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탐관오리 위소보
임흥주는 크게 기뻐하며 신감(神龕) 안으로 기어가 동태비의 초상화를 아래로 끌어냈다. 위소보는 정성공의 신상을 향해 무릎을 꿇고 몇 번 절을 했다.
[국성야님, 당신은 영응호걸이시라 제 절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습니 다. 그러나 이 할미는 당신의 대사를 그르쳤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매 일 당신 곁에 있으니 당신이 틀림없이 화내실 것 같아서 제가 당신을 대신하여 쫓아버리고 우리 사부이신 진 군사를 당신 곁에 모셔오겠습니 다.]
사부의 최후가 떠올라 위소보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대만 백 성들은 모두 동태비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영화 는 산업을 육성하고 학문을 장려하고 충성을 다했으므로 백성들은 그를 대만의 제갈공명이라고 칭했다. 정극상이 나라를 다스릴 때는 아무도 감히 동태비를 비난하지 못했다. 물론 진영화를 찬양하는 말도 감히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위소보가 이런 명령을 하달하자 사람들은 무척 통쾌하게 여겼다. 게다 가 국성야 신상 앞에서 절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백성들은 더욱 감격했다. 비록 이 위 대인이란 인물은 돈을 지나치게 요구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진 군사의 제자라 대만의 군민들에게 호의를 느낀다고 생각했다. 시랑이 청병을 이끌고 대만을 평정하는 바람에 명 나라의 해외에 남아 있는 강산이 완전허 소멸했었다. 그러므로 시청위 탐(施淸韋貪:시랑은 청렴하고 위소보는 탐욕스럽다는 뜻)이란 말이 생 겨났지만 백성들은 그래도 이 위 대인이란 분이 대만에 남아 있어 주길 바랐고 될 수 있으면 시랑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나 일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한 달 좀 넘게 지나자 시랑이 수군을 이끌고 다시 대만으로 돌아왔다. 위소보가 해안으로 마중나가 보니 시 랑이 일품대원(一品大員) 복장을 입고 있는 대신 한 사람과 배에서 나 왔다. 그 대신은 도판(跳板) 위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위 형제 잘 있었는가? 이 형님은 정말 보고 싶어 죽을 뻔했네.]
그 대신은 다름아닌 바로 색액도였다. 순간 위소보는 크게 기뻐하며 재 빨리 앞으로 달려나갔다. 두 사람은 갑판 위에서 서로 손을 맞잡고 큰 소리로 껄껄 웃었다. 색액도가 웃으며 말했다.
[아우님, 반가운 소식을 갖고 왔네. 황상께서 그대보고 북경으로 올라 오라는 성지를 내렸네.]
순간 위소보는 기쁨과 근심이 엇갈렸다. (내가 만약 북경에 가고 싶었다면 벌써 갔을 것이다. 소황제는 아주 고 지식해서 절대로 나한테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가 천지회를 쳐 부수는 일을 수락하지 않으면 그는 나를 만나 주지도 않을 것이다.) 시랑이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성은의 호탕함은 실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황상께선 대만의 백성들이 내지로 거처를 옮기는 지의를 철폐하셨습니다.]
이 무렵 대만 군민들은 한 달 넘도록 날이면 날마다 모두 황제가 대만 을 포기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황상의 입은 금구(金 口)이니 한번 내뱉은 말은 절대로 번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시랑이 이와 같은 말을 하자 해안의 관원들은 참다 못해 큰소리로 환호하면서 일제히 소리쳤다.
[만세! 만세! 만만세!]
이 소식이 전해지자 도처에서 환호성이 터졌고 이어서 폭죽소리가 요란 하게 울려퍼졌으며 설날보다 훨씬 더 화려한 축제 행사가 벌어졌다. 색액도가 전달한 성지는 위소보의 기운을 몹시 북돋아주는 내용이었다. 그가 즉시 상경하면 별도의 지시가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위소보는 황 제의 은혜에 감사드렸다. 두 사람은 대중을 피해 내당으로 들어가 밀담 을 나누었다. 색액도가 말했다.
[아우님, 황상께선 그대가 아직도 머뭇거릴까 봐 특별히 나로 하여금 달려와서 촉가(促駕)토록 한 것이오. 그대는 황상께서 어떤 임무를 맡 기시려는지 알고 있소?]
위소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황상의 신기묘산을 우리들이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색액도는 그의 귀에 대고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나찰귀(羅刹鬼)를 쳐부수는 것이오.]
위소보는 잠시 어리벙벙해졌다. 그러나 이윽고 껑충 뛰어오르면서 큰소 리로 외쳤다.
[정말 묘책 중의 묘책입니다!]
색액도가 말했다.
[그대가 이 소식을 전해 들으면 분명 아주 기뻐할 거라고 황상께서 말 씀하셨는데 과연 틀림없군. 아우님, 나찰귀들은 순치(順治) 황제 때부 터 흑롱강 일대를 점령하였으며 그 기세 또한 아주 대단하오. 그래도 선제(先帝)와 황상께선 도량이 넓으셔서 구차하게 따지지 않았소. 그런 데 뜻밖에도 나찰귀들은 날이 갈수록 점차 땅을 점령해 오고 있소. 요 동(遼東)은 우리 대청의 근거지인데 어찌 외국놈들이 날뛰는 걸 용납할 수 있겠소? 지금은 삼번(三藩)의 반역도들과 대만의 정씨를 모두 평정 했으므로 천하무사하니 황상께서는 나찰을 쳐부수기로 결심한 것이오.]
