿐이다. 주역에서 건(乾)으로만 되어 있고, 곤(坤)으로만 되어 있는 것은, 이 세상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치지 않는다. 왜냐? 이건 퓨어(pure)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음양의 착종(錯綜)이 없다는 것이다.
착종(錯綜) : 음효와 양효가 섞이는 것을 형용하는 『주역』의 전문술어. 착은 옆으로 반대되는 것(旁通)이고, 종은 상하가 거꾸로 되는(反對) 것이다. 착종이 있어야 역(易)의 변화(change)가 있다.
결국 이 세상의 변화는 64개 중에서 건곤(乾坤)을 뺀 62개가 된다. 왜냐? 62개는 음이든 양이든 섞이게 된다. 즉 음양이 섞여야, 이 세상의 변화가 일어난다.
역(易) : 변화(Changes)
64개는 대단한 게 아니다. 주역은 옛날 점서다. 점쟁이들 책이다. 이렇게 말하면 과학도 별게 아니다. 과학도 21세기의 점이다. 앞으로 오는 미래를 예측하자는 것이다. 사실 같은 것이다. 점이나 과학이나 사실 같은 것이다.
2. 효사의 허상
그런데 점을 치는 여러 법칙이 있다. 복잡하다. 50개의 산대를 가지고 여러 과정을 거쳐서 효(爻)가 나온다. 그럼 점괘라는 게 나온다. 그리고 점괘에 따라 효사(爻辭)라는 게 붙어 있다. 점괘에 말이 붙어 있는 것이다.
(?)이라는 괘는 26번째의 대축(大畜)이다. 이 괘의 5번째 효(六五)에는 “豶豕之牙, 吉.”(거세된 돼지의 이빨인데 길하다)라는 효사가 붙어있다.
파고다 공원 앞에 가면 눈이 먼 사람이 새를 가지고 앉아서 점을 친다. 돈을 주면 새가 들어가서 점괘를 하나 뽑아 나온다. 그 새가 점괘를 뽑아 나오는 과정이 점을 치는 과정이다. 복잡한 과정을 새(鳥)로 생략을 한 것이다.
뽑은 점괘를 까보면, 거기에 말이 쓰여 있다. 그런데 그 말이라는 게 대개 황당하다. ‘오늘 동쪽으로 가면 재수가 좋다. 과묵한 것이 행운이다. 우물곁에 고양이가 울고 있다.’ 등의 단일한 문장만 나온다. 그게 새점(占)이다.
내가 미국에 가서 여행을 하면, 미국 사람들이 나를 무슨 도사처럼 본다. 미국에 있는데 어떤 미국 청년이 나에게 와서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손에 제임스 레게가 쓴 주역 번역본을 가지고 있었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점을 치고, 제임스 레게의 주역 번역본 그대로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 내용을 해석해서 지시하는 대로 여행을 하고 있었다. 거기서 동쪽으로 가라면 하면, 동쪽으로 가는 식이었다.
I Ching, Book of Changes
제임스 레게(James Legge, 1815~1897)는 19세기말 『주역』을 번역했다. 그리고 그것은 1960년대 히피(Hippie)의 바이블이 되었다. 밴텀 포켓북으로 유행.
그래서 오늘은 동쪽으로 갔다가, 내일은 서쪽으로 갔다가 하면서 여행을 하고 있다.
문제는 그 내용이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우물곁에 고양이가 있다. 오늘 아침에는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동쪽으로 가라. 서쪽으로 가라.’ 등등의 내용은 너무 자의적이다.
효사(爻辭)의 내용은 매우 자의적(arbitrary)이다. 다산은 그것을 필연적 상수(象數)의 연관 속에서 해석하려 했으나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64개의 괘에 각각 6개의 효가 있으며, 그 효마다 효사가 붙어있으니깐 모두 384개의 효사가 있는 것이다. 즉 384개의 스테이트먼트(statement)가 있는 것이다. 그걸 뽑아서 점을 치는 것이다. 그에 따라 만날 여행을 해본들 거기서 무슨 인생의 참의미가 나오겠는가? 그러니깐 점이라는 것은 믿지 말라는 것이다. 점의 최고봉이라는 것도 이런 수준이다. 이런 말을 하면 또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동양철학자가 점쟁이들 밥줄을 다 끊어버린다고 할 것이다.
『주역』의 경(經)은 384개의 효사(爻辭, Line statement)로 구성되어 있다.
3. 필연과 우연의 조화
아무튼 64개의 괘상은 단순한 다이어그램이다. 그것을 과거 중국의 어떤 수학적 천재가 일시에 만든 것이다. 그 도상을 몇 천 년에 걸쳐서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난센스다.
괘상(卦象)의 다이어그램이 몇 천 년에 걸쳐 형성 되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64의 단순한 수학에 의하여 64개의 괘상은 즉각 결정되는 것이며 그것은 지극히 단순한 것이다. Damn simple!
그러나 64개의 도상은 아주 심플하고, 수학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셈본 수준이다. 이 64개의 도상은 아주 심플하고 필연적이다. necessity한 것이다. 64개의 도상은 변화가 있을 수 없다. 그건 필연의 세계다.
