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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욱 진실위원장 "DJ납치, 박정희가 지시"
"현지팀이 살해 지시 무시하고 DJ살려"
2007년 10월 25일 (목) 17:34 연합뉴스
안병욱 국가정보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 위원장(가톨릭대 교수)은 1973년 발생한 김대중(DJ) 납치사건과 관련, 25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안병욱 위원장은 이날 `KBS 라디오정보센터 박에스더입니다'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 속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없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시대 조건이 전혀 아니었다"면서 이 같이 말했다.
진실위는 전날 `DJ납치사건은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최소한 묵시적 승인은 있었다고 판단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안 위원장은 박 대통령 지시를 보여주는 물증이 없는 것에 대해 "물증이 처음부터 만들어졌을 리가 없다. `김대중 처리해'라고 한마디하면 알아서 처리하던 시기였다"고 반박했다.
그는 중앙정보부의 공작목표에 대해 "처음에 공작 목표는 `김대중 제거'였다"면서 "단순납치였다면 김대중을 잡아 어떻게 데려올 지 계획이 있어야 하는데 없다"면서 "외교행낭, 냉장고를 이용해 싣고 온다고 돼 있는데 냉장고에 살려옵니까. 죽여오는거죠"라고 말해 살해가 목표였음을 분명히 했다.
안 위원장은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 있었는데 안죽였다"면서 "현지 공작을 실행하는 당시 중정 직원들이 애초에 (살해) 지시를 무시하고 (DJ를) 살렸다고 판단한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 측 개입으로 수장될 뻔한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DJ측 주장에 대해 "김 전 대통령이 배 밑창에서 미국 비행기 (소리를) 들었다는 얘기 외에 이를 확인할 근거가 없다. 그날 배에 있었던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그런 일 없다고 확인했다"면서 부인했다.
안 위원장은 `일본 정부의 방해로 조사결과 발표가 늦어졌느냐'는 질문에 "양국(한.일) 정부 다 마찬가지지만 특히 일본 정부는 이 진실이 밝혀져서 자기들이 곤란한 처지에 당하는 것을 (우려해) 굉장히 여러 가지를 내세워 간접적으로 (발표를)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진실을 밝히는 것 이상으로 한일관계에 친선, 공동,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정진 기자 transil@yna.co.kr
(끝)
김대중 납치사건 전말 朴正熙
박정희, 사후보고 받았고 최소한 사실 은폐, 묵인
「金大中납치」 中情 조직적 범행… 동아일보 단독입수
영구미제사건으로 역사에 묻힐 뻔 했던 ‘김대중(金大中) 납치사건’은 당시 중앙정보부가 치밀하고 조직적인 사전계획을 세우고 국내외 공작요원을 동원해 일으켰다는 사실이 사건발생 25년만에 최초로 문서로 확인됐다.
동아일보는 18일 중정과 그 후신인 국가안전기획부가 보관해온 극비문건 ‘KT공작요원 실태조사보고’를 단독입수,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문건에는 김대중씨를 일본 도쿄(東京)에서 서울까지 납치했던 중정요원 25명과 김씨를 오사카(大阪)부두에서 부산까지 실어나른 ‘용금호’선원 21명의 명단및 그들의 역할, 사후 중정의 관리내용이 모두 수록돼 있다.
비밀문건의 제목 ‘KT공작’은 중정이 김대중씨 이름의 영문 이니셜을 따서 붙인 사건 암호명이다.
79년3월10일 김재규(金載圭)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朴正熙)당시 대통령에게 보고한 이 문서 하단에는 ‘대통령 각하 보고필’이라고 적혀 있어 박대통령도 최소한 사건발생 후 납치 전모를 보고받았으며 중정의 진상 은폐를 추인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문건에는 이밖에도 △실태조사 대상인원에 대한 관리현황 △공작관련 선박처리현황 △공작요원 사후 관리 자금관계 △조사실시 목적 △실태조사대상 △결론 등이 들어있다.
문서에 수록된 ‘KT사건행동별 관여인사 일람표’에 따르면 납치사건의 최고책임자는 이후락(李厚洛)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으며 이철희(李哲熙)정보차장보―하태준(河泰俊)해외공작국장(8국) ―윤진원(尹鎭遠)8국공작단장―김기완(金基完)주일대사관 공사 등으로 사건지휘가 이루어졌다.
또 나머지 중정요원들은 대부분 주일대사관이나 오사카총영사관 근무자들이며 현장책임자로 서울에서 건너간 윤단장의 지휘에 따라 △납치 △도쿄→오사카 안가(安家) △오사카→오사카부두 △오사카부두→부산 △부산→서울안가 이동 등 각 단계별로 9개조가 투입돼 치밀하게 움직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도쿄 그랜드팔레스호텔에서 김대중씨를 납치하는 작전은 윤단장과 한춘(韓椿) 김병찬(일명 김동운) 홍성채(洪性採)주일대사관 1등서기관, 유영복(劉永福) 유충국(柳忠國)2등서기관이 맡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용금호가 부산에 도착한 뒤 김선배(金仙培)당시 중정 의무실장이 김씨의 건강상태를 진찰했으며 서울로 이송된 뒤에는 하태준국장이 직접 김씨의 상태를 확인했던 사실도 드러났다.
한편 특수공작의 경우 대통령의 결재없이 구두지시로 공작이 진행되고 대통령이 사후보고를 받는다는 정보관계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볼 때 박대통령이 김대중씨 납치를 직접 지시했을 가능성도 높다.