위소보는 통흘도에 수년 동안 갇혀 있었기 때문에 답답하기가 노름을 하다 망통을 연거푸 열 번 잡은 것 같았다. 그러던 차에 이 소식을 접 하자 마음이 흡족해서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색액도가 다시 말을 이었다.
[황상께선 나찰국 대한(大汗)에게 여러 차례 유지(諭旨)를 보냈지만 상 대방에서는 끝내 답신이 없었소. 나중에 하란국(荷蘭國) 사신으로부터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나찰국이 비록 크긴 하나 역시 오랑캐 나라라 중국 문자를 아는 사람이 전혀 없어서 황상의 유지를 받고도 도무지 이 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답신을 하지 못한다고 했소. 그렇지만 나찰병들 은 동쪽으로 침략하는 일을 시종일관 중단하지 않았소. 그럼에도 불구 하고 황상께선 우리 중국은 인의(仁義) 를 중요시하므로 무식한 오랑캐들을 깨우쳐야지 함부로 죽일 수 없다고 하셨소. 따라서 먼저 그들의 잘못을 깨우치게 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어 야 하며, 만약 그래도 여전히 굽힐 줄 모른다면 그때는 별수없이 무력 으로 주륙(誅戮)을 해야 한다고 하셨소. 더욱이 조정의 대신들 중에 나 찰어에 능통한 사람은 오직 위 아우님 한 사람밖에 없지 않소?]
순간 위소보는 생각했다. (내가 나찰어에 능통하기 때문에 소황제가 내게 항복한 것이구나.)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손짓발짓을 하며 기뻐했다. 색액도가 웃으며 말했 다.
[아우님이 나찰어에 능통한 것도 대단하지만 또 한 가지 지니고 있는 재주는 누구도 따르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나찰국의 섭정 여왕은 대한 (大汗)의 누님이고 아우님의 옛 애인이라던데 맞습니까?]
위소보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나찰 여인은 온몸이 노란 털로 덮여 있습니다. 그 소비아란 섭정 여왕 은 얼굴은 예쁘게 생겼지만 피부는 생각보다 아주 거칠더군요.]
색액도가 웃으며 말했다.
[황상께서 아우님을 출마시킨 건 다시 그녀의 피부를 몇 번 더 만져 보 라는 것이 아니겠소!]
위소보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흥미 없소! 흥미 없소!] [아우님께서 그 섭정 여왕을 만져 주기만 하면 양국이 친해질 수 있고 앞으로 전쟁이란 재앙을 면할 수 있는데 이거야말로 국태민안의 큰일이 아니겠소?] [황상께선 나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싸우라는 게 아니라 나더러 십팔 막이라는 신공(神功)을 전개하라는 것이군요. 하하하!]
위소보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위소보가 나찰국이 흑룡강 일대를 점령 한 자초지종을 묻자 색액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명나라 만력년(萬曆年)부터 나찰인들은 동침(東侵)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나찰인들은 시베리아의 탁목사극(托木斯克), 엽니색사극(葉尼塞斯 克), 사고차극(邪庫車克), 악곽차극 등지에 성을 건축했다. 순치(順治) 6년에는 나찰인들이 녹정산에 성을 건축하고 아이파청(阿爾巴靑)이라고 불렀다. 아울러 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오면서 온갖 약탈을 했다. 순치 9년에는 만청(滿淸)의 영고탑(寧古塔) 도통(都統)이었던 해색(海 色)이 군사 이천을 거느리고 흑룡강 연안에서 나찰병을 격퇴시켰다. 나 중에 다시 송화강 일대에서 접전이 벌어졌지만 만청의 도통 면안탈리 (明安達理)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나찰군을 대파했다. 이윽고 나찰병 들은 서쪽으로 퇴각하면서 니포초(尼布楚)에다 성을 구축했다. 그리고 모스크바로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원병을 청했다. 그 사자는 모스크바 로 가는 도중에 온갖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즉 흑룡강 일대에는 온통 금은이 매장되어 있고 소와 말이 떼를 지어 있으며 주민들의 가옥은 모 두 황금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찰인들은 횡재하고 싶 은 마음에 떼를 지어 동쪽으로 내려왔다. 그들은 연도에서 노략질을 하 면서 백성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그중 카자흐 기병들은 제일 악랄했 다. 마침내 만청(滿淸)의 영고탑 도통인 사이호달(沙爾呼達)과 영고탑 장군인 파해(巴海)가 군대를 이끌고 승리를 거두었으며, 나찰병의 통군 대장을 죽였고 카자흐 기병대를 절반 이상 죽여 버렸다. 그러자 나찰인 들은 감히 더 이상 흑룡강 일대로 내려오지 못했다. 강희 초년에 이르자 나찰군은 다시 대거 동침했고, 아극살 성(雅克薩 城)을 근거지로 삼았다. 강희 황제는 어른이 되자 나찰인들의 야심이 만만찮다는 걸 알고 길림(吉林)의 수사(水師)를 흑룡강 일대로 이동시 켜 엄밀한 수비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자 나찰군들도 끊임없이 군대를 증가시켰다. 그들은 또한 아극살 성을 아주 튼튼하게 건축하는 동시에 나찰국 본부로 통하는 연도에 정거장을 설치하여 흑룡강 일대의 광대한 토지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했다. 그 무렵 강희는 전력을 다해 오삼계와 싸우고 있었던 터라 나찰의 침략 을 방어할 겨를이 없었다. 삼번(三藩)을 평정하고 대만의 정씨가 항복 한 후에야 비로소 나찰에 대응할 수 있었다. 