괘상(卦象)의 신택스(syntax)는 매우 단순하며 필연적(necessity)인 것이다.
그런데 그 필연적인 64개의 도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효사의 내용은 완전히 우연적인 것이다. 인간의 말로 표현되고 있는 우주에 관한 효사의 내용은 완전히 우연적인 것이다.
효사(爻辭)의 세만틱스(semantics)는 완전히 우연적(chance)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본질이다. 생명의 본질은 이렇게 단순한 아미노산을 지정하는 4가지 핵산의 3자리 기호체계라고 하는 단순한 도상 속에 인간이라고 하는 무한하고 우연적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괘상 (필연) - 효사 (우연)
DNA기호(필연) - 단백질 세계(우연)
그러니깐 내가 보기에 2천 년 전 주역을 만들었던 사람이나, 20세기의 분자생물학을 만든 사람이나, 세계관의 이해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생명(Life)은 단순한 필연의 구조 속에서 무한히 다양한 우연의 세계를 펼친다. 주역의 구상자나 분자생물학의 발견자들은 동일한 생명적 세계관을 표방하고 있다.
그러니깐 우리는 인간과 우주에 대해 미신적인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 주역이 되었든, 분자생물학이 되었든, 똑같은 과학적 통찰력을 가지고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핵심은 뭐냐?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는 궁극적으로 매우 단순한 도상이 있다. 그런데 이것들이 단지 단순한 게 아니라 오히려 이 단순한 도상들의 콤비네이션에 의해서 무한히 우연적이고 자의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세계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 현상이나 생명적 현상이나 공통된 것이다. 무기물의 세계나 유기물의 세계나 통 털어서 생각해야 한다.
과학자들이 물질의 세계만을 연구한다고 하면 웃기는 이야기다. 철학자들이 정신의 세계만 이야기하고, 목사님들이 정신의 세계만 이야기한다고 하면, 그건 난센스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그렇게 마인드 앤 보디(mind&body)로 나누어질 수가 없다.
우주나 인간에게 있어서 물질(Matter)과 정신(Mind)은 분리될 수 없다.
4. 생명
난 어제 포항제철에 가서, 뜨거운 쇳덩어리를 보고 무한한 생명력을 느꼈다. 그것 이상의 강렬한 생명력을 느껴본 적이 없다.
손등에 피가 나면, 피가 굳어 딱딱해지는 응고현상이 일어난다. 그런데 어려서 그 굳은 모습을 보고, 쇠가 녹슨 것이랑 생긴 게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옛날에 ‘이상하다? 내 몸의 딱지가 왜 쇠 녹슨 것과 같지?’라고 생각했다. 어려서 나는 그게 왜 그런지 몰랐다.
우리 몸의 피에는 헴기라고 하는 철이 들어있다. 헤모글로빈이라는 것이 헴기와 글로빈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헴기가 바로 쇠다. 그래서 허파에서 헴기가 노출되었을 때 산소를 잡아서 우리 몸에 운반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교환하면서 CO2를 밖으로 내보낸다.
헤모글로빈(hemoglobin)
척추동물의 혈액에 함유된 색소단백질. 헴기와 글로빈으로 구성. 산소와 강력한 결합능력을 지니고 있다. 헴기는 철이다.
나는 과거에 저 밖에 있는 쇠와 피 속에 있는 쇠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 같은 쇠다. 내가 쇠를 먹어서 피로 나와 산화된 것이다. 저 밖에 있는 쇠와 내 피 속의 쇠가 같다는 것을 의과대학에 가서 처음 깨달았다.
그렇다면 저기 밖에 있는 쇠도 나의 생명이요, 피 속에 있는 쇠도 나의 생명이다. 저 우주와 나는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고, 저기 밖에 있는 쇳덩어리나 내 몸에 있는 쇳덩어리나 다 같은 생명이라는 것이다.
내가 가슴에 있는 이야기를 한다면 무한히 할 수 있다. 난 인사이트가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미친놈이라고 한다. 보통 때는 내가 이런 말을 안 한다. 그런데 포항공대에 오니깐 기분이 좋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5. ‘이성의 기능’ 서문
오늘 여러분께 내가 존경하는 20세기 석학의 책을 소개하겠다. 아인슈타인과 상대성 이론에 대해 겨룰 수 있을 정도로 우주적 통찰력을 가진 물리학자였으며 수학자였고, 럿셀과 더불어 ‘수학의 원리’라는 세계적 작품을 집필한 분이다.
말년에는 하버드에 가서 형이상학자로 돌아가신 화이트 헤드라는 분의 ‘이성의 기능’이라는 책의 일단을 소개하겠다. 이 책을 통해 ‘오늘날 과학자의 사명이 무엇이며, 도대체 과학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하는 중요한 이야기를 하겠다.
화이트헤드(A. N. Whitehead, 1861 ~ 1947) : 영국의 수학자·물리학자·형이상학자. 럿셀과 『수학의 원리』(1910 ~ 1913)를 지었고, 『과정과 실재』(1929)는 그의 대표적 형이상학 저작이다.