당시 중앙정보부 이철희차장보, 현장지휘 윤진원
당시 中情 이철희차장보 공작 시인…핵심관계자론 첫증언
73년8월 김대중(金大中) 납치사건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보였던 이철희(李哲熙)씨는 18일 서울 강남 모처에서 동아일보 취재기자와 단독으로 만나 “납치사건은 중앙정보부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밝혔다. 이씨는 “김대중씨 납치사건은 당시 이후락(李厚洛)중앙정보부장이 73년 봄 나를 궁정동 안가로 불러 ‘김대중을 무조건 한국으로 데려오라’고 지시한데 따라 중정 해외공작팀이 수행했다”고 밝혔다.
이씨의 이같은 증언은 당시 사건의 핵심 고위 관계자가 사건발생 이후 25년만에 처음으로 ‘김대중납치사건’이 중앙정보부의 공작이었음을 공식 인정한 것이다. 이 씨 는 “당시 나와 하태준(河泰俊)해외공작국장(8국장)은 이부장의 지시를 두차례에 걸쳐 반대했으나 이부장이 ‘나는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라고 말해 밑에서 반대한다고 해서 취소되는 명령이 아닌 것으로 감을 잡았다”고 증언했다.
이씨는 그러나 이부장으로부터 김대중 납치 지시가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이라는 말을 직접 듣지는 못했다고 덧붙였다. ‘최고위 납치 지시자’가 누구냐에 대해 이전부장은 비공식적으로 ‘박정희대통령’이라고 흘려왔었다. 그러나 당시 정권의 핵심인사들은 “박대통령은 사건발생 후에야 알았고 ‘은폐 수습책임’이 있을 뿐”이라고 반박해 왔다.
[김대중납치사건 현장지휘 윤진원씨]對北공작 베테랑
‘김대중 납치사건’을 현장에서 지휘한 윤진원(尹鎭遠·73)씨는 누구인가.
사실 그는 납치사건만 아니라면 ‘중앙정보부 해외공작 단장’이라는 직함에서 짐작할 수 있듯 대중에 알려질 수 없고 또 알려져서도 안되는 ‘공작전문요원’이었다. 그와 같이 일했던 중정 동료들은 “작고 다부진 키의 윤씨는 목숨을 걸고 사선을 넘으며 수십년간 국가를 위해 일해온 유능한 공작원이었다”며 “애국자를 정치공작에 투입하는 바람에 그는 30년 동안 쌓아온 명예를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1925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난 그는 부산공고를 졸업한 뒤 전쟁중인 50년 육군종합학교에 입교, 그해 12월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한 그는 육군첩보부대(HID)로 옮겨 일하다가 61년 중앙정보부가 창설되면서 현역 소령 신분으로 중정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육군첩보부대는 대북관련 정보나 공작을 담당해온 비밀부대. 납치사건의 윗선으로 중정차장보였던 이철희(李哲熙)씨 역시 HID출신이다. 그는 주로 대북 또는 해외공작 업무를 담당해오다가 73년 김대중납치사건을 ‘현장지휘’하게 된다. 김대중납치사건의 현장업무를 가장 정확하게 증언해줄 인물인 셈.
납치사건 이후 그는 당시 업무를 수행한 중정직원과 용금호 선원들의 비밀관리를 맡는 등 일선에서 소외된 업무를 해오다 결국 75년 준장진급에 실패했다. 중정은 75년2월 전역한 그를 1급 관리관으로 재임용했다.
당시 중정측은 윤씨에게 강원지부장을 제의했으나 그는 “국내정치는 나에게 맞지 않는다”고 거절하고 공작단 업무를 계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씨는 80년초 중앙정보부에서 은퇴한 뒤 주로 중정 동료들과 어울리면서 소일하고 있다는 것이 동료들의 설명이다. 윤씨는 현재 서울 이태원동의 빌라에서 큰아들과 살고 있으며 언론과의 인터뷰를 극력 피하고 있다.
이후락씨 『무조건 김대중 데려와』…반대의견 무산
지난 25년 동안 김대중(金大中)납치사건의 진상을 함구해온 당시 중앙정보부 정보차장보 이철희(李哲熙)씨는 사건발생 25년만인 18일 “다시는 정보부 직원이 정치공작에 이용돼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증언한다”며 진상을 털어놓았다.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 했던 ‘기밀’을 털어놓는 순간 그의 표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김대중씨가 천신만고 끝에 대통령선거에서 이겨 취임식을 눈 앞에 두고 있는 공교로운 시점에….
이씨는 먼저 “73년 봄 이후락(李厚洛)부장이 남산에 있던 나를 궁정동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 ‘김대중이 해외에서 시끄럽게 하니 무조건 데려오라’고 지시했다”며 이 사건이 이부장의 지시였음을 명확히 했다. 어렵게 기자와 만난 그는 연방 차를 마시며 오랫동안 정보업무를 해온 사람답게 침착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당시 자신과 하태준(河泰俊)해외공작국장(8국장)이 60년대 중정요원들이 베를린에서 무리하게 간첩체포작전을 벌인 후유증으로 해외공작업무가 마비상태였음을 들어 “일본의 치안상태가 좋아 잡음없는 공작수행이 불가능하고 오히려 말썽만 난다”며 반대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부장이 열흘 뒤 다시 자신을 불러 강한 어조로 “뒷일은 내가 책임질테니 무조건 김대중을 데려와. 나는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라고 채근하는 바람에 반대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님을 알고 하국장과 윤진원(尹鎭遠)해외공작단장에게 납치계획수립을 지시했다는 것.