더욱이 위소보가 모스크바 에 간 적이 있어서 피방(彼邦)의 정사를 잘 알고 있는 데다가 나찰국의 대권을 장악하고 있는 섭정 여왕과 보통 관계가 아니란 걸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를 중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위소보가 대만에 당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즉시 색액도에게 명하여 소환시켰던 것이다. 마침내 위소보는 처자를 데리고 북경으로 향했다. 물론 그가 대만에서 횡재한 청명재(請命財)도 부하에게 명하여 배에 실 었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시랑한테 대만 정씨의 장령(將領)인 하우(何 佑)와 임흥주, 홍조, 그리고 오백 명의 등패병(藤牌兵) 을 달라고 했다. 시랑은 그가 이번에 상경하면 틀림없이 중용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더욱이 자기는 조정에서 그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두말 않고 승낙함과 아울러 그와 색액도에게 후한 예물을 전해 주었다. 대만의 백성들은 내지로 거처를 옮기라는 조정의 지의(旨意)를 철폐시 킨 데는 이 소년 위 대인의 공이 크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감사하 는 마음으로 만민산(萬民傘), 호민기(護民旗) 등의 선물을 수없이 보내 왔다. 심지어 위소보가 배에 오를 때는 신발올 벗어 높이 들어 올리면 서 작별인사를 했다. 이 탈화(脫靴)의 인사법은 본시 청렴결백하고 백 성에게 존경받는 지방관에게만 사용했다. 그런데 위소보 같은 탐관오리 가 이런 영광을 누릴 수 있었으니 실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하루가 지나기 전에 배는 당고(塘庫)에 당도했다. 위소보, 색액도 일행 은 상륙하여 육로로 천진(天津)을 지나 북경에 이르렀다. 위소보는 도 문(都門) 안으로 다시 들어오자 실로 별천지에 온 것 같이 몹시 흥분했 다. 그는 즉시 황제를 만나 보러 갔다. 강희는 서재에서 그를 접견했다. 위소보는 강희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끓고 절을 하고 나서 몸을 일으키려다 문득 서러운 생각이 들어서 바닥 에 잎드린 채 목놓아 통곡했다. 강희는 위소보가 온 걸 보고 속으로 몹 시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울화가 치미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번에 비록 그를 중용하지만 버릇은 단단히 고쳐 놓아야겠다. 감히 성지를 누차 거역하다니. 이번 기회에 버릇을 고쳐 두지 않으면 앞으로 더욱 날뛰게 될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위소보가 만나자마자 대성통곡하는 바람에 강희의 마 음도 약해지고 말았다.
[빌어먹을! 네 녀석은 어째서 만나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냐?]
위소보는 울면서 말했다.
[평생 다시는 황상을 못 만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만 나 뵙게 되어 실로 감개무량합니다!]
강희가 웃으며 말했다.
[일어나라! 일어나! 어디 네 얼굴 좀 보자.]
위소보는 몸을 일으켰다. 얼굴은 온통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되어 있었 지만 입가에는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강희는 웃으며 말했다.
[빌어먹을! 그 사이 네 녀석의 키가 조금 컸구나.]
문득 동심이 되살아나서 어좌(御座) 아래로 내려오며 말했다.
[누가 더 큰지 어디 재 보자.]
그러면서 다가오더니 그와 등을 맞대고 섰다. 위소보는 그와 신장이 비 슷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황상이 신장을 비교해 보자는데 어찌 황상보다 클 수가 있겠는가? 위소보는 즉시 무릎을 약간 구부렸다. 강 희가 손을 내밀어 두 사람의 머리를 재어 보니 자기가 약 일촌(一寸) 정도 더 큰지라 웃으며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의 키는 비슷하구나!]
그는 몸을 돌리고 몇 걸음 떨어지더니 웃으며 말했다.
[소계자(小桂子), 그 동안 자식을 몇이나 두었느냐?] [소인이 못난 탓에 아들 둘하고 딸 하나뿐입니다.]
강희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 일은 내가 너보다 한 수 위구나. 난 이미 아들이 넷이고 딸은 셋이 나 있다.] [황상께서는 웅재대략(雄才大略)하신데 어찌 소인이 비할 수 있겠습니 까?]
강희는 웃으며 말했다.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는데도 너의 학문은 조금도 진보되지 않았구나. 자식을 낳는 일이 웅재대략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이냐?] [옛날 주문왕(周文王)에게는 아들이 백 명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좋은 황제라면 아들도 틀림없이 많은 것입니다.]
강희가 웃으며 되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황상께서는 소인으로 하여금 고기를 낚으라고 통흘도로 보내셨기 때문 에 우리 두 사람은 주문왕과 강태공에 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문 왕에 관한 일을 소인이 상세하게 알고 있어야만 황상을 뵙게 될 때 서 슴없이 대답할 게 아닙니까?]
최근 몇 년 동안 강희는 오삼계를 상대하여 싸우느라고 밤낮으로 분주 했다. 한편, 위소보란 소년 신하가 곁에 없어 우스운 얘기로 답답한 마 음을 풀어 주지 못해서 때로는 허전한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이때 군 신(君臣)이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반갑겠는가? 한참 동안 정담 을 나눈 후 통흘도에서 지냈던 일과 대만의 풍토와 백성들이 살고 있는 실정을 물어 보았다. 위소보가 말했다.