이 분이 쓴 The Function of Reason, 이성의 기능이라는 책의 첫 서문을 여러분들에게 잠깐 소개해 드리겠다.
『이성의 기능』(The Function of Reason) : 1929년 『과정과 실재』가 간행된 후 같은 해에 프린스턴 대학에서 행한 강연의 원고를 프린스턴대학 출판부에서 출판한 책. 68세의 완숙한 경지의 저작이다.
History discloses two main tendencies in the course of events. One tendency is exemplified in the slow decay of physical nature. With stealthy inevitableness, there is degradation of energy. The sources of activity sink downward and downward. Their very matter wastes. The other tendency is exemplified by the yearly renewal of nature in the spring, and by the upward course of biological evolution. In these pages I consider Reason in its relation to these contrasted aspects of history. Reason is the self-discipline of the originative element in history. Apart from the operations of Reason this element is anarchic.
- 도올 번역, 이성의 기능(통나무, 1998)
역사는 자연스레 두 가지 주요한 경향을 드러낸다. 한 가지 경향은 물질적 성질의 완만한 해체를 보여준다. 은밀하게 필연적으로 에너지 저하가 일어난다. 활동의 근원적 요소들은 아래로 아래로 빠져나간다. 그들의 물질 자체가 소모된다. 또 다른 경향은 매해 봄철에 새로운 갱신을 보여주고, 생물학적 진화의 상향성을 보여준다. 이 논고에서, 나는 역사의 이렇게 대조되는 측면과 관련해서 ‘이성’을 고찰한다. 이성은 역사 속 독창적 요소의 자기 훈련이다. 이성의 작용과 분리되면 이러한 요소는 무정부적 혼돈으로 떨어지게 될 뿐이다.
엄청나게 어려운 문장이다. 인류가 지어낸 언어의 역사상 화이트 헤드의 문장처럼 어려운 말을 사용한 사람은 없다. 화이트 헤드의 ‘과정과 실재’라는 어마어마한 형이상학적 저술은 그야말로 한 페이지를 읽기도 어렵다.
여러분들이 이걸 이해 못해야 포항공대 학생의 자격이 있는 것이다. 왜냐? 이해 못하는 것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6. 역사와 엔트로피
물리적 세계는 기본적으로 시간에 영향을 받는다. 그럼 시간의 특징은 무엇인가? 비가역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시간의 비가역성은 열역학의 법칙과 관련이 있다.
화이트 헤드가 말하는 역사(History)는 시간을 가진 모든 사건(events)의 과정이다. 이 과정은 두 개의 경향이 있는데 첫 경향은 에너지 저하와 소모가 일어나는 물질적 세계에 관련된다. 열역학의 법칙이 정립되기 이전의 언급이지만, 이것은 엔트로피(entropy)의 증가와 관련된다.
왜냐? 모든 세계의 역사, 시간의 축이라고 하는 것은, 물리적 세계의 모든 것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말한다면, 우리가 뜨거운 냄비를 차가운 바위 위에 놓을 경우에, 차가운 돌의 열기를 빼앗아서 냄비의 온도가 더 올라가는 경우는 없다. 그런 세상의 법칙은 없다. 이게 열역학이다.
냄비는 식게 되어 있다. 식는다는 현상은 냄비의 열이 바위로 전도되어 흘러나가는 것이다. 언제까지 그 현상이 지속될까? 냄비의 온도와 바위의 온도가 동일하게 될 때까지 지속된다. 그래서 결국 둘의 온도는 같아진다. 이렇게 같아지는 것을 불교에서는 무차별이라고 한다.
무차별(無差別) : 해탈의 의미와 상통하는 불교의 용어.
해탈을 무차별이라고도 한다. 인간을 무차별적으로 사랑하라! 여기에 문제가 있다. 열역학적으로 생각하면, 무차별적 사랑은 엔트로피의 증가이다.
그런데 이 세계가 무차별의 세계로 진행된다면, 이 세계는 정말 엉망이 될 것이다. 엔트로피(entropy)는 ‘무질서의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무차별의 세계로 가면, 무질서의 정도가 증가하는 것이다.
엔트로피(entropy) = 무질서의 정도(degree of disorder)
포항공대에 연구실이 있을 것이다. 랩을 쓰면 쓸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착착 내부가 정돈되어가나? 아니면 지저분해지는가? 그렇다.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지저분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돈이 되면 좋겠지만, 지저분해진다.
지저분해지면 교수님이 들어오셔서 야단을 친다. ‘왜 이렇게 어질러 놓았어? 이게 뭐냐? 왜 엔트로피를 증가시켰냐?’ 정보가 요약, 정리되어 있으면 찾기 쉬운데 마구 어질러 놓고, 무차별화시켰기 때문이다.
교수님이 야단을 치면 청소를 해야 한다. 청소는 바로 엔트로피의 감소이다. 청소라는 것처럼 이 세상에 중요한 게 없다.
청소 = 엔트로피의 감소
청소를 못하는 사람은 과학자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요즘 실험기기를 가서 함부로 쓴다. 예전엔 플라스크(flask)가 귀해서 잘 닦아 썼는데, 요새는 1회용으로 막 쓴다. 이런 형편없는 과학이 어디 있는가?
physical nature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간다. 시간은 반드시 엔트로피는 증가시킨다. 이게 환장할 노릇이다.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세계에 디케이(decay)가 일어난다. slow decay가 일어난다.