그는 또 자신이 업무지시를 김기완(金基完)주일공사에게 내리자 김공사 역시 심하게 반발,“내 선에서 처리할 사안이 아니니 반대의견을 부장께 직접 말하라고 했다”고 회고, 내부진통이 적지 않았음을 시사했다. 하지만 이씨는 하국장과 상의, 오랫동안 해외공작 업무를 담당해왔던 윤진원 8국 공작단장에게 “모든 수단을 동원, 김대중을 한국으로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이후 윤단장은 자신이 데리고 있던 8국 직원들을 중심으로 주일대사관에 파견된 중정직원과 함께 납치 계획을 짰다. 당시 중정측이 김대중씨를 납치, 암살할 계획이었다는 세간의 논란과 관련, 이씨는 “이부장의 지시는 분명히 ‘납치’였다”며 “만약 암살할 계획이었다면 해외공작팀이 아닌 다른 팀을 동원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납치도중 바다 한가운데서 수장될 뻔했던 김대중씨가 미국의 개입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는 일부의 주장에 대해서는 “미국측이 사건발생 이후 김대중씨를 구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 때문에 김씨가 살아난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애초 계획대로 배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동했고 항해도중 어떤 방해도 받지 않았다는 것.
이씨는 “정통성 없는 정부 때문에 해외업무를 담당했던 많은 중정직원들이 정치공작에 이용돼 그동안 쌓아왔던 경력을 망쳤다”며 “그들과 국민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씨는 79년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82년 거액 어음사기사건으로 부인 장영자(張玲子)씨와 함께 구속돼 91년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94년 어음연쇄부도사건으로 부인 장씨가 재수감된 후에는 옥바라지를 위해 청주교도소 근처에서 4년째 혼자 살고 있다.
中情 「KT공작」긴박했던 5박6일
73년8월8일 오후 1시19분 일본 도쿄(東京)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그랜드팔레스호텔 2212호 스위트룸 앞 복도. 신병치료차 일본에 머물고 있던 양일동(梁一東)통일민주당 당수를 만나고 나오던 김대중(金大中)씨는 건장한 체격의 괴한 6명에게 납치돼 옆방인 2210호로 끌려갔다. 괴한들은 김씨를 침대에 눕히고 마취제를 묻힌 수건을 코에 갖다 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 뒤 엘리베이터로 끌고내려와 지하주차장에 대기시킨 차에 태우고 도주했다.
국가 정보기관의 치밀하고 조직적 범죄인 ‘김대중납치사건’, 이른바 ‘KT공작’의 서막은 이렇게 시작됐다.
본보가 단독입수한 ‘KT사건행동별 관여인사 일람표’에는 김대중납치사건에 참여한 중앙정보부 인사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최고책임자인 이후락(李厚洛)중앙정보부장―이철희(李哲熙)정보차장보―하태준(河泰俊)해외정보국장(8국장)이 납치사건의 수뇌부를 이루고 있다. 또 윤진원(尹鎭遠)해외공작단장은 현장총지휘, 중정 해외요원인 김기완(金基完)주일대사관공사와 윤영노(尹英老)참사관은 재일(在日)활동책을 맡았다.
이들 휘하의 중정요원들은 납치 및 각 이동구간별로 9개조로 나뉘어 치밀한 사전준비를 했다. 9개조는 △행동대(납치조) △도쿄→오사카 △오사카안가(安家) △오사카안가→오사카부두 △오사카부두대기 △오사카→부산 △부산→서울 △서울안가 △안가→김대중가 이동조.
여기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팔레스호텔에서 누가 김씨를 납치했느냐 하는 것. 지금까지도 김씨의 납치범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하지만 일람표를 보면 그들의 신원은 낱낱이 드러난다. 사건의 현장총책임자인 윤진원해외공작단장과 주일대사관의 한춘(韓椿) 김병찬 홍성채(洪性採)1등서기관, 유영복(劉永福) 유충국(柳忠國)2등서기관이 김씨를 직접 납치한 중정요원이다.
또 유충국 홍성채 유영복씨와 김기도(金基燾)오사카영사 등은 현지 정찰의 임무를 맡아 김씨를 납치하기 전 김씨의 일정과 움직임, 일본 경시청 동향 등을 파악했다. 납치범 6명 중 김병찬과 유충국은 호텔 현장에서 사라졌고 나머지 4명이 김씨를 차량 뒷좌석 바닥에 밀어넣고 오사카쪽으로 달아났다. 운전은 유영복이 맡고 윤단장은 김씨와 줄곧 동행하며 구간마다 현장을 지휘했다.
도쿄∼오사카간 고속도로를 5∼6시간 달린 후 도착한 곳은 오사카 인근의 중정 안가. 사건후 김씨는 “도쿄에서 어딘가로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괴한들이 ‘안의 집’으로 가자는 대화내용을 들었다”고 진술했었다. 이때문에 ‘안의 집’이 과연 누구의 집인지를 놓고 추론이 분분했다. 오사카총영사관 운전사인 안용덕(安龍德)씨가 한때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본보가 입수한 문서에는 목적지가 ‘대판(大阪)안가’로 명시돼 있다. 따라서 ‘안의 집’은 중정 안가를 지칭하는 은어일 가능성이 높다. 안가에는 도쿄에서 온 4명외에 박승민(朴勝民) 김기도 김명기(金命起) 박성일(朴聖一) 김봉실(金鳳實·여) 등 5명이 대기중이었다. 김씨는 윤단장 등에 의해 어느 빌딩 차고를 통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다미방으로 끌려갔다. 김씨는 당시 “거기에서 젊은 여자 목소리를 들었다”고 진술했다. 문제의 ‘젊은 여자’는 안가의 타자수인 김봉실이었던 셈이다.
