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대성전의 儒學者 차인들 ② - 신라말기 최치원편
2014-12-15 오후 4: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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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최씨의 시조로 모셔진 고운 최치원(857년)은 현인왕1년(857)에 태어난 신라말기의 유학자이며 중국과 한국에 많은 글을 남긴 문장가로서 차에 대한 기록도 남겼다.
최치원이 지은 『계원필경』 서문에 의하면 그는 경문왕8년(868) 12세 나이로 당에 유학을 떠날 때 그의 아버지 최견일이 “10년 내 급제하지 않으면 내 아들이라고 하지말라.”는 분부에 따라 6년 만에 외국인 대상 과거시험인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게 되었다. 당 말기 농민의 반란인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회남 절도사 고병의 막하에 있을 때 지은 <격황소서>의 문장은 당 전역에 이름을 떨치는 명문장이었고 마침내 희종 황제로부터 자금어대를 하사받게 되었다.
최치원은 28세(884년)때 당말의 사회적 혼란과 부모의 병환으로 귀국할 뜻을 희종이 알게 되었고 사신으로 임명하여 조서를 가지고 귀국하게 되었다. 그는 49대 헌강왕(875~886)으로부터 환대를 받았고 그 후 6두품의 아척간인 아찬에까지 중용되었다.
최치원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문서들을 정리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고 왕실이 후원한 불교 사찰과 선종 승려의 비문을 짓거나 외교 문서도 작성하였다.
그의 비문 작품 중 충남 보령군 성주면 성주사의 무염국사의 비석문에는 차와 향이 나오며, 국보 47호인 경남하동 쌍계사의 진감선사탑비에는 “금옥 같은 목소리로 범패를 잘하였다는 내용과 함께 한명을 공양하는 이가 있으면 가루내지 않고 섶나무로 불 때어 삶았다(復有以漢茗供爲者 則以薪窕石釜 不爲屑 而煮之)”는 자다법으로 솥에서 떡차를 달여 마시는 내용이 나온다. 이와 같이 신라 말기에도 차와 향은 부처님과 스님들께 올리는 대표적인 공양물임을 알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최치원의 문학작품 중 하나인 『쌍녀분』에는 부호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가 두 주인공 자매 중 언니는 염상에게, 동생은 차상에게 시집보내는 내용에 소금과 차가 나온다. 그 당시에도 소금과 차는 생필품으로써 차 파는 상점들이 부자가 될 정도로 차가 성행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효자였던 최치원은 병든 부모에게 석달치의 급료를 미리 받아 차와 약을 보내는 문장이 보인다. 『계원필경』의 <사탐청요전장>에 의하면 “고향 사신이 없어 편지도 부치기 어렵던 차, 마침 본국의 사신 배가 바다를 지나간다 하니 이 편에 차와 약을 부쳤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
삼국을 통일한 화랑도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최치원의 『난랑비사』 서문에는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그 이름은 풍류다. 교을 만든 근원은 선사에 자세히 실려 있거니와 그 핵심은 유·불·선 삼교를 포함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國有玄妙之道 曰風流說敎之原 比傷禪史實乃三敎 接化群生)”이라고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다. 이렇게 국민을 교화하던 신선사상인 풍류도는 고대로부터 전해오던 우리의 전통 사상으로 볼 수 있다.
6두품 벼슬에 머문 최치원은 당시 신라에 과거제도가 없어 진골의 혈통만이 출세가 보장되어서 견제받기도 하고 국정의 문란 등으로 외직을 자청하다 관직을 내려놓는다. 결국 최치원은 신라말기의 난세를 비관하다 세속을 떠나 가야산 해인사, 청학동과 삼신동, 고운동계곡, 천왕봉 아래 법계사 등을 전전하다, 경남 화개동 골에서 차를 마시고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계원필경』외에 『금체시』, 『상대사시중장』, 『잡시부』, 『제왕연대력』, 『부석존자존』, 『법장화상전』, 『쌍녀분전기』 등이 있다.
이혜자 <성균관 여성유도회 중앙회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