모든 물질적 안정성(stability)은 완만한 부패(slow decay)일 뿐이다.
The sources of activity sink downward and downward.
이 양반이 쓴 다운워드(downward)는 엔트로피의 증가를 말한다. 하향이 된다.
하향(downward) = 엔트로피의 증가
지금은 봄이라서 밖에 나가면 나무들이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간다. 생명이 약동한다. 겨울 내내 얼었던 나무에서 연둣빛 싹을 낼 적에 생명의 환희를 느낀다.
그런데 이 우주는 다운워드만 있는 게 아니라 업워드(upward)가 있다고 한다. 분명히 나무도 물질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다. physical nature다. 그러나 좀 다르다.
상향(upward) = 엔트로피의 감소
개울가를 가면 물이 흐른다. 흘러가는 게 물의 역사다. 물은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모든 것이 다운워드한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이 다운워드한다. 역사의 진행과 더불어 다운워드한다.
물의 역사는 하향이다.
냇가에 있는 돌이 왜 동그란지 예전에는 몰랐다. 그런 걸 의심해본적이 없나? 우리 동네에 있는 돌들은 다 삐쭉삐쭉한데 냇가에 가면 돌들이 다 동그랗게 되어 있었다. 그게 신비했다. 우리 동네엔 냇가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 보았을 때 충격이 왔다. ‘왜 이렇게 동그랗게 생겼을까?’ 난 그걸 최근에야 깨달았다. 그렇게 내가 돌대가리다.
도올의 호는 돌대가리의 약칭이다.
모든 사물들은 예외없이 다운워드라는 한 방향으로 진행한다. 소위말해서 엔트로피 증가의 방향으로 간다.
따라서 모난 것을 다 깎아버린다. 다 무차별화시킨다. 돌맹이가 굴러가다보니깐 저항을 많이 받는 삐죽한 것부터 깎인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깐 모든 게 다운워드로 흘러간다.
7. 생명
그런데 그 역사의 흐름에 반역하는 이상한 게 있었다. 업워드가 있었다. 바로 붕어가 있다. 거꾸로 올라가는 것은 붕어밖에 없다. 미꾸라지, 송사리 등은 거꾸로 올라간다. 나이아가라 폭포도 미꾸라지가 거꾸로 올라간다. 포항공대에서 이건 영원히 못 푼다. 이것들이 어떻게 올라가는지 영원히 계산을 못한다.
즉 엔트로피가 어김없이 증가하는 이 역사에 저항하는 위대한 반역자들이 있다. 그 위대한 반역자를 우리는 바로 생명이라고 한다.
생명은 역사에 대한 반역이다. 그것은 열역학적 제2법칙에 대한 반역이다.
8. 가치중립의 오류
The function of Reason is to promote the art of life.
이성의 기능은 삶의 기술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 도올 번역, 이성의 기능(통나무, 1998)
결국 이성의 기능은 우리 삶의 기술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이성에 의해 과학적으로 이 세계를 알아낸다고 하는 것은 신(神)의 법칙을 아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이 세계를 왜 물리학적으로 탐구하는가? 결국 비센샤프트(Wissenschaft), 즉 과학적 연구정신에 의해 앎의 체계를 밝히고, 이를 통해 우리 삶의 기술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다.
과거의 이성(Reason)의 개념은 수학적 능력과 관련되어 있었으며 이데아의 세계에 속한 천상의 능력이었다. 따라서 이성의 개념은 현상적 삶과 관련이 없는 초월적, 선험적, 선천적 특수능력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삶의 기능으로 이해한 것은 하나의 생물학적 혁명이다.
즉 어떠한 과학적 발견이라도 인간의 삶을 도외시해서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20세기의 모두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라는 아주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20세기 과학의 개념의 최대오류는 과학적 명제가 가치중립적(value-free)이라는 판단이었다. 과학도 삶의 가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오늘날의 과학자들은 클로닝 기술을 개발하고, ‘나는 그냥 발명했을 뿐이다. 나는 아무 상관없다.’하고 끝낼 수 없다.
클로닝(cloning) : 염색체 분열을 거치지 않고 체세포에서 막바로 개체를 복제해내는 기술. 물리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생물 개체를 만들어내는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기술.
이제부터 사이언스는 가치로부터 중립적일 수 없다. 가치중립은 사이언스 리서치(science research)의 메소드(method)가 지향하는 것이다. 연구의 방법론과 그 과학적 발견의 궁극적 의미는 별개의 문제다.
가치중립은 과학적 연구의 방법론에 국한된다. 연구방법론과 목적적 인과(final causation)를 혼동할 수 없다.
9. 적자생존의 한계
I now state the thesis that the explanation of this active attack on the environment is a three-fold urge :
(i) to live, (ii) to live well, (iii) to live better.
나는 이제 이러한 환경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설명하는 것은 3단계의 충동이라는 명제를 주장한다.