이중 김명기는 안내 및 연락을 맡은 것으로 돼 있다. 안가는 후일 오사카 총영사관의 숙소로 사용된 엑셀 오카모토(岡本)빌딩 302호로 밝혀졌다. 이들은 김씨의 팔을 묶은 새끼줄을 풀어 다시 단단히 묶고 코를 제외한 얼굴전체에 화물포장용 테이프를 붙인 뒤 다시 김씨를 차에 태웠다. 다음 목적지는 오사카 부두.
납치에 직접 관여한 4명은 김씨를 총영사관 운전사 안용덕이 모는 차에 태워 부두로 끌고간 뒤 부두에 대기중이던 용금호 선원, 그리고 선원으로 위장한 중정요원 박정열(朴廷烈) 정운길(鄭雲吉) 등과 접선한다. 비밀문서에 따르면 용금호는 5백36t의 화물선으로 5백마력 엔진 2개를 장착한 대북공작선이다. 44년에 건조돼 72년 2월 중앙정보부가 해군으로부터 넘겨받은 배로 화물선으로 위장, 일본에 취항하고 있었으며 북한의 공작침투 저지가 주목적이었다.
용금호는 납치사건후 일본 경시청의 주목을 받자 ‘유성호’로 이름을 바꾸고 공작활동을 계속하다 배안에서 벌어졌던 엄청난 비밀을 안고 75년 해체된다. 용금호의 선원들은 대부분 당일까지 자신들이 무슨 일에 동원됐는지를 몰랐다. 이들은 선원으로 위장, 승선한 정운길이나 박정열의 지시에 따라 김씨를 태운 용금호를 부산까지 운항했다. 그 과정에서 입밖에 낼 수 없는 비밀을 알게 되지만 중정측의 회유와 협박 등으로 비밀을 발설하지 못했다.
용금호는 김씨를 납치한 다음날인 9일 오전8시45분 오사카부두를 출발했다. 일본 해상보안부 기록에 따르면 내해(內海)를 따라 관문해협을 통과한 것이 10일 오전9시54분이다.
배안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는 김씨와 선원 사이의 진술이 크게 엇갈린다. 김씨는 “범인들이 내려와 오른손에 추를 달고 두 다리도 묶은 후에 50㎏쯤의 추를 달았다. ‘살려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배가 미친 듯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비행기’라는 소리가 들렸다. 해상자위대나 미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쿵’소리와 함께 하늘에 빨간 불이 반짝 반짝 보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본보취재팀이 만난 선원들은 “비행기는 없었다. 죽이려는 것 같지도 않았다”(당시 용금호 통신장 정용석·鄭容碩씨의 증언)고 말했다. 관여인사 일람표가 맞다면 용금호 선상에는 중정요원으로는 정운길 박정열 두 사람밖에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만일 바다에 수장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상식적으로 납치를 주도한 윤단장 등 책임자급이 승선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느 진술이 옳은지는 좀 더 정밀한 조사가 필요한 대목이다.
한국측 수사본부의 발표에 따르면 용금호가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것은 8월11일 깊은 밤이었다. 배속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12일 오전7시 부두에 접안했다. 부두에는 김진수(金珍秀)중정8국 일본과장, 강제원(姜濟元)8국공작단2과장, 용금호 선원들의 뒷수습을 맡은 윤석만(尹錫萬)8국공작단 풍진호선박운영책, 김선배(金仙培)의무실장, 김실장의 운전사가 나와 있었다.
김실장은 잠시 김씨의 건강상태를 진찰한 뒤 대기시켜둔 앰뷸런스에 김씨를 태우고 곧장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도착한 것은 12일 오후. 하태준(河泰俊)해외공작국장이 직접 나와 김씨를 확인했으며 안가로 김씨를 데려가 하룻밤을 머물고 13일 밤 동교동부근에 김씨를 내려놓고 도주했다.
안가에서 김씨를 자택까지 데려가는 일은 강제원과장과 8국공작단 요원인 이휘윤(李暉潤)소령, 공작단 운전사가 맡았다. 일람표를 분석해보면 김씨의 납치공작은 세밀한 사전계획에 따라 이뤄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적어도 수십일에서 수개월에 걸쳐 치밀한 준비를 거친 후 공작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상당한 시일 동안 김씨의 동태를 감시했을 것이고 위험성이 큰 만큼 공작에 참여할 중정요원들의 선발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선을 넘어 서울 동교동 자택에 도착한 김씨는 5일간의 피랍과정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하지만 요란하게 설치했던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정명래·鄭明來 당시 서울지검공안부장)는 사건 1년 뒤인 74년 8월14일 아무런 성과없이 수사를 중지했고 또다시 1년 후인 75년 7월21일 수사를 종결했다. 수사본부는 당시 “용금호와 관련자들에 대해 치밀하고 광범위하게 수사했으나 이렇다할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치밀하고 광범위한 수사’를 했다는 증거는 찾기 어렵다.
그레그『美 납치다음날 박정희에 救命요청』
‘김대중(金大中) 납치사건’ 발생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 한국책임자로 일했던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국대사는 “사건 발생 다음날 하비브 당시 주한미국대사가 일본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나와 협의한 뒤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을 찾아가 그를 풀어주도록 요청했다”고 밝혔다.