[대만이란 곳은 토지가 기름지고 기후가 따뜻하기 때문에 많은 농산물 이 생산됩니다. 따라서 백성들도 아주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 더욱이 황상께서 그들이 대만에 거주하는 걸 허락하신 것을 알자 모두 황상께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모두들 하나같이 황상을 영락없는 오생어탕 이라고 말합니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사란 백성들한데 폐를 끼치지 않는 게 급선무다. 백성들이 대만에서 편안히 살고 있는데 그들로 하여금 내지로 거처를 옮기게 한다는 건 너 무나 크나큰 폐를 끼치는 것이다. 조정의 대신들은 대만의 실정도 모르 고 헛되이 의논을 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대사를 그르칠 뻔했다. 너와 시랑은 이번에 정말 애 많이 썼다.]
순간 위소보는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 했다.
[소인이 여러 번 성지를 거역한 죄는 목을 열여덟 번 잘려도 마땅합니 다. 그러니 어떠한 공로든 마음에 두실 필요 없습니다. 오로지 황상께 서 성은을 베풀어 소인을 용서해 주시고 저로 하여금 곁에서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강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도 목이 열여덟 번 잘려도 마땅하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너에게는 목이 그만큼 없구나.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분명 히 너의 목을 열일곱 개는 잘랐을 것이다.] [예, 예. 소인은 머리통이 오직 한 개만 있는 것을 만족합니다.] [그 머리통을 보존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앞으로 너의 충성심을 지켜볼 것이다. 붙어 있고 없고는 더 이상 성지를 거역하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다.] [소인은 무조건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문자 그대로 충심경경(忠心耿 耿), 적담충심(赤膽忠心), 진충보국(盡忠報國)할 것입니다.]
강희가 웃으며 말했다.
[넌 그 충자에 관한 성어(成語)를 꽤 많이 알고 있구나. 그것 말고는 더 없느냐?] [소인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오로지 충 자밖에 없기 때문에 자연히 많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밖에·‥…그 밖에 충군애국(忠君 愛國)이 있고 충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충신이 아니다, 그리고 충후노실(忠厚老實)······] [그만 일어나라! 만약 네가 충후노실하다면 세상에는 버릇없고 교활한 무리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위소보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황상께 아룁니다. 오직 황상 한 사람에게만 충성할 것입니다. 다른 사 람을 대할 때는 충성을 바치지 않습니다. 황상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소 인의 성격이 다소 익살스럽긴 하지만 황상께 대하는 태도는 진정한 충 성심이고 친구에게 대하는 태도는 의리입니다. 만약 충의를 한꺼번에 이룰 수 없을 때 소인은 하는 수 없이 몸을 움츠린 채 통흘도에서 낚시 를 할 것입니다.] [넌 지금 괜한 걱정을 하고 있구나. 내가 언제 너더러 천지회를 상대하 여 싸우라고 했느냐?]
강희는 뒷짐을 지고 몇 걸음을 옮기면서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네가 친구한테 의리를 지키는 것은 미덕이다. 나도 그 일로 널 나무라 지 않겠다. 성인들이 충서지도(忠恕之道)를 중요시했듯이 이 충 자는 군(君)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따라서, 아무한테나 진심갈력(盡 心竭力)하게 대하면 그것이 곧 충이라고 할 수 있다. 너처럼 친구를 배 반하지 않기 위해서 죽음을 택한다거나, 부귀영화를 버리고 친구를 배 반하지 않는 사람도 극히 드물다. 너의 그런 태도에는 고인지풍(古人之 風)이 담겨져 있구나. 정녕 네가 친구를 배반할 수 없다면 자연히 나도 너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소계자, 내가 네 죄를 사면한 것은 예전에 공을 세웠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다. 그리고 네가 나와 어려서부터 친 했다 해서도 아니다. 그건 순전히 네가 중요시하는 그 의리가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위소보는 매우 감격하여 눈물을 철철 흘렸다. 그는 흐느끼며 말했다.
[소인은……소인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단지 다른 사람이 진심으로 절 대하면 저도……저도 진심으로 그들을 대할 뿐입니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 나찰국의 섭정 여왕도 네게 잘 대해 줬는데 내가 널 파견하여 그녀 를 치게 하면 어찌할 생각이냐?]
순간 위소보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녀가 계모에게 갇혀 있을 때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그 때 소인이 그녀에게 화창수(火槍手)들을 충동시켜 반란을 일으키라고 가르쳐 줌으로써 왕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그녀에게도 할만큼 했습니다. 그녀가 군대를 파견하여 황상의 금수강산을 빼앗으려 한다면 절대로 용 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화냥기가 있어서 오늘은 이 남자 와 놀아나고 내일은 저 남자와 놀아난다는 건 모두 헛소문입니다. 만약 나찰국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면 소인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가서 그 여왕을 잡아가다 황상께 보여드렸을 겁니다.] [나찰국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따라서 이번 싸움 은 우리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나찰국이 비록 화기도 우수하고 기병 도 용맹무쌍하지만 그들의 본토는 멀리 떨어져 있고 우리는 가까이 있 기 때문에 그들이 머나먼 곳에서 동쪽으로 내려올 때 병원(兵員), 마 필, 화기, 탄약, 양식, 피복 등을 충분하게 휴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러나 우리는 이미 호부상서 이상아(伊桑阿)를 영고탑(寧古塔)으로 파견 하여 애휘(曖暉), 호마이(呼瑪雨) 두 성에다 양식과 탄약을 충분히 비 축했다. 그리고 십여 개의 역참(驛站)을 설치하여 군품 공급에 차질이 없도록 했다. 더욱이 사전에 몽고에 성지를 전달하여 나찰인과 무역을 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아울러 흑룡강에 장군 살포소광(撒布素 廣)의 기병대를 파견하여 나찰인의 수송차량을 만나면 모조리 태워 버 리고 나찰병의 마필을 보면 즉시 죽여 버리라고 지시했다.]