(i) 살기, (ii) 잘 살기, (iii) 더 잘 살기.
지금 환경의 적응이라는 의미에서 본다면, 무기물에서 유기물로 진행하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 ~ 1882)은 적자생존(the 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생존경쟁의 법칙으로 진화를 설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진화를 설명할 수 있는 과학적 이론이 아닌 국부적 현상일 뿐이다.
도봉산에 있는 거대한 바위의 생명은 8,9억년 이어진다. 인수봉의 바위는 몇 억년 되었을 것이다. 적자생존이라는 측면에서 말한다면, 바위처럼 위대한 적자(適者)는 없다.
바위가 왜 진화를 하겠는가? 진화와 바위는 아무 상관이 없다. 바위는 도끼질을 하던 뭘 하던 떡 버티고 있으면 된다.
적자생존이라는 말은 간단하게 깨질 수 있는 개념이다. 어떻게 환경에 적응을 잘하는 자가 살아남는가? 공룡이 환경에 적응을 못해서 사라졌을까? 공룡은 무한히 번식했고, 그 환경에 최고로 적응했었기 때문에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너무 적응을 잘해서 너무 새끼를 많이 낳았고, 그래서 자기들이 먹을 것까지 다 먹어서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진화를 증명할 수 없다.
환경에 적응을 잘 하는 종일수록 더 일찍 도태될 수도 있다. 인간조직사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adaptation to the environment, 즉 환경에 잘 적응하는 것은 진화의 요인이 될 수 없다. 이 세계의 위대한 진화라고 하는 것은 환경에 대한 적응이 아니라, 환경을 나에게 적응시킨 결과이다.
어떠한 이유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안정적인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그 안정된 상태를 적극적으로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진화는 환경에로의 성공적 적응(adaptation to the environment)이라는 측면에서 설명될 수 없다. 오히려 환경을 자기의 삶을 위하여 능동적으로 개변시키는 충동에서 진화는 일어난다. 그 충동은 이성(Reason)과 관련된다.
바위는 실력도 없고, 생각도 하지 않고, 정말로 마음이 편한 놈이다. 바위처럼 위대한 적자(適者)가 없다. 그에 비해 인간인 나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바위덩이로 한 번만 맞으면 죽는다. 그런데 바위는 아무리 때려도 끄떡없다.
인간은 고등한 생물로 진화되었다. 그런데 진화가 되면 될수록, 염색체의 길이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훨씬 더 불안정한 요소가 많다. 쉽게 죽어버리고, 작은 것에 상처를 받고, 조그만 잘못해도 암에 걸려 죽는다. 인간처럼 허약한 존재는 없다. 적자생존이라는 의미에서 말한다면, 이 지구상에서 인간처럼 허약한 존재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허약한 존재로의 진화는 무언가를 위해서, 무언가를 위대하게 만드는 어떠한 힘이 있다. 이걸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우주에는 저 별자리를 보더라도, 빅뱅이 일어나서 끊임없이 흩어지고 있지만, 또한 우주에 새로운 별을 생성시키고 있다. 새로운 별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 우주도 간단하지 않다.
이 우주를 지배하는 것은 환경의 적응이라는 문제가 아니라, 이 환경을 더 나은 그 무엇으로 진화시키는 어떠한 충동이 이 우주에 내재해 있는 거 같다. 나는 그런 것 없이, 이 우주의 진화를 설명할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애매한 문제이다.
그러니깐 생명적 존재는 단순히 to live, 즉 산다고 하는 것만으로 해석이 안 된다. to live는 바위가 최고다.
to live : 산다.
그런데 또 하나의 충동이라고 하는 것은 to live well, 즉 잘 살라는 것이다. 이것은 adaptation to the environment, 환경에 대한 적응이다. 이것이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에 잘 적응하려는 것이다. 그것이 to live well 이다.
to live well : 잘 산다.
그런데 생명 진화의 가장 위대한 충동은 어디에서 왔냐? to live well이 아니다. to live가 아니다. 단순히 생존하려고 하면 진화가 되지 않는다.
10. 환경에 대한 능동적 공격
to live better, 무언가 더 잘 살려고 해야 한다. 어떠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모든 생명은 to live better하려는, 그런 적극적인 active attack이 있어야 한다.
to live better : 더 잘 산다.
비버는 가만히 환경에 적응하며 사는 게 아니다. 나무를 꺾어다가 댐을 만들어서 자기 환경을 자기가 적극적으로 만든다.
물고기를 잡아먹고 싶으면 그놈들을 쫓아다니는 게 아니라, 그놈들이 자기의 먹이가 되어 오도록 환경을 조성해서, 그놈들을 유인해서 잡아먹는다.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다.
This active attack on the environment : 생명의 환경에 대한 능동적 공격
더 잘 살려고 어떠한 환경을 점차 만들어가고 있다. 이 힘을 신(神)이라고 불러도 좋고, 궁극적으로 나는 이걸 리즌(Reason)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건 우주에 내재하는 힘이다. 우주의 일부이며, 마이크로 코스모스인 나에게 내재하는 신(神)이다.