그레그는 18일 동아일보와의 회견에서 “하비브대사의 요청을 받은 박대통령은 즉각 김씨를 풀어주도록 지시했고 이 지시는 곧장 대한해협 위에서 김씨를 싣고 가던 선박에 전해졌다”면서 “수장될 운명에 처했던 김씨는 이 지시가 떨어지면서 몸의 결박이 풀리고 비로소 마실 것과 먹을 것이 주어졌으며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또 “일각에서는 당시 김씨를 싣고 가던 배 위에 미국정부가 보낸 헬기가 떠 김씨의 죽음을 막았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며 “김차기대통령도 나에게 이에 대해 직접 물은 적이 있지만 미국은 어떤 비행기도 현장에 보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레그 전대사는 이어 “우리는 김씨 구명을 놓고 당시 일본정부와는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며 “김씨를 구해야 하고 청와대를 움직여야 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미국의 판단이었다”고 증언했다. 73년 8월9일 하비브 당시 주한미대사가 일본으로부터 김대중씨가 납치됐다는 첫 연락을 받았다. 아마 일본경찰이 연락해주지 않았나 싶다.
하비브대사는 곧바로 나에게 전화를 해 이 사실을 알리면서 “우리는 누가 김씨를 납치했는지를 밝혀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내가 청와대에 가서 ‘김씨가 한국중앙정보부(KCIA)에 의해 납치됐다’고 말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며 “우리는 하루 안에 행동을 취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다음날 하비브를 찾아가 “맞습니다.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씨를 납치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하비브는 곧 청와대로 달려가 박정희대통령에게 “한국중앙정보부가 김대중씨를 납치했으므로 지금 당장 중정에 연락해 그를 풀어주라”고 요청했다.
박대통령은 충분히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김대중을 풀어주도록 지시했고 이 지시는 곧장 대한해협에서 김대중을 싣고 오던 선박에 전해졌다. 수장될 운명에 처했던 김씨는 이 지시가 떨어지면서 몸의 결박이 풀렸고 마실 것과 먹을 것이 주어졌으며 13일 무사히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박대통령이 김대중 납치를 지시했을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하비브가 자신을 만나러 왔을 때 직감적으로 이후락(李厚洛)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뭔가 미친(Crazy) 짓’을 했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이보다 앞선 어느 날 박대통령은 이부장과 소주를 마시면서 김씨가 해외에서유신반대운동을 하고 있는데 대해 분노를 표시한 적이 있다.
박대통령은 미국과 일본에서 보여준 김씨의 행적이 사대주의라고 심하게 비판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이부장은 김씨를 제거하면 박대통령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겼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일각에서는 당시 김씨를 싣고 오던 배 위에 미국정부가 보낸 헬기가 떠 그의 죽음을 막았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김차기대통령도 나에게 이에 대해 직접 물은 적이 있지만 미국은 어떤 비행기도 현장에 보내지 않았다.
연락체계 유지가 필요했던 KCIA나 납치사건으로 화가 나 있던 일본경찰이 추적하기 위해 비행기를 보냈을 수도 있을 것이나 어느 경우도 확실치 않다. 우리는 김씨 구명을 놓고 당시 일본정부와는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 김씨를 구해야 하고 청와대를 움직여야 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미국의 판단이었다. 김씨 납치사건 이후 한미관계는 곧 원상으로 돌아갔고 특히 이후락씨가 물러나고 신직수(申稙秀)씨가 새로 중앙정보부장이 되면서 미CIA와 KCIA의 관계도 크게 호전했다.
74년 서울지검부장『日과 마찰우려 수사종결』
“광범위하고도 치밀한 수사를 하였으나 아무런 자료를 포착하지 못하였고… 결국 현단계에서는 본건 용의자들이 범행에 가담하였다는 자료가 없어 내사를 중지한다.”
74년 8월14일 당시 서울지검 정명래(鄭明來·67)공안부장은 김대중(金大中) 납치 사건에 대해 ‘어정쩡한’수사 종결을 발표한다. 사건이 일어난지 1년만의 일이다. 82년 공직에서 물러나 현재 변호사로 활동중인 정씨는 19일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수사본부가 차려진 마포서에는 중앙정보부 연락관이 상주해 있었으며 경찰의 수사 내용과 수사 계획까지 중정으로 보고가 된 것으로 안다”며 중정의 수사 개입을 간접 시인했다. 그는 또 “수사과정에서 가장 크게 고려했던 점은 특정인(박정희·朴正熙대통령)에 대한 비호보다는 일본과의 외교 마찰이었다”고 회고했다.
“수사본부에 격려차 두차례 나갔을 뿐 김대중씨를 한번도 대면하지 않았다”고 밝힌 정씨는 “수사 내용의 핵심 부분이 중정에 의해 고의로 누락됐는지는 모르지만 경찰의 보고서에는 중정의 개입을 의심할 만한 부분은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내 수사가 약 6개월간 별다른 성과없이 표류하는 동안 일본에서는 한국대사관 1등서기관이었던 김동운(金東雲·본명 김병찬)의 지문이 발견되는 등 중정의 개입 혐의가 구체적으로 드러났고 한일간 외교 문제로 비화될 조짐까지 보였다.
결국 당시 총리였던 김종필(金鍾泌)씨가 일본 총리를 만나 양국이 동시에 이 문제에 대해 수사를 종결하기로 합의했으며 정씨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내사 종결을 선언했다. 정씨는 “당시엔 일본과의 외교 문제가 가장 중요했었고 만약 중정의 개입 부분이 밝혀졌을 경우 국제적으로도 한국이 상당히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했을 것”이라며 “김대중씨가 당한 일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가슴아프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용금호선원 『DJ 꽁꽁묶어 선창밑 감금」
“25년간 가슴에 납덩이를 안고 살아온 기분인데 이렇게 훌훌 털어 놓고보니 정말 후련합니다. 이젠 내일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납치된 김대중(金大中)’을 싣고 대한해협을 건넜던 용금호 선원들은 19일 동아일보를 통해 ‘김대중 납치사건’ 전말이 밝혀지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당시 용금호 선원 21명중 출항목적이 ‘김대중 납치’임을 알고 있었던 선원은 통신장 정용석(鄭容碩·50·부산 서구남부민동)씨 등 4명.
