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 원의 행복 / 강릉 바우길
글 / 김덕길
“자기야! 나 홍게가 먹고 싶어. 응?”
“그래 가자고! 홍게 쯤이야 뭐.”
아내는 유난히 게를 좋아한다. 킹크랩부터 랍스터, 꽃게, 대게까지…….
그런데 비싸다. 그래서 우리는 연중행사로 가거나 아니면 한해 걸러 가곤 한다.
어느 날, 그녀의 친구가 원주에서 홍게를 먹었는데 무한리필이라 원 없이 먹었다고 자랑이 늘어졌단다. 맛도 최고였단다.
우리는 설날 연휴에 가기로 결정한다.
원래 계획은 연휴 1일차에 동계올림픽 파크와 강릉 바우길 5코스를 걷는게 목표였다.
아내가 운전을 하고 나는 책을 읽는다. 아내가 졸리다고 책을 읽어달란다. 다섯 살 어린 아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준 후 20년 만에 소설책을 소리 내 읽는다.
소설가 성석제의 ‘단 한 번의 사랑’이란 책이다.
한 시간 동안 책을 소리 내 읽는데 거의 발음이 틀리지 않았다. 아마도 2일 한권의 독서를 시작한 지 3달째가 되니 글이 눈에 제대로 밟히기 때문인 것 같다.
올림픽 파크는 표를 끊으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도저히 두어 시간을 기다릴 자신이 없어 포기한다. 게임장 입장을 할까 생각도 했는데 표도 없거니와 요금도 비싸다.
할 수 없이 우리는 경포대로 차를 몰았다.
허난설현의 생가를 방문한다. 허난설현은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누나다. 그녀는 26년의 짧은 생을 살다 간 분이지만, 당대 최고의 여류신인으로 칭송이 자자하다.
허균의 누이 이름이 ‘허초희’ 호는 ‘난설현’ 이다. 글을 잘 쓰고 짓는 일이 조선의 여자들에게는 쉽지 않았다. 두 아이까지 먼저 저세상에 보낸 그녀의 삶은 너무나 기구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글을 불태우라는 유언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허균은 이미 누이의 시를 모두 암기하고 있었기에 후일 암기했던 내용을 글로 풀어 책으로 엮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게 ‘난 설현집’이다. 이 책은 조선 뿐 아니라 중국에까지 널리 읽혔다고 한다.
‘홍길동 전’을 지은 허균마저 반란죄로 처형을 받았으니 실로 안타깝다.
우리는 다시 강릉 항에 차를 주차하고 트레킹 준비를 한다.
강릉 항은 안목 커피거리 근처에 있다. 한때 이곳은 드라이브를 하러 온 데이트 족들이 바다를 바라보며 자판기 커피를 즐겨 마시는 곳이었다. 이곳의 자판기 커피는 다른 곳보다 훨씬 맛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소문이 난 상태였다.
그것이 발판이 되어 오늘 날 안목 커피거리라는 상권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우리도 해물칼국수로 점심을 해결하고 바닷가 솔향기 길을 따라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선다.
바람은 미풍이었고 파도는 잠잠하다.
멀리 수평선은 파란 바다를 가득 안고 하늘과 닿아있다. 청정 바다와 맑은 하늘을 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소나무는 작고 앙증맞으며 바닷바람을 고스란히 맞고 자란다. 바닥은 모래 천지다. 나는 아내에게 문제를 하나 낸다.
“이곳 트레킹 코스에서 모래 다음으로 많은 것이 무엇일까요?”
“사람들…….”
“땡! 정답은 바로 솔방울입니다.”
솔숲은 안목 항을 지나 송정해변을 지나 솟대다리를 지나 강문 항을 지나 경포대로 이어진다.
솔숲의 바닥에는 모래가 깔렸고 모래위에는 무수히 많은 솔방울이 자리 잡는다. 솔방울은 제멋대로 떨어져 제멋대로 구르다 제멋대로 놓여있다. 사람들의 발길질에 채이기도 하고 매운 해풍에 몇 바퀴 구르기도 하고 눈발에 얼기도 하면서 수줍게 논다. 절제되지 않고 꾸미지 않고 애써 아름답게 만들어 놓지 않아도 스스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저 눈부신 솔방울을 보라!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나는 솔방울의 매력에 푹 빠진 채 송정해변의 자판기 커피를 뽑는다.
“아! 바로 이 맛이야!”
그곳의 자판기 커피 맛은 그야말로 신이내린 맛이다. 혀끝에 착착 달라붙는데 그리 달지 않으며 걷는 자의 피곤을 한꺼번에 날려준다.
‘아! 400원의 행복이여!’
우리는 두 시간여를 걸으며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다.
솟대다리의 빼어난 곡선미가 사람을 끌어 모은다. 강문항에서 경포로 이어지는 해변에는 올림픽기념 불꽃 조각들이 즐비하다.
수많은 꽃을 등에지고 서있는 꽃사슴 조각도 멋지다. 불꽃모양의 조각과 짚으로 만든 도깨비 모양의 공예품도 특이하다.
경포대를 산책하는 많은 외국인들을 보니 ‘정말 올림픽경기를 하는 구나’ 라고 실감을 한다.
강릉 빵에 커피 한잔의 여유는 트레킹으로 피곤해진 심신을 달래주기에 충분하다.
이제는 경포대나 안목커피거리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보다 어리다.
세월은 무심한데 무심한 세월을 탓하면 뭐 하랴.
400원의 자판기 커피 한 잔에 우리가 행복했으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