그런데 이 리즌(Reason)은 다른 뜻으로 뭐냐? 엔트로피의 감소와 관련 있는 것이다. 그러니깐 이 우주를 지배하는 업워드하는 힘이 있다면, 그것을 나는 우주의 이성이라고 부르고 싶다.
더 잘 살려는 충동의 근저에 이성(Reason)이 놓여 있다. 이 이성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천이성(practical Reason)과 실천이성의 구체적 방법론을 초월하여 우주의 신비를 풀어나가는 사변이성(speculative Reason)이 있다.
11. 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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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igher forms of intellectual experience only arise when there are complex integrations, and reintegrations, of mental and physical experience. Reason then appears as a criticism of appetitions. It is a second-order type of mentality. It is the appetition of appetitions.
지적 경험의 더 높은 형태는 단지 정신적 육체적 경험의 복잡한 통합과 재통합이 있을 때에만 발생한다. 이성은 욕구들에 대해 비판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사고방식의 2차적 유형이다. 그것은 욕구들 가운에 또 하나의 욕구다.
이 말도 이해가 어렵다. 여러분들이 과학자가 되려면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왜냐? 여러분이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 앎의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12. 희랍 과학자들의 특징
희랍 과학자들의 특징을 화이트 헤드는 다섯 마디로 요약하였다.
In the first place, they were unboundedly curious.
우선, 그들은 한없이 호기심이 많았다.
과학자들이 되려면 무조건 curious해야 한다. 호기심이 많아야 한다. 우주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아야 한다. 호기심이 없는 인간은 여기에 포함되면 안 된다.
In the second place, they were rigidly systematic both in their aim at clear definition and at logical consistency.
두 번째로, 그들은 명확한 정의와 논리적 일관성 모두를 지향함에 있어서 지독하게 체계적이었다.
여러분들이 과학자가 되려면, 어떠한 인생의 목적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아주 엄밀하고 체계적이어야 한다. 엉터리로 하면 안 된다. 명료한 정의가 있어야 하고, 논리적으로 일관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학자가 될 수 없다.
Thirdly, they were omnivorous in their interstsㅡnatural science, ethics, mathematics, political philosophy, metaphysics, theology, esthetics, and all alike attracted their curiosity.
세 번째로, 그들은 자신들의 관심분야인 과학, 윤리학, 수학, 정치철학, 형이상학, 신학, 미학에 관해 닥치는 대로 흡수했고, 그것들은 모두 면에서 똑같이 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세 번째로 그들의 관심 분야는 아주 과식적이었다. 뭐든지 다 먹었다. 과학, 윤리학, 수학, 정치철학, 형이상학, 신학, 미학. 이 모든 것이 그들의 관심 분야였다.
Fourthly, they sought truths of the highest generality.
넷째로, 그들은 최고 수준의 일반적인 진리를 추구했다.
이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희랍의 과학자는 모름지기 가장 일반적인 진리를 추구했다. 여러분이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발명하고, 자신이 대단한 과학적 발명을 했다고 하면, 그건 난센스다. 어떤 사례를 발견하든지 그것은 여러분들을 지배하고 있는 어떤 우주적 일반론과 관련이 있다.
여러분은 고민을 하는지 모르지만, 뉴턴 등이 이미 여러분들을 위해 general principle를 만들어 놓았고, 여러분들은 그 속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을 뿐이다. 그걸 여러분들이 다시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이미 여러분들은 제너럴 프레임워크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연구만 한다고 하면 웃기는 이야기다. 그건 과학자가 아니다.
Fifthly, they were men with active practical interests.
다섯째로, 그들은 적극적으로 실질적인 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희랍의 과학자들은 인간의 실천적인 삶에 대해서 아주 적극적인 자세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과학자라면 과학만 연구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플라톤은 자기 수학을 실현하기 위해서 시칠리아에 가서, 자신의 이상 정치를 펼치려고 했다. 그때는 수학과 정치가 분리되지 않았다. 우리나라도 지금 1+1은 2가 되는 원리만 가지고 정치를 해도 이렇게는 안 된다.
과학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혼동을 한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이러한 다섯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12. 욕망을 제어하는 또 하나의 상위적 욕망
The higher forms of intellectual experience only arise when there are complex integrations, and reintegrations, of mental and physical experience. Reason then appears as a criticism of appetitions. It is a second-order type of mentality. It is the appetition of appetitions.
지적 경험의 더 높은 형태는 단지 정신적 육체적 경험의 복잡한 통합과 재통합이 있을 때에만 발생한다. 이성은 욕구들에 대해 비판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사고방식의 2차적 유형이다. 그것은 욕구들 가운에 또 하나의 욕구다.
Reason이라고 하는 것은 ‘appetition of appetitions’라고 했다.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삶을 증진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Reason is the appetition of appetitions. : 이성이란 욕망들을 제어하는 또 하나의 욕망이다.
여러분이 사막에 가서 오아시스를 못 만나고 오래 있으면 어떻게 되나? 우리 몸은 조직학에 따르면 epithelial cell이라는 상피세포로 싸여져 있다. 그래서 보통 상황에서 수분증발을 막아준다.
상피세포(epithelial cells) : 신체의 외표면과 내표면을 덮고 있는 간격이 조밀한 특수한 세포조직층.