정씨는 당시 공작목표가 ‘납치’였음을 지금도 확신한다. 출항전날 정사장이라 불리던 중정요원(정운길)이 항구근처 다방에서 이희호(李姬鎬)여사에게 전화를 걸고 오더니 다른 요원(박정렬)에게 “부인(이희호여사)이 울더라. 울게 뭐 있노. 영감 데려오는데…”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정씨는 “중정이 김씨를 암살할 계획이었다면 이런 전화를 걸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73년 8월8일 오후1시 도쿄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납치된 김대중이 오사카에 정박중이던 용금호에 승선한 것은 9일 오전1시경.
“눈에 안대가 덮인 채 검은 보자기에 싸인 김씨를 로프로 선창에 끌어올렸습니다. 선창밑 타기실(舵機室)에 감금하고 자해하지 못하도록 붕대를 감은 막대기를 입에 물렸지만 그의 담담한 모습에 자해의사가 없다고 판단, 막대기를 뺐죠.”
용금호 엔진운항을 담당했던 조기장 김광식(金光植·59·부산해운대구 우동)씨의 증언이다. 그는 “김대중씨가 ‘나를 죽일 것이냐’고 묻기에 ‘죽일 생각이 없다’고 말해주자 김씨가 아무말 없이 누워 오른쪽 손가락으로 자신의 배위에 여러차례 성호를 그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양측 증언은 김대중씨가 “비행기소리를 들었다”는 부분에서 차이가 난다.
정용석씨는 이를 “이튿날 타기실에 감금돼있던 김씨를 옆방 2번 화물창에 감금했는데 바로 옆에 엔진룸이 있어 엔진소리를 비행기 소리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양 팔과 다리를 모두 묶여 누워 있었고 눈까지 가려진 상태라 정상적인 감각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는 것.
당시 갑판원 임익춘(林益春·65·전남 여수시 둔덕동)씨 역시 “항해중 비행기나 헬기를 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선원들은 또 “납치사건이후 윤진원(尹鎭遠)공작단장이 선장 이순주(李淳柱)씨를 목포―제주간 여객선 선장으로 취직시켜주는 등 선원들이 비밀을 지키도록 ‘사후 관리’해왔다”고 전했다.
특히 윤씨는 80년 ‘서울의 봄’시절 부산에 내려와 선원들과 술자리를 갖고 수백만원씩을 쥐어주면서 “세상이 바뀌어 더이상 당신들을 도와줄 수 없다. 수백억원의 재산을 가진 이후락(李厚洛)씨가 당신들을 도와주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말을 했다고 선원들은 증언했다.
돈-권력으로 가담자 입 막았다
73년8월13일 일본 도쿄(東京)에서 김대중(金大中)씨를 납치, 동교동 자택으로 강제송환시키는 ‘임무’에 성공한 중앙정보부는 또다른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진실을 은폐하느냐’는 것이었다. 납치사건 가담자는 중정요원 25명, 용금호 선원 21명을 합해 모두 46명. 알아서 비밀을 지켜줄 것으로 믿기에는 ‘입’이 너무 많았다. 중정이 사건에 가담한 중정요원과 용금호 선원들에 대해 각종 혜택을 주며 사후관리에 나선 것도 그 때문으로 보인다. 본보가 입수한 ‘KT사건관여인사 일람표’와 ‘용금호관계 인사 일람’을 분석한 결과 중정과 그 후신인 국가안전기획부는 공작가담 중정요원과 용금호 선원들에게 비밀유지의 대가로 꾸준하게 몇가지 ‘당근’을 제공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우선 중정요원들에 대해서는 보직상의 혜택을 주거나 취업알선, 예산지원 등의 방법을 썼다. 용금호 선원들에게도 취업알선이나 매점 등의 허가권제공, 보상금 지급 등으로 입을 막았다. 76년경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KT사건관여인사 일람표’의 양식은 △직급 △성명 △납치사건 임무 △납치당시 직책 △현 직책(보고서작성 당시) △현직에 대한 의견 △해소 방안 △비고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중 눈을 끄는 대목이 ‘현직에 대한 의견’과 ‘해소방안’란. 한마디로 가담자들이 현직에서 느끼는 불만의 싹을 없애주려 했다.
한 예로 사건 당시 재일(在日)행동책이었던 김기완(金基完·미국 로스앤젤레스근무)8국해외공작관의 ‘현직에 대한 의견’란에는 ‘귀국 희망’이라고 적혀 있다. 그 ‘해소방안’으로는 ‘상응한 보직부여’로 돼있어 김씨가 원하는 대로 귀국시킬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김대중씨의 납치에 직접 가담했던 김병찬 당시 주일대사관 1등서기관이나 유영복(劉永福)2등서기관은 각각 ‘보직변경 희망’과 ‘해파(海派·해외파견)철수로 사기저하’가 문제점으로 지적돼 있고 ‘상응한 보직 보장’을 해소책으로 제시했다.
