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 공부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실 화엄경은 불제자 라 할 지라도 인연을 맺기가 제일 어려운 경전이기도 합니다.
너무 방대하고 한자로 기입하서 한글번역의 고통이라는 면으로 체험되는 난해한 부분이 있어 그렇습니다.
그러나 일단 인연을 맺고 사경이나 독송 등 경전의 말씀을 참구하기 시작하면
깨칠 수가 있는 가장 소중한 기회가 열리고, 처처의 부처님 공덕을 두루 두루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쉽게말하여 영원성의 극락정토를 들여다 볼 수 있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 이 공부는 십년정도를 매진해야 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염두해야 합니다.
사실 8만4천 대장경은 전부 이 화엄경 하나로 귀결되는 소식입니다.
부처님께서 성불견 하신후에 49 년간 기초경전부터 , 삼승, 대승, 일승 의 과정으롤 방편설 하신 것도
긍극의 화엄경 을 설하시기 위한 목적이였읍니다.
이 공부의 특징은 소개하는 사람이나, 이를 열람하는 사람들 모두가 공히 공부가 된다 하는 것입니다.
주객이 결국 하나인 까닭입니다.
또한 이 화엄경은 불경의 최 집성판이며, 성경말씀, 공자의 역경 말씀 등이 총 망라되어
적연하게 하나를 가르치는 이심전심을 체득케 하는 경전이 되므로 일생일대의 최고의 보고의 자리(보물의 창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피고지고 피고지고 계절 10 번만 공부하면 됩니다.
부처님게서는 성불하시고도 중생을 위하여 49 년간 설하신 것에 비한다면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닌 것을 마음짐작하고 덤벼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읍니까?
저는 예전에 갇힌 적이 있었는데
만기가 다 되어도 이곳에서 나가기가 싫었읍니다.
공부에 집중되어져서 그러합니다.
한 십년만 이곳에서 머물며 계속 수행하는 인연이 주어진다면 하였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사실입니다.
바깥에 나와 보았자 빤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 생애를 답습하고 경험하면서 늘 선정삼매의 지락에 들며는
한 1000년도 하루처럼 흘러가는 위의적정분에 들기 때문이지요.
공부는 이 정도로 해야 합니다.
이 역시 한순간에 멍 때리면 그냥 열리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맛을 보자고 화엄경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본인 견지에서는 이 화엄경을 이해하고 난 연후에 법화경 최상승 경전의 영축산의 보살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화엄경을 공부 하지 않고 법화경을 먼저 만난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모래알로 밥을 짓는 것을
시도하는 것과 같읍니다.
법화경의 방편설은 유마경이라 할 수 있고
화엄경의 즙액을 짜서 드러낸 것은 반야부인 금강경이라 할 수 있읍니다.
금강경이 열리게 되면 바로 성경이 동시에 열리게 됩니다.
예수님 친견이 가능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주역삼매가 펼쳐지고 화엄경과 연결되는 것도 또 한 이러한 까닭이 주어진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소인은 화엄경의 부처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가끔 예수님의 말씀, 공자님의 말씀을
소개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의미하는 것에 절대 고정관념이나 문화적 범주 차별등의
소견을 지녀서는 아니됩니다. 그거 다 쓸데 없는 방편상의 공부방법에 불과한 것입니다.
섭리, 섭사, 중용, 성령, 여래, 여호아, 메시아, 미륵, 중도, 모든 것이 다 한마음 한뜻으로 서려
있는 것이 화엄경전임을 이해하게 되면 모든 성인들을 한줄로 다 꿰어서 모든분을 친견하는 것과 같은 장입니다.
공부란 내가 가장 낮아질때 그 임계치를 딱 넘어서면 모든것이 다 보이게 되는데.
속세간 말로 표현한다면 뚜껑이 확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묘하지요.
그러므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光佛華嚴經) 이라 이름합니다. 빛의 소식입니다.
성경말씀도 죄다 빛의 소식아닙니가?
온 무한한 이 공간의 빛들이 다 나 하나의 개별의 의지와 행에 대한 소식과 맛물려 굴러가는 것입니다.
이 하나의 쟁점에 대한 정체를 보고자 하고 이에 대한 성취감이 찾아오기를 바란다면
연유와 연역적 행간의 순리적 진행이 필요합니다., 이는 화엄경을 읽어가면서 자연시리 몸에 베어지는 것에서
열려집니다, 그러므로 화엄경 영화 무대 에서 펼쳐지는 진행과정을 다 보아야 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냥 툭 떨어지는 것이 아닌 까닭이므로 항상 초지일관 꾸준한 마음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 한분반 열람하시더라도 소인은 한 십년 간 이 경전을 모시기로 한 연유가 이것입니다.
꾸준하게 공부하시기를 발원하겠읍니다.