생명의 특징은 막에 갇혀있다는 것이다. 원시생명부터 생각해보라. 막이 없으면 생명이 안 된다. 막이라는 것은 그 안에 다른 세계를 만든다. 차별의 세계를 만든다.
생명의 특질은 막(membrane)이다. 막은 세포 내의 차별적인 특수상황을 유지시킨다. 생명은 무차별이 아닌 차별이다.
능동수송이라는 게 있다. 농도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야 하는데, 오히려 낮은 데서 높은 데로 퍼내는 게 막이다. 그렇게 생명은 위대한 것이다. 차별을 유지시키기 위해 그렇게 고생하는 게 세포라는 것이다.
능동수송(active transport) : 막에 내재하는 대사에너지(ATP)에 의하여 능동적으로 물질을 이동시키는 작용.
사막에 가면 외부의 수분이 내 몸보다 형편없이 적다. 그러면 수분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현상이 일어난다. 그러나 막 때문에 수분이 나올 수 없다.
사막에서 그렇게 한참 가다보면 수분이 점점 빠져나간다. 최후에는 사막의 수분과 같아진다. 그러다 미라가 된다.
그런데 생명이 있으면, 그 현상을 방치하지 않는다. 갈증이라는 이상한 현상이 생긴다. 갈증이 없으면 생명이 아니다.
갈증(Thirst) : 체내수분이 체외로 과도하게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몸의 욕망(appetition) 현상 중의 하나.
무생명은 갈증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사막에 두면 그냥 말라간다. 하지만 생명인 사람은 안 그런다. 생명이 있으면 수분이 빠져나가 무차별화되어 가는 현상에 항거한다. 그 항거의 사인(sign)이 갈증이다.
갈증은 무차별에 대한 항거이다.
그 갈증을 여기서 appetition, 욕망이라고 불렀다. 수분을 채우려는 욕망이 일어난다. 그런데 서문의 마지막 문장은 anarchic이라는 말로 끝났다. 이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anarchic하다. 무정부적이다.
Apart from the operations of Reason this element is anarchic.
이성의 작용과 분리되면 이러한 요소는 무정부적 혼돈으로 떨어지게 될 뿐이다.
10명 정도가 사막을 가다가 물이 떨어지면, 목이 마르기 시작한다. 그러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수통 하나를 갖고 있는 게 발견된다면 욕망이 충돌하기 시작한다. 물을 마시려고 아귀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그럼 무정부상태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무정부 상태이긴 하나, 그런 무정부 상태라고 하는 것이 생명의 현상이다. 무정부적인 욕망이 없으면, 그건 생명이 아니다.
그러니깐 유학(儒學)에서 말하는 욕(欲)이라고 하는 것도 원래는 위대한 것이다. 욕(欲)이 없으면 생명이 아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은 욕(欲)에 있는 것이다.
조선 유학자들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에서 말하는 욕(欲)도 위대한 생명의 싸인이다.
그런데 이 욕(欲)이라고 하는 것은 원초적인 의미에서 아낙킥하다. 카오틱하다. 혼란스럽다.
그렇게 싸우면 안 된다. 여기서 이렇게 싸우다가 다 자멸해서 죽고 만다. 그래서 사람들이 의견을 낸다. ‘살길이 있다. 물을 분배해서 시간 간격을 두고 먹자.’ 또는 ‘한 사람한테 물을 주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오아시스를 찾으라고 여행을 떠나보내자.’ 등의 의견을 낸다.
욕망을 또다시 제어시키는 상위권의 욕망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수긍이 될 수 있다. 욕망을 제어시키는 또 하나의 상위권이 욕망이 일어나면 살 수가 있다. 그걸 여기서 ‘The appetition of appetitions’라고 했다. 욕망을 제어하는 다른 차원의 욕망이 표출된다는 말이다. 욕망을 제어하는 또 하나의 욕망을 우리는 ‘이성’이라고 부른다.
The appetition of appetitions : 욕망을 제어하는 또 하나의 상위적 욕망. = 이성
여기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머리를 쓰는 것이다. 오아시스를 찾기 위해, 메모리를 작동해서 자신들이 걸어왔던 길을 다 기억해 내야 한다. 그리고 밤중이 되면 별을 보고 천문학에 의한 기하학적인 계산을 한다. 그렇게 해서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가면 오아시스를 만날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것이 바로 사이언스다. 이것이 기하학이고 천문학이다. 이렇게 해서 인류의 과학은 발전해 온 것이다.
그러니깐 과학이라는 것은 결국 삶에서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욕망을 제어하는 또 하나의 욕망이라는 차원에서 인간의 과학은 인간의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개의 차원이 있다. 하나는 practical Reason이고, 또 하나는 speculative Reason이라고 한다.
practical Reason, 실천적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이 우주에서 적응해서 사느냐 하는 실천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성이다. 이 실천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와 더불어서 발전한 능력이다.
실천이성(practical Reason)은 당면한 구체적 삶의 문제를 해결한다. 그것은 방법론적 이성이다.
13. 과학과 기술
동양에 과학이 없었겠는가?