인사상의 우대보다는 생계보장을 해주려 한 경우도 있다. 역시 납치조에 포함됐던 유충국(柳忠國)주일대사관 2등서기관의 현직의견란에는 ‘생계곤란’, 그 대책은 ‘특별예산 지원’. 불법적인 특수공작에 가담한 직원들에게 중정의 예산까지 지원한 셈이다. 오사카(大阪)총영사관 타자수로 오사카 안가(安家)로 납치된 김씨를 목격했던 김봉실(金鳳實)씨의 일람표에는 ‘이직시 생활기금 요(要)조치’로 돼있고, 오사카 총영사관 운전사로 있다가 후일 D그룹 운전사로 자리를 옮긴 안용덕(安龍德)씨 역시 생활기금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돼 있다. 용금호 선원들에 대한 ‘입 막음’도 치밀하게 이뤄졌다. 선원들에 대한 대책중 특이한 점은 사건을 발설하지 않는 조건으로 ‘서약서’를 쓰게 하고 특별보상금까지 지급했다는 사실이다.
본보가 입수한 용금호 통신장 정용석(鄭容碩·50·부산거주)씨의 서약서 내용은 ‘본인은 과거 특정선박 승선기간중 지득한 일체의 사항이 국가안전보장에 관련된 사항임을 명심하고 지금까지 외부에 누설하지 않고 보안을 지켜왔으며 동 공로로 금번 특별보상금을 받게 되었는바, 이를 계기로 앞으로도 상기 사실에 대한 보안을 더욱 철저히 유지할 것’이라고 돼 있다. 서약서는 또 ‘본인은 금번 특별보상금과 과거의 협조 사실을 근거로 이를 재차 거론, 부당한 요구수단으로 이용하거나 차후 어떠한 요구도 제기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오며 이를 위반시 동기여하를 막론하고 그 결과가 반국가적 행위임을 자인하고 어떠한 처벌이라도 감수할 것을 서약합니다’로 돼 있다. 중정측은 김씨를 납치한 것이 ‘국가안전보장 관련사항’임을 선원들에게 주지시킨 뒤 서약위반, 즉 사건내용을 발설하거나 다른 요구를 하는 행위를 ‘반 국가행위’로 못박고 있다.
서약서의 집행인은 사건후 선원들을 꾸준히 관리해온 윤진원(尹鎭遠)해외공작단장이었고, 입회자는 용금호 선원으로 위장한 중정요원 정운길(鄭雲吉)씨였다. 실제로 본보 취재진이 선원 정씨를 만나 확인한 결과 정씨는 당시 윤단장으로부터 3백만원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문제는 이 서약서를 작성한 시점이 박대통령이 죽고 신군부가 득세한 80년12월29일이라는 점. 중정뿐만 아니라 그 후신인 안기부도 이들에 대한 사후관리를 했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윤단장이 보상금을 지급하면서 “정권이 바뀌어 더이상 지원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는 선원들의 증언으로 미뤄볼 때 5공정권하에서는 공작가담자들에 대한 관리는 더이상 계속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정씨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기 이틀전 윤단장은 영수증을 쓰고 안기부 감찰실로부터 2천만원을 수령한다.
선원들에 대한 회유책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밀수사건으로 구속된 임모씨의 경우 ‘해소방안’에 ‘출감조치후 취업’으로 돼있어 중정이 사법부에 외압을 행사하지 않았나 하는 의혹마저 일게 한다. 또 선장 이모씨에 대해서는 ‘K해운 취업추진중’이라고 돼있고, 또 다른 선원들에 대해서도 △매점임대계약 추진중 △제주 버스회사 허가시 취업 △공영주택 관리 허가시 취업 등 각종 이권제공과 취업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용금호 선원들의 얘기는 다소 다르다. 중정측이 사건후 자신들에 대한 배려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한 선원은 “중정측이 취업알선을 약속했으나 제대로 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며 “윤단장이 술자리 등으로 위로하면서 입에 풀칠할 정도의 용돈을 조금씩 줬다”고 말했다.
이 선원은 “동료선원 중 한 사람은 중정측이 자신들을 제대로 돌봐주지 않자 ‘집단적으로 반발하자’며 동료들을 부추기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중정측은 이처럼 공작가담요원들과 선원들에 대한 ‘일람표’를 작성, 박대통령에게 정기적으로 보고했던 것으로 미루어 박대통령은 최소한 사후에 납치사실을 은폐하는 데 방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보가 입수한 문서들의 작성 연대가 각기 다르다는 점도 보고의 횟수가 많았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대통령각하께 보고필’이라고 적힌 ‘KT공작요원 실태조사보고’의 작성일은 박대통령이 죽기 7개월전인 79년3월10일. 하지만 ‘KT사건관여인사 일람표’의 작성시기는 윤진원씨가 복직(77년8월)하기 전인 76년경쯤으로 추정된다. 또 선원들에 대한 일람표는 79년10월1일까지 기록돼 있어 이 보고서들은 중정측이 정기적으로 박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 중 일부인 것으로 보인다.
「中情 공작」 풀리지 않는 의문
중앙정보부의 김대중(金大中)씨 납치 목적은 살해였나, 강제귀국이었나. 이 문제는 사건 발생 25년이 지나도록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주장도 판이하게 엇갈린다. 피해자 김씨는 줄곧 “73년 여름 나에게 일어났던 일은 엄밀히 말하자면 납치사건이 아니라 살인미수사건이었다”고 말해왔다. 사건 당시 미국중앙정보국(CIA)한국책임자였던 도널드 그레그 전주한미국대사는 “김씨가 수장될 운명에 있었다”고 말해 김씨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가해자인 중앙정보부 요원들과 용금호 선원들의 말은 다르다. “살해 의도는 없었으며 순수한 납치였다”고 반박한다. 하나의 진실을 둘러싸고 양측이 정반대의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중정이 살해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김씨의 논거(論據)는 크게 두가지다. 당시의 사건 정황과 사건후 이후락(李厚洛)전중앙정보부장이 동향 친구인 평민당 최영근(崔泳謹)전의원에게 털어놨다는 박정희(朴正熙)전대통령의 지시내용이다.