위소보는 크게 기뻐서 말했다.
[황상께서 그처럼 치밀한 조치를 취하셨다면 이번 싸움은 틀림없이 승 리할 것입니다.] [그렇지도 않다. 나찰은 대국이다. 남회인(面懷仁)의 말에 의하면 절대 로 적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 만약 우리가 싸움에서 패하면 우리는 요동 땅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국본(國本)이 흔들리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패하더라도 본국은 무관하고 단지 서쪽으로 퇴각하면 그뿐이다. 그러니까 이번 싸움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 네가 만약 패하면 내가 군 대를 이끌고 직접 나가서 싸울 것이다. 그때 내가 첫번째 행할 일은 바 로 너의 목을 치는 것이다.]
강희가 맨 나중 말을 할 때의 음성은 예사롭지 않은 목소리였다.
[황상께서는 심려하지 마십시오. 소인의 목을 보존할 수 없는 이상 나 찰병한테 잘리면 잘렸지 절대로 황상께서 직접 오셔서 자르도록 하지는 않겠습니다.] [네가 그 점을 알고 있다니 기특하구나. 하지만 전쟁이란 아무도 장담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건 단지 적을 너무 가볍게 생 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위소보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만약 우리가 나찰국을 상대하여 전쟁을 치를 생각이었다면 너를 보내 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감히 우리 강토를 침 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은혜와 위협의 작전을 섞어 써서 그들로 하여금 은혜에 감사하게 함으로써 양국이 영원히 우호관계를 유지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살생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화친에 중점을 두어라. 싸움을 하지 않고 상대방을 굴복시킬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최 상의 수법이다. 따라서 네가 나찰국의 섭정 여왕을 설득하여 군대를 철 수하고 양국이 화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게 큰 공을 세우는 것이다.] [소인이 나찰병의 장군을 만나면 황상의 성유(聖諭)대로 그들을 계몽시 키고 아울러 그들로 하여금 나찰국 섭정 여왕에게도 황상의 뜻을 전달 하게 할 것입니다.] [나는 서양의 이미 여러 선교사들로 하여금 나찰국의 역사, 풍토, 지 리, 군정 등을 상세히 탐문토록 하였다.] [잘하셨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자고로 지피지기하면 백전백승이라 하지 않습니까?]
강희는 웃으며 말했다.
[그 선교사들 말에 의하면 나찰인들은 본성이 비열하다고 하더군. 따라 서 좋게만 대해 주면 그들은 갈수록 더욱 사나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히 그들에게 위엄을 드러내어 우리를 함부로 넘볼 수 없다는 걸 깨닫 게 해야 한다. 우리는 대군을 출동시켜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고 만약 싸움을 하게 되면 싸우고, 다른 한편 우리는 예의지방(禮義之邦)이라 함부로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는다는 걸 그들에게 보여 줘야 한다.] [소인 명심하겠습니다. 이른바 제갈양이 맹획(孟獲)을 일곱 번 놓아 주 었다가 다시 사로잡은 것처럼, 그들로 하여금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 고 앞으로 감히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것이죠?]
강희가 웃으며 말했다.
[바로 그것이다.]
위소보는 그의 웃는 얼굴이 좀 이상하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 이미 그 의 뜻을 알아차리고 웃으며 말했다.
[그건 바로 만세야(萬歲爺)께서 소계자를 일곱 번 사로잡은 것처럼, 소 인으로 하여금 고맙게 여기면서도 겁을 먹게 하여 앞으로 더이상 엉뚱 한 짓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군요. 소계자는 손오공과 같아서 항 상 부처님 손바닥 같은 만세야한테서 도망가지 못합니다.]
강희가 웃으며 말했다.
[너도 나이가 몇 살 더 먹었다고 갈수록 겸손해지는구나. 하지만 네가 나의 손바닥에서 도망친다면 난 정말 널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소인은 황상의 손바닥 안이 아주 편한데 무엇 때문에 도망가겠습니 까?] [오삼계를 평정한 일은 따지고 보면 네 공도 적지 않다. 그래서 이번에 너로 하여금 수륙삼군(水陸三軍)을 통솔하여 나찰에 출정하게 한 것이 다. 아극살 성(雅克薩城)이 녹정산에 건축되어 있다. 나는 너를 삼등녹 정공(三等鹿鼎公)과 무원대장군(撫遠大將軍)에 봉하겠다. 도통 붕춘(朋 春), 흑룡강 장군 살포소, 영고탑 장군 파해(巴海)로 하여금 널 돕게 할 것이고, 문관(文官)으로는 색액도로 하여금 널 돕게 할 것이다. 우 리는 먼저 보병 사만과 수사 오천을 출동시킬 것이다. 만약 부족하면 얼마든지 더 지원해 주겠다. 마필과 군수품은 이미 모두 준비되어 있 고, 애휘와 영고탑에 비축된 양식으로도 대군은 삼 년 동안 지탱할 수 있다.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강희가 한마디할 때마다 위소보도 한 마디씩 감사의 말을 했다. 이윽고 그의 말이 끝나자 얼른 무릎을 꿇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강희가 말 했다.