희랍인들은 수학적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에 연역적 체계에 의해서 이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발달되어 있던 사람들이다. 아까 말했듯이 우리가 서양과학을 인정하는 이유는 이런 수학적 능력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과학을 전제로 하지 않은 practical Reason의 테크놀로지로 말한다면, 동양문명이 서양문명보다 훨씬 탁월하다.
과거의 도자기 기술, 건축기술, 직조기술 등 technology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고등한 수학이론을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삶의 과학은 발전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과거의 우리 동양문명은 technology라는 측면에서 놀라운 성과를 달성했던 문명이다.
기술(technology)은 연역적 과학(science)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도 놀라운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다. 동양의 문명의 성취는 사이언스가 없는 테크놀로지였다.
그러나 이러한 technology라고 하는 것은 general principle을 가지고 있는 과학이라는 앎의 체계를 전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양한테 굴복하고 만 것이다.
우리가 삶의 기술에만 충실하다면 서양의 과학은 필요 없다. 과거 사람들이 훨씬 더 멋있게 살았다. 과거의 양반들이 우리보다 훨씬 질 높은 삶을 살았다.
그러나 서양과학이 추구하는 것은 보편적인 우주의 입법 체계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역적인 사이언스와 귀납적인 테크놀로지가 결합하여 최근 150년간 인류 역사는 눈부신 발전을 이룬다. 테크놀로지와 사이언스는 최근에 와서야 랑데뷰를 한 것이다.
옛날엔 이게 따로따로 놀았다. 도자기 굽는 기술하고 피타고라스의 정의는 따로 놀았던 것이다. 요새는 그것이 합쳐지고 있다. 그것이 여러분들이 말하는 과학이라는 것이다.
최근 150여 년 간의 인류문명의 비약적 진보는 사이언스와 테크놀로지, 즉 사변이성과 실천이성의 랑데뷰를 한 결과로 이루어진 놀라운 업적이다.
인류는 이렇게 놀라운 세기를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세기에 있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뭐냐? 결국 우리는 궁극적으로 사변이성의 체계를 인간의 삶과 관련해서 재건해야한다는 이야기다.
결국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과 별개로 하늘에서 내려온 능력이 아니라, 우리 삶을 증진시켜주는 우리 몸의 능력이다.
사변이성(speculative Reason)은 실천이성의 성공적 방법론의 한계를 항상 뛰어넘는다. 그것은 제약된 지성에 의하여 달성될 수 없는 끊임없는 상상력의 새로움을 지향한다. 사변이성의 궁극은 우주론(cosmology)과 관련된다.
14. 몸과 과학
격치고의 처음에 뭐라 그랬나? 물택신야(物宅身也)라고 했다. 물(物)은 우리 몸에 깃든다고 했다.
物宅身也.
결국 나는 인간의 이 몸을 떠난 과학적 진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몸(MOM)을 떠난 과학적 진리(scientific truth)는 없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이 몸의 진리를 가지고서 이 세계를 바라보아야 하는가? 결국 과학은 우리 삶을 어떻게 충실하게 만들고 아름답게 만드느냐에 집중해야 한다.
과학의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얼마나 더 아름답게 이해하고, 우리의 삶을 어떻게 더 아름답게 만들어 가느냐는 일반적인 가치이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과학적 진리도 우주와 인간의 아름다움(Beauty)에서 유리될 수 없다. 과학도 미학에서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앞으로 21세기의 과학자들이 분명히 가슴에 깊게 새겨야할 새로운 차원의 진리이다. 과학적 진리는 절대로 중립적일 수 없다.
15. 朝聞道, 夕死可矣.
나는 포항공대에서의 역사적 강연을 논어의 구절을 인용함으로서 끝내려고 한다. 논어의 이인편에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공자님 말씀하기를 조문도(朝聞道)이면 석사가이(夕死可矣)라고 하셨다.
子曰 : “朝聞道, 夕死可矣.”
-도올논어 제3권 46쪽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 공자님의 유명한 말씀이다. 그런데 여기서 조문도(朝聞道)가 뭐냐? 전통적인 주석학에서는 복잡한 이론(異論)이 많다.
공자님은 평생 노나라에서 이상적인 정치가 실현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늙어서 죽음은 가까워오는데, 이상적인 군주가 나타나거나 이상적인 정치가 실현된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공자가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아침에 이 노나라에 도가 실현되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이제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을텐데...’라는 것이다. 이렇게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이 이야기를 풀기도 한다.
言將至死, 不聞世之有道也.
-고주-
그러나 나는 ‘조문도 석사가의’라고 하는 것을 그렇게 풀지 않는다. 여기서 조문도(朝聞道)의 도(道)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주자가 말하기를 사물당연지리(事物當然之理)하고 했다. 요새말로 하면 그게 과학적 법칙이다. 사물의 당연한 이치다.
道者, 事物當然之理. -주자의 신주-
도올논어 제3권 48쪽
사물당연지리(事物當然之理) = 과학의 법칙
나는 오늘에 이 포항공대에 있는 여러분들에게 외치고 싶다. 나는 아침에 과학적 진리를 터득하기만 한다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