먼저 김씨는 납치사건 과정에서 자신이 두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말해왔다. 한번은 납치된 직후 끌려간 도쿄(東京)팔레스호텔 2210호에서였다. 김씨에 따르면 범인들은 호텔방에서 자신을 살해한 뒤 욕실에서 시체를 토막내 배낭에 담아 호텔을 빠져나갈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을 전송하러 나온 통일당 김경인(金敬仁)의원이 현장을 목격하는 바람에 첫번째 살해기도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 범행에 실패하자 범인들은 자신을 용금호로 끌고가 몸에 추를 달고 결박해 수장하려다 미국측의 압력으로 살해계획을 포기했다는 주장이다.
김씨는 또 “수장 직전 비행기 나는 소리가 들렸고 범인들이 놀라 갑판위로 뛰어 올라가 ‘비행기다’하고 소리쳤다”고 회상하고 있다. 김씨가 중정의 살해의도를 확신하는 또 하나의 근거는 최영근씨를 통해 들었다는 이씨의 발언내용이다. 김씨는 87년 10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최씨의 말을 인용,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박정희씨가 이후락씨 보고 ‘김대중이 해치워 버려’, 이건 이후락씨 말 그대로입니다. 그 말을 듣고 자기는 속으로 깜짝 놀라 충격을 받아가지고 그냥 ‘알았습니다’하고 물러나와 어물어물 한 달을 보냈다는 거예요. 그후 (박정희씨가)다시 불러가지고 ‘왜 하라는데 안하느냐’고 다그쳤다는 거예요.”
김씨는 자신의 체험과 최씨를 통해 들은 이후락씨의 발언내용을 중정의 살해기도 근거로 확신하고 있다. 그레그 전대사의 발언도 김씨의 확신을 굳히는데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레그 전대사는 18일 동아일보와의 회견에서 “납치사건을 중정의 소행으로 판단한 당시 하비브대사는 박정희대통령을 만나 김씨를 풀어주도록 요청했다. 배 안에서 몸이 묶이고 눈이 가려진 채 수장될 운명에 처했던 김대중씨는 이 지시로 결박이 풀리고 비로소 마실 것과 먹을 것이 주어졌다”고 회고했다.
이같은 주장을 종합하면 중정은 당시 김대중씨에 대한 살해의도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당시 중정관계자들과 용금호 선원들의 증언은 다르다. 이후락씨는 87년 역시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호텔에서 납치하는 계획 자체지, 절대로 살해하려는 것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호텔에서 어떻게 토막살인을 하고, 비행기가 떠서 수장을 면했다면 그 비행기가 배의 항진을 내버려 뒀겠느냐”고 반문했다. 비행기가 뜬 사실조차 없다는 것. 당시 정보차장보였던 이철희(李哲熙)씨도 같은 주장이다. 이씨는 18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납치지시를 내릴 때 이후락부장은 ‘김씨를 한국으로 데려오라’고 지시했다”며 “애초부터 암살할 계획은 없었다”고 살해의도를 극구 부인했다.
용금호 선원들도 유사한 증언을 하고 있다. 정용석(鄭容碩)씨는 “살해의도는 없었으며 비행기가 뜬 적도 없었다”고 말했다. 정씨는 “죽일 의사가 없음을 김씨에게 알려주지 않아 김씨 본인은 ‘혹시 죽는 것 아니냐’며 상당히 초조해 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김광식(金光植)씨는 “김대중씨가 ‘나를 죽일 것이냐’고 물어 ‘죽일 생각이 없다’고 말해주자 아무말 않고 누워 오른쪽 손가락으로 자신의 배위에 여러차례 성호를 그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물론 중정직원들이나 용금호 선원들이 자신들의 범죄정도를 감경하기 위해 입을 맞춰 거짓말을 했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본보가 입수한 ‘KT사건 행동별 관여인사 일람표’를 보면 9개의 공작조가 도쿄에서 서울까지 치밀하게 역할분담을 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것이 “처음부터 납치 의도였다”는 중정측 인사들의 발언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수도 있지만 이 일람표가 사전계획서가 아닌 사후보고용이었다는 점 때문에 단정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중정이 김씨를 죽일 의도가 있었느냐, 없었느냐의 논쟁은 사건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 70년대 후반부터 20여년간 끝없이 이어졌다. 납치사건에 관련한 당시 중정관계자들의 양심적인 증언과 베일속에 묻혀있는 자료의 공개가 이뤄져야만 그 진실이 파악될 것이다. 의문이 풀리기에는 지난 20여년이 아직은 짧은 세월인지도 모른다.
첫댓글 'DJ납치'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중정차장보였던 이철희를 궁정동 안가로 불러 ‘김대중을 무조건 한국으로 데려오라’고 지시한데 따라 중정 해외공작팀이 수행한 정치공작 사건입니다. 당시 권력체계로 볼 때 박정희의 명령이 없이는 김대중을 납치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지요. 국민들 앞에서는 막걸리를 마시면서 밤에는 딸같은 여대생들 치마폭에서 양주를 마시는 위선자의 표본이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