[아극살과 니포초에 있는 나찰국 기병과 보병은 육천 명에 불과하다. 우리가 그 일고여덟 배나 되는 병력으로 상대한다는 건 그야말로 뇌정 만균지세(雷霆萬鈞之勢)가 아니겠느냐? 네게 바라는 것은 단지 우리 중 화(中華)의 위풍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다.] [이번 싸움은 소인이 황상을 대신하여 나간 것이라 우리가 조금이라도 헛점을 보이면 나찰인들은 우리를 업신여길 겁니다. 그러니 황상께선 심려하지 마십시오.] [좋다. 혹시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봐라.] [소인은 대만에서 오백 명의 등패병을 경성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들은 홍모병을 상대하여 싸운 적이 있어서 화기에 저항하는 데 능하기 때문 에 함께 데려가 나찰을 무찌를까 합니다.]
강희는 기뻐하며 말했다.
[그거 아주 잘됐구나! 정성공의 옛 부하들은 하란(荷蘭)의 홍모병을 격 파했기 때문에 네가 데려가서 나찰병을 친다면 우리한테 더욱 승산이 있겠구나. 그렇지 않아도 나는 나찰병 화기의 성능이 뛰어나서 우리 군 대의 피해가 많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등패는 조총탄알을 막을 수 있고 등패병들은 땅바닥으로 굴러가서 칼 을 사용하여 나찰병의 발목을 자를 것입니다.]
강희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아주 그럴싸한 묘책이다, 묘책이야!]
위소보가 말했다.
[소인에게 첩(妾)이 하나 있는데 그녀는 전에 모스크바에 함께 갔었기 때문에 나찰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습니다. 소인의 생각에는 그녀 를 함께 데려갈까 하는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청나라의 법도는 출사(出師)할 때 군중에 가족을 데려가면 대죄를 범하 는 것이라 필히 사전에 진정을 올려야 했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다. 그러니 큰 공이나 세우도록 해라!]
위소보가 절을 하고나서 입구까지 물러갔을 때 강희가 다시 그에게 물 었다.
[소문에 너의 사부인 진근남이 정극상한테 살해됐다는데 틀림없느냐?]
순간 위소보는 흠칫 놀라며 대답했다.
[예.]
강희가 말했다.
[정극상은 이미 조정에 투항한 몸이다. 나는 그에게 정씨 자손을 해치 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니 너는 그를 괴롭히지 마라.]
위소보는 하는 수 없이 예, 하고 대답했다. 그는 경성으로 오기 전부터 정극상을 찾아가 분풀이를 할 생각이었는데 뜻밖에도 강희가 미리 알아 차리고 이와 같은 분부를 내린 것이다. 만약 다시 가서 그를 건드리면 그건 곧 어명을 거역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사부님을 해친 원수 놈을 이대로 방치하란 말인가?) 위소보는 고개롤 숙인 채 천천히 걸어나오는데 갑자기 말소리가 들렸 다.
[위 형제, 축하하네!]
위소보는 귀에 익은 음성이라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눈앞에 체격이 아 주 우람한 사람이 웃는 얼굴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름 아닌 바 로 어전시위 총관인 다륭이었다. 순간 위소보는 깜짝 놀랐다. 그날 그 가 궁 밖으로 빠져나갈 때 분명히 자기 방에서 다륭을 일검에 찔러 죽 였는데 어떻게 지금 자기 앞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의 혼백이 복수하러 왔단 말인가? 그는 놀라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생각 같아선 즉시 몸을 돌려 도망치고 싶기도 하고 무릎을 꿇고 빌고 싶었지만 두 다리가 마치 땅바닥에 못으로 박혀 있는 듯이 도무지 움직 일 수가 없었다. 앞뒤가 모두 급한 바람에 똥오줌이 한꺼번에 흘러나왔 다. 다륭이 가까이 다가와 그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
[아우님을 여러 해 동안 보지 못해서 이 형님은 아주 보고 싶었다네. 그 동안 별일 없었는가? 자네가 통흘도에서 황상을 위해 낚시질을 했으 며 황상께서 자네의 벼슬을 승진시켰다는 말을 듣고 나도 몹시 기분이 좋았다네.]
위소보는 그의 손이 몹시 따뜻하게 느껴졌고 햇빛에 비친 자신의 그림 자 옆에 그의 그림자도 있었기 때문에 귀신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 어서 다소 마음을 놓았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예,예.]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가 복수를 할까 봐 걱정했다. 당시 그의 비수는 분명히 다륭의 심장을 정확하게 찔렀는데 어찌 아직도 살아있을 수 있 단 말인가?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륭은 다시 말했다.
[그날 아우님 방에서 이 형이 암살을 당할 때 아우님이 자객을 쫓아 준 덕분으로 이 목숨을 겨우 보존할 수 있었네. 이 일을 줄곧 자네한테 치 사하지 못했지만 한번도 잊은 적이 없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네는 또 시랑을 시켜서 대만에서 나한데 선물까지 보냈으니 그 고마움은 정 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네.]
위소보는 그의 진지한 태도를 보고 절대로 거짓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고 느꼈다. 그는 내심 생각했다. (그는 어전시위 총관이며 황상 신변의 근신(近臣)이다. 시랑이 이번에 선물을 나눌 때 자연히 그의 몫이 있었을 것이다. 필시 그가 시랑에게 내 얘기를 묻자 시랑은 틀림없이 선물의 일부분을 내가 보냈다고 말했 을 것이다. 그래야만 그가 나하고 보통 사이가 아니란 걸 드러낼 수 있 고,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나의 체면을 봐서 그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 다. 그런데 한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어째서 내가 자객을 쫓았다고 말하는 것일까?) 다륭은 그의 창백한 얼굴과 넋을 잃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자 강희한테 꾸중을 들어서 그런 줄 알고 그를 위로해 주었다.
