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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1950년 7월 즈음 반격을 위해서 집결한 한국 경찰부대들. 사진을 잘 보면 상당히 재밌는 것이 보이는데 바로 일본군 90식 철모임.
이 경찰들의 경우 일본군이 남기고 간 90식 철모들을 쓰고서 전투에 자주 참가하였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인 한국 정부가 추후 군비 증대를 노리고서 구일본군 장비 상당수를 빼돌려서 어딘가에 숨겨두었기 때문임.
1950년 6월 15일 KMAG 문서에서는 한국의 조병창에 대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남기는데, 약 300톤 이상의 구 일본군 군수물자가 문자 그대로 땅에 파묻혀진 상태로 부평-서울 일대에 묻혀있고 한국 정부가 그것을 알고 있다고 하고 있음.
그리고 이미 90톤 가량의 물자가 꺼내져서 부평의 조병창에서 재생산되었다고 하는데, 여기 물자에는 총열을 포함한 소총 부품 및 탄약이 포함되어 있으며 아마도 철모를 비롯한 군수품들 역시 만만찮게 있었을 것임. 당장 15일에 일본군 수류탄 664발을 꺼내다가 국립경찰에게 지급했다는 것도 있으니 철모라고 안줬을리가 만무함.
이 사진들은 유명하다면 유명한 사진인데, 저 경찰들이 쓰고 있는 것이 90식 철모들임. 거의 대부분 9월까지 모습을 드러냈고.
그렇게 전쟁이 발발하자 물자가 태부족해진 한국 정부는 파묻혀진 장비들을 죄다 꺼내서 경찰이나 군에 대거 지급한 것으로 보여짐. 저런 식으로 개전 초기 7~9월 사이에 일본군 90식 철모가 자주 눈에 띄인 것도 그런 면이 큼. 당장 철모 소요에 비해서 기존 물자는 턱없이 모자랐기 때문임.
전쟁 직전 한국군 및 경찰 등 정부가 가용한 무장병력 대비 보급 수요 충족에서 철모는 13%만이 지급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럴 수 밖에 없기도 함. 철모는 100% 미국의 지원에 의해서만 공급되었기 때문임. 개전 당시 자체 피복 생산품목 및 생산량은 전투복, 작업모, 훈련화 3종 뿐이었으니 별 수도 없었겠지만.
당장 미국이 지원해준 것은 정규군 65,000명 분의 장비와 경찰 35,000명 분의 장비였고, 나머지 남는 병력들에게는 저런 식의 남는 물자를 주거나 그마저도 없으면 자체 생산이라도 되던 작업모를 쓰고 나가서 싸우는 수밖에 없었음.
그나마 부평-서울 일대에 비축된 군복 및 군장, 철모류는 한강 철교가 폭파되면서 그대로 유기되어 북한군이 뺏어 써버렸음. 그러나 비상한 시기에는 비상한 방법이 동원된다고, 아예 방법이 없던 것은 아니긴 했지만. 그 방법이 무엇이냐면 바로 적으로부터 빼앗아오는 것임.
이 사진은 7~8월 사이에 북한군으로부터 노획한 장비들을 화차에 실어서 가져온 것들을 찍은 것임. 이 당시 북한군으로부터 한국군은 적지 않은 장비들을 노획했는데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것들이 그대로 간단한 조사 이후에 한국군이나 경찰에서 소비되었음.
사진 속의 의성 방어전에 나선 수도사단 병사들처럼 북한군 철모를 빼앗아 사용하던 사진도 심심찮게 보임. 그나마 저런 철모라도 받으면 다행이지, 적지 않은 장병들은 사진 속의 작업모를 대부분 쓰고서 싸우고 있었음. 예외적으로 포병은 거의 대부분이 철모를 지급받았는데, 이는 북한군 포격으로부터 운용병들을 안전하게 지키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임.
통상 북한군은 박격포로 한국군 포병에 대한 대포병전을 수행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최대한 화포 운용요원들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서 철모를 최대한 지급해줬기 때문. 보병대는 그냥 저런 식으로 작업모 쓰고 다니면서 싸우기 바빴음. 미군도 당장 한국군에게 총기와 탄약 보급하기도 바빠서 군장류 보급은 의외로 늦어지고 있었던 상태.
즉 한국군 및 경찰에는 미군이 지급해준 M1 철모와 일본군 90식 철모, 그리고 북한군으로부터 노획한 Ssh-40 철모가 혼용되어 돌아다녔고, 북한군 역시 한국군과 별 다른 차이가 없었음. 얘네도 부평에서 대량으로 노획한 한국군 군복과 철모를 쓰고서 돌아다녔기 때문.
그리고 전투가 지속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서 빼앗은 장비로 무장하고 다녔는데 이러한 것이 점차 사라진 것이 1950년 9월 북진 이후부터임. 이때는 부산으로부터 들어오는 막대한 군수물자가 한국군에게도 지급되기 시작하면서 최소한 외견상으로는 북한군과 차이를 보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함.
이게 진짜 문제가 되던 것이 오인교전의 사례도 종종 보임. 특히 미군이 접근하는 무장병력이 북한군인 줄 알고 싸웠는데 알고보니 경찰이었다던지, 한국군이었다던지의 사례가 있음. 재수없어서 오폭맞고 쓸려나간 부대들도 있었고.
가난한 군대의 싸움은 이렇게 처절할 수 밖에 없었음. 파묻혀 있던 것을 꺼내다 쓰거나 적으로부터 노획해서 쓰던가, 그도 아니면 그냥 없이 싸우던가. 나중에 저런 90식 철모나 노획 소련제 철모들은 민병대가 가져가서 씀.
지금 사진이 사라졌긴 한데 민병대가 소련군 철모 쓰고 99식 소총이랑 일본도 들고 다니면서 부역자 색출도 하고 다녔는데 마르고 닳도록 쓰기 바쁘더라.
출처
RG 338, KMAG, Adjutant General, Decimal File, 1948-53, Box 19, Civilians; Civilian Employees, Conscription Deferment
6ㆍ25전쟁시기 다부동지역에서 한국군의 군수지원에 관한 연구, 조봉휘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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