29) 威儀寂靜分(위의적정분)
수보리(首菩提) 若(약) 有(유)人 言(언)댄
: 수보리야 마약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如來(여래) 若來(약래), 若去(약거), 若坐(약좌), 若臥(약와) 是人 하
여래가 만약 온다거나, 간다하거나 앉았다거나 드러누웠다거나 이렇게 말 하는 사람이 있다면
不解 所設意(불해 소설의)
비로한 여래 소식을 해석 하지 못한 것인바
何以故(하이고) : 왜냐하면
如來者 (여래자) 無所從來(무소종래) 亦無所去(역무소거). 故(고) 名(명) 如萊!(여래)!니라
여래라함은 좇아오는바도 없고, 가는바도 역시 없으니 고로 이를 이름하여 여래라 함이니라
화엄경을 독송하면 항상 令(영) 이라는 용어가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여래(如來) 라는 용어가 많이 나오며, 寂靜(적정), 청정(淸淨) 등의 용어도
많이 나오며 거듭 거듭 반복합니다.
이러한 의미를 통괄하여 해의 한다면 바로 O 의 이야기인데 이를 연기법이라고
총칭하여 법을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반은 돌고 나머지 반은 거슬러 겪어야 한다는 O 의 법칙을 방편으로 소개하는
것인데, 저의 소개는 용수존자의 관중론(觀中論) 을 근거하여 표현하는 방법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中論 역시O 이고 空이며 無 이고 여래. 이고 적정이고 청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총괄하여 연기법을 애서 언어로서 표현하는 방식이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여래지심은 어느누구에게나 간에 생명성품에는 다 함축되어 베어있는 법입니다.
이 법은 그러므로 일승인데 비로자나부처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여래시짐을 항상 행하는 것이라 여기면 되는 것입니다.
이를 반야 라 하기도 하지요.
그러므로 29) 위의적정분 처럼 여래라 함은 같음이 온다라는 동적인 의미를 표현하였지만
실제로는 오는것도 아니요 가는바도 아니고 앉는 것도 누워버리는 것도 아인
동적이 아닌 정적인 상태로 눈에 보이지 않게 출현하는 정중동의 중용을 의미하는
중 論 을 의미한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금강경 사구게에서 위 29) 위의적정분 역시 사구게송에 들어가는 아주 중요한
대목이 됩니다.
화엄경을 공부하실때 항상 위와 같은 용어가 출현하여도 연기법이며 항상
위적정분(威寂靜分) 으로 여기시고 움직임의 동적(動的) 으로 소개한다 하여도
이 소이연의 해의를 잘 이해하고 적정분으로 여기셔야 합니다.
사실 한국불교는 오히려 석가세존의 원 인도어 경전 보다 한자어를 극복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대부분 여기에서 공부를 포기한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을 중화를 거칠 수 밖에 없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단 하나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화엄경의 경전의 한자어는 계속 반복해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자어를 쉽게 정복 할 수 있읍니다.
모르는 한자어가 나오고 ,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면 일단 한자어 용어 사전을
하나 구하여 곁에 놓고 자꾸 열람하고 뜻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이것 하나만 잘 이행하고, 천천히 읽어나가면 이해안될 것이 하나도 없읍니다.
예를 들어 화엄경의 경전 내용중에
如來往昔念念中에 (여래왕석념념중) 에 하고 경전이 나오게 되면
여럐가 옛날부터 겪은 생각중에라고 번역을 하지만
여래가 옛날부터 겪은 것은 지금 생각에 다 포함되어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구나 하고 이해를 하라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생각을 내는 원천은 지금 의 생각의 이면에 항상 주어져 있는
불성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지금으로 부터 2,500면전에 경전을 말씀하신다 하고서는 2,500년 전에
열반하신 석가세존이신 그 분을 우리는 논 하지만 지금순간에 우리들 마음의 처소
여래지심에 함게 항상 상존하며 상주하고 있는것입니다.
지금으로 부터 2,500년전 부처님의 일생 역시 전부 꿈이라는 사실입니다.
부처님의 생전 모습이나 말씀은 중생의 제도를 위하여 이를 열거하시고
연역으로 집대성하여 후세에 방편으로 전할 뿐이지
원래는 석존의 출현도 꿈인 것입니다.
이로서 선지식인들이 도 를 깨치려면
부처도 죽이고 삶도 죽이고 생각도 죽이고 보살심도 다 죽이라 하시는 것입니다.
오로지 이러한 대상들을 다 죽이자 하는 본체는 무엇인가 하는 것만 궁구하고
이 문제만 열리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아부람이전에니라, "아아부람 BEFORE I AM!" 하심과 같은의미를
말함이니 그와 같이 여겨야 합니다.
현재 내 몸이 한소식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발견할때 깨친다 하는 것이니
달리 법을 구할 도리가 없는 "위의적정분" 을 잘 이해하시면 큰 도움이
됩니다. -합장-