[최근 황상께서 자주 역정을 내시는 건 모두가 나찰국의 지나친 행패 때문이니 너무 걱정할 것 없다네. 이따가 퇴궐한 후 우리끼리 한잔 하 면서 그 동안 못다 한 얘기를 나누세.] [황상의 은덕은 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두텁습니다. 조금 전에 또 저를 승진시키셨습니다. 이 아우는 황은을 어떻게 갚아드려야 할지 정말 모 르겠습니다.]
다륭이 웃으며 말했다.
[축하하네, 축하해! 아우님은 일처리를 하는데 있어서 남달리 뛰어난 재주가 있기 때문에 황상의 걱정을 덜어 드릴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 승진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이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부러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위소보는 그 가 자기를 대하는 태도가 다정하면서도 부드러운 걸 보자 내심 두려워 했던 마음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다 형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전 지금 오줌이 마려워서 미칠 지 경입니다. 황상을 뵈올 때 당부하신 말씀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지금 까지 오줌을 참고 있었는데 더 이상은 정말 참을 수 없을 것 같습니 다.]
순간 다륭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황상께서 신하를 만날 때 만약 용 무가 끝났다는 뜻을 비치지 않으면 신하는 절대로 먼저 물러갈 수 없었 다. 따라서 신하가 정말 오줌이 마려울 경우에는 실로 난감한 일이었 다. 하지만 위소보 같은 총신(寵臣)이 아니면 황상도 그렇게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는 법이 없었다. 다른 대신들은 두세마디로 끝나기 때문에 오줌이 마렵거나 똥이 마려운 경우는 드물었다. 다륭과 위소보는 항상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다륭은 오늘 오랫만에 다시 위소보를 만나자 정말 반가웠다. 그래서 그는 즉시 위소보의 손을 끌고 변소 앞까지 데려다 주고 자기는 문 밖에 서서 그가 나오기를 기 다렸다.
그날 위소보는 사부와 천지회의 여러 형제들을 구하기 위해서하는 수 없이 검으로 다륭을 찌른 것이다. 평소에 그가 자기한테 잘 대해 준 것 을 생각하면 내심 미안한 생각도 들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죽지 않았고 게다가 자기를 대할 때 전혀 원망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지라 위소보는 대소변을 보고 나서 속옷으로 뒤를 닦고 그 속옷을 구석에 처 박아 두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다륭에게 그날의 상황을 물어 보았 다. 다륭이 말했다.
[그날 내가 깨어나 보니 이미 침대에서 나흘이나 누워 있었더군. 의원 의 말에 의하면 심장이 약간 옆으로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자객의 칼이 내 폐를 스쳐 갔을 뿐 심장을 찌르지 못했다더군. 더욱이 나같이 심장 이 치우쳐 있는 사람은 십만 명 중에 한 명이 있을까말까 하다고 말했 네.]
위소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랬었구나! 난 그런 줄도 모르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난 줄곧 형님이 정직한 호한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형님께서는 마음 이 비뚤어져 있는 사람이군요? 형님의 마음은 작은부인 쪽인가요? 아니 면 아드님 쪽인가요?]
순간 다륭은 어리벙벙해졌다. 그러나 이윽고 웃으며 말했다.
[아우님이 그 얘기를 하지 않았으면 난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네. 내가 여덟 번째 소첩을 각별히 사랑하고 있는 건 아마 내 심장이 비뚤어졌기 때문일 걸세.]
두 사람은 한바탕 웃어 댔다.
[그 자객의 무공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가 형님을 암살하러 올 때 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랬을테지.]
다륭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마침 그때 건녕 공주 전하께서 날 만나러 오셨네. 나는 삼 개월 동안 치료하여 겨우 완쾌되었지. 황상의 말씀에 의하면 위 아우께서 죽음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구했다고 하더군. 더욱이 손수 자객을 처단했다고 하니, 이 중간의 상세한 과정은 아우님이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이 형 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네.]
위소보는 얼굴 두껍기로 천하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였지만 이 말을 듣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그제서야 비로소 황제 가 자기의 과오를 숨겨 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황제가 직접 말 했기 때문에 다륭이 전혀 의심하지 않았지만 또 한가지 이유는 공주의 사생활이 개입된 일이라 될 수 있으면 캐묻지 않는 게 상책이란 걸 궁 중 사람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궁금해도 가슴 깊이 묻어 둘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위소보는 내심 부끄럽게 여기며 이 충후하고 착 한 사람한테 필히 한 차례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대만에서 토산품을 좀 가져온 게 있는데 나중에 사람을 시켜서 형님댁에 보내드리겠습니다.]
다륭은 마구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없네. 지난번 아우님이 시랑을 시켜서 보내은 선물도 집에 많이 쌓여 있다네.]
순간 위소보는 문득 한가지 일이 생각났다. (이 일은 설령 황상이 알게 되어도 내가 어명을 거역했다고 나무랄 수 없을 것이다.)
[다 형님, 정극상 그 녀석은 항복한 후 북경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 까?] [황상께서 잘 대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일등공(一等公)이란 벼슬 을 내리셨네. 그 녀석은 아무 재주도 없는데 조상 복을 잘 타고 나서 뜻밖에도 벼슬이 아우님보다 더 높다네.] [그날 우리가 장난삼아 그가 시위들한테 일만 냥의 은자를 빛졌다고 해 서 제가 대신 갚았던 일을 형님께선 아직 기억하고 계시겠죠?]
다륭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기억하고말고! 아우님이 좋아했던 그 낭자는 나중에 어찌 되었는가? 만약 아직도 정극상을 따라다니고 있다면 우리 지금 당장 가서 그녀를 빼앗아 오세.]
위소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낭자는 이미 제 마누라가 되었고 아들까지 낳았답니다.]
다륭이 웃으며 말했다.
[축하하네. 정극상 그 녀석이 경성에서 제아무리 일등공, 이등공이라 해도 필경 아무런 권한이 없는 빛좋은 개살구가 아닌가. 그러니 우리가 그의 집으로 쳐들어간다 해도 감히 뭐라 하지 못할 것이네. 자고로 귀 순한 번왕(藩王)들은 행여나 황상께서 그가 속으로 불복하여 다시 반란 을 일으킨다고 의심할까 봐 온종일 전전긍긍하며 지내고 있지.] [우리는 그를 괴롭힐 것도 없고 단지 빛진 돈만 받으면 그뿐입니다. 그 가 일등공이 아니라 설령 친왕(親王)이나 패륵(貝勒)일지라도 남한테 빛진 게 있으면 당연히 갚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옳다, 옳아. 그날 그자가 아우님한테 일만 냥을 빚질 때 우리 어전시 위들이 여러 명 목격했으니 지금 받으러 가세.]
위소보가 미소를 지으머 말했다.
[그 녀석은 정말 한심합니다. 단지 그 일만 냥뿐이라면 얘기도 하지 않 습니다. 그자는 나중에도 여러 차례 저한테 많은 돈을 빌어갔으며 그가 친필로 쓴 차용증서도 제 손에 있습니다. 정씨 집안은 대만에서 몇 대 째 왕야(王爺)노릇을 했으니 금은보화를 적지 않게 모은 건 엄연한 사 실이고 틀림없이 모두 북경으로 가져왔을 겁니다. 정성공과 정경은 좋 은 사람이라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하지 않았겠지만 정극상 그 녀석은 절대로 가만 있지 않았을 겁니다. 따라서 그가 왕야 노릇을 하루 하면 적게 잡아도 일백만 냥은 수탈했을 겁니다. 이틀이면 이백만 냥이고 사 흘이면 삼백만 냥입니다. 그러니 그가 며칠 동안 왕야 노릇을 했는지 형님께서 한번 계산해 보시죠.]
순간 다륭은 어이없다는 듯이 입을 딱 벌렸다.
[대단하다, 대단해!] [나중에 제가 차용증서를 형님께 보내 드리겠습니다. 제 자신은 그 돈 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네. 형님된 입장으로 아우의 빛을 받아주는 것 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수하의 시위들을 거느리고 직 접 찾아가면 그의 담력이 아무리 크다 해도 감히 거절하지 못할 것이 네.] [그 빚은 생각보다 좀 많습니다. 그 녀석은 왕년에 물 쓰듯 돈을 뿌렸 습니다. 그러니 한꺼번에 갚으려면 그다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하기로 합시다. 형님께서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그가 열흘 안에 갚지 못하면 시위 형제들의 이름으로 차용증서를 나눠 쓰도록 하세요. 차용증서는 한 장에 일천 냥으로 써도 좋고 이천 냥으로 씨도 좋습니 다. 그리고 그 차용증서를 어느 시위가 받든 그것은 바로 그자의 것입 니다.] [그건 말도 안 되네. 시위들은 모두 자네의 옛 부하가 아닌가? 옛 상사 를 위해 빚을 좀 받아 주는 것인데 포상을 바란다면 그건 말도 안되 네.] [그들은 비록 모두 저의 옛 부하들이지만 좋은 형제들이고 친한 친구들 이기도 합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전 마치 순풍에 돛단배를 띄운 것처 럼 벼슬이 날로 높아졌지만 그들에게 전혀 해준 것이 없어서 미안한 생 각도 듭니다. 그래서 이 몇백만 냥의 은자를 여러 시위들께 나눠 주려 는 겁니다.]
순간 다륭은 깜짝 놀라는 것 같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몇……몇백만 냥의 은자가 있다구?]
위소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본전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중의 일부는 꿔 준 것이고 게다가 이 자에 이자가 붙어서 액수가 커진 겁니다. 그러니 이 돈은 형님께서 많 이 차지하기 바랍니다.]
다륭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몇백만 냥?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그러니까 그로 하여금 차용증서를 나눠 쓰도록 하는 것이오. 그래야만 좀 수월하게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위소보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이 일에 절 개입시키면 안 됩니다. 만약 어사(御史)들이 알게 되면 틀 림없이 저한테 번왕 일당과 사귀고 고리대금업을 한다는 죄명을 씌워 상소를 올릴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전시위들이 그에게 노름빛을 받으러 간다면 한 사람 앞에 불과 일, 이천 냥의 은자라 그다지 문제될 건 없 습니다. 형님께서 만약 어전시위들이 혼자 먹기에 좀 뭐하다고 생각하 신다면 효기영의 군관 몇 명을 데려가십시오. 그들도 모두 저의 옛 부 하라 마땅히 조금씩 나눠줘야 할 게 아닙니까?]
다륭은 연신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내심 이 빚을 받으면 최소한 절 반 이상은 위소보한데 돌려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비록 남보다 손 이 큰 편이지만 그래도 그